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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주한미군 ‘고엽제 매립’ 논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미군기지
에서 민관합동조사단 관계자들이 미군의
안내를 받아 고엽제 매몰 장소로 추정되는
헬기장 인근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고엽제 매몰 의혹이 제기된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 내 지하수
에서 발암물질인 테트라클로로에틸렌
(PCE·사염화에틸렌)이 수질 기준을 약
49배 초과해서 검출됐다. 특히 이 지하수
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수백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지 바깥의 지하수 관정에서도
PCE가 검출돼 주민들이 그동안 오염된
지하수를 마셨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고엽제에 포함된 다이옥신 성분은
지하수와 토양·하천퇴적토 등 모두에서
검출되지 않았다.
캠프 캐럴 기지 환경오염 여부를 조사해온
한·미 공동 조사단은 5일 “기지 내부의
지하수 관정 22개소와 기지 바깥의 토양
(22개 지점)과 하천퇴적토(5개 지점)의
오염도를 조사한 결과 고엽제에 불순물로
포함돼 있는 다이옥신은 검출되지 않았다
”고 밝혔다.
그러나 조사 대상 지하수 관정 22곳 가운
데 14곳(64%)에서 발암 및 신경·생식계
독성 등을 일으키는 PCE가 기준치의 최고
49.7배 검출됐고, PCE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트리클로로에틸렌(TCE)도 22곳 중
12곳(55%)에서 수질 기준의 최고 24.8
배 농도로 검출됐다.
▶2010년 제36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
65개국 600 여명의 선교사들 참석하여
"열 방을 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 주제로 열림
▶2009년 영국 하원의장 마이클 마틴
중도사퇴 성명서 발표
▶2009년 스리랑카 내전,
26년 만에 종식 선언.
▶2007년 자이툰부대 장교 1명 총기 사망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 중인 한국군 자이툰 부대의 한 장교가 부대 안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2004년 9월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파병된 이후 부대원이 숨지기는 처음이다.
토요일인 2007년 5월 19일 오후 6시45분쯤(현지시각 오후 1시45분쯤) 자이툰 부대 소속 오모(27) 중위가 부대 내 의무대 이발소에서 턱 아래 부위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오 중위는 의무대 행정병이 발견했을 당시 이발소 바닥에 숨진 채 엎드려 있었고, 주위에서 오 중위의 K-2 소총 1정과 탄피 1발이 발견됐다.
오 중위는 3사 출신으로 4월 26일 자이툰부대 6진 2차 교대 병력으로 파병돼 의무행정 장교로 근무해왔다. 이 사건은 자살로 결론났다.
▶2007년 연기자 겸 가수 하리수 결혼
▶2005년 '스타크래프트 II’
한국서 첫 공개.
▶2004년 중국 상하이 중의약대에
`허준 동상` 건립
▶ 2002년 김대중 대통령 3남 김홍걸,
특정범죄 가중 처벌법상의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수감.
▶2001년 종묘제례,
제례악 유네스코 유산 선정
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의 한 장면.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1호인 종묘제례와 제례악이 2001년 5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UNESCO)회의에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됐다.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 선언’이란 유네스코가 소멸 위기에 있는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을 걸작으로 지정해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전통성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로, 지난 1997년 11월 제29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설립 결의안이 채택된 바 있다.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에 대해 유네스코는 일정액의 재정지원과 홍보 활동을 하게 되며, 2년마다 6∼10건 정도가 걸작으로 선정되고, 회원국은 매회 1건의 후보를 신청할 수 있다. 이날 회의서는 종묘제례 및 제례악을 비롯해 중국, 일본, 인도 등 19개국 19종목을 선정했다.
위대한 문화유산, 종묘대제
종묘대제의 첫 번째 절차 ‘취위’. 왕과 제관이 제례를 위해 정해진 위치에 서는 의식이다.
국가제사의 기원
조선은 건국 후 1474년(성종5) 오례(五禮)를 기준으로 국가체계를 완성하였다. 오례는 제사에 관한 길례(吉禮), 국왕의 즉위나 왕세자 책봉, 국가혼례 관련 가례(嘉禮), 외국 사신 맞이 의례인 빈례(賓禮), 출정 등 군사에 관한 군례(軍禮), 국장(國葬) 관련 흉례(凶禮)로 구성되었다.
국가제사는 길례에 해당하는 국가의 핵심의례로 만물의 근원이 되는 하늘신(天神)을 위한 환구제(圜丘祭), 국토와 오곡의 신에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社稷祭), 조상신인 역대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비롯하여 농업국가 조선에서 중시한 농사의 신(神) 선농(先農)과 양잠의 신(神) 선잠(先蠶)에게 지내는 제사가 대표적이다.
유교국가의 통지행위인 국가 제사는 천신, 지기(地祇), 조상신인 인귀(人鬼)를 대상으로 군주는 제사를 통하여 이들의 공적에 보답기 위한 윤리적인 행위를 표현함과 동시에 권위와 정당성을 확보 받는 정치적인 행사였다.
조선시대 국가제사는 제사의 등급에 따라 주재하는 사람의 지위나 절차가 달랐으며 제례에 사용하는 음식이나 복식, 음악, 무용도 차이가 있었다. 천자만 지네는 환구제와는 달리 사직제는 제후, 지방관, 일반백성에 까지 정해진 규모와 형식에 따라 지낼 수 있었으며 왕실의 종묘제례와 같은 국가제사의 전통은 사대부와 일반백성에도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전승되고 있다.
두 번째 절차 신관례(晨祼禮) 모습. 하늘과 땅 속에 있는 신을 부르기 위해 향을 피우고 땅에 술을 붓는 의식을 행한다.
세 번째 절차 천조례 (薦俎禮). 신위가 모셔진 각 실에 제물을 올리는 절차이다.
