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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6.08.10
민주노총이 함께하는 자주통일평화연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이 2026년 5월7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2 안보대화를 반대하는 각계선언을 발표했다. 이날 한일 양국은 차관급으로 격상된 외교・국방 당국 간 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한다. 회의에서는 한미일 3국 협력의 토대가 될 한일 안전보장 협력, 한국군과 자위대 간 협력 등을 주요하게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 민주노총 )
지난 4일 일본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정부가 출범 뒤 처음 발간한 「2026 방위백서」에서 “일본을 둘러싼 엄중한 안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외교·방위·경제·기술·정보력 등을 종합한 국력을 강화해야 한다 (중략) 정부는 올해 안 ‘안보 3문서’ 개정을 위한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의 안보 3문서는 ‘국가안전보장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을 말하며, 일본의 외교·방위 정책 방향을 규정하는 핵심 지침이다. 2013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 정권이 처음 제정했고, 2022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내각에서 개정되어 반격능력 보유 등을 명시하면서 체계를 갖췄다.
일본은 이번 ‘안보 3문서’ 개정을 통해 무인기(드론)와 인공지능(AI) 활용 등 최근 중동과 우크라이나 새로운 전쟁 방식 변화에 대응하고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큰 폭의 군사력 강화를 노리고 있다. 더불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2% 목표도 조기 달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리고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주장했다.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억지 주장은 22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일본 방위백서 지도에 독도(‘竹島’로 표시됨) 주변이 일본 영토임을 의미하는 파란색 실선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림출처 : 경향신문)
일본은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근원적 책임자이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하지 않았다면, 패전국도 아닌 우리가 전쟁과 분단을 겪을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또한 일본이 한반도를 35년 동안이나 유린하고, 조선인과 아시아인 2,000만을 학살하고도 전쟁범죄에 대한 일말의 사죄도 없이 오늘에 이른 것은 미국을 등에 업고 한반도 분단체제에 기생해왔기 때문이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인정도, 사죄도, 배상도 할 수 없다는 일본과 공조를 부르짖고 있는 이재명 정부는 제정신 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일정상회담을 7차례나 한 이재명,
역사정의는 역행하고 일본의 재무장만 정당화해
2025년 6월 4일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1년이 조금 넘은 지금까지 한일정상회담을 7차례나 열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9개월 동안 무려 네 차례나 마주 앉았다. 1차 회담은 작년 10월 30일 경북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뤄진 정상회담이었다. 두번째는 올해 1월 13일,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일본 나라현이었고, 1·2차 정상회담 중간인 지난해 11월 남아프리카공화국 G20 정상회의에서 양 정상은 약식으로 회담한 바 있다. 4차 회담은 5월 19일 이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가졌다.
그리고 다카이치 총리 출범 이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총리와의 세 차례 정상회담을 포함하면, 이재명 정부는 지금까지 일본 정상을 무려 일곱 차례나 만났다.
이 과정에서 이재명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 대한 민(民)의 염원은 안중에도 없고 일본이 요구하는 한일군사협력, 한·미·일 협력만이 거론됐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위한 일방적이고 굴종적인 정상회담이었다. 특히 역사정의는 외면하고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강제동원,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승소 판결 이행 문제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지난 5월 19일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된 이후 5월 20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발표한 입장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이 요구해 온 진정한 사죄와 법적 배상을 거부한 채 역사왜곡과 부정을 반복하고 있다.
이번에 합의된 조세이탄광 희생자 유해 DNA 감정 절차 추진은 늦었지만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랜기간 정부 지원 없이 민간에서 어렵게 인양한 유골에 대해서만 한정되어 있는 미진한 조치이며, 이것이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국가 책임 문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역사정의의 핵심은 단지 일부의 인도적 조치가 아니라, 피해 사실에 대한 인정과 진정성 있는 사죄, 법적 책임 이행에 있기 때문이다.
(중략)
다카이치 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미일 동맹·한미동맹의 전략적 연계를 언급하며 한일관계를 미국 중심 인도·태평양 안보 질서의 한 축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과거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과 책임 이행 없이 질주하는 군사패권화 움직임이다. 이는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자 역사정의에 대한 역행이다.이렇게 일본이 ‘전쟁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안보·군사협력 강화를 추진하는 것은 일본의 재무장을 정당화하고 피해자들의 존엄과 권리를 다시 한 번 뒤로 밀어내는 일이다.”
