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과 ‘환생’
1990년대 중반에 전생과 환생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높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주제로 하는 서적들이 여러 권 출판되면서 꾸준한 관심을 모았고, 이와 관련된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도 많은 인기를 끌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최면을 걸어서 환자의 전생을 알아내어 치료한다는 정신과 의사도 있었습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나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도 전생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생 신드롬’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전생이라는 용어는 원래 불교의 윤회설과 관련된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삶이 단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고 믿습니다. 전생에서 착하게 살던 사람은 다음의 생에서 고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악하게 살던 사람은 비참한 처지로, 혹은 동물로도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업보를 다 청산한 사람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윤회론의 주안점은 전생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캐묻는 데에 있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서 좀 더 착하게 살아서 다음 세상에서는 더 훌륭한 사람으로 태어나자는 데에, 궁극적으로 해탈하자는 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윤회설은 전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전생 증후군’은 단지 과거에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다면 ‘전생 증후군’은 겉으로는 불교의 윤회론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윤회론의 본래 의도와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전생이라는 과거에 집착하는 전생 증후군은 현실 도피적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현실 도피적 경향은 전생 증후군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1990년대 초반에 휴거를 주장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이들에게서도 이런 점이 발견됩니다. 그들은 종말이 곧 다가왔다고 확신하면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4장 16-17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때가 되면 자신들은 하늘에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처한 현실이 견딜 수 없이 힘들고 무겁다고 느끼는 사람들로서, 곧 다가올 세상 종말에 모든 것을 걸고서 자신의 가정, 학교, 직장까지도 포기하고 매달렸습니다. 미구에 닥칠 종말을 고대하면서 고단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전생 증후군’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 즉 전생에 관심을 쏟으면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생활이 뭔지 모르게 계속 꼬이게 되면, 그 원인을 현재가 아니라 전생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버거운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요구되는 성찰과 노력이 힘드니까 전생을 핑계 삼아 현실을 피해 보려는 것은 아닐까요?
한마디로 전생 증후군은 불안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어버리려는 몸부림입니다. 이런 태도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 덜고자 진통제를 먹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통제는 치료약이 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피하지 말고 꿋꿋하게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꿀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진정한 치료약일 것입니다.
전생 증후군의 뿌리인 윤회설은 그리스도교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곧 죽음을 넘어서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에 행한 공로와 저지른 잘못에 상선벌악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윤회설은 반복되는 삶을 통해서 과거의 업보를 온전히 자신의힘만으로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분명 그리스도교 신앙과 다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단 한 번 걷고 난 다음 하느님 앞에서 그 길에 대해 셈을 바치게 된다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칩니다.
흘러간 강물은 다시 거슬러 올라오지 않듯이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단 한 번뿐이기에 매 순간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보내야 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이며, 지상 생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현하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시간의 끝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13항)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히브 9,27)이라는 성경 말씀대로 인간은 지상 생활을 마감한 다음에는 다시 지상 생활로 돌와오지 못하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윤회나 죽음 뒤의 환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윤회설이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것은 숫자나 자료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결국 결단의 문제입니다. 성경을 신앙생활의 바탕으로 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윤회설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윤회설에서는 전생의 업보가 원인이 되어서 현재의 결과고 나타나고 현재의 업보가 다음 세상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께서는 과거의 잘못을 무상으로 용서하고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먼저 죄에 대한 보속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으니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실 뿐입니다.(요한 8,11)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죄와 잘못을 다 청산하기를 기다렸다가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무상으로 용서해 주시면서 새롭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로써 인간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거듭 주시는 하느님과 과거의 업보를 철저히 자신의 힘으로 청산해야만 하는 윤회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으면서 윤회설을 추종할 수 없고, 더구나 확실하지도 않은 전생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과거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성경은 환생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성경과 성전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자인 가톨릭교회는 환생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성경에 근거도 없고 교회가 거부하는 환생설에 휩쓸리지 말고 한 번뿐인 인생을 깨어서 충실히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마르 13,33-37; 마태 25,13; 요한 9,4; 에페 5,16; 콜로 4,5)
현대 세계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위기의 상황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결단을 통해서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역경에 직면해서 한 가정이 망가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족 간의 결속을 이전보다 더욱 공고하게 다질 수도 있습니다. 강한 바람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나무뿌리가 땅에 더 깊게 뿌리를 내리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위기를 호기로 바꾸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