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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2. 19. 오늘의 양식 : 구약 예언서의 해석
삶의 터전에서 드리는 예배
표어 : 오직 예수. 재림 신앙. 땅끝 선교
1. 예배의 선포----------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를 드리는 데 방해가 없도록 합시다. ------------
2. 찬양과 경배---------- 243 저 요단강 건너편에
295 큰 죄에 바진 나를
121 우리 구주 나신 날 --------------------------------------------
3. 신 앙 고 백---------- 사 도 신 경--------------------------------------------------------
4. 찬 송---------- 370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5. 기 도---------- 주의 나라를 위하여
주의 동력자를 위하여
예배자를 위하여 ---------------------------------------------------
6. 하나님 말씀---------- 고린도전서 15 장 3 – 8 절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7. 설 교---------- 요한계시록
1] 구약 예언서의 해석
예언서를 읽으면 어렵다고 한다. 그 까닭은 예언에서 미래적인 요소를 발견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서가 누구를 위하여 쓰인 책인지를 생각하면서, 이스라엘 당시대의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것이다.예언의 사전적인 개념은 앞에 되어질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모든 예언서의 관점은 매우 현실적이다.
즉, 예언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민족에게 멸망 당하기 직전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식이 강하게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언이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애절하게 회개를 부르짖는 선지자들의 외침인 것이다. 그들이 비록 미래의 일을 말하고는 있어도 그것은 먼 훗날의 인류를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당장에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위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긴장감 넘치게 외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언은 일차적인 의미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일차적으로는 선지자들의 활동 당시라고 할 수 있는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대왕국 백성들에게 절박한 심판과 회개 촉구의 메시지이지만, 이로부터 영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교훈을 남기며, 궁극적으로는 인류 최후의 심판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여야 한다.
2] 선지자들의 시대적 배경
최초의 선지자를 모세라고 말한다. 그는 율법시대를 연 주인공으로서 후대의 선지자들과는 다른 형태의 사역을 하였다. 왕국 분열 이전까지 몇 명의 선지자들이 등장하지만, 사역이 활발하지는 않았다. 실제적으로 선지자들이 활발하게 사역하기 시작한 것은 왕국이 분열된 이후부터이다. 특히 북 이스라엘의 7대왕으로 아합왕 시대인 B.C. 850년경 활약한 엘리야 선지자는 후대 선지자들의 선배격으로 유명하다.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B.C. 760경부터 400년경까지 삼사백 년간의 기간은 선지자들이 가장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이다. 북 이스라엘 말기(末期)에 호세아 선지자와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북 왕조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 시절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던 때부터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빈부의 차이는 심해졌다. 또 종교사회적으로는 지도자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도덕이 문란하였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형식적인 신앙만이 존재하였다.
북 이스라엘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드실 때가 되었다. 호세아와 아모스선지자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적국이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에도 요나 선지자를 보내어 심판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니느웨는 금식하고 회개하였는데, 이스라엘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 남 유다에서는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였다. 남 유다 역시 히스기야 왕 전후에 솔로몬 시대를 능가하는 제 2전성기를 누렸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형식적 종교 행위로 인하여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유대주의적 문화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사야가 열심히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희망을 잃어갔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 나훔 선지자를 보내어 심판을 선포하시는데, 이는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나타내셨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남조 유다 왕국도 결국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고 만다. 요시야 왕부터 시드기야까지 예레미야와 하박국, 스바냐 선지자가 활약하였다. 이때는 유다의 격동기라고 할 수 있었는데, 선지자들은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지금 당장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자고 부르짖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여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선포하다가 매국노의 누명을 쓰기도 하였다.
남 유다마저 멸망 당했을 때, 북 이스라엘은 이민족의 이주 정책으로 혼합되어 단일민족의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사마리아 족이 되었다. 그래도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었다. 그제야 유대인들은 깨달았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율법을 저버리며 우상숭배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에게 남은 것은 나라를 빼앗기고 온 세상을 떠도는 거지와 같은 모습이 된 자신들의 실체를 알았으나 제사장과 서기관을 비롯하여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자들과 백성 중에서도 유능한 사람들은 모조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빼앗긴 땅 팔레스타인에 남은 자들은 힘없고 소외된 백성들뿐이었다. 그때 거기 남아서 활동한 선지자는 요엘과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면서 유다가 언젠가 회복될 것을 예언하였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도 선지자가 있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활동하였는데, 에스겔과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꿈의 해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었다. 에스겔은 많은 환상을 통해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야 왕국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새로운 성전의 개념과 새로운 예배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무엇인지 환상을 통해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포로 귀환 시대에 활약한 선지자들이 있다. 바사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다 민족에게 본토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바사 제국 시대에 세 번에 걸친 귀환이 있게 된다. 1차 귀환 때는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이 급하였다. 이때 활약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이다. 1차 귀환을 영도한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로 성전을 짓던 중 아닥사스다 1세 때 방해로 중단되었다. 다리오 1세 때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다시 중건되어 마침내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된다.
2차 귀환은 에스라가 영도하였다. 그는 유다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율법 회복과 이방 족속과의 혼인을 금지 시킨다. 돌아온 유다 족속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감행하였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이 율법적인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3차 귀환은 느헤미야가 영도하였다. 그는 종교 지도자라기보다 정치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고 유다 왕국이 회복되기를 강하게 소망하며 에스라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회복에 앞장섰다.
끝으로 말라기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새 성전을 짓고 율법을 회복하며 하나님께 일시적으로 순종하다가 또다시 그 열정이 식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곧 타락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그 후 신약 시대까지 선지자는 더 이상 없었다.
