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익운(沈翼雲)은 세상에 보기 드문 재사(才士)이다. 그의 아비 심일진(沈一鎭)은 범상한 사람으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이는 상운(翔雲), 둘째는 익운(翼雲), 막내는 영운(領雲)이다. 서로 스승이자 벗이 되어 모두 시문을 잘했는데 심익운이 가장 뛰어났다. 심상운과 심익운은 다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하였는데, 가문의 허물로 인해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심익운은 이를 분통해하여 마침내 한 손가락을 잘라서 세상과 인연을 끊을 것을 맹세하였다. 그 뒤로 그의 시는 더욱 격정이 넘쳐나고 까다로워져 원망하고 불평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그의 재주를 아끼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동정하였다. 그런데 끝내는 심상운의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濟州)로 귀양 가서 죽었고 심상운은 처형되었다. 정조(正祖)가 인재를 사랑하고 양성하여 아무리 사소한 재능을 지닌 자라도 모두 등용되었는데, 유독 심익운 형제만은 자신의 재주를 과신(過信)하여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화를 당한 것은 실로 자초(自招)한 것이었다.
대체로 덕(德)을 넘어서는 재주는 반드시 자신에게 재앙을 가져온다. 이가환(李家煥)은 노긍(盧兢)을 꺼렸고 노긍은 심익운을 꺼렸는데, 이가환의 박학다식에는 노긍이 미치지 못했으나 학문의 조예는 이가환을 능가하였고, 심익운의 재주는 또 노긍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이가환은 사학(邪學.천주교)을 신봉한 역적죄로 처형당했고, 노긍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돌아왔으나 끝내 굶주림 속에 죽었으며 심익운 역시 귀양 가서 죽었으니, 모두 자신의 재주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심익운은 평소 나와 교유가 없었는데 김배와(金坯窩.김상숙)의 처소에서 나의 《역송(易頌)》을 보고는 그에 대해 매우 높은 평가를 했었다. 나 역시 그의 《역찬(易贊)》을 기억하는데, 비록 《역(易)》을 안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문장은 매우 뛰어나 세속의 선비가 지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註: 심익운(1734~1783)은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모역에 걸린 고조부 심익창의 후손이라 하여 청환직(淸宦職)에 서임될 수 없다는 소론의 반대를 받았다. 그가 이를 비관하여 손가락을 자른 것은 패륜행위라고 탄핵되어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심익운의 시 <定情歌[마음을 가라앉히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一波纔過一波生 夜靜無風浪始平 慾界河沙淘不盡 箇中難得十分淸 / 한 물결 지나면 또 한 물결 생기고 고요한 밤 바람 잦아드니 물결 잔잔하다. 냇가의 모래 같은 욕심은 끝이 없어 그 가운데 십분 맑음을 얻기 어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