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경륜가 - 박현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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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위한 '민족경제'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의 접점을 찾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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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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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현채와 나 박현채(나는 그의 전주고 7년쯤 선배이기 때문에 그는 생전에 흔히 나를 주선배 또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존칭을 생략한다.) 그는 몹시 술을 즐겼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의 명을 단축시켰다. 그는 이 따끔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한잔 하러 나오시오”라고 했다. 그런 때면, 지장이 없는 한 나가보곤 했는데, 대개는 정윤형, 이경희 등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합석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57년 경 서울 을지로에 있던 농업문제연구소 정례토론회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주석균 선생이 운영하던 이 연구소의 간사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농림분과 보좌위원으로 재직하면서 경제개발3개년계획 작성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농업문제 해결의 길을 고민하고 있었기에, 박현채와는 퍽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평생 그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 때에는 그가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귀뜸해준 사람이 없었고, 최근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제도권의 농업경제학 전공자로서 농업문제에 관한 비판 글을 많이 썼지만, 언제나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자기가 놓여 있는 입장에서 나름대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지만, 대한민국의 판 그 자체를 바꿀 것을 꿈꾸고 있던 박현채의 눈에는 그것이 수정주의 또는 현실 타협주의로 비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나는 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귀국한 경제학 박사들이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187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학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한계효용학파 내지 미국의 주류경제학(신고전파 종합)이 한국의 경제학계를 지배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이론을 내부에서 뒤집어보고 그 약점과 현실 불합치점을 보여주는 작업에 몰두했다. 나는 그런 입장에서 “경제학개론”(일조각, 1977), “한국적 경제학“(정음문화사, 1984), ”한국자본주의사론“(한울, 1988)을 내놓았고, Joan Robinson의 ”현대경제학비판“(일조각,1979)과 일본 우자와 히로부미(宇澤弘文)의 “근대경제학의 재검토”(한울, 1989)등을 번역 출판했다. 또한 ‘소위 서강학파 경제학의 오류’라는 글을 발표하여 비판을 가했다. 나의 학문적 입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영국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학설을 거꾸로 이용하여 자본주의 변혁의 이론체계를 완성시킨 맑스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 분석에는 지극히 심오한 이론체계이지만, 일상적으로 시장과 가격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본주도 아래서 운영되고 있는 잉여가치 축출기구로서의 현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현실에 맞게 이론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계효용학파에 뿌리를 둔 미국의 신고전학파의 경제학을 맑스의 노동가치학설에 접목시켜 분석하는 방법을 택해야한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입장이었고, 그것이 상기의 일련의 저작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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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후반의 나이로 조선대 교수로 취임, 민족경제론을 강의하던 시절의 모습 © 인터넷 이미지 | 맑스의 이론을 절대적으로 금기시하고 심지어 그와 관련된 책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으로 엮어 넣는 군사정권의 암혹한 시기에, 나의 그 정도의 학문적 시도도 퍽 힘들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박현채는 시종일관 맑스적 입장에서 한국의 변혁을 고민하면서, 그 변혁주체를 어떻게 형성하느냐라는 문제에 집착했고, 그것이 한국이라는 분단현실과 결합하여 그의 “민족경제론”으로 발전되어 갔다. 박현채는 비록 나와는 약간 입장의 차이가 있었지만 나의 위와 같은 학문활동이 한국의 변혁주체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항시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그를 최후에 만난 것은 그가 경희대학교 부속 한의원 재활센터에 입원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날더러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경기대학교 서울 본교에서 거행된 그의 영결식에서 나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혁명가였던 그의 명복을 빌면서 눈물을 흘렸다. 