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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피하여 백두산을 다녀 왔습니다.
천지의 신비함은 볼때마다 다릅니다.
장마가 온다고 하여도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우리 강경지역에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렸으면 하지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룰수 없습니다.
여행기 보내드립니다.
시간이 나실 때 보시고
불필요하시면 부담없이 내팽개쳐도 됩니다.
열대야 현상이 계속되더라도
기도하는 맘으로 그러려니 하시면 됩니다.
8월 한 달도 멋지게 보내시기 기도합니다.
강경에서 황선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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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여행기
장춘-서파-북파-연길-토문
2016. 8.27-2016. 7.30
(22-44)
양의옥, 황선춘 황방실, 국건 20명
첫날 2016년 7월 27일 수요일 맑음
백두산을 가는 날이다.
맘이 설렌다.
큰 딸 방실이와 큰 외손주 건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서 그렇다.
건이와는 3년 전 초등학교 졸업에 홍콩과 마카오 심천을 다녀왔고 그것이 우리 건이에게 도움이 되었단 말을 들었을 때 값진 투자였음을 알았고 이번에도 건이의 중학교 졸업 기념과 생활에 여념이 없던 큰 딸과 함께하는 여행을 아내와 같이 계획했었다.
새벽기도에 이런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우리 가족을 보살피시고 놉은 마음 문을 열어주시고 함께하는 여행이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되게 해주세요.
다녀오는 기간 동안도 우리 가족을 보살피시고 혼자 계시는 장인어른도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장인 어른에게 아내는 몇 번이고 부탁을 한다.
아버님, 국은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니 조금씩 끓여 드시고 반찬은 여기저기여기저기....
혼자 남겨 둔 자식에게 타이르듯이 하나하나 알려주고 집을 나선다.
정훈이 아빠에게 8시에 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10분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훈엄마가 암으로 고생을 하시는데 이런 일로라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으면 좋은 일이 아닌가?
논산으로 와서 2만원을 자리에 올려놓고 나온다.
적극 돈을 받지 않으려는 정훈 아빠와 더 드리고 싶은 나의 마음이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공주에서 수원 동탄으로 명멸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서 기사는 이 길을 택한다.
긴 터널을 두어 개 통과하고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방금 병원에서 밤일을 마친 초롱이와 은실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와 미팅을 하고 여행 일정표를 받는다.
우리 팀은 한교투어에서 8명 그리고 하나투어에서 12명 합하여 20명이 여행을 하게 된다.
수화물을 자동으로 수속을 밟아 장춘으로 부치고 우린 지하 1층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사주고 싶었으나 막내가 기어이 자기가 산다고 하여 명이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한다.
아내는 기자고 온 고추와 깻잎 등 바리바리 준비한 음식물을 은실에게 건넨다.
아이들을 염려하는 아내가 고맙다.
막내는 백두산 기후가 변화가 많다고 하여 비옷을 준비해 준다.
기특한 녀석이다.
첫째와 우리 네 명은 출국수속을 밟아 공항 안으로 들어간다.
간단하게 쇼핑센타에 들러보고 42번 게이트에서 잠시 쉰 다음 3시 비행기에 오른다.아시아나 OZ379 32F가 좌석번호다.
비행시간 2시간 15분.
우리 일행 20명도 모두 탑승하였다.
장춘까지는 직선거리로 731km, 그런데 북한 상공을 나를 수 없으니 위하이로 따렌으로 돌아가서 1300k의 긴 거리로 돌아간다.
조금 있다가 기내식이 나온다.
2시간 거리에서 기내식을 먹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밥도 주고 음료도 달라는 대로 준다.
튜브에 있는 고추장도 더 달라하니 서너 개를 덤으로 준다.
인심이 너무 풍부하다.
2월에 인도 콜카타에 갈 때 저가 제주항공을 탔을 때와 비교가 되었다.
24시간을 굶겨 눈이 쑥 들어갔던 기억이 새롭다.
몇 년 전과 지금의 중국 비행장은 매우 달라졌다.
우선 서비스가 향상되었고 수속도 간단하다.
단체비자는 입국서류가 따로 없다.
단체 비자를 먼저 개찰구에 넣고 여권만 대조하면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친절하디.
비행기가 따렌을 지나 육지로 접어들면서 구름이 걷히고 요동과 만주의 넓은 땅을 비쳐주었다.
한없이 녹색의 천을 깔아 놓은 평지가 계속되면서 장춘에 가까울수록 그 모습이 확대된다.
벼로 알았던 녹색 경작지가 모두 옥수수 밭이었다는 놀라운 사실.
빈틈없이 심겨진 옥수수는 정부에서 모두 수매하여 사료로 쓰고 또 고량주를 만드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니 맘 놓고 옥수수를 경작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서 지은 벼농사도 정부에서 특별한 대책이 없어 값이 계속 하락하고 농민들은 불만이 쌓이는데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화물을 찾고 바로 하나투어 홍송학 가이드를 만난다.
조선족 4대째를 이어오는 정통 조선족 27세의 청년이다.