3] 예언의 형식
예언을 성경의 한 문학 장르로 이해하기 위하여 어떤 형식이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문학 양식을 채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예언이 소송(Lawsuit)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예언의 형식이 마치 소송을 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피고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소환되고, 이어서 그들의 죄악에 대한 고소장이 낭독되면서 증거로서 죄악의 모습이 낱낱이 고발된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심판을 언도하시는 것으로 완결되는 형식이다.
사 3: 13-26을 보면, 13-14절에서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라는 말씀은 법정이 소집되고 유다 족속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는 장면이다. 14절 하반절부터 16절까지 고소장이 낭독되고 증거들에 의해 유죄가 입증된다.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결국 하나님은 유죄인 그들에게 17-26절에서 심판을 선고한다.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언약에 명시된 질병과 기근과 결핍과 죽음 등 온갖 종류의 형벌이 그들 위에 내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소송이라는 비유적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유다 민족이 극심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전하는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 소송예언은 호 3: 3-17과 호 4: 1-19 등이 있다.
(2) 화(Woe) 예언의 형식이다.
화(禍)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이나 죽음에 직면하여 슬퍼하며 ‘화로다’라고 외치던 언어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아는 화의 개념을 통해 임박한 멸망을 예고함으로써 곧 얼마나 심각한 상태가 올 것인지 누구나 알아차리도록 만드셨다. 이 형식에서는 화의 선언과 화의 원인, 화의 임박한 예고의 세 가지 요소로 특징지어진다.
미 2: 1-5를 보면, 1절에서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화를 선언하시는 내용이다. 그리고 2절에서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라는 말씀은 화의 원인이다. 다음 3절의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부터 5절까지는 화가 임박하였음을 예고하시는 내용이다. 그밖에 합 2: 6-8이나 습 2: 5-7도 화 예언으로 되어있다.
(3) 약속(Promise)으로 된 예언이다.
이는 구원의 약속을 의미로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먼저 미래에 대하여 어떤 날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 날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며, 끝으로 축복을 약속한다.
암 9: 11-15을 보면, 11절에서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라고 할 때 ‘그 날’이 언급된다. 다음은 11절과 12절에서 다윗의 퇴락한 장막을 일으키고 에돔의 남은 자와 만국을 기업을 얻는다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13-15절에서 축복의 상징인 생명과 건강, 경제적 번영과 농산물의 풍성한 수확, 존경과 안전과 보호 등이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그밖의 약속 예언으로는 호 2: 16-22나 사 45: 1-7, 렘 31: 1-9 등이 있다.
4] 예언의 근거
선지자들은 어떻게 예언하게 되었는가? 즉, 예언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계시하시거나 혹은 꿈과 황홀경 등을 통해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예언을 말하게 하셨다. 즉,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들과 접촉하셔서 하나님의 비밀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신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한테서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조차 거짓 예언과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온다. 렘 14장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면 예언의 근원이 되는 각각의 방법들은 어떤 특징을 가졌으며,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언의 근원은 말씀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 재료로부터 나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거나 아니면 환상을 봄으로써 예언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방법은 다시 직접 계시를 통한 방법과 무의식 상태에서 주시는 방법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직접 계시(Revelation)는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직접 접촉하여 받는 것이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다. 또한 그 원천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제일 중요하게 여김을 받는다. 선지자들은 대부분 의식상태(Conscious)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말씀을 듣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그들에게 임하여 예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하 20: 1-6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기도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표현은 선지자들에 의해 빈번하게 사용되는 문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 상태에서 뿐 아니라 무의식 상태(Unconscious)에서도 주어졌다. 무의식 상태는 수면 시에 꿈(Dream)을 꾸는 상태를 말한다. 민 12: 6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꿈으로 말씀하기도 한다고 하셨다. 창 20: 2-6에서는 블레셋 그랄 왕인 아비멜렉이 모르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꿈에서 그에게 죽음을 경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환상(Illusion)을 봄으로써 비밀을 깨닫고 예언하는 경우로 환상이란 실제가 아닌 어떤 환영(幻影)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상(異像)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환상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보는 것과 무의식상태에서 보는 것으로 구분된다. 많은 경우 환상은 꿈속에서 주어졌다. 꿈은 수면을 취한 상태에서 무의식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구약의 요셉과 다니엘은 꿈속에서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도 많은 선지자가 환상을 통하여 예언하였다.
마지막은 황홀경(Ecstacy)을 통하여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경우이다. 황홀경이란 수면을 취하지 않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무의식 세계로 빠져들어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아지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겪은 황홀경은 보통의 경우처럼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비합리적 방법으로 날뛰는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홀경 상태에서 그들은 오히려 정신력이 상승했으며 영적 능력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바울 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홀연히 빛과 소리로 임하신 주님을 만날 때 다른 사람들은 뇌성치는 소리와 번쩍이는 빛만 보았다. (행 9: 7, 행 22: 9). 바울은 분명한 의식 속에서 하늘로부터 비취는 빛을 보고 또 주님의 음성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는 황홀경 상태에서 주님을 만난 상황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참된 예언이 있으며 참된 선지자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참된 선지자와 참된 예언이 있다면 그들의 말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이므로 성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히 1: 2에서 ‘이 모든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주님의 사역이 완성됨으로써 종말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큰 범주의 종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완성된 성경을 통해서 아들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예언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다. 예언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면 성도들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전 14: 1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며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지금도 예언이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자신이 직통 계시를 받는다고 속이는 자들도 여기저기에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그러한 속임에 넘어가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언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언의 은사는 선지자들처럼 예언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말을 너도나도 하고 있다면 성도들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지겠는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예언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네비임이 토라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8. 기 도 ---------- 받은 은혜와 귀한 사명을 통하여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자가 되기 위하여 ------------------------------
9. 찬 송 ---------- 243 저 요단강 건너편에 -------------------------------------------
10. 폐 회 ---------- 주기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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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