조선시대 국가제사 중 환구제, 즉 제천례(祭天禮)는 중국과 연계된 천하관의 문제 등으로 인해 세조대까지 이어지다 중단된 후 고종대인 1895년 대한제국 건국과 함께 부활되었다. 이로 인해 제천례의 주요내용 이었던 기곡제(祈穀祭)는 중종대 이후 선농단에서 주로 행해지다 숙종대부터는 사직단으로 옮겨 거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종묘는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졌다. 신라는 남해차차웅이 서기 6년 시조묘를 세우고 유리이사금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올렸으며, 고구려에서는 서기 20년(대무신왕 3)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으며, 백제는 온조왕 대에 동명왕묘와 국모묘(國母廟)를 세웠다. 고려는 992년에 종묘를 완성하였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웠으나 도읍을 서울로 정하면서 1395년 경복궁을 중심으로 오른 쪽에 사직(社稷)을 왼쪽에 종묘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은 조선시대 국가를 의미하는 종사(宗社)로 일반화되어 사용되었다.
현재 종묘의 정전(正殿)에는 27명의 국왕 중 태조를 비롯한 18명과 추존된 국왕 1명을 합하여 19명의 신주만 봉안되어 있고 나머지는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지위가 군(君)으로 격하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없으며 역대 공신들의 신주를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궁궐을 호위한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별도로 자리하고 있다.
네 번째 절차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첫 번째 술(예제)를 올리는 예로 보태평을 연주하고 춤춘다.
종묘친제규제도별병 중 친제반차도 및 친제찬설도
종묘제례의 현재적 의미
전통시대 국가제사는 형식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것을 ‘사(祀)’, 지기(地祇)에게 지내는 것을 ‘제(祭)’, 인귀(人鬼)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향(享)’, 문선왕(文宣王)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석전(釋奠)이라 하였다
다섯 번째 절차 아헌례(亞獻禮). 아헌관이 두 번째 술(앙제)을 올리는 예로 정대업을 연주하고 춤춘다.
전통시대 새로운 국가의 건국에는 이를 지탱해 줄 사회적 목표와 통치를 위한 이념이 요구되었다. 1392년 조선이 유교를 국시로 건국된 후 국가통치를 위한 핵심가치는 “충(忠)과 효(孝)”, “예(禮)와 악(樂)”이었다. 이러한 충과 효, 예와 악을 강조한 유교문화권에서 최고통치권자가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또 실천하던 공간이 바로 종묘였다. 즉, 종묘는 국왕이 그 조상을 섬기는 모습을 통해 ‘효’의 실천의지를 만백성에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이는 ‘효’를 이루면 ‘충’이 되므로, 종묘의 궁극적인 의미는 국왕이 백성에게 효와 충을 동시에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예’와 ‘악’은 종묘제례에 잘 드러나는 데 제례를 행할 때 예와 함께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폐망과 일제강점기, 6.25전쟁, 건국과 산업화의 급격한 시대변화를 통해 수백 년 동안 이 나라를 지탱해온 “충과 효”, “예와 악”은 그 위상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민족문화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과 1962년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으로 전통문화의 전승이라는 틀 속에서 종묘와 관련된 제례, 음악을 비롯하여 전통문화 전반에 대한 계승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현재적 관점에서 종묘제례의 복원은 시대의 가치이념을 달리하는 산업사회에서 전통윤리인 “충과 효”의 가치와 의미를 국민들에게 새롭게 인식시켜주고 전승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예와 악”은 조선시대 국가의례에 사용된 의례절차는 물론 각종 궁중음악과 무용 등 아악이 당대 대중예술의 근간이 되었던 사실을 상기하면 제례에 사용된 의례체계와 음악, 무용 또한 현전하는 전통예술을 구성하는 기본 골격이며 동시에 새로운 문화로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중요한 콘텐츠인 것이다.
종묘대제는, 본래 춘하추동 사계절의 첫째 달 초순과 12월 등 연 5회를 지냈으나 광복 이후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가, 1969년 복원되어 지금까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만 봉행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정과 함께 종묘제례악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종묘제례는 197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종묘건축은 독창성이 뛰어난 건축양식과 함께, 500년 조선왕조의 신주를 그대로 모시고 600년 이상 제례를 봉행하는 등 문화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1년에는 종묘제례가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현재 무형유산보호를 위해 2008년에 수립‧공표된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으로 등재되어 있다.
여섯 번째 절차 종헌례(終獻禮). 종헌관이 세 번째 술(청주)을 올리는 예로 정대업을 연주하고 춤춘다.
종묘제례는 유형의 건축과 무형의 종묘제례, 종묘제례악 및 일무가 융합된 문화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종합의례이자 예술이다.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올린 술과 음식을 초헌관이 먹으며 조상의 덕을 받는 예.
송신례(送神禮). 신을 보내드리는 예.
종묘제례의 절차와 내용
종묘대제는 크게 신을 맞이하는 절차와 신이 즐기는 절차, 신이 베푸는 절차, 신을 보내는 절차로 나누어진다. 제례가 시작되기에 앞서 신을 맞이하는 절차로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서는 취위가 진행되고, 신을 부르는 의식인 신관례를 마친 후, 신이 즐기는 절차인 천조례(제수를 올리는 의식)와 초헌례(첫 술잔을 올리는 의식), 아헌례(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 종헌례(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를 거쳐 신이 베푸는 절차인 음복례(제례에 쓰인 술과 제물을 먹고 신이 주신 복을 받는 의식)와 신을 보내는 절차인 철변두(제례에 쓰인 제물을 거두는 의식), 송신례(신을 보내는 의식) 후 마지막 절차인 망료례(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우는 의식)까지 마치게 되면 제례는 모두 끝나게 된다.
종묘대제에는 제례와 더불어 제례악과 선왕의 문덕(文德)과 무덕(武德)을 찬양하는 일무(佾舞)가 함께 어우러져 완성된다. 일무는 6열 6행의 36인이 추는 춤으로 국왕의 문덕을 찬양하는 보태평(保太平)에는 예악(禮樂)을 의미하는 약(籥)과 적(翟)을 들고 추며 무덕을 찬양하는 정대업(定大業)에는 검 또는 창을 들고 춘다.
