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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오복음 5,17-19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ᆢ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
예수님의 행보는 율법을 거슬러가는 것으로 보여지기가 일쑤였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에 답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ᆢ ᆢ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ᆢ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ᆢ”(18-19)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니 철저히 그대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
오늘 복음단락 다음에 어어지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름은 율법의 겉이 아니라 속을 보고 행하는데 있다고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하시는거지요.
20절 이하에서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설교 본론을 읽어보면 그 뜻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겉이 아니라 속을, 양이 아니라 질을, 결과가 아니라 지향을 바라보는 일은 우리가 평생을 두고 배워야 할 과제입니다.
기도는, 참기도는 이런 깊은 눈을 가지게 해줍니다.
오늘 1독서에서 우리 하느님은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신명기 4,7)이시고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이는 "지혜와 슬기를 보게"(신명기4,6)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까이 계시는 그분을 정작 의식하지 못하고, 찾지 않는 것은 온전히 우리 몫입니다.
'그분과 함께'
이것이 삶이 깊어지는 비결입니다.
오늘도 '그분과 함께'
겉이 아니라 속을 보고 행하여서 율법을 완성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3월2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마태오 5,17-19
하늘에서 정해질 나의 위치: 나는 타인에게 어떤 비전을 주는가?
얼마 전 어떤 모임을 하는데, 한 자매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드릴 예화가 그에 해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디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런웨이라는 유명 패션 잡지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의 비서로 일하게 됩니다.
미란다 프리슬리는 패션계의 교황이라 불릴 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미 미란다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에밀리가 있었습니다. 에밀리는 처음 앤디를 무시하며, 그녀의 부족함을 지적하고는 “그렇게 옷도 못 입고, 여긴 그런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에밀리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보여주려 애쓰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더욱 경쟁적으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앤디는 점차 일을 배우고 실력을 쌓으며 에밀리와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밀리가 못하는 일들을 해내고, 미란다에게 더 많은 신뢰를 얻기 시작합니다.
에밀리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앤디를 경계하며, “너,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그 순간,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에밀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승진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거예요.”
그런데도 앤디는 미란다에게 점점 더 인정받으며, 더욱 많은 책임을 맡게 됩니다.
윗사람의 눈에는 남을 밟고 올라가 잘 보이려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앤디는 점차 미란다의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왜 내가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하나?” 경쟁적이고 냉정한 미란다의 업무처리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녀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앤디는 마음을 정하고 미란다에게 그만두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리 악랄한 미란다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에 여전히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며 경쟁자를 끌어내리려 하는 부하직원은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제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신자를 만나게 되고 인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도 있습니다.
일을 매우 잘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를지 모릅니다.
그 신자가 다른 신자들에게 “그냥, 이 정도만 하면 돼!”라며 그 신자가 사제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사제는 모든 봉사자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사제가 본당 전체를 생각할 때 그 한 사람만을 좋아하기보다는 전체가 잘 돌아가게 하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와 반대로 누군가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예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이와 똑같이 자리가 매겨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높낮이가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내 주위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때 매우 공부를 잘하는 한 친구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난 치과의사가 될 거야. 다른 의사들은 환자가 오면 밤에도 나가야 하지만, 치과의사는 정시 출근, 정시에 퇴근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거든.”
저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려고 하는지보다는 자기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이에게 이런 생각을 누가 품게 하였을까요?
그런 부모나 선생은 세상에서 기억될 수 없습니다.
반면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님의 사례는 참 좋습니다.
만약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를 완전하게 키워내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 설리반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을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깊은 만족과 성장을 경험하며, 헬렌을 돕는 일이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하였는지 알면 나의 위치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미사만 빠지지 않고 나가라.” “성당 나가는 게 다 너에게 좋은 거야.”라는 식은 나의 위치도 하늘에서 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어라.” 등의 완전한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부모라야 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가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비전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6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5,17-19
힘든 일을 기쁘게 할 때, 그 일이 곧 복음의 길입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특강을 다니면서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주제요 화두인 회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회개라고 하면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십니다.
지난 잘못에 대해 크게 가슴 치는 것, 하느님과 이웃에게 소홀했음을 뉘우치는 것,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서 새삶을 모색하는 것...
그런데 또 다른 스타일의 회개가 있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얼굴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왜곡되고 그릇된 하느님 상을 깨트리는 일입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상이 많이도 엉뚱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분, 너무 크신 분이어서 이토록 작고 부족한 나와는
상대도 하지 않으시는 분.
그런데 오늘 신명기 저자가 소개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길이 너무 힘겹고 혹독할 때면,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면서,
즉시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랍니다.
루카 복음 사가가 소개하는 하느님의 모습도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분, 대단한 분이셨지만,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일관되게 작고 겸손한 모습을 유지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큰 사람들, 높은 사람, 고관대작들과 어울리지 않으셨고, 언제나 작고 가난한 사람, 세리, 죄인들과 기쁘게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죄인들과는 완전 동떨어진 엄청 대단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조차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재미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 역시 특별하고 대단한 행위를 통해서라기보다 일상의 작은 계명에 충실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요즘 마음이 하도 울적하고 거시기해서 시간 될 때 마다 피정 센터 구석 구석 봄맞이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돌아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가 생각해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배수로 낙엽 치우기, 병들어 죽은 나무들 잘라내기, 매실나무 전지 작업, 쓰레기 분리수거...
머릿 속이 복잡할 때는 역시 단순 작업이 최고입니다.
일에 온전히 몰입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니, 기분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별것 아닌 일이 없습니다.
특히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다들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들, 짜증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얼굴로 할 때, 그 일이 곧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요, 복음적인 일,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2025. 3. 26. 수)(마태 5,17-19)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은, 율법에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의 율법 실천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실천’을 가르치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율법 실천의 완성’은 ‘사랑 실천의 완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 실천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여기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라는 말은, “사랑은 항상 빚으로 남아 있다.” 라는 말이고, 이 말은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7-18).”
사랑 없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은 없고
기쁨만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지키고,