금년(2005년) 이른 여름에 덕수궁 옆 열린공원에서 거행된 민주민족열사 추모제에 갔을 때, 백명도 넘어 보이는 영정들 속에 박현채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나는 나에게 들려준 한 송이 국화꽃을 그의 영정 위에 꼽았다. 2. 박현채의 이론적 입장과 나의 입장-그 합일점과 차이점 박현채는 나의 회갑 기념논문집 (주종환 편저, “힌국자본주의론”, 한울,1989,pp.321-333)에 기고한 바 있다. 이 책의 제1편은 ‘한국자본주의발달사'이고 제2편은 ’한국경제의 현황과 대책‘인데, 그 제1편에 박현채는 ‘사회구성체론과 발전단계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이 논문은 박현채가 조선대 교수로 발탁된 후에 쓴 것인데, 그가 다른 곳에서 발표했던 글들을 요약하여 다시 쓴 글인 것 같다. 말하자면, 이 글은 그의 말년에 가까운 때에 쓰여 진 글이다. 나는 이번에 박현채 전집 발간이라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그를 기념하는 글을 쓰라는 부탁이 와서, 글을 쓰기 전에 위 논문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는 생전에 흔히 매우 압축된 표현방식을 즐겨 썼는데, 이글은 지면제약 때문인지 더욱 압축된 표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자세히 한자 한자 음미하면서 읽지 않으면 초학자들에게는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그의 체취가 물씬 묻어나는 글이다. 이 글은 그가 꾸준히 체계화 하려고 노력했던 ‘민족경제론’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사회구성체론과 발전단계론을 둘러싼 여러 비판들에 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박현채는 이 글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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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경제사상의 정수로 불리는 민족경제론의 표지. © 한길사, 1978 | “(사회구성체론과 발전단계론)은 민족경제론이 적용되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제도와 사회적 성격의 문제와 얽혀 있으며, 그것이 어느 발전단계에 놓여 있느냐하는 문제로 된다.....(그것은) 민족경제를 둘러싼 차원 다른 모순관계를 밝히는 데 있다.....민족경제론 구성범주간의 상호관계는 민족경제론이 아직 완성된 체계가 아니고 완성된 단일의 논리체계를 의도하지 않는 데서 현상적인 관계 이상의 것은 아니지만 개괄적으로 그와 같이 제시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민족경제론의 발전과 함께 더욱 확장되고 다른 것으로 될 것이라는 데서 가변적이다.” 그는 여기에서 민족경제론이 결코 완성된 단일의 논리체계를 의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앞으로 연구의 심화와 더불어 더욱 확장되고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마치 완성된 이론체계인 것 같이 잘못 생각하는 경향은 올바른 견해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앞으로 후학들의 연구에 의해 심화 발전시켜 체계화의 길을 모색할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이론에서 특히 문제로 되는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다.
첫째, 그는 “해방전후 한국경제의 성격”(한길사, 1983)에서 한국자본주의에 관해 그 발전단계를 1) 자본의 원시적 축적기(1905-1918) 2) 산업자본단계 (1919-1929) 3) 금융자본단계 라는 3개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것은 한국의 자본주의가 서구의 그것과 똑 같은 발전단계를 거쳐 간다고 보는 견해다. 나는 이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한국자본주의는 어느 정도의 자기완결성을 갖는 독립된 자본주의가 아니었으며, 일본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일 분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립된 자본주의에 관해서나 이야기될 수 있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경제의 일부였지, 한국경제는 아니었다.....그것은 일본경제의 생산구조의 주변부로서의 특수한 성격 대문에 별개의 분석대상이 되고, 거기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적 과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주종환, “연세춘추” 1987. 5. 11; 동, “한국자본주의발달사론”, 한울, 1988 p. 14 재수록) 사회의 역사적 성격 분석은 일하는 대다수 민중의 주요한 대결대상 즉 ‘주요모순’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려내서 민중에게 투쟁목표를 분명히 제시하는 데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를 둘러싼 논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박현채의 견해를 수용하면, 일제하의 한국이 마치 자주성을 가진 독립국가인 것 같은 착각을 주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어 보였다. 당시의 식민지 한국 민중의 주적은 이미 금융독점자본주의단계로 진입하고 있던 일본제국주의의 하수인인 총독부체제가 깔아놓은 半봉건=半자본주의적 국가(금융)독점자본주의였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박현채의 견해를 수용하면, 당시의 ‘주요모순’은 일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반제반봉건투쟁이 아니라, 한국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反자본주의 투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이론구조에 길을 터주게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당시의 한국사회의 주요모순과 한국민중의 주적은 자주독립을 박달한 총독부 권력이었으며, 그 지배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이 ‘주요모순’이였고, 反봉건투쟁으로서의 지주-소작인간의 투쟁이나 反자본주의투쟁으로서의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종속모순’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올바른 투쟁강령은 ‘반제 반봉건 민족민주 통일전선’이었고, 그 가운데 주요모순’과 관련된 민중의 주적은 일본제국주의 타도였으며, 지주에 대한 소작농민들의 투쟁이나 자본가에 대한 노동민중의 투쟁은 이 ‘주요모순’에 종속된 ‘종속모순’이었다고 보는 점이 박현채와 다른 필자의 견해의 핵심이었다. 