들으라고 하듯 자기는 총각이란다.물이 강을 따라 흘러가듯 말도 잘도 한다.
10시간을 차를 타고 왔다고 한다.
연변 청년이었다.
가이드는 차를 타고 가면서 15분 뒤에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정말이냐고 묻자, 앞으로 송강하로 6시간 이동하는데 식당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르지만 일찍 먹고 출발한다고 한다.
정말 6시간 만에 밥 세끼를 먹는 것이다.
12시에 공항에서 아이들과 점심을 먹었고
4시에 기내에서 기내식을 먹었고
저녁을 해가 동동한데 8시에 먹는다.
배가 고픈 것도 고통이지만 배가 부른 것도 고통이다.
맛있는 식사가 맛이 없게 느껴지는 것도 배웠다.
장춘은 800만 명이 사는 도시이지만 우리나라의 1/3넓이나 된다.
마지막 황제 부이가 살았던 곳이 이곳 장춘이다.
앞으로 6시간 가는 동안 고층 건물도 없고 식당도 없고 불편할 것이라고 한다.
옥수수 밭이 연이어 있는데 기계화 되지 않고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일한다고 한다.
기계화가 되면 10억 명이나 되는 농부들의 일자리가 없어져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심기도 사람이 직접하고 거두기도 직접 거둔다는데 어찌 동시에 고르게 자라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국 사람만 가능하다.
우린 1000평도 안 되는 밭을 경작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들이 많은데 여기서 그런 문자를 쓰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었다.
가이드가 하는 부탁은 4가지.
여권을 챙기고 분실하지 말도록,
물은 백산수 말고는 절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도 먹지 말고 따뜻하게 먹을 것.
시간을 1시간 뒤로 미루고 엄수할 것.
백두산 천지의 날씨를 묻지 말 것이란다.
그리고 덧붙여 백두산에 있는 식물이 무어냐고 묻지도 말란다.
7,000여종의 식물 이름을 어찌 알겠느냐는 것.
장춘시의 신흥아파트는 웅장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송강하진은 시골이란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크게 성이 있고 그 밑에 시가 있고 다음이 현 그리고 그 아래가 진이니 송강하진은 우리나라의 면지구나 동에 해당되는 구역이 된다.
거기에 장백산 호텔도 기대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시설도 기대해서는 안 된단다.
그저 그렇단다.
대개가 북경의 여행은 발빠지는 관광
장가계나 계림은 와와 소리 지르다가 목 빠지는 관광
서안은 역사로 듣기에 귀 빠지는 관광
그리고 백두산 관광은 우리 민족에게는 마음으로 하는 관광이란다.
밤 하늘 밤 하늘 별이 더 크게 보인다.
북두칠성이 손에 닿을 듯 커지고
카시오페아의 W자가 대문자로 가로누웠다.
밤하늘이 나를 어지럽힌다.
해는 져서 어둑한데
가로등불 없고
가로수 검은 숲이 지나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여기가 고속도로인가 하는 의아심도 생기니.
만나는 다른 차들도 없다.
송강하의 밤하늘은 놀랍게 별이 빛난다.
시계는 밤 12시
야릇한 피곤함이 있다.
내일은 7시에 일어나라니 여유가 있을 듯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잠을 청한다.
장백산호텔 501호
======Tip========
창춘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에 있는 부성급시이다.
지린 성의 성도이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을 담당하고 있다.
자동차공업과 영화 제작의 거점이 되고 있으며, 총면적 20,571km2, 집시구의 면적은 3,578km2, 시가지는 168.6km2, 총인구는 800만명이다
창춘 주변지역은 원래 군사단위인 몽골 기의 방목지였다.
1791년 청나라 조정은 몽골 군주에게 이 지역을 중국인 이주민들에게 개방할 것을 요구했으며 마침내 승인을 얻었다.
그결과 1799년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산둥성 및 하북성 북부 출신의 많은 농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창춘 청이 세워졌다.
이곳은 무엇보다 지린 시에 딸린 행정중심지였으며, 그 지역의 집산지이자 유통 중심지이기도 했다.
2일째 2016년 7월 28일 목요일 맑은 후 비
송강하진 호텔에서 일어난다.
맑은 공기가 창문을 타고 들어와 피부 깊숙이 스며든다.
선풍기나 에어컨 같은 인공바람이 아닌 자연에서 얻은 시원함은 폐에 젊음을 불어 넣어 준다.
여섯시인데 한 낮과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하늘이 맑은 것이요, 공기가 맑은 것이요, 찬란한 햇살이 구름이나 먼지의 여과없이 대지를 비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조금 실망한 것은 거리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 오가는 사람이 적고 자동차나 경적소리가 없다는 것, 바삐 직장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도 없어서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중국 하면 상하이나 북경처럼 미세먼지가 눈과 코를 마비시키고 자동차들이 거리를 메우며 인파가 들끓는 그런 곳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당연하다.
송강하진이 있는 이곳은 한 민족이 다스려온 고요의 나라가 아닌가?
고조선과 한사군과 예멘과 고구려가 다스려온 나라 우리의 조상들이 지켜오던 나라가 이곳이어서란 작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 작은 산맥들이 줄지어 선 것이 다정해 보인다.
