눈사람 외 2편
박홍점
호랑가시나무가 있던 자리
수국이 피던 자리
삐딱하게 빨간 모자 쓰고
입꼬리가 활짝
우체국 갔다 돌아올 때
빙판에 익숙해져 가벼워질 때 만났다
뭉쳐진 여백
선물을 받은 기분
작자 미상의 작품
눈사람이 없다고 겨울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별안간 반짝이는 하루
어른 곁에 아이 하나 세우려다
이제 학원 가야지, 엄마가 불러 들어갔는지
둥근 눈 뭉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라 할까
태어나다 만 아이 다정하게 세워 두고
언제나 언니
그는 언제나 집안의 홍 반장
동생이 여섯
베틀에 앉아 뚝딱뚝딱 베를 짜고
동생들 머리를 감겨 주고 묶어 주고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들고 골골이 찾아다닐 때
그의 어깨는 오른쪽으로 기울고
오만 원짜리 지폐를 택시 창밖으로 내던지고
어린 조카 미미의 집 커튼을 달고
사계절이 있듯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네 번의 쉼표와 네 번의 마침표
그는 과연 누굴 사랑했을까
미끈한 다리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용두산 엘레지를 익숙하게 부르고
그는 언제나 집안의 홍 반장
사랑하는 조카가 열여섯
이제는 돌아와 6인실 요양병원 침상에 누웠다
집안의 역사였던 그가 창밖 단풍나무 쪽으로 돌아눕는다
가을비는 연거푸 한낮의 길을 지우고
앞차의 전조등을 지운다
주먹장미가 필 때 소년이 온다
쉬는 시간이면 복도 끝에서 끝을 향해 뛰던
그러면서도 눈이 밝아
한 옥타브 올려 내 동생을 불러 주던
햇살 같은 소년
뒷발질이나 한번 했을지도 모를 일
남을 웃기면서 함께 웃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러나 거리는 웃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러나 거리는 웃음을 꺼낼 수 없게 했고
별안간 피 흘리는 보통의 어깨와 골목에서 마주쳤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소식이 횡횡했다
딸 다섯을 낳고 늙은 무릎으로
촛불로 빌어서 낳은
제 부모의 유일한 아들
17세, 주말이면 반찬이나 용돈을 받으려고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던 어린 자취생
총탄이 소년을 가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먼저 떠오른 것은 노부부의 닳아 버린 무릎과 굽은 등
광장의 시신들을 뒤적였을 애타는 손
차마 울지도 이름 부르지도 못했을
제 어미의 자식
오월이면 머리를 긁적이며 온다
―종면이 친구 행렬이에요
― 박홍점 시집, 『언제나 언니』 (파란 / 2023)
박홍점
전남 보성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차가운 식사』 『피스타치오의 표정』『언제나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