한편, 박현채는 앞에서 인용한 그의 논문에서, 일본의 가지무라 히데끼(梶村秀樹)가 주장했던 ‘식민지반봉사회구성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가지무라의 이론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사회구성체 개념을 도입하고 종속이론과의 연관 (물론 그 자신이 종속이론가이지만) 속에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의 주변부자본주의론과의 통합을 시도한 견해”라는 것이다. (앞의 책, p. 327) 필자 자신도 가지무라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일제하의 한국사회를 식민지반봉건적 사회구성체로 보는 입장에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가 아니라고 보는 가지무라 교수 등의 견해에도 찬동할 수 없다. 식민성과 반봉건성을 강조하기 위한 이론 설정이라는 의미에서 그 뜻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반봉건적이라는 말 자체가 半자본주의적이라는 뜻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을 자본주의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논리상의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앞의 책 p. 14). 가지무라가 일제하의 한국사회의 반본건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 자본주의적 성격마저 부정하면서 그것을 역사적으로 독특한 ‘·식민지반봉건사회’라고 규정했던 점에 대해, 박현채와 필자는 다 같이 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박현채는 종속이론과의 접점을 전적으로 거부한 데 대해, 필자는 종속이론의 시각의 일부를 그런대로 수용함으로써, 가지무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박현채의 상기한 인용문에서 거부하고 있는 “식민지반봉사회론과 주변부자본주의론과의 통합”을 시도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그런 관점에서 일제하의 한국사회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고 본 가지무라의 견해와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에 편입된 일부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의 지배를 받는 사회라고 보아야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 이 견해가 ‘월라슈타인’이나, 김준보 교수, 그리고 종속이론가인 이대근 교수 등의 반봉건성 부인론과 분명하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월라슈타인과 김준보 교수 그리고 이대근 교수 등은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의 공존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지만, 필자는 일제하의 지배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우크라드)을 인정하고 그 기초 위에서 종속적 위치에 있는 비자본주의적 우크라드와 지배적 자본주의적 우크라드와의 대립과 공존, 그리고 이들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을 인정해야만, 일제하의 한국사회의 성격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점이 박현채의 견해와 필자의 견해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책, p. 15) 한편 박현채는 8.15 국토분단 이후의 한국경제의 성격을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규정함으로써, 이대근을 필두로 한 종속이론가들과 유명한 ‘사회구성체논쟁’을 전개했다. 필자는 이 점에 뒤늦게 뛰어들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혹자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어떻게 주변부자본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국의 자본주의의 성격이 국가독점자본주의냐 아니냐의 문제와 그것이 종속성 내지 주변부성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주변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앞의 책, p. 22)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8.15 국토분단 이후의 한국경제의 성격을 ‘전근대성에 심각하게 발목 잡혀 있는’ “종속적 주변부 국가(관료)독점자본주의”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국사회경제학회, “사회경제평론 제1집 , 1988.) 3. 최근의 노동해방파에 대한 ‘민족경제론자’ 들의 견해를 듣고 싶다 필자는 2000년 여름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주종환, ‘현단계 한국사회의 성격과 사회운동의 과제’, 유팔무, 김정훈 편,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2”, 한울, 2001), “현 단계 한국사회의 성격규정은 시민운동 뿐 아니라 민족 민주 민중 운동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운동의 성격과 목표를 과학적으로 설정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1980년대에 이 땅의 운동권을 양분하여 진행되었던 소위 민족해방파와 노동해방파 사이의 뜨거웠던 논쟁을 상기하게 된다. 이 논쟁은 당시의 한국사회의 성격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하였지만, 운동사적으로 볼 때, 이 논쟁은 필요이상으로 이념논쟁에 매달림으로써 운동의 활력을 소모적으로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그러한 상황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걸쳐 한국에서 전개되어 온 실제적 상황이 이를 더욱 현실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사실 1987년의 역사적 6월항쟁에 있어 민족해방파나 노동해방파 중 어느 세력도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지 못하였고......