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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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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지구촌교회 김인환 담임목사. ⓒ광교지구촌교회 |
작년 이맘 때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뉴스가 하나 있습니다. 군사독재시절 고문기술자였던 이근안씨가 목사가 된지 3년여 만에 면직처분을 받고 목사직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고문기술자였던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논란이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었던 고 김근태씨의 별세로 인해 분노로 바뀌면서 결국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 씨의 목사 직분을 박탈한 것입니다. 징계위원회의 한 목사님은 이근안 씨가 목사로서 품위와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렸으며 겸손하게 선교하겠다는 약속도 어겼다고 판단해 이 같은 징계를 내렸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근안 씨의 목사 면직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를 말하기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바라보면서 제 마음 속에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는가?’라는 고민이 더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주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울이라 불리었던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무려 13권의 책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벗어나 땅 끝까지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아마 천국에 가면 바울로 인해 복음을 듣게 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더 위대한 것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도 그는 늘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이라 불리었을 때 그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악독해도 그처럼 악독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까요? 아니 어떻게 주께서 그런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바로 오늘 본문이 기록된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던 중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께서 그를 변화시켰고 그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쓰실 수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은 안 돼’ 하는 사람 마저도 하나님은 쓰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은혜로 일꾼을 세우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천국에 가면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는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안 왔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안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왔다는 것이고, 셋째는 자신이 왔다는 것에 놀란 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열등감이라는 존재와 동행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요즘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혜민 스님께서 지난 11일 방송된 MBC의 ‘기분 좋은 날’에서 키가 작아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키가 171cm입니다. 이에 많은 네티즌들은 “스님도 열등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 인간적이어서 좋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왜 이러지”라는 질문을 갖고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열등감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은 데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죄만 짓고 사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실망하며 더 큰 열등감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교회에서의 봉사를 부탁할 때 우리는 손사래를 치면서 “저는 아직 아닙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에요.”라며 물러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보시죠.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실 때 자격 없는 사용하십니다. 자격이 있어서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만약 자격이 되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본문에 나와 있는 사울이야말로 배제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막 회심을 하고 초대 그리스도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장 극악한 방법으로 박해했던 박해자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 보세요.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의 잔인함이 느껴지십니까? 여기서 ‘잔멸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뤼마이노마이’라는 단어 인데 포도원에 뛰어든 멧돼지가 포도원을 마구 짓밟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드는 모습을 묘사한 말입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짓밟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1-2절 보세요.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왜 사울이 다메섹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습니까? 예루살렘교회를 짓밟는 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아 그는 예루살렘에서 무려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찾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을 주께서 사용하신다!’ 이게 말이 됩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쓰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을 쓰셨습니다. 왜요?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주께서 부르실 때, 그 은혜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나 같은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버티지 말고, 나 같은 사람도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의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주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동기부여 연설가이자 작가인 찰스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 두 가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
여러분은 매일 누구와 만나십니까?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도 만족할 수 없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동네에 뛰어 들어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아니 평생 돈만 알았던 삭개오가 어떻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속아 빼앗을 것을 네 갑절이나 갚는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의 변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주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핍박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요? 그의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학벌이 좋고 능력이 많아도 예수를 만나 인생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 한 주께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적으로 보면 누구보다도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학벌이 없었습니까? 그에게 열심히 없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의 이력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3장 5-6절 보시죠.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흠이 없는 자라’ 그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많은 능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예요.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니 예수께서 구주이시오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그는 주께 쓰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를 모조리 잡아 죽이기 위해 가고 있는 다메섹의 여정에서 그는 주님을 만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비추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태양보다 밝은 빛 가운데 들려오는 음성.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세계적인 강해설교가인 아지스 페르난도는 이 구절을 “NIV적용주석”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로부터의 빛과 사울의 이름을 부르는 상황을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이 주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에요? 사울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즉시 엎드려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주님이 누구이셨습니까? 바로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들려오는 분명한 음성,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니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구나! 예수님이 주인이시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누가 주인이십니까? 예수께서 주인이시라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 내어 드려야 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주인 되어 우리의 생각대로 일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박해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만나기 전 열심을 냈던 사울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 주님의 뜻대로 섬긴 바울의 모습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주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주인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대로 봉사와 사역을 결정합니다.
자,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보실까요? 본문 8절 보세요.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수동적입니까? 예전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밀어부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무기력하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에요. 본문 9절 보세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금식을 합니다. 보지 못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지만 금식은 사울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금식을 한 것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에게 금식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면 이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할 때 금식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사울이 사흘간 금식한 것은 철저히 자신을 죽이며 회개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제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온전히 드려질 수 있도록 자신의 옛 모습을 철저히 죽이기 위해서 회개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재철 목사님은 “사도행전 속으로”라는 책에서 독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김칫독을 쌀독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독 안에 든 김치를 모두 비워 내고 독 안을 깨끗하게 씻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김칫독을 쌀독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김치를 비워 내고 물로 씻은 뒤에도, 상당 기간에 걸쳐 독 안에 배어 있는 김치 냄새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칫독이 완전히 죽어야 쌀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칫독이 완전히 죽어야 쌀독으로 거듭날 수 있듯이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아야 주께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생각해 보세요. 교회 좀 다닌 사람 중에 “예수님이 주인이시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는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되신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주인되신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요? 왜 자꾸 옛 사람의 모습으로 봉사하고 사역하고 성도들을 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일을 하기 전에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철저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하는 스타일과 생각과 가치를 예수님의 스타일과 생각과 가치로 바꾸어야 합니다. 아니 날마다 사도 바울이 바울 되어서 고백한 고백을 드리셔야 합니다. 그 고백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믿음을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안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옛 사람입니까? 우리의 옛 사람이 아직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탁월하고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주께서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옛 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열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제네바에 살 때 이야기입니다. 제바에 사는 동안 태풍이 지나간 다음 산책을 나가면 강변 길을 따라 뿌리째 뽑여 나자빠진 나무들을 여기저기서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무의 공통점은 뿌리의 길이가 고작 50cm 정도에 불과하답니다. 그 정도의 얕은 뿌리로는 높이 20m가 넘는 거목이 태풍 앞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목사님은 그때 소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여전히 자기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나무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들은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태풍을 만났지만, 그 태풍을 이기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뿌리째 뽑혀 쓰러진 나무들보다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뿌리가 중요합니다. 기초가 중요합니다. 그 뿌리가 깊숙이 박혀 있어야 태풍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나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주인이시다. 예수가 내 삶의 구주이시고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뿌리는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 것일까요? 혹시 조그만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며 뿌리째 뽑히는 나무는 아닐까요? 예수가 주님이십니다. 그 신앙 고백의 뿌리가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 나무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견고한 나무가 되어 주께서 마음껏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