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 노숙인 쉼터 '행복한 우리집'의 식당 벽에 붙어 있는 시(詩)가 있다. 제목은 '집시의 기도', 부제(副題)는 '충정로 사랑방에서 기거했던 어느 노숙인의 시'다. 쉼터 관계자는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한 시"라고 했다.
'집시의 기도'는 화자(話者)가 노숙하는 신세를 한탄하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노숙인 김모(68)씨는 "밥 먹을 때마다 (시를) 쳐다보는데 '이 악물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 시는 10년 전부터 노숙인 관련 단체행사나 자료집에 자주 등장했다. 이걸 쓴 사람은 누구고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시인이 머물렀다는 '구세군 충정로 사랑방'은 2년 전 중랑구 망우동으로 이사 갔다.
구세군은 대방동·충정로·서대문을 거쳐 현재 망우동·서대문에 노숙인 쉼터 두 곳을 운영 중이다. 김도진(47) 사무국장은 "'집시의 기도'는 1998년부터 2001년 4월까지 우리 시설을 오간 장금(1949년생)씨가 쓴 것"이라고 했다.
장씨는 1999년 봄 이 시를 썼다. "98년 장씨가 사업이 망했다며 찾아왔어요. 160㎝ 정도의 키에 머리숱도 적고 이(齒)도 많이 빠진 왜소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그가 '집시의 기도'를 써냈어요. 모두들 글 솜씨에 놀랐습니다."
당시 '대방동 사랑방'에는 노숙인이 100명쯤 있었다. 그 중 30여명이 글을 끄적였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가 평소에도 한문이나 사자성어를 종이에다 쓰곤 했다. 이날도 장씨는 집시의 기도를 단숨에 써내려갔다"고 했다.
사랑방은 10여 년 전 상담기록을 폐기해 장씨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남아있지 않았다. 장씨는 1999년 10월 대방동 쉼터가 충정로로 이사 갈 때 떠났고 2년 뒤 다시 충정로로 찾아와 한 달간 지내다 또 나갔다고 한다.
김 국장은 "장씨는 본인을 '집시'라고 한 것처럼 얽매이는 걸 싫어했던 노숙인이었다"고 했다. 장씨는 쉼터를 떠나서도 남대문·서울역 등지를 돌아다니며 1년에 서너번 김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4년 전 연락이 끊겼다.
장씨의 흔적은 영등포 행복한 우리집에서 3분 거리인 또 다른 쉼터에서 발견됐다. '햇살보금자리 상담보호센터'에는 작년 3월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있던 장씨를 고시원에 차린 응급구호방에 옮긴 기록이 있었다.
작년 4월 2일 밤, 이 센터 병원동행팀은 탈진한 장씨를 부축해 지하철을 타고 제기동역 근처 동부병원 응급실로 데려가기도 했다. 장씨는 4월 3일 119구급대에 실려 보라매병원으로 갔다. 이 센터의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4/6 민윤찬 활동가가 김○○씨를 동행, 보라매병원에 다녀왔다고 하네요. 장금씨를 찾아갔는데 의식 불명인 상태라고 합니다. 4/14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계신 장금씨를 찾았으나 중환자실에 있기 때문에 면회 불가.'
마지막 면회를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는 동행팀 윤순택씨가 말했다. "장금씨가 '집시의 기도'를 썼다는 걸 모두 몰랐다. 그는 특별했다. 내게 가끔 아프리카나 세계평화 얘기를 해줬다."
그는 고시원 구호방에서 '노숙자라고 병원에서 천대받으면서 죽는 것보다 고시원에서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뜻을 윤씨에게 전했다고 한다. 보라매병원에서 기저귀를 찬 채 누워있는 모습이 윤씨가 마지막으로 본 장금씨였다.
보라매병원은 작년 4월 29일 시립 성인남성 부랑인 시설 은평의 마을에 장씨를 의뢰했다. 장씨는 작년 6월 1일 부천대성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은평의 마을 관계자는 "장금씨는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돼 벽제화장터로 갔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내용 증명을 보냈지만 아무 통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김 국장은 "4년 전 통화 때 '부산으로 가 아내와 살겠다'고 해 이 생활을 벗어난 줄 알았다"고 했다. 노숙 시인은 '집시의 기도' 한 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님 블로그에서 퍼옴...
첫댓글 암울했던 60~70년대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가 호의호식하던 얼마 되지않은 때에
한켠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이웃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온
요즘시대의 각박함이 묻어나옵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쵸? 저도 이글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눈물이 나더라구요..
가족과 떨어져서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고 한때 가장이었던 사람이
혼자서 저렇게 살다가 혼자 떠나갔다니...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언젠가 티비에서 봤든 것같은데...날씨가 추워지니 이분들 걱정이...한때는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열심히 뛰었을지도 모를 ...
재 작년 11월의 늦은 밤, 제가 서울역 앞 계단을 내려 오다가 노숙인들을 보고 참으로 측은한 마음에
<11월의 노숙자> 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를 다시 보니 참으로 마음이 무거워 집니다. 혹자는
사지가 멀쩡한데 왜 노숙인이 되었냐고 비난을 하지만 암울한 사회가 만들어낸 시대의 희생자이기도한
그들을 돌보고 회생시킬수 없는 정부의 무정책내지 무관심도 함께 지탄 받아야 합니다. 노숙자의
양산은 결국 비 노숙인의 기회비용을 증가시키기 때문이지요 .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서울역..노숙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하도가 있어요.. 벽기둥과 벽기둥사이에 박스로 막아놓고 그곳에서 잠을 자곤 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곳을 지나갈때 무서워하기도 했는데 가끔 지나갈때 빵이나 음료수 살짝 놓고 오곤 합니다. 특히나 겨울엔 너무 추울텐데..... 걱정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