현행, 종묘대제 봉행은 국가를 대표하여 문화재청에서 정책과 홍보를 맡고, 국제문화행사로서의 전체적인 진행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담당한다. 제례의 주관은 종묘제례보존회가 의례를, 종묘제례악보존회가 음악과 일무를 담당한다. 외래 관광객 유치 및 해외 홍보를 한국관광공사와 국립국악원에서는 제례악의 악사 파견과 악기를 지원한다.
망료례(望燎禮). 마지막 절차로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우는 예.
<현행 종묘제례 주요절차>
종묘제례를 도회한 기록화인 종묘친제규제도설병(宗廟親祭規制圖說屛)의 설찬도(設饌圖)에 따르면 각각 좌우에 12가지의 음식을 비롯하여 가운 데 질서정연하게 희생에 쓰인 양고기와, 소고기를 비롯하여 조 등의 진설 모습과 친제반차도(親祭班次圖)에 228명의 제관들이 잘 묘사되어 당대의 장엄한 제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화는 오늘날 종묘대제를 현재적 관점에서 학술적인 고증을 거쳐 재현해낼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귀중한 기록유산이다.
팔일무를 추는 모습.
▶2000년 박경완,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4연타석 홈런
프로야구 현대의 포수 박경완이 사상 첫 4연타석 홈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박경완은 2000년 5월 19일 대전에서 벌어진 한화와의 프로야구 경기서 첫 타석부터 내리 4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박경완은 경기가 끝난 뒤 "4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치고 홈을 밟고서야 대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그리고는 온몸에 긴장이 풀려 다리의 힘이 쭉 빠졌다"고 말했다.
현대 박경완이 2000년 5월 19일 대전에서
열린 2000 프로야구 한화와의 경기에서
6회 4연타석 홈런을 치고 있다.
1991년 계약금도 없이 쌍방울에 입단, 2군을 맴돌던 박경완은 1994년부터 주전으로 안방을 지키기 시작했다. 1996년 골든 글로브 수상으로 최고 포수 자리에 올랐고 1998년 현대로 이적, 그 해 팀 우승의 주역이 됐다. 4연타석 홈런은 미 프로야구에서 전설적 강타자 루 게릭이 1932년에 기록하는 등 총 네차례 있었고, 일본 프로야구에선 왕정치가 1964년 한 차례 기록한 일이 있다. 5연타석 홈런은 세계적으로 아직 기록된 적이 없다.
▶ 2000년 아세안지역포럼
북한 가입 확정.
▶2000년 삼성전자
'보고 듣는 MP-3세계 첫 개발
▶1999년 한국축구 100년사를 모은
`축구박물관` 개관
1999년 5월 19일 축구회관 준공식에 참가
한 참석자들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1999년 5월19일 개관식을 가진 축구박물관 200여평에는 역대 국가대표의 유니폼, 공, 축구화, 국제대회 트로피, 국내 프로축구의 역사와 각 팀별 유니폼, 팬북, 팬던트, 홍보용품 등과 사진으로 보는 한국축구 100년사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됐다.
이와함께 `역대대통령의 축구사랑` 코너도 마련, 1968년 서울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직후 육영수 여사가 `잘 싸웠습니다`라고 쓴 방명록등을 비치했다. 이날 오전에 열린 개관식에는 신낙균 문화부장관, 박세직 월드컵축구위원장,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오쿠라 준지 일본축구협회 부회장과 원로 축구인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1998년 이탈리아 국립현대미술관
고흐-세잔 그림 3점 도난
▶1997년 제1회 LG배 세계기왕전 -
이창호구단 우승
초대 바둑황제의 영광은 이창호 구단에게 돌아갔다. 이 구단은 1997년 5월 19일 소공동 롯데호텔 아테네가든 특별대국실서 벌어진 제1회 LG배 세계기왕전(조선일보사 주최-LG그룹 협찬) 결승5번기 3국서 유창혁 구단에 1백93수 만에 흑으로 불계승 토털 3대0으로 완승했다. 이로써 이 구단은 세계최대규모의 LG배 원년 우승컵과 상금 2억원의 주인이 되며 세계정상을 확인했다.
1997년 5월 19일 제1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3국에서 이창호 9단(오른쪽)이
우상귀 화점에 첫 수를 놓고 있다.
이날 이 구단은 우상귀 화점에 이어 세번째 수로 빈귀를 차지하지 않고 좌하귀 백의 화점에 걸치는 의욕적 포석으로 출발했으며 유 구단은 두귀를 선점하는 발빠른 포진으로 대응했다. 이후 유 구단은 좌변을 버리고 우중앙에 대세력권을 형성했으나 이 구단이 중앙 백의 약점을 위협하며 우변을 초토화 일찌감치 승세를 확립했다. 지난 1996년 6월 개막됐던 제1회 LG배 세계기왕전이 11개월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97년 국민회의,
김대중총재를 대통령후보로 선출
▶1995년 신행주대교 재개통
▶1994년 아프리카 말라위,
카무주 반다 대통령의 30년 독재 마감
▶1993년 한국-마다르스카르 국교 수립
▶1992년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4대 대통령후보로 선출
▶1992년 민속의학자 김일훈씨 별세
▶1988년 월스트리트 저널지, 노드롭 스캔들 폭로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한국판 록히드사건으로 불리우는 노드롭 로비사건을 1988년 5월 19일 폭로했다. 노드롭 사건은 미국의 노드롭 항공사가 최신예 전투기 F20을 한국에 팔기 위해 1984년에 박종규 전청와대 경호실장과 이민하씨에게 775만달러의 로비자금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고 그 상당부분을 전두환 대통령이 받았다는 의혹이 일어 정치적 문제가 된 사건이다.