구름이 한가로이 하늘에 그림을 그린다.
호텔 앞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가이드가 누누이 일렀지만 너무 단출하다는 생각이 든다.
둥근 돌림판 가운데 멀건 숭늉이 한 그릇 덩그렇게 놓였다.
달걀 한 개씩 담긴 그릇과 작은 빵이 담긴 그릇 그리고 짜디 짠 야채볶음과 미역귀 불린 것, 짠 단무지를 채 썰어 놓은 더 짠 반찬이 전부다.
다들 어른스런 분들이라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지만 수저에 힘이 없고 숭늉을 푸는 국자도 없어 작은 사기수저로 조금씩 맛을 본다.
그리고는 수저를 놓고 일어난다.
그래도 나는 식성이 좋으니 숭늉 세 그릇, 그리고 골고루 맛없는 반찬이라도 두어 번씩 맛을 본다.
그러다가도 여기 사람들은 이런 식사도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을 본고로 이것도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한 번 더 맛을 본 후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짬을 내어 가이드에게 한 마디 하였다.
이런 식사는 우리가 예상하지만 앞에 나가면 과일가게가 많은데 조금씩이라도 선심을 써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하였다.
불평을 한 것이다.
조식 후 8시에 백두산 서파산문으로 약 1시간 40분을 소요하여 출발한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벽에 목이버섯과 산삼의 광고가 보인다.
백두산 목이버섯, 백두산 산삼이 좋다는 뜻일게다.
버스 안에서 백두산의 날씨는 판단하기 매우 어렵다고 한다,
어제도 비가 많이 내려 정상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천지를 볼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한다.
우리 버스로 1시간 이동, 셔틀버스로 40분 이동하여 1,422계단을 오르며 야생화를 감상하며 천천히 감상하는 서파코스란다.
언덕을 따라 하늘로 이어지는 듯 얕은 계단을 올라가서 천지를 볼 수 있는 코스로, 1442개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주변에 흩어져 자라는 고산지역의 야생화와 백두산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북한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37호 경계비와 함께 감동적인 천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길 양쪽에 셔틀버스로 37호 경계비 주차장으로 약 40분, 가는 도중의 풍경이 놀랄만하다.
1시간 40분 동안 우리는 백두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흰 줄기와 검은 줄기가 조화를 이루는 숲은 욕심내고 싶은 나무숲이다.
흰 색을 띠는 나무는 자작나무이고 검은 색을 띠는 나무는 피나무로 서로 키를 조졸하며 자라는 듯 친구처럼 얽혀 살고 있다.
이것이 다른 잡나무들과 조화를 이루어 백두산을 두른다.
장백산이란 커다란 간판이 있는 입구에는 벌써 관광객들이 많이 차 있다.
이곳의 관광객은 중국인과 한국인이 대부분인데 하루 2만에서 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5만원의 입장료만 하더라도 20억여 원의 관광수입을 올리는 곳이다.
백두산 풍경 중 최고로 뽑히는 천지는 화산의 분화구에 생성된 것으로 해발 2,200m 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천지"라는 이름이 붙여있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1,422개의 얕은 계단을 도보로 약 50분 정도 올라간다.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이 모두 사람으로 꽉 차 있다.
줄을 이은 것이 만리장성 같다. 백두산 인간장성!
두 시간을 준다.
알아서 올라가고 알아서 보라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곳이 정말 우리의 숨이 살아있는 곳임을 알고 짝을 맞추어 출발한다.
야생화는 지금 철이 지난 듯 많지는 않다.
노란 작은 꽃들은 씀바귀 같고 곤색의 꽃들과 이름 모를 야생화는 녹색의 완만한 백두산을 덮었다.
정상을 바라보니 언뜻 보기에도 백두산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화산의 잔재가 지금도 있어서 나무한 포기 풀 한포기 없이 회색의 봉우리들을 보여 준다.
5개 계단마다 오르는 숫자가 쓰여져 있다.
정상부근은 사람이 복잡하니 1400계단에서 아내의 사진을 찍고 1420계단에서 내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상에는 벌써 관광객이 뒤덮여 있고 비집을 틈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 천지가 조화를 이루어 시원한 바람과 흰 구름과 맑고 푸른 호수가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나는 27년 전 북파로 올라가 감탄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마음이 들떠서 핸드폰과 카메라로 사진을 담는다.
큰 애와 건이도 신기한 듯 감탄사를 올리고 우리 넷은 염치불구하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큰 애에게 이 사진 중 잘 나온 것을 확대하여 걸어두라고 하였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하산을 시작한다.
여운을 남기는 것은 내일 다시 북파로 오르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행여 내일 비가 다시 온다고 하여도 오늘 본 천지의 모습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내려가는 길이 더 복잡하다.
사람을 피해 달리다시피하여 셔틀버스 주차장에 이른다.
주차장이 넓지만 손님이 많아 주차장은 장날을 연상하게 한다.
중국 사람의 특징이 나타난다.
무조건 틈만 보이면 새치기를 한다.