그 많은 세력들이 YS와 DJ에게 흡수되고 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동구권 사회의 몰락이란 요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으며, 이들의 이론 그 자체의 결함이란 측면에서 조명해야만 과학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이론은 이론의 테두리에 머무를 수 없으며, 그것이 현실 속에서 검증될 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면, 한국사회의 오늘의 혼미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 틀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현 단계 한국사회의 성격에 관한 규정 즉, ‘전근대성에 심각하게 발목 잡혀 있는’ “종속적 주변부 국가(관료)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은 “민족경제론”의 제창자 박현채의 이론의 상당부분을 수용하면서 이를 발전시킨 필자 나름의 현실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과연 근대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우리 사회는 근대사회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의 통일조차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국가보안법 체제 아래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립하지 옷하고 있으며, 국민 대다수의 의식구조 역시 지역 패거리주의, 연고주의, 혈연주의 등 19세기적 가치관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 경제 역시 겉으로는 상당히 선진국을 향해 가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며, 박현채가 정당하게 분석 바와 같이,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지 오래 되었으나, 경제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재벌들의 존재형태는 여전히 전근대적 족벌 체제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그러한 경제권력이 국가권력의 행사자인 관료세력과 밀착관계 아래 놓여 있다. 필자가 “전근대성에 심각하게 발목 잡힌”이라는 형용사 밑에 “종속적 주변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규정한 이유는 위와 같은 상황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규정을 운동론과 관련시켜 말한다면, 이 규정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이 사회의 전근대성을 극복하는 운동이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점이다. 특히 국가보안법의 철폐는 필수불가결하다. 둘째, 종속성에 대한 인식은 민족의 자주성의 확보와 남북 분단 문제의 자주적 해결이 모든 문제에 앞서 해결되어야 할 시급한 민족적 과제임을 일깨워주게 된다. 주변부성에 대한 인식 역시 강대국에 의한 패권적 지배의 배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제시해 준다.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은 앞의 전근대성과 맞물리는 가운데, 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혈족재벌과 국가권력의 유착에 기인하는 부패의 만연과 이들 기득권세력들에 의한 권력독점 체제를 우선적으로 혁파하는 과제와 참여민주주의의 확립이 매우 중요함을 가리켜 준다. 그것은 나아가 참여민주의의 확립이라는 역사적 과제의 추진세력이 옛날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서와 같이 유산자 계급이 아니라, 기득권세력에 의해 피해를 입고 탄압받아온 광범한 근로인민대중과 지식인과 민족자본가의 연합체일 수밖에 없다는 중요한 결론을 유도하게 된다. 이들 여러 과제들 가운데 어떤 것이 ‘주요모순’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역시 민족분단의 극복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 열거한 그 밖의 제반 모순들은 민족대단결을 통해 민족적 양심이 되살아나고 그럼으로써 민족분단체제가 극복되면 대부분 자연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말하자면 ‘종속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현 단계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에 있어서, 노자간의 대립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최근까지도 소위 노동해방파의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즉 “개혁주의적 시민운동세력만이 아니라 민중운동 내의 개량주의 및 현재 민간통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통일운동세력의 많은 부분들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 및 남한자본의 북한 진출을 뒷받침하는, 정권과 자본의 제2중대로 점차 편입되고 있다. 그리고 수구와 개혁의 대립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국제여건의 변화에 따른 자본가 내부의 헤게모니 게임일 뿐이기에, 대립의 기본구도는 현 정권의 시장주의적 북한 흡수통일노선과 계급적. 민중적 통일노선 간의 대립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민중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남북한의 노동자. 민중의 이익에 진정으로 합치하는 새로운 사회체제의 건설을 지향해나갈 것인가이다. (김세균,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관계 및 남북한사회’ “진보평론” 2000년 가을호, PP. 179-88.) 필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를 기준으로 전선을 분명히 가르자는 이런 주장은 노자의 대립을 기준으로 하고 노동자 주도의 사회주의혁명을 지지할 것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전선을 갈라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입장은 매우 명쾌하고 용맹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런 노동자계급에 의한 사회주의혁명 주장이 현재의 국가보안법 체제 아래서 버젓이 주장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기이하게 보이는 면도 있다. 그것은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 이론이 `적의 적은 우리의 우군이다‘라는 관점에서 포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보여지는 면마저 없지 않다. 