그후 5공비리 특별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수사해 이민하씨가 노드롭사로부터 350만달러를 받아 유용한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구속했다. 그러나 F20의 시험비행 추락사고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박씨가 1985년 12월 사망함으로써 나머지 돈의 행방과 사건의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76년 한국-파푸아뉴기니 국교 수립
▶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
20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
▶1973년 서독-소련
3개(경제, 문화, 항공)협정 체결
▶1970년 국제노동기구(ILO)가
빈곤백서를 발표, 세계인구의 15퍼센트가
영양실조로 고통
▶1967년 유엔(UN) 특별위 나미비아
(서아프리카)의 신탁통치 결의
▶1967년 소련 대기권 핵무기
금지조약 비준
▶1966년 박맹호, 민음사 설립
▶1962년 독일 화가 뮌터 사망
▶1961년 윤보선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다음날 번복
▶1961년 혁명위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
▶1961년 남북협상 주장한 혁신계 ‘민족일보’ 폐간
4·19 후 혁신세력의 급속한 성장에 맞춰 평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을 기치로 내걸었던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가 1961년 5월 19일, 지령 92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발행인 조용수는 6·25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4·19가 일어나던 그 해 6월에 귀국한 재일 거류민단의 간부 출신. 진보적인 논지 탓인지 국회에서도 조총련계 자금 유입설을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졌다.
1961년 8월 28일 민족일보 사건으로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에서 판결을 받고 있는 조용수, 송지영, 이종률, 안신규 피고인(왼쪽부터) .
이때 발생한 5·16은 조용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신문 폐간에 이어 관련자 13명이 구속된 것이다. 국민을 선동해 북한을 고무동조하고 조총련계 간첩 이영근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했다는 것이 혐의 내용이었다.
국제언론인협회(IPI)와 국제펜클럽, 국내외 문인·언론인 100여명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혁명재판부는 조용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최고회의는 이를 추인했다. 12월 21일, 조용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영근이 민단계였고 1990년에는 국민훈장까지 추서됐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져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60년 미국-일본 신안보조약
신행정협정 중의원서 자민당 단독승인
▶1958년 미국-캐나다
북미방공사령부(NORAD) 설치
▶1957년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1957년 5월 19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렸다.
한국 최고의 미인을 뽑는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1957년 5월 19일 개최됐다. 대회 주최사인 한국일보는 4월 6일 1면에 미스코리아대회 개최 사고(社告)를 냈다. 응모 자격은 만 18세이상 28세까지의 한국 여성으로서 지ㆍ덕ㆍ체의 모든 면에 진선미를 겸비한 사람, 직업의 유무는 불문하나 흥행단체 또는 접객업소에 종사한 일이 없는 미혼여성으로 했다.
신청 마감은 4월 30일이었으나 마감이 다가와도 신청이 들어오지 않았다. 행사 준비 기간이 짧은 탓도 있었겠지만 당시만 해도 미스코리아 선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좋지 않았다.
이날 결선대회에 오른 7명의 후보가운데 23세의 박현옥양이 미스코리아로 당선됐고 홍인방양과 김정옥양이 준 미스코리아로 당선됐다.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박양은 7월 1일 롱비취시에서 열린 세계미인제전에 한국여성의 대표로 참가해 우리나라 여성들이 지닌 진선미를 자랑했다.
▶1957년 발명의 날 제정
▶1955년 국회 태창산업
특별융자조사위원회 보고
▶1954년 미국-파키스탄
상호방위원조협정 조인
▶1952년 원내 자유당,
개헌문제로 합동파, 잔류파로 분열
▶1950년 제2회 총선에 의한 국회 개원,
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
▶1941년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 결성
▶1935년 아랍 독립운동 도운 영국 탐험가
토머스 로렌스 사망
▶1930년 남아연방서 백인여성에 참정권
▶1925년 말콤 X 출생 - 1960년대초
흑인의 자부심과 블랙내셔널리즘을 주장한
흑인 민권운동지도자
▶1925년 제네바서
제7회 국제노동회의 개막
▶1925년 이탈리아 프리메이슨등
비밀결사 금지
▶1924년 참의부 의용군 압록강 연안의
국경을 순시중인 총독 제등실의 배 습격
▶1922년 손병희 선생 사망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 선생이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 중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제 3대 교조로 취임
손병희(孫秉熙, 1861. 4. 8~1922. 5. 19)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여1882년 동학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으며 이후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갔다. 입교 10년만인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자 일약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통령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기에 이른다. 선생이 이끄는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전봉준과 남접군과 함께 남북접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남북접연합군은 일본군의 불법개입으로 인해 공주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동학혁명운동의 열화 같은 의지는 좌절되고 선생은 원산, 강계 등지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조로 취임하여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다가 1901년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구국의 길 모색,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일본에서의 경험은 선생으로 하여금 종래 동학혁명에서 보여주었던 무력항쟁의 노선에서 계몽운동으로 방략을 변경하는 기점이 되었다. 선생은 일본에서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새로이 구국의 길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2차에 걸쳐 총 64명의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유학을 주선하고 신문물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함으로써 민족의 동량(棟樑)을 육성코자 하였다. 또한 1904년에는 갑신개화혁신운동을 추진하여 교도들에게 단발을 지시하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해 간다. 아울러 심복인 이용구를 국내에 파견, 진보회를 결성케 하여 신생활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다.
일본에 망명중인 선생 등 천도교 간부들의 사진(1904) 망명 시절은 아직 천도교의 출현 전으로, 동학 제3교주였던 선생은 박해를 피해 유학생 24명과 간부 등을 데리고 일본에 망명하였다. 아랫줄 오른쪽이 선생.
이러할 즈음 한국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놓고 야심에 찬 러시아와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은 순식간에 전쟁의 도가니가 되었고 한국인의 피해는 극심한 것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동원, 인력동원은 결국 우리의 몫이었다. 어느 편이 이기던 우리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 전쟁이 조국독립의 호기로 파악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고 이 기회를 이용, 부국강병의 대책을 세워 국가만전(國家萬全)을 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진보회를 앞세워 농민층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을 규합해갔다. 그러나 사육에 눈이 먼 이용구가 이끄는 진보희는 선생의 뜻과는 달리 친일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로 변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함으로써 친일화된 진보회와의 단절을 서두르는 한편 이듬해(1906년) 귀국한다. 이후 선생은 사태수습을 위해 일진회에 가담한 이용구 등 천도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선생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일진회에 의해 잠식당한 천도교의 교세를 만회하여야 할 뿐 아니라 심각한 재정문제도 눈앞의 급무였다. 그리하여 우선 교회만회를 위해 정교분리정책을 실시하였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정치적 문제를 떠나 교세확충에 전력하기로 한 것이다. 재정은 신도들의 성미(誠米)로 차츰 호전되기 시작했다.