어깨를 디밀고 뚱뚱한 몸을 밀어 넣으면 신기하게 틈이 벌어지고 우리보다 훨씬 늦게 온 팀들은 벌써 차에 오르는 곳도 있다.
화도 나서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보다 늦게 와서 앞지르는가 하였더니 아가씨 하나가 나를 빤히 보더니 한 소리 한다.
틈이 있지 않아요?
오히려 나보고 더 이상하다고 한다.
나도 이상하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적 배짱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이 오래 장수한다고 한다.
남을 배려하려면 신경을 쓰고 맘에 그물을 쳐야 하지만 내 맘대로 하는 것은 거칠 것이 없으니 마음에 고민이 없어 장수의 요건을 채우는가 보다.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
용케도 내려가는 셔틀버스를 두 팀으로 나누어 타게 되었다.
가이드는 첫 번 주차하는 곳에서 내리지 말고 마지막에 대리란다.
거기에는 점심을 먹기 위한 곳인데 간판이 한국인을 위한 곳이라고 쓰여 있다.
비빔밥을 택하였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아래충과는 딴 판으로 아무도 없다.
나무로 장식한 2층은 답답하기도 하였지만 조용한 것이 맘에 들었다.
그런데 음식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가이드다.
달랑 비빔밥 한 그릇씩이다.
반찬도 없고 국물도 없다.
맛을 좋은데 내려가서 국을 가져오려던 일행이 뺐겼다고 한다.
아래충에서는 전쟁을 한다.
계속 내려오는 손님들이 밀리는 현상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밥이 없어요!‘
차라리 위에서 반찬 없는 비빔밥이 좋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숨통 터지는 이층에서 내려와 야외 식당의 의자에 앉아 쉬며 여러 생각들을 하였다.
화장실을 다녀와 이번에는 금강 협곡을 한 시간 다녀온단다.
금강 대협곡은 천지가 용암을 분출할 때 만들어진 V자 형태의 협곡으로 기묘한 형태의 송곳바위와 천길 낭떠러지사이로 에메랄드빛 계곡수가 유유히 흐른다. 금강 대협곡 관광을 위해 만들어놓은 관광로는 백두산 원시삼림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연의 공기와 새소리를 들으며 산림욕을 즐기는 곳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누워서 이끼로 옷을 갈아 입고 산속을 흐르는 물소리와 그 아래 펼쳐지는 협곡의 웅장함이 멋을 부린다.
아쉬운 것은 나무들에 가려 좋은 모습을 다 볼 수 없다는 것이고 장가계의 웅장함보다는 못하지만 아직 협곡이 계속 생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일 부러운 것은 원시림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고 이것이 백두산의 보물임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우리는 주차장에서 두 팀으로 나누었다.
래푸팅을 하는 팀과 그렇지 않은 팀.
네 명은 남아서 맥주를 마신다고 하고 18명은 버스로 이동하여 백두산 서파에서 나오는 냇가를 레프팅을 하러 간다.
비옷과 슬리퍼를 공으로 내어주고 보트에 두 명씩 타는데 바가지 한 개와 작은 노를 준다.
바가지는 물이 차면 퍼내는 기구로 사용하고 작은 노는 배가 부딪치지 않게 조절하는 것이라고 하고 둘씩 태워 아무 안전조치도 하지 않고 떠내려 보낸다,
약간 겁이 나기도 하지만 행여 죽기야 할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보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싸늘한 바람과 찬 바닥과 흐르는 물이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리 부딛고 저리 내리치고 바위와 어울리면서 한 시간을 내려간다.
오래도 간다.
발이 시렵다.
물이 치고 올라와 몸 위에 덮어씌운다.
걱정이 생긴다.
방실이와 건이는 겁이 많은 편이라서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까 하는 걱정이다.
그러다가 중국인을 생각하였다.
만만 태평한 그들은 이런 때 어떻게 할까?
아마도 자기만을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하자. 장수하자.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보다 훨씬 늦게 출발한 그 얘들이 노를 젓고 도란거리고 우리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무섭지도 않고 재미만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 네 명은 안전하고 즐겁게 한 시간의 레프팅을 마치고 호수처럼 잔잔한 하류에 내려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감사를 느끼게 하는 레프팅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도백하로 이동을 한다.
북파로 오르는 천지를 보기 위함이다.
잠시 검은 구름이 끼더니 이내 굵은 비로 차 지붕을 때린다.
요란하다.
내일이 걱정되지만 다시 한 번 중국인을 생각한다.
걱정하지 말자.
다음 코스가 두만강 뗏목을 타는 것인데 늦어서 가는데 지장이 있으니 포기하고 대신 오늘 걸은 다리를 풀기 위해 발 맛사지를 해 준다고 하니 모두가 좋다고 한다,
건이는 죽어도 싫다고 하여 그만 두었다,.
자기가 미성년자인 것을 알아서 한 것이려니 하고 건이가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3일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맑고 흐리고 비
이도백하진은 북파로 가는 백두산 코스의 첫 동네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백폭포의 물길이 이곳을 흐른다.
