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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 26-38
오늘은 주님탄생 예고 대축일 입니다.
오늘 묵상을
제2독서 히브리서에서
시작해 봅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원죄를 물려받았고 살아가면서죄를 피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듯 합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지은 죄에 대해서 그것을 벗고자 하는것이 인간의 깊은 본성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제물로 바치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그 몫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단 한번 바치심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틀안에 있던 그들에게
이는 적지 않은 충격 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들이 만든 하느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에수님을 죽이기에 이른 것이겠지요.
대조적으로,
오늘 성모님께서도 율법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계획을 듣게 됩니다.
이에 몹시 놀라면서도,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이해 하지 못하면서도 천사를 통해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데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답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이세상에 오시도록 협력하십니다.
오늘 성모님은 자신의 선택이 율법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명백히 알고 계셨을것입니다.
성모님은 율법에 충실 하셨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께서 율법등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닌, 율법 그 너머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었기에 구세주를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실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율법(어떤 자신의 생각, 확신, 주장등의 틀)을 넘어선, 자유로우신 성령의 이끄심에 내어 놓을줄 알때 성모님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온전히 하셨듯이 우리안에서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1,37-38)
(정 루치아나 수녀님)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루카 1,26-38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은 어떤 연령대일까?
오늘은 성모 영보 대축일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신성시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신부님의 어머니도 신자들이 공경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어떤 인물을 낳은 어머니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공경하게 될까요?
자녀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유치원 교사가 해 준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학급에 친구들 신발까지 정리해주며,
선생님 마음 아프니까 떠들지 말자고 친구들을 다독이는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담해 본 결과 그 아이 어머니는 아기가 태중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두 번 통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날 때부터 부모님을 생각하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믿을 수 없었던 하나의 장면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본 것인데, 한 어머니가 아이들 몇 명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대여섯 명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누나가 막내 아기를 안고 있었고 엄마는 거의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울지도 않고 어린아이들이 엄마처럼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 태중에 아기가 있을 때부터 저렇게
성체조배를 하니 아이들에게도 그 영향이 가는구나!’였습니다.
저도 만약 결혼했다면, 아기 엄마에게 억지로라도 ‘하.사.시.’를 읽게 하고 매일 ‘성체조배’를 태교로 시켰을 것 같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산만한 아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이 부모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는 부모의 모든 것을 받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하느님은 요셉 성인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마리아와 혼인하고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거나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으십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주저했다면, 헤로데에게 아기를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자연의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인간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범’으로 보여주셔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하느님이셨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끔찍한 일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처음부터 튼튼했거나 지혜가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고 충만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튼튼해진다거나, 충만해진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지금도 반복해서 진행중인 상태라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완성된 상태로 잉태되거나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과정’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더 절대적입니다.
만약 성모 마리아가 죄에 조금이라도 물들었다면, 예수님도 죄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는 자녀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에서 죄에 물들지 않아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델은 ‘파라오의 딸’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당시 파라오라는 사탄과 같은 존재에 의해 모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의 딸이지만, 파라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파라오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일강에 떠내려온 모세를 키웁니다.
그 공주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은 파라오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모세를 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런 면에서 당신 자신도 죄에 물들면
안 되는 분이셨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미리 마련하셨듯이 성모님도 미리 마련되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20)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육체를 지니셔야 했다면,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그 육체를 주셔야 하는 성모 마리아도 미리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마련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첫 피조물인 ‘지혜’를 성모 마리아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받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성령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아기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오실까요?
성모 마리아의 인사를 통해 오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처럼 우리가 하는 것에 따라 은총을 주시며 순종하십니다.
다만 우리 안에 죄가 있다면 그 죄 때문에 쉽게 돌아가실 수도 있는 약한 상태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실지 궁금해합니다.
저는 분명 성모님께 그러하셨듯이 ‘아기 예수님’으로 계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른으로 우리 안에 사실 수는 없습니다.
어른은 나에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예수님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다만 살아계신다면 신적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성모님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5일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복음: 루카 1,26-38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냥 사랑이 아니라 ‘총애’(寵愛)! 총애받는다는 것은 적당히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각별히 사랑받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총애로 인해 삶이 바뀝니다.
총애받게 되면 우울한 색조였던 나날이 순식간에 화사한 색조로 변화됩니다.
총애는 한 존재를 고무시키고 참 사랑에 눈뜨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은혜롭게도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녀의 소박함과 순수함, 그녀의 작음과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덕행을 바탕으로 한 즉각적인 응답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순명의 모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그분 손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천사 가브리엘과 주고받던 대화의 결론은 ‘예!’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는 언제나 순명을 요구하십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 조차도 번제물로 바칠 정도로 순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 역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겸손 가득한 마리아의 순명에 대한 하느님의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거처하시는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 성전이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끊임없이 살아계시는 계약의 궤로 재탄생합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초대,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느님의 초대였지만, 기꺼이 응답한 마리아로 인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 32-33)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지극히 간단한 선언같지만,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닌 포스가 엄청납니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이나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같이 장엄합니다.
마리아의 적극적인 동의와 협조로 인해 이제부터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왕국이 건설될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어, 그 시간을 끝없이 연장시키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건설될 왕국은 종래의 지상 왕국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영원한 왕국, 불멸의 왕국이며,
그 왕국의 장엄한 광채 앞에 지상의 왕권은 빛을 바랠 것입니다.
새롭게 왕좌에 좌정하실 왕은 만왕의 왕이 되실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지니실 통치권은 한계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하고 장엄한 인류 구원 사업의 첫 출발점은 바로 마리아의 ‘Fiat’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강론>
(2025. 3. 25. 화)(루카 1,26-38)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6-38).”
1)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홉 달 뒤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메시아 강생은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첫 인사말이 “기뻐하여라.”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누리고 있는 ‘은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하고, ‘메시아 강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마태오복음을 보면, 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22-23).”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마리아하고만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하고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 하느님께 다가가신 분이고,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라는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리아를 선택하셨음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즉 마리아의 신앙생활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데, 사람들이 받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고 온 삶으로 잘 받는 사람이 그 은총을 제대로 받아서 누릴 수 있습니다.>
3) ‘메시아 강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나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받아 주셔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4)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에 있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 라는 천사의 말은, 원래는 동정녀의 성령 잉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 속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5)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저런 나쁜 놈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가족이든지, 친구든지, 누구든지 간에......
정말로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지 않는 한.
(전주 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