일제의 전쟁범죄는 무자비하고 엽기적이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저질렀던 학살과 전쟁범죄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했다. 아니 엽기적이었다.
야만적인 무단통치에 맞서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을 되찾자는 전 민족적 반일 애국 항쟁인 ‘3·1혁명’으로 일제의 총검에 희생된 사람은 최소 칠천 명이며 구속자 역시 오만 명에 육박했다.
일제의 태평양전쟁 광기에 수많은 조선 청년이 군인과 노무자로 강제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과 폭력 속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또 조선의 여성들은 여자정신대근무령에 따라 노동력은 물론 이려니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아야 했다.
특히 일제는 창씨개명과 쌀을 강제 공출했고, 전쟁물자 동원을 위해 사찰의 종과 제기, 놋그릇 등도 빼앗아갔다. 교육과 대중문화까지 전쟁 도구화되고 학교는 병참 기지화됐다. 그뿐 아니라 일제는 조선인 포로와 죄수를 731부대로 끌고 가 잔인한 생체실험까지 했다.
소설가 조정래는 대하소설 『아리랑』에서 일제의 만행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믿을 수가 없어서 써 붙인 글이라고 한다.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00여 만! 200자 원고지 2만 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
조정래가 200자 원고지 2만 매를 쓴다면 쓸 수 있는 총글자 수는 400만 자이다. 이는 36년 동안 희생된 조선 민족의 숫자와 같다. 그는 고통 속에 숨져간 영혼들의 수에 비해 자신이 쓰는 글의 분량이 터무니없음을 괴로워하며 자신을 의지를 위해 남긴 경고문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강준만의 『한국근대사 산책 ⑩권: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인물과 사상사, 2008)에서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 하종문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을 ‘학살극’이라 주장했다.
“15년의 침략전쟁 기간에 가해자인 일본에서는 3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아시아 각지에서는 무려 2,0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찌 보면 1945년 8월 15일까지 15년간은 전쟁이 아니라 차라리 ‘학살극’이라 부르는 게 나을 성싶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오랜 기간 국내외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였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국외 중국과 소련 접경지역에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창설되거나 싸우고 있었고, 국내에도 해방을 준비해 온 세력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일본 내의 민족운동 진영과 미국의 한인 단체들도 있었다.
국외 항일 무장세력으로는 대표적으로 김구(1876~1949)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 김두봉(1889~1958. 추정)의 화북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김일성(1912~1994)의 만주 동북항일연군(제 88국제여단) 등이 있었다.
또한 국내에는 여운형(1886~1947)이 1944년 8월 결성한 건국동맹과 이재유(1905~1944), 이관술(1902~1950), 박헌영(1900~1956)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그리고 노동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재유는 형 만기 이후에도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않아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였고, 이관술은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박헌영은 은신 중이었다.
해방은 되었건만 고국으로 가는 길은 미국과 소련의 방해로 험난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서울 시내 각처에는 ‘금일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必聽)’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일왕 히로히토는 정오에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과 전쟁 종결을 선언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튿날 독립운동가, 정치범들이 석방되고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먼저 여운형은 8월 15일 밤, 건국동맹에 기반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킨다. 건준은 창립 보름 만에 전국 145개 지부가 건설된다.
여운형은 해방 다음 날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해방 직후 첫 대중 연설을 했다.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은 사실을 알리고, 흥분과 혼란을 가라앉히며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중략)
세계문화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대학, 전문, 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는 해방된 지 석 달 만에 환국한다.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까닭에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통보하면서 임시정부 귀국 지원 조치는 15인승 비행기 1대뿐이었다. 이 때문에 주석과 부주석인 김구와 김규식(1881~1950)을 비롯한 15명이 11월 23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과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1877~1946) 등은 12월 1일 김포 비행장이 아닌 전라도 군산비행장에 도착하여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더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의 환국을 알리지 않았던 탓에 환영인파조차 없었다.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회’가 15만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홍명희(1888~1968) 환영사에 김구가 답사를 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3·1대혁명의 민족적 대유혈투쟁 중에서 산출한 유일무이한 정부였습니다. 그야말로 전 민족의 총의로 조직된 정부였고 동시에 왜적의 조선통치에 대한 유일의 적대적 존재였습니다.