우리나라 농심에서 이곳에 생수 회사를 차리고 백하수라고 이름하여 판매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6시 식사를 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큰 접시와 수저를 가지고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음식을 담으로고 하자 종업원이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접시를 뺏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큰 접시를 얇은 비닐로 덮어 놓은 것을 우리가 베끼고 가지고 온 것이 생각난다.
이곳의 식사는 손님이 둥근 테이블에 10명이 꽉 들어차야 음식을 내다 준다.
한 명만 모자라도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
다행히 옆에 자리가 있어서 앉자 큰 밥그릇과 달걀 그릇, 멀건 국그릇, 그리고 야채와 반찬이 나온다.
음식이 무척 짜다.
얼굴을 찌뿌리며 먹어야 한다.
손님 위주가 아니라 주인 맘대로인 느낌이 든다.
한 한국 사람이 화를 내며 소리 지른다.
혼자 남아서 테이블에서 기다려도 다른 손님이 오지 않으니 기다리다가 일어나 소리를 친 것이다.
그리고 접시를 가지고 음식을 담으려고 한다.
그러자 옆의 한 테이블에서 손짓을 하여 자기들에게로 오라고 한다.
진정되었다.
음식 문화가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손님의 기분이 별로다.
냉수도 달라고 하자 겨우 물통을 들고 와서 따라준다.
아내도 불평을 한다.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려고 뜨거운 물을 틀었는데 아무리 틀어도 찬물만 나와서 샤워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
나는 늦게 면도를 하려고 물을 틀자 바로 더운 물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더운물도 6사 이후에야 주는 것 같다.
더 웃기는 것은 모닝콜을 종업원이 복도를 다니며 “모닝콜!”하고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다닌다.
그러고 보니 호텔 내에 전화기가 없다.
사람이 일일이 모닝콜을 알리는 호텔도 처음 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우리가 목적하는 북파의 천문봉을 향해 출발한다.
27년 전에 다녀 온 곳이라 새로운 기분으로 출발한다.
이곳은 백두산이 가장 먼저 개발되고 잘 알려진 코스로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장백폭포(비룡폭포), 천문봉, 온천지대, 녹연담 등이 북파코스에 위치해 있다.
차량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이 개발되어있어 편리하게 천문봉까지 올라가서 관광할 수 있으며, 백두산 용암에서 끓어 나온 온천수가 흘러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백두산의 대표 코스다.
길 양쪽에 거대한 주목과 삼림이 열병식을 하고 간간이 흐린 하늘을 보며 오늘 날씨가 좋기를 기도하였다.
어느 할빈에서 온 스님이 네 번을 올랐지만 번번이 비와 구름으로 천지를 보지 못하였는데 그날도 비가 와서 보지 못하고 떠나려 하자 스님은 가이드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한 번 더 천문봉에 오르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여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다시 한 번 천문봉에 올라 백두산의 천지를 보고 갔다는 이야기를 주었다.
힘이 있는 스님이었던 것 같다.
끈질긴 집념으로 천지를 본 이야기지만 대부분은 한번에 백두산의 모습을 잘 보기를 어려운 그런 산이다.
백두산 북파코스 입구에서 40분 이동하여 셔틀버스로 환승한다.
주차장에서 줄서기는 어디나 마찬가지다.
15억의 중국인들이 관광을 시작하면 무서운 속도로 변화되는 관광이 된다.
겨우 틈을 비집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하늘에 구름이 점점 많아지고 고불거리는 길을 봉고차로 바꾸어 타고 오른다.
큰 나무 숲을 지나서 천지를 올라 산 위를 보니 들꽃이 서파보다 더 많다.
정상에 다다르자 우리보다 먼저 온 일행이 주차장에서 산 위로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저럴 수가!
마치 만리장성이 산을 타고 뻗쳐 있는 것처럼 사람의 행렬이 봉우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올라가니 언제 따라갈까 하는 의심도 생기지만 차에서 내리니 찬바람이 겨울처럼 쌩쌩거린다.
옷을 가방에서 내리고 비옷을 겹친다.
초겨울 날씨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천문봉을 오른다.
사람이 많다 보니 중간에서 줄을 차단하여 조정을 한다.
구름이 낮게 빨리 깔리는 것을 보았다.
아차하면 천지를 보기 어렵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산 정상부근에 하얀 바위처럼 생긴 것들이 군데군데 있다.
지난 겨울에 온 눈이 미쳐 녹지 못한 것이란다.
말하자면 빙하라고 할 수 있지만 작은 바위 정도의 크기여서 그것이 눈인지 빙하인지 알 수 없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눈이 녹지 않은 것이란다.
그것 참 이런 일도 다 있나?
우리는 더워 죽겠는데 산은 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말이다.
정상에 벌써 안개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여 있었다.
그러나 막 천막을 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여서 가끔씩 천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감탄을 하며 노랗고 붉은 바위 사이에 비쳐지는 천지를 감상하였다.
가장 좋은 전망대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어김없이 경계줄을 띠어 놓았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위험한 곳이어서 가보지 못한다.