그런 정치적 또는 정략적 의미부여는 좀 지나친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주장이 운동권 안의 유력한 분파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일단은 눈여겨둘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주종환, ’민족운동 사회개혁운동 그리고 평화운동‘, “참여사회연구소 편, ”시민과 세계“. 제2호, 2002년 여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대립은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적 속성임이 분명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전근대사회의 그것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고 국토가 분단된 상황 아래서, 종속성과 주변부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종속적 주변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이것과는 매우 이질적인 서구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발전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한 노자 간의 대립 문제에 노조가 지나치게 매달리게 되면, 자칫 노조이기주의 또는 좌익모험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할 위험성이 있다. 그렇기에 노자 간의 대립을 직장 현장의 문제에 왜소화시켜 보아서는 안 되고, 언제나 민족공동체의 이익, 참여민주주의의 발전, 한국사회의 현대화라고 하는, 대국적 공익적 관점에서 다른 계층과의 상호관계를 존중하면서, 그 테두리 안에서 현장 노동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운동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노조 그 자체의 발전도 기할 수 없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노동자들의 일상의 생활권이 걸려있는 노동자 복지향상 등 노동현장의 문제 해결도 결국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자주적 중립적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통해 불필요한 군사비 지출 경쟁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획기적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사회운동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북의 대립과 대결을 하루 속히 극복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외국군대를 철수시키고,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여 그 자원을 중립적인 복지국가 건설 쪽으로 돌려쓸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제성장의 혜택의 공평한 분배를 가로막고 경제의 대외적 예속화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족벌 재벌 지배 체제를 개혁하여 중소기업과 서민계층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민중에게도 복된 생활을 보장할 수 있게 하는 선진화된 경제체제의 확립은 노동자 자신의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 각계각층의 공통된 요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세력의 지배 체제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광범한 연대가 가능하고 또 그런 연대 하에서만 이들 모든 계급계층의 소망이 비로소 빛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패의 척결과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요구도 역시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사회 각계각층이 연대해야만 비로소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착, 부패 척결, 재벌개혁, 사회의 현대화,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권 보호와 권리 확보 등 이 모든 요구들은 결국 동시적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그런 점에서 본다면 민족운동 민주화운동 민중생활권 수호운동 등 한국사회 개혁을 위한 모든 운동들은 동전의 앞과 뒤와도 같이 하나로 되어야 할 필연적 관계 아래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현 단계 한국사회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얻어진 결론인 만큼 과학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종환, ‘현 단계 한국사회의 성격과 사회운동의 과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2“ 앞의 책, p. 374-375) 좀더 겸허하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 보다 사회과학자 다운 태도는 아니겠는가? 즉 신자유주의 반대운동과 제국주의 반대운동 내지 민족자주운동 간에 어떤 접점은 없는 것인지, 또 신자유주의 반대운동과 기업구조개혁운동 내지 독점재벌 비판운동과의 접점은 없는 것인지, 남북대결을 부추기고 대북 강경 대응책만을 주장하면서 6.15남북공동선언과 포옹정책의 파기를 요구하는 호전세력에 대항하여 민족끼리의 공조를 강조하는 반전평화운동과의 접점은 없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운동이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반대운동과 맞닿는 접점은 없는 것인가? 등등 문제는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다. 자기의 우군이 될 소지가 있는 운동을 모조리 `정권과 자본의 제2중대‘로 몰아붙여 적대시하고 노동계급혁명에 찬동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만이 진정한 개혁세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극좌모험주의, 독선주의 더 나아가서는 개혁세력의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정권과 자본의 진정한 의미의 제2중대’로 될 가능성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한편 민족운동진영에도 문제는 있다. 말로는 민족대단결을 내걸면서도 동지들을 험담하는 데 골몰하고 분파를 형성하여 막가파식 극단행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여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매도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있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반대파에 대한 모함까지도 서슴지 않고, 단결을 해치는 행동을 바로 통일운동이나 노동운동이라고 착각 하고 있는 무리들이 활개를 치고 있음을 본다. 위와 같은 견해와 통폐에 대해 박현채가 현재 살아 있다면, 어떻게 대응할까. 매우 궁금한 일이지만, 그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이제 박현채를 따르는 ‘민족경제론자’들이 답해야 할 과제다. * 필자는 동국대 명예교수,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 연구소 이사장이며 본문은 '평화만들기'에도 기고했다.