우리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전민족으로 총단결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에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데 있습니다.
(중략)
우리동포들은 3·1대혁명의 전민족 총단결 총궐기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발양해서 우리의 독립주권을 찾고 자주평등행복의 신한국을 건설합시다.”
김일성과 항일연군은 소련 군함 푸가초프 호를 타고 9월 19일에 원산으로 들어왔다. 소련이 중국국민당 정부와 우호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소련 측의 반대로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귀국하지 못했다.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군중대회’가 평양역전에서 30~40만이라는 해방 후 최대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개최됐다.
이재명은 과거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삼전도의 굴욕’ 발언으로 굴욕외교를 질타!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빼앗았으나 수많은 항일지사와 대중은 암흑 같은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불굴의 항쟁으로 국내외에서 만세 운동, 무장 투쟁, 비밀결사 조직 등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자주독립의 의지를 지켰다.
시사만화가 박시백이 『일제강점사 35년』에 쓴 작가의 말이다.
“일제 강점 35년의 역사는 부단한, 그리고 치열한 항일투쟁의 역사다. 비록 독립을 가져온 결정적 동인이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임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설명은 무지 혹은 의도적 왜곡이다.
자학이다.
우리 선조들은 한 세대가 훌쩍 넘는 3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줄기차게 싸웠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국경을 넘었고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삼원보, 룽징,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 모스크바, 베이징, 상하이,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 워싱턴, 파리….
총을 들었고, 폭탄을 던졌으며, 대중을 조직하고 각성시켰다. 그 어떤 고난도,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들이 있어서 일제 식민지 35년은 단지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움을 간직한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박시백은 앞의 책에서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로, 친일부역자는 친일부역자로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대의 요구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그들의 정신, 그들의 투쟁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반한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그들의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집안을 일으켰다. 나아가 해방 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뿐인가.
민족교육인이니 민족언론인이니 현대문학의 거장이니 하는 명예까지 차지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로, 친일부역자는 친일부역자로 제 위치에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빛의 항쟁’ 이후 새롭게 탄생한 이재명 정부는 일본과 굴욕적인 외교로 선열과 수많은 항일지사와 민중을 욕보이고 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과거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인 2023년 3월 6일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안 발표 당시 “삼전도의 굴욕에 버금가는 외교사 최대 치욕이다.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를 짓밟는 2차 가해이자 대법원 판결에 배치되는 폭거이다. 이 정부는 어느 나라 정부냐”며 강하게 비판했었다.
이후 이 재명 당 대표는 3월 13일 최고위원회의에서도 3월 16~17일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강하게 질타했다.
“강제동원 배상, 후쿠시마 오염수, 수출규제까지 바로잡아야 할 현안이 그야말로 산적하다.
조공목록 작성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다. 특히, 일본에게 군사협력에 관한 백지수표를 상납한다면 대한민국의 앞날에 두고두고 큰 화근이 될 거라는 점을 경고한다.
(중략)
정부의 굴욕적인 배상안은 일본의 통절한 사죄와 반성에 기초했던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아니라 돈 몇 푼에 과거사를 팔아남겼던 김종필-오히라 야합의 재판”
‘국민주권정부’다운 자주외교로 맞서라!
광복 81주년, 아직 이 땅의 주권은 회복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내정간섭과 경제약탈, ‘대중국 전쟁기지화’는 선을 넘었고 일본과는 한일 군수지원협정(ACSA)이 논의되면서 ‘강도 원수’와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은 2016년부터 군사정보를 주고받는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맺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미사일 관련 정보 등을 함께 보고 보호하는 협정이다.
지소미아가 ‘정보’를 나눈다면, 군수지원보호협정은 ‘물자와 서비스’를 나눈다. 즉 군사정보보호협정은 한일 양국 군이 연료와 탄약, 수송, 정비 부품 등 각종 군수 물자를 서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된다는 것은 일본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하고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는 일이 된다.
‘철천지원수’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지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다가오는 8·15경축사에서 제대로 된 자주외교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경고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라.
‘국민주권정부’다운 자주외교로 맞서라!
무엇이 두려우냐!
정신 차려라!
민(民)의 엄중한 경고임을 직시하라!!!
이육사(1904~1944, 본명 이원록)가 절규하던 초인이 81년이 지나도록 ‘광야’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해 울부짖고 있다.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