예전에 왔을 때는 아주 먼 옛 일이지만 마음대로 구경하게 하였는데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으리라.
남파쪽으로 호수와 맞닿은 곳에는 외길이 보이고 북한 초소도 보인다.
가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통제된 길에서는 모든 부분을 다 보았다.
내려오려고 하는 시간에 빗줄기가 가끔 내리고 안개가 천지를 덮었다.
이렇게 신기할 수가 있나?
우리만 얼굴을 보여주고 내려오는 길에는 하늘까지 검게 변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일행을 도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일행 중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려오는 주차장은 조금 한산했지만 봉고차에 오르는 순간 딸네와 떨어진 차를 탔다.
여기 운행하는 봉고차는 모두 200대인데 모양이 한 공장에서 나온 듯 똑같다.
내려와서 줄을 서는데 우리 보다 조금 늦은 딸과 일행 몇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이 빠져라 기다리며 내리는 손님을 보고 20여대가 내려 온 동안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이들이 우리 보다 먼저 내려와 더 아래로 내려갔음을 알았다.
잠시 동안의 불안이 안개처럼 걷히자 장백폭포로 가는 일정이 더 기분 좋았다.
장백폭포는 높이가 60여m의 웅장한 폭포로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 같다고 하여 비룡폭포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아 일년 내내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장백폭포는 천지에서 직접 내려오는 물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폭포로 장관을 이룬다.
엄청 찬 물과 또 83도의 온천수가 어우러진 세계에서도 보기 힘든 지형이라는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도 줄을 서서 계단을 오른다.
폭포가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 와서 뿜어 굽이쳐 내리는 폭포의 장관을 보며 정말 백두산, 장백산의 멋진 모습에 감탄을 한다.
사진도 찍고 시원한 바람도 맞으며 내려오는 길로 들어선다.
자작나무 숲이 여러 형태로 멋을 부리는데 꼬아 비비 트는 자작나무며, 천년은 넘을 듯한 고목위에 핀 이끼버섯이며 바위취나물과 노란 꽃들이 산등성이에 만발한 모습도 아름답다.
달걀을 온천수에 넣어서 세 개에 2천원을 받고 파는 곳에서 익은 달걀을 샀다.
겉을 까고 입에 대고 후루룩 들이 마시면 속까지 입속으로 들어오는데 맛이 유별나게 좋다.
두 개씩 먹는다.
다시 내려와 우리의 목적을 완성 했으니 다음 목적지로 간다.
이도백하를 내려온다.
소낙비가 와서 길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비는 간간이 또 내리고 내린다.
점심을 먹는다.
맛이 있다.
연변으로 가는 길목에 장뢰삼을 4대째 재배하는 곳이 있다.
푯말에 심어서 경과된 햇수가 적혀 있다.
40년짜리가 한 뿌리에 8만원이란다.
10명의 사람들이 사면 값을 할인해 준다.
8만원짜리가 5만원에 거래되니 10개를 판 셈이다.
잎사귀를 먹어보니 쓴 맛이 난다.
한 개 사서 가방에 넣었다.
이 산삼을 심은 산이 바로 천산리 전투를 한 청산리였다면 한번쯤 관심을 가질 만도 하다.
연변으로 간다.
용정시내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방문한다.
윤동주 시인의 별과 나의 시가 유명한 곳.
수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낸 곳.
민족의 정신이 살아 있는 이곳은 한국 관광객은 꼭 볼만한 곳이다.
현지 설명을 하는 여자 가이드가 설명을 한다.
사진은 찍을 수 없지만 이미 우리 몸에 배고 우리의 기억을 살아나게 하는 설명에 방실이도 흠뻑 빠졌다.
마지막에는 헌금 통이 있다.
우리가 내는 작은 헌금들은 이곳의 용정중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사용한다,
무료로 공부를 가르치며 애국정신을 고취하라는 마음에서 모두 뜻있는 성금을 내었다.
연길시와 연변은 같은 이름이다.
우리 교포 120만 명이 살다가 지금은 80만 명이란다.
소수민족은 100만 명 이상이라서 중국정부에서는 소수민족에서 폐지하려 하지만 이들의 뜻을 모아 그 이름을 고수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여기 주민은 북한 출신의 주민이 50%, 독립운동 출신이 50%여서 중국과 한국의 축구시합은 물론 한국을 응원하지만 북한과 남한의 축구시합은 반반으로 민족의 뿌리를 실감하게 한단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과 강택민 주석의 한중 수교 후부터는 연변의 주민이 힘을 얻고 생활하고 있다니 조국의 힘이 얼마나 교포들에게 힘이 되는지 짐작이 간다.
한국이 인기를 얻은 계기가 연속극이었다.
이순재가 나오는 ‘사랑이 뭐길래’란 연속극 이후 이들의 생각이 바뀌었단다.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된 중국에서 남자가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청소하는 것을 본 이들의 여성들이 자기들만 하는 것은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이 하는 부당한 일을 거부하는 사례가 생겼고 남자법이 접목되었단다.
대장금 이후에는 한식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고 한국의 음식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단다.