* 다음은 <교수신문> 2002년 9월 19일자에 실린 “정건화 교수와 박영호 교수가 기억하는 박현채-이론과 행동 함께 한 실천적 전략가” 기사를 소개한다. 정건화 한신대 교수(경제학과) "대학원을 다닐 당시, 산업사회연구소 세미나에서 뵈었던 박현채 선생은 우락부락한 '터프가이'였다. 논쟁도 아주 치열하게 하시고, 토론을 할 때는 상대방을 무섭게 몰아쳤다. 그러나 후배들에게는 언제나 넉넉한 이해심으로 포용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박현채 선생을 알고 지냈는데, 세미나에서의 모습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민통선을 눈앞에 두고 분단 조국에 관한 토론을 벌일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빨치산 출신이었던 박현채 선생과 학도병 출신이었던 조정래 선생의 경험을 들으면서, 사회와 유리된 사회과학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됐다. 이후 역사적 현실을 배제하지 않고 학문과 결합해야겠다는 것이 나에게 학문적 화두로 남았다.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은 선생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실천적 패러다임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박현채 선생이 운동가로서 또 사상가로서 민족경제론 끊임없이 정리해 왔고, 이것을 대중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셨다. 한편으로는 민족경제론이 이후 사회구성체 논쟁과 함께 토착적 사회과학 이론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한동안 사회과학계가 논란에 휩싸였을 때, 박현채 선생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계셨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모습이 선생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선생은 항상 어느 곳에 소속돼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직 내부를 비판하실 때는 가차없으시지만 조직 자체의 흔들림에 대해서는 지켜 보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현채 선생의 이론은 지금 꺼내보면 기계론적이라는 비판도, 내부적인 모순을 가졌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혼란한 시대에 변혁운동의 한 가운데에 서서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몸소 보여준 모습은 아직도 배워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박영호 한신대 교수(경제학과) "박현채 선생과의 인연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사적으로 전주고등학교 선배이었을 뿐만 아니라 진보적 사상의 선배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깊은 동질적 연대감 속에서 인연을 맺었다. 내가 기억하는 박현채 선생은 학자이면서 전략가이다. 탁월한 현실분석능력을 가지고 우리 사회문제들을 이론화해서 민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평생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한 몸으로 맞서 싸우고자 하다가 결국 세상을 일찍 떠나버리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 뿐이다. 박현채 선생은 우리가 선결해야될 과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 자도자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좀처럼 통일을 입밖에 내지 못하던 시절에, 민족문제의 해결 없이는 계급모순의 극복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분단된 양쪽의 국가경제가 아니라 통일된 조국의 민족경제가 추구해야할 과제라고 명시한 견해는 지금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것이 박현채 선생의 이론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가를 이어받아 박현채 추모 재단을 설립해서 학술상과 사회운동상(가칭)을 수여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은 올해 안에 준비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민족경제론을 해방 이후 남북한의 경제학계에서 유일하게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의 경제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가치 있는 이론이라고 평가한다. 이 민족경제론이 남긴 과제는 우리에게 일차적 세계화는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 통일이라는 과제이고 또 민족문제의 해결 없이는 세계화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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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을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요약 좀..
녹색으로 된 글만 발췌해도 개괄적인 내용이 충분히 담긴다
이론은 있는데 실천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 이사람 이론은 뜬구름 잡기이네. "~해야한다." 근데 그 ~해야한다의 전제조건도 아직 길조차도 잡지 못했는데 뭘 할 수 있겠냐. 게다가 결국은 대립과 투쟁에 관한 내용. 구시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