민족교육사업을 위해 보성학교, 동덕여학교 등 인수
선생은 여기에 만족할 수만은 없었다. 원래 민족의식에 뿌리를 둔 천도교에서 살아온 그였다. 좀 더 민족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계몽운동으로 눈을 돌린다. 각급 학교에 의연금을 지원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해 갔다. 또 보성사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천도교월보>를 발행하여 문화사업에 대한 관심도 늦추지 않았다.
당시의 국내상황은 1904년 망국사태를 인식한 의병의 궐기가 눈부셨고 한편으로 교육, 문화 등 국민계몽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천도교단의 입장에서 볼 때 대체로 동학과는 사상이 상충되는 의병에 합류하기는 어려운 처지였고(개별적으로는 의병에 가담하는 동학교도가 있었다) 더욱이 1894년 동학혁명운동을 통해 무력투쟁에 의한 실패의 경험을 겪은 처지에서 또다시 무력항쟁의 방략을 구사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천도교의 실상이었다. 따라서 선생이 교육, 문화사업을 통한 구국의 길을 걸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1907년 김연국을 거쳐 박인호에게 대도주직(大道主職)을 이양하여 천도교 서무를 관장케 하고 자신은 교세확장에 진력하는 한편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문창, 보창, 명신, 양영 등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을 더욱 확대해 갔다.
문화사업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던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운영하여 교육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이끌다
1918년에 접어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발맞추어 꾸준히 독립운동의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계획이 유학생 송계백을 통해 국내에 전달되고 이어 광무황제(고종)가 급붕(急崩)하자 국내에서도 독립선언방식의 운동계획이 급속히 추진되기에 이른다. 독립선언방식을 채택한 것은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측근들에게 독립운동의 세부추진계획을 일임하였다. 이들은 박영효, 한규설 등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거족적인 항일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뜻과 같이 않았다. 그리하여 방향을 전환, 독자적인 독립선언계획을 추진하던 기독교측과 연합하기로 하고 기독교계의 남강 이승훈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어 만해 한용운을 통해 불교계의 동참이 이루어졌으며 유교계와의 연계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또 연희전문, 보성전문, 세브란스 의전 등 각 학교학생들이 추진하던 독립운동계획도 이에 통합하여 바야흐로 전민족적 거사의 준비는 무르익어 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이들 각계 인사들은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이윽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고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2만1천여매(3만5천매라는 학설도 있음)의 선언서 인쇄를 마치었으며, 전국 각지로의 배포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선생을 필두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의 민족대표들이 서명함으로써 모든 준비는 갖추어진 셈이었다.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으로 정하였다. 원래 광무황제의 인산(장례일)은 3월 3일이었는데 이사 당일에 거사하면 장례식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하여 3월 2일로 하려 했으나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의 반대로 토요일인 3월 1일로 거사일을 확정한 것이다.
독립선언식 이후 체포되어 2년 옥고 치러
거사일인 3월 1일, 29인(33인중 4명 불참)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여 선생의 주도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만세삼창을 끝으로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피체되었다. 이들이 점화한 3.1독립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3.1독립운동의 영향은 국내외 각지에서 8개에 달하는 임시정부의 출현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통합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그 중 대한민간정부(기호지방)와 대한국민의회 정부에서 각각 선생을 대통령에 선임한 것도 이러한 민중의 신망에 바탕한 것이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당시 선생은 62세였다.
선생의 친필 유묵
선생의 생애는 참으로 한국근대사의 큰 줄기를 이룬 것이었다. 때로는 혁명가로, 때로는 사상가요, 민족의 지도자로 손병희 선생은 늘 앞장서 걸었다.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독립된 국가의 앞길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21년 미국 이민제한법 제정
▶1919년 북경대학생연합회 맹분선언,
일화배척운동 전개
▶1910년 핼리혜성 75년 만에 지구에 접근
핼리혜성이 1835년이후 75년 만인 1910년 5월 19일 지구 2300만Km까지 접근해 꼬리의 길이가 천구의 중간인 120도까지 이르자 전 세계가 혼란에 휩싸였다.
영국의 천문학자 E.핼리는 1705년에 당시 뉴턴이 발표한 만유인력의 이론에 따라서 기록에 있는 24개의 혜성의 궤도를 계산해서 1531년, 1607년, 1682년에 출현한 바 있는 세 개의 혜성이 같은 궤도를 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간격으로 나타나는 점에서, 이들 동일한 혜성이 태양의 주위를 76년의 주기로 돌고 있다고 결론짓고, 이 혜성은 1758년에 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E.핼리의 사망후 175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밤에 실제로 혜성이 출현하자 이후 핼리혜성이라고 불려졌다.
고대의 기록을 알아보면, 지금까지 29회의 출현기록이 남아 있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467년 중국 주대(周代)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76년 만인 1986년 이 혜성이 다시 태양에 접근하자 많은 국가들이 탐사기를 쏘아 올려 혜성의 조성, 태양풍과의 상호작용 등을 관측함으로써 신비에 쌓였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혜성의 본체는 지름이 불과 6Km정도이고 코마(핵 주위의 대기)의 반지름은 약 1천만Km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909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프랑스 파리 샤트레극장에서 공연
▶1906년 민종직의 홍주의병 홍주성점령
▶1903년 스웨덴의 시인 스노일스퀴 사망
▶1902년 정약용의 목민심서,
광문사(廣文社)에서 신식활자로 간행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을 꿈꾸다, 정약용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수학과 관료생활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약용의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 '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어릴 적 스승은 부친이었다. 10세 나이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마현에 터를 잡은 그가 서울 출입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들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입신의 생활은 20대부터였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유 관계를 넓혔다. 성균관 재학 시에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지만,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관직은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다. 한때나마 외직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고마고(雇馬庫) 개혁, 가좌부(家坐簿) 제도 개선, [마과회통(麻科會通)] 저작 등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가장 이상적인 관료가였다. 배다리와 기중가의 설계에서 이미 재능을 펼쳤지만, 그의 저작에서 엿보이는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민본(民本)이었다. 정약용은 왕정시대에도 주민 자치가 실현되기를 소원한 인물이다. 조선후기를 살았던 인물이었지만, 소박하게나마 민주주의를 지향한 인물이었지 않았을까.