다양한 음식이 중국에 태동하는 계기가 대장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들고나서부터는 13억의 중국과 5천만의 한국이 연전연패를 당하던 중국이 우리나라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 한국의 이미지가 중국에 높이 평가되고 조선족들의 위치도 높아지게 되었단다.
지금은 케이팝이나 연예인 활동이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늘어나면서 경제와 문화적 힘이 성장되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요즈음은 태양의 후예가 방영되므로서 이미지가 내려왔다고 한다.
총각들이 결혼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한다.
여자들의 눈이 높아져서 웬만한 남자는 남자로 보지 않게 되었으니 태양의 후예로 남자들이 더욱 힘을 잃어가게 되는 결과가 되고 있다고 한다.
해가 질 무렵에 용정시에 들어왔다.
일송정이 보이는 시내 가장자라에 해란강이 흘러간다.
해란강은 두만강 지류로 ‘선구자’에서 언급된 용정 지역의 강이다.
해란강 주변의 들판이 우리 민족이 간도 지방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하다.
예전 올 때는 아주 작고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강둑을 아주 잘 정리하여 우리나라의 4대강 정비사업과 같은 강 살리기 덕분에 아름다운 혜란강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일송정이 보인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에 보면 길 오른 쪽의 산 위에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눈에 띄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일송정"이다.
산 정상에 우뚝 선 한그루 소나무로 그 모양이 정차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상징이었단다.
일번 넘들이 여기 상징하는 나무가 정기를 불어 준다하여 소나무를 자르고 약을 뿌렸는데 그 약기운인지 아직도 나무를 심으면 3년 안에 죽어 안타깝다고 한다.
해란강의 그 다리 위로 해서 대성중학교에 들어간다.
대성중학교는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학교로,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실제로 학생들이 이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구관 앞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가 새겨져있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있으며, 건물 2층에는 기념 전시관이 있다.
정면에 윤동주 시인의 동상이 있고 건물 안에 들어가서 2층으로 오르면 작은 안내하는 가이드가 역사와 애국자들과 대성중학교의 이미지를 설명한다.
한족 13만 명이 살고 있는 용정시에 지금은 주민도 줄어들고 학생도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긍지를 살리는 교육을 지금도 이어간다.
나오는 길에 모두는 성금함에 작은 돈을 넣어 성금에 참여한다.
이 성금은 여기 들어오는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저녁은 쇠고기 샤브샤브다.
옵션을 하지 못한 것에 보상으로 고기를 무제한 공급한다고 한다.
개인 스토브에 물을 끓이고 백두산에서 생산하는 송이버섯을 첨가하여 끓여서 먹는다.
실컷 먹고도 남을 고기였고 송이버섯이 먹기에 충분하다.
처음에는 신이 무척 났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흠뻑 먹었다.
전신맛사지를 받는데 건이는 받지 않으니 따로 방을 주어 쉬게 한다.
부르하통화라고 하는 만주어의 버드나무 우거진 강위로 공원의 불빛의 뜻이란다.
밤에 비치는 해란강의 다리 위를 지나면서 아름답게 회황하게 빛나는 불빛에 취해버렸다.
용정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저녁 11시에 취침에 들어간다.
내일은 6시에 아침을 먹게 된다.
용정........, 혜란강....... 일송정......별 하나에 나 하나......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우물가에 저녁종이 울릴 때
사나이 굳은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다.
대학시절 가창을 가르치시던 김용래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일송정을 다시 보며 느끼는 마음이 마음에 새롭다.
우리나라의 상징처럼 부르던 노래들이 머리에 가득하다.
연길 대호텔에서 더운 물도 나오고 냉장고도 있고 전화기도 있는 여지껏 가장 좋은 숙소에서 잠을 청한다.
4일째 2016년 7월 30일 토요일 맑음 Gu
호텔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처음으로 먹고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도문(圖們)으로 약 1시간 소요하여 달려간다.
토문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로 삼면이 바다이고,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두만강의 하류가 흘러간다.
두만강은 토문강, 두만강, 그리고 도망강이라고도 부른다.
예전에는 북한 주민이 살기 힘들어 몰래 토문으로 와서 농사를 짓다가 가곤 하였는데 살기 어려운 북한보다는 중국이 살기 좋아서 아예 발을 붙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발각이 되어 결혼한 아내를 남겨 놓고 낳은 자녀를 놓고 나중에 발각되어 도망자로 몰려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래서 강 이름이 도망강이 되었다.
그 낳은 아이는 국적을 얻지 못하여 어머니의 성을 따라 호적에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비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받으니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여 꿈에라도 자기 아버지를 보고 싶어서 아버지 어디 있지 노래를 부르기도 한단다.
북한의 남자들이 일자리를 얻기위해 도강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양강도 삼지연군 2,088m 지점 북동계곡에서 발원하여 양강도 대홍단군, 함경북도 연사군·무산군·회령시·온성군·새별군·은덕군을 지나 선봉군 우암리 동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상류로부터 석을수·연면수·성천수·보을천·회령천·오룡천·아오지천과 하이란 강, 훈춘 강 등의 지류가 곳곳에서 합류한다.
강폭이 40m밖에 되지 않지만 여기에 유람선이 있고 늪 저쪽에는 북한의 초소가 산 정상에 있고 중국과 접경한 지역에 육로와 기찻길이 있다.
예전에는 걸어서 중간부분까지 갔지만 지금은 중국 군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불법 도망자를 감시하기도 하고 중국과 북한의 무역물품을 나르기도 하여 여기에 세관이 자리 잡고 있다.
더위에 지쳐 관광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지만 건이와 방실이 그리고 나와 아내는 기필코 보겠다는 일념으로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달리다시피하여 접경지역에 이르렀으나 중국 군인은 노 한다.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것도 ‘노‘란다.
시간은 급하고 머뭇거릴 수 없어 북한으로 가는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두만강 강변 공원에서 잠시 생각을 한다.
접경지대에 조성된 5km 길이의 공원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나타내는 비석이 있고, 북한의 남양시를 가까운 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어서 좋다.
어서 돌아가자.
중국은 이제 두만강 이북을 자기 땅으로 삼아버렸다.
30여년 전 동북공정을 앞세워 광개토대왕이 건설한 만주이남 요동반도도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북한으로 가는 길도 봉쇄하고 자기들의 이익의 땅으로 만들었다.
멋진 군인을 뽑아 국경을 지키게 하고 위엄을 자랑한다.
그만 가자.
고속도로에 들어서기까지도 나는 토문에 머물러 있었다.
나훈아씨가 즐겨 부르던 그 노래를 황해도 출신의 송해씨가 부르면 더 구슬퍼지던 노래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흘러간 그 옛날의 내 님을 싣고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언제나 오려나
애달피 불러 봐도 푸른 물은 없고 철공장에서 내려오는 오물로 검은 물로 변해버린 두만강.
눈을 들어 보니 강 너머 초소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찾는 이는 한국을 사랑한 후예들이 꿈을 안고 찾는 추억밖에는 없다.
잘 있거라.
다시보자.
다음에는 통일이 되어 이 다리 위로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걸어나 보자.
돌아오는 고석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는다.
20명의 우리 일행은 이제야 정이 들었다.
웃고 경계하는 마음도 풀고 자기들이 이야기도 한다.
점심이 더 맛이 있다.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해서인지 다른 때보다 더 많이 먹는다.
정들자 이별이란다.
사람은 귀족이 많은 소주에서 태어나 인정을 받고
미인이 많은 항주에서 젊은 나이를 보내고
나는 것은 비행기만 빼고 땅에 나는 것은 나무 의자만 빼고 먹을 것이 좋은 광동에서 먹을 것을 먹고
나무가 좋아 관이 아름다운 유수에서 죽고 싶다고 한다.
도문에서 장춘으로 오는 고속도로 6시간 내내 보이는 옥수수 밭.
크건 작건 좁건 넓건 무조건 옥수수다.
언제 심고 언제 풀을 매는지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꽃이 일제히 같은 시기에 피니 동시에 일을 한 모양이다.
사람이 없는 곳에도 옥수수, 들판에도 옥수수.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내가 직접 보아야 이해가 갈 것 같다.
중국 나들이가 거듭될수록 알아가는 맛이 더하다.
장춘공항에 들어서자 가이드는 인사하고 떠난다.
알아서 하란다.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다.
여권 한 장이면 티켓에서부터 보딩까지 쉽게 마칠 수 있어서다.
예전처럼 감시하고 늦장부리고 텃세하던 공항 풍경이 간단하고 질서 있고 쉽게 입출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란 것을 중국도 알아버린 것이다.
이제 두 시간을 경과하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늦은 시각이지만 기내식을 먹으면서 집에 갈 걱정을 한다.
논산 가는 리무진이 막차시간을 넘겼다.
고속 터미널로 가서 논산으로 가서 강경으로 가려면 오늘 밤이 짧다.
그래도 가야 한다.
방실이와 건이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고속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서울의 밤경치는 참 아름답다.
한강 주변의 강물에 비친 시내가 물속에 긴 여운을 남긴다.
아내와 딸과 손주와 함께한 백두산 여행에 감사하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백두산 대장정을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늘 가야지 하고 마음속에 품은 산이 아니에요?
뜻깊은 여행 ! 가족이 함께 한 여행이어서 아주 좋습니다.
오랜만에 들어오니 반가운 글이..백두산 천지를 보았다니 부럽습니다. 여러번 가도 못 보는 경우가 많다는데 역시 장로님의 기도에 하나님이 역사 하셨군요. 남편과 6/23~26 백두산 다녀왔는데 비가 오는 가운데 오른 서파 코스에서 약간 보일락 말락.. 북파코스에서는 구름, 안개, 비로 전혀 보이지 않아 천지는 물론 장백폭포도 구경하지 못하고 내려 왔답니다. 천지를 제대로 못 봐서 기회가 되면 다시 가보려고 생각 중
모두들 소원해진 카페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감동입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백두산 대장정을 눈앞에 보는듯^^ 잘 읽었습니다.
가보고 싶으면서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백두산이었는데
나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