기나긴 유배 생활의 시작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었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정계에서 배제되고 잊혀져 갔다. 사실 정약용은 관직에 나간 지 2년 만에 당색(黨色)으로 비판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가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산시문집] 제4권에는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정약용의 시가 전해진다.
빈소를 열고 발인하는 날 슬픔을 적다[啓引日述哀]
운기(雲旗), 우개(羽蓋) 펄럭펄럭 세상 먼지 터는 걸까 홍화문(弘化) 앞에다 조장(祖帳)을 차리었네
열두 전거(輇車)에다 채워둔 우상 말(塑馬)이 일시에 머리 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龍輴)가 밤 되어 노량(露梁) 사장 도착하니 일천 개 등촉들이 강사(絳紗) 장막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화관(于華館)으로 가셨을까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衣裳)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 모습 그대로 있건마는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다산시문집] 제4권, 시)
유배 생활 처음에는 천주교도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천주교인이라는 소문으로 나자 모두 정약용을 모른척했다. 유배지의 어려움 속에서도 승려 혜장(惠藏) 등과 교유하고, 제자들을 키우며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담배 역시 유배의 시름을 덜어주는 벗이었다.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무른 곳이 사의재(四宜齋)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 기거하면서 예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후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과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천여 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유교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의 이른바 주석 학문인 경학(經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마현으로의 귀향과 [여유당집]의 완성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57세에 해배되어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해배되었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지냈던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자신이 지은 많은 저술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초로의 나이에 더 이상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저술들을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경세(經世)의 길이었다. 이후 자신의 호를 다음 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즐겨 사용한 것 역시 그런 의미였다. 그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고, 일표(一表)와 이서(二書)는 천하와 국가를 위함이니, 본말(本末)이 갖추어졌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육경과 사서에 관한 저술이 근본이라면,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는 경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다.
해배 이후 학문적 교제를 했던 대상은 신작(申綽, 1760~1828)·김매순(金邁淳, 1776~1840)·홍석주(洪奭周, 1774~1842)·홍길주(洪吉周, 1786~1841)·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 당시 저명한 노·소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정권을 잡은 노·소론계였지만 고정된 정론이나 학설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경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경세관을 펼쳐 나갔다.
정약용이 가진 국가개혁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국가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에서 그는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 종합된 개혁사상을 전개하였다. 정약용의 개혁안은 장인영국(匠人營國)과 정전법(井田法)을 중심으로 한 체국경야(體國經野)라 평가할 수 있다.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체국)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경야)을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이다. [주례(周禮)]의 체국경야 체제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경세유표]를 후대에도 계속해서 갈고 닦아야 할 ‘초본’이라 했다. 그가 펼친 국가개혁사상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생명력을 가진 근대적 사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던 정약용은 양반제자 18명과 중인제자 6명이 각각 별도로 그의 아들과 더불어 자기가 경영하던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였다. 또 초의(草衣)선사를 비롯한 만덕사의 스님들은 전등계(傳燈契)를 조직하게 하여, 길이 우의를 다지도록 했다. 그는 귀향 이후에도 옛 제자들과 서로 내왕하면서 강진에서 있을 때와 다르지 않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다산의 저술활동은, 물론 다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과의 공동작업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다산의 많은 저서에는 공저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러한 표기가 없는 경우에도 공동저작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목민심서]는 정용편(丁鏞編)으로 되어 있는데, 저술의 체계를 잡고 조목마다 편자의 의견을 붙이는 일은 다산 스스로가 행했지만, 각종의 전적(典籍)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할 뿐만이 아니라 다산의 구술을 기록하고 정서(精書)·제책(製冊)하는 일은 모두 제자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48권 16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목민심서]가 단 1년 이내에 저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회갑을 맞은 1822년 다산은 인생을 정리한다. 자신의 장지를 정하고, 스스로 묘지명을 짓는다. 별호도 후대를 기약한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사용한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기존 저술에 대한 종합과 문집의 편집으로 나타났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이후 별세할 때까지 15년 동안 그는 [매씨상서평]을 개정하거나, [상서고훈]과 [상서지원록]을 개수하고 합편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정리하는 등 저작에 대한 분합, 필삭, 윤색에 온 힘을 기울여 182책 503권의 가장본 [여유당집]을 완성하였다. 아들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여유당집]의 교열을 부탁했으며,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에 따라 [여유당집]이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되었다.
1935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에 수록된 삽화 '다산인물상'
1992년 안보선이 그린 '다산 다산인물상', 개인소장.
2009년 4월 김호석이 그린 '다산인물상', 강진군 다산기념관 소장.
장우성의 '다산인물상'을 토대로 설경숙이 그린 '다산인물상', 강진군 다산기념관 소장.
▶ 1891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 착공
낭만과 꿈, 회한과 유형의 역사로 점철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공사가 1891년 5월 19일 시작됐다. 공사는 서쪽의 모스크바, 동쪽의 블라디보스톡, 중부 시베리아 철도, 트랜스∼바이칼 철도, 기타 철도 등을 건설하여 서로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지만 공사비 부족과 냉혹한 겨울추위 등으로 여러차례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게다가 죄수들을 포함한 건설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반발, 폭동을 일으켜 공사 진척을 방해했다.
하지만 최대 난관은 노선의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바이칼 호수였다. 바이칼 호수 공사 중 러ㆍ일전쟁이 발발하자, 바이칼을 우회하는 노선이 시급했던 러시아 정부는 청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만주를 지나는 동청철도와 연결한 전장 8314km의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했다. 전쟁 후 러시아는 일본의 만주 할양을 우려해 대체 루트로 아무르강 철도를 건설, 이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이르게 했다. 이 노선은 1916년에 완공됐다. 그래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2개 노선에 대한 완공일을 갖고 있다. 1904년은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고 만주통과노선을 완공시킨 해이고, 1916년은 전적으로 러시아 영토 안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성시킨 해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 대지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톡까지 총길이 9천2백88km에 달하는 세계최장의 철로이다. 지구 둘레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며 경부선에 비해 20배가 넘는 거리다. 근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국가사업의 하나로 꼽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은 항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동과 서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대중 교통수단이자 핵심 물류수단이었다. 이 철도는 또한 일제 압정에 시달려 연해주 등지에 이민갔던 수많은 우리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그야말로 `눈물의 철도`이기도 했다.
▶1881년 최초의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
▶ 1879년 원산 개항을 허가
▶ 1864년 `주홍글씨`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호손 사망
▶ 1845년 영국 항해가 탐험가 존 프랭클린 북극 북서항로 출발
▶ 1798년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
이 원정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실패였지만, 학문과 과학 면에서는 성공이었다.
5월 19일 프랑스 남부의 항구 툴롱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을 때, 나폴레옹은 400척의 배에 3만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그가 훗날 원수(元帥)로 삼게 되는 장교 다섯 명도 끼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기를 꿈꾸었다. 근대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 고대 동방의 지혜를 배워 동양에 제국을 개척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예술가, 과학자, 학자, 석학 167명도 함께 했다. 이 박식한 이들은 이집트에서 보물-로제타석도 그중 하나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했다-을 지니고 돌아와 원정의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 그들이 지닌 지식의 정수는 22권으로 된 『이집트에 대한 기록』이라는 책으로 출간됐고, 이는 근동에 대한 유럽의 열정을 촉발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면에서 나폴레옹의 원정은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7월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집트의 지배 계층 맘루크를 쓰러뜨린 후, 나일 강 전투에서는 넬슨에게 나폴레옹의 함대가 격파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자파를 습격하고 아크레를 포위했으나, 전염병이 닥쳐 그의 군대를 몰살시켰다.
그는 1799년 한 대의 배에 몸을 싣고 프랑스로 몰래 돌아갔다. 3년 후 이집트에 남은 그의 군대가 영국군에 항복했을 때, 나폴레옹 자신은 이미 황제로 대관식을 올린 후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이집트에 갔던 이들은 3명 중 1명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동방으로 가야 한다-모든 위대한 영광은 그곳에 머무른다."
나폴레옹
▶1442년 세종대왕 측우기 발명
우량계 측우기
1442년에 서운관에 설치되었던 측우대(보물 제843호 관상감측우대). 가로 92, 세로 58, 높이 68cm의 화강석제. 상면에 지름 16.5, 깊이 4.7cm의 둥근 구멍에 측우기를 안치하였다. 사진에 보이는 측우기와 그 옆에 놓인 자는 모조품이다.(기상청 소장)
강우량을 측정하려면 빗물을 받는 그릇(受雨器)과 그 안에 괸 물의 깊이를 재는 자(量尺), 그리고 그릇을 안치할 수 있는 적절한 높이의 받침대(臺)가 있어야 한다. 측우기(測雨器)는 이와 같은 세 가지 부품을 갖춘 우량계(雨量計, rain gauge)로서 조선 세종시대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어 실용화되었다. 보통은 빗물 받는 그릇을 ‘측우기’라 불렀다. 우량을 헤아려 농사 등에 활용하는 제도는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일찍부터 시행되었다. 그러나 우량계로써 장기간 기록을 남긴 것은 전근대에는 조선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세종시대의 측우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며 오로지 부품의 하나인 받침대가 남아있다. 그래도 다행히 헌종 3년(1837)에 제작된 ‘금영측우기’가 남아 있어 세종 측우기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발명과 실용사례를 통해 측우기는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기우제와 측우기
이문원 측우기 받침대. 대리석 받침대의 4방에는 [측우기명(測雨器銘)]이 새겨져 있다. 왼쪽 벽면에 보이는 액자는 대의 4방에 새겨진 측우기명 탁본이다. 금영측우기를 복제하여 대 위에 안치하였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올해는 104년만의 가뭄으로 서울지방의 5, 6월 강우량이 예년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국민 모두가 갈망하던 비가 6월 29일 밤부터 내렸는데 30일 오전까지 대략 100mm가 내려 완전 해갈에는 미흡해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올해와 상황이 비슷했던 조선조 정조 6년(1782) 5월(음력)로 되돌아 가보자. 조정에서는 대신들을 삼각산과 목멱산(남산)에 보내 첫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지냈고, 두 번째는 용산강에서 치렀다. 이어 5월 22일에는 우사단(雩祀壇)에서 임금이 세 번째를 지낸다. 이날 임금은 일산(日傘)도 바치지 않은 채 밤새워 기도하고, 연(輦)을 물리치고 보여(步輿)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감옥에 들러 의금부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환궁하였다. 신시(申時 -오후 3시)부터 비가 내렸고, 관상감에서 “측우기의 수심(水深)이 1촌 5푼입니다.”고 보고하였다고 5월 23일 [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다음 날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에게 이문원(摛文院-규장각) 앞에 측우기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직제학 심념조(沈念祖)에게는 명문을 짓고, 직제학 정지검(鄭志儉)에게는 글씨를 쓰도록 하여 넉 달 뒤에 완성되었다. 측우대 사방에 새긴 명문 가운데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자.
“....... 1분1촌을 상상해서,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적으면 가물까 보아 염려하고, 많으면 홍수에 상할세라. 이로부터 언제고, 적당하기만 비노라.” 훗날 규장각 검서 박윤묵(朴允黙)은 이 명문을 읽고 “..... 어진 임금의 하늘 공경하시는 뜻을 알고 싶다면, 돌에 새긴 신하의 명을 살펴보시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측우기는 백성에게 기쁨을 주려는 임금의 마음이 담긴 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만든 측우기의 받침대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측우기의 발명
측우기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이 물음의 답은 [세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 23년 8월 18일의 기사를 보자. “호조에서 건의하기를, 각도 감사가 우량을 보고하도록 하는 법(轉報雨澤 - 중국 고대의 上雨澤)을 시행 중이나 흙의 건조하고 습한 성분이 같지 않고, 흙속으로 빗물이 스며 든 깊이(入土淺深)도 알기 어려우니 서운관에 석대를 놓고, 높이 2척, 지름 8촌이 되는 쇠그릇을 주조하여 석대 위에 올려놓고 빗물을 받아, 관원으로 하여금 자로 수심을 재어 보고하게 하고, ......”. 이 내용은 지금까지 시행해온 호미나 보습으로 땅을 파서 빗물이 스며든 양을 감각적으로 알아서 임금에게 보고하는 제도를 개선하여 서운관에 우량계를 놓고 측정하여 보고하도록 법을 일부 개정하자는 건의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높이 2척, 지름 8촌이 되는 쇠로 만든 원통형 우량측정 기구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같은 해 4월 29일 실록의 기사에 “......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실험하였다. ......”란 내용이 들어있다. 측우기 발명의 아이디어가 세자로부터 나왔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서운관에서 시제품을 제작하여 호조에 보내 앞서의 건의가 올라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해 5월 8일 호조에서 다시 우량을 측정하는 건(測雨事件)에 대하여 건의하는데, 요약하면, “쇠를 주조하여 [빗물을 받는] 그릇을 만들어 측우기라 부르고, 높이는 1척5촌, 지름은 7촌, 서운관에 석대를 놓고 그 위에 측우기를 안치한다. 비가 그친 다음에 관원이 주척(周尺-세종조 1척은 20.7cm)으로 괸 물의 깊이를 잰다. 비 오고 갠 일시, 수심의 척‧촌‧분수를 상세히 기록하여 즉시 보고하고 기록해 둔다......”라고 하여 측우기의 실용과 강우량 보고를 제도화 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측우기의 크기는 시제품보다 약간 작아졌고, 주척으로 수심을 재는 측우법이 확정되었다. 실험을 거쳐 높이 2척, 지름 8촌의 철제(청동제) 시제품이 만들어지고, 시제품은 실용화 연구 단계에서 크기가 줄어들었다. 이로서 수우기, 자, 받침대로 구성된 측우기가 발명되어 실용화 되었다. 측우기 사용으로 종래 감각적인 강우량 보고제도 제도가 척(尺)‧촌(寸)‧분(分)을 단위로 10진법을 써서 측정하는 정량적인 측우제도로 혁신되었다.(종래의 전보우택 제도가 폐지된 것은 아니다) 세계 기상학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 한양에서 일어난 것이다.
영조의 측우기 복원
조선 초기와 중기의 전란을 겪으면서 유실된 측우기와 측우제도는 영조 46년(1770) 5월에 복원되어 구한말까지 지속되었다. 이보다 앞서 영조 16년(1740)에는 세종조의 포백척(布帛尺) 유물을 바탕으로 표준 척도기가 새로 제작되었다. 이것이 ‘경신신제척(庚申新製尺)’이다.『실록』을 근거하여 수우기의 크기는 세종 조의 것과 같게 청동재질로 만들었다. 수심을 재는 자는 빗물 받는 그릇보다 길어야 잡고 측정하기에 편리하므로 주척 2척으로 만들었다[대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다]. 석대는 포백척(49.2cm)으로 높이 1척, 남북의 너비 8촌, 돌로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깊이 1촌 되게 둥근 구멍을 파고 측우기를 안치하였다. 아래 그림에 보이는 영영(嶺營)측우대에 새겨진 제작일이 “乾隆庚寅五月 造”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측우기는 [영조실록]46년 5월 1일의 기사와 상통된다. 복원 후 첫 번째 측우는 영조 46년 5월 13일 “밤 2경부터 해 뜰 때까지 비가 내렸는데, 측우기의 수심은 2촌(약 4.14cm)이었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실록에 적힌 대로 측우기를 석대 위에 설치한 것은 “하늘을 공경하는 성왕의 뜻(欽敬之聖意)”이라 여겼다.『문헌비고』에 등재했음은 물론 영조의 일대기(行狀)에도 실었다.
영영(嶺營)선화당(宣化堂) 측우기 사진. 일본인 기상학자 和田雄治가 인천측후소 뜰에서 촬영한 것임. 측우대 앞 뒷면에 ‘測雨臺’라 석각되어 있으며, 앞면에 ‘乾隆庚寅五月 造’(건륭경인5월 조)라고 새겨 1770년 5월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현재 받침대(가로 37, 세로 37, 높이 46, 상부에 지름 16, 깊이 4.3cm의 구멍이 파여 있다.)만 남아있다.(보물 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기상청 소장)
다시 측우기란 어떤 의미인가?
금영측우기. 헌종 3년(1837)에 제작된 것으로 이 측우기를 이용하여 기록한 18년간의 측우기록이 [각사등록(各司謄錄)]'충청도편'에 남아있다. 和田雄治가 일본으로 가져 간 것을 1971년 반환 받은 것이다.(보물 561호). 둘째 단 원통에 “錦營 測雨器 高一尺五寸 徑七寸 道光丁酉製 重十一斤”이라 새겨있다. 높이 1척5촌(약 31cm), 지름 7촌(약 14.5cm), 헌종 3년(1837) 청나라 도광(宣宗)17년 제작, 무게 11근(6.2kg)임을 알게 해준다. 맨 아랫단 바깥 바닥에 “入番通引 及唱 次知 使令”이라 새겨 감영의 근무자들이 당번으로 관측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통 안에 괸 물의 깊이를 재기에 편리하도록 3단으로 포개서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和田雄治는 물의 깊이를 재는 주척 1척이 20.7cm라는 기록을 남겼지만 자는 유실되었다.
측우기는 발명-개발-법제-유실-복원의 역사를 간직한 과학문화재이다. 이것은 우량측정 말고도 또 다른 용도로도 쓰였다. 현재까지 역사, 천문학, 농업과 기상학사 방면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아보려는 실증적인 조사와 연구는 보기 드물다. 정인지(鄭麟趾)는 <세종 영릉신도비문> 가운데 과학기술 업적을 나열하면서 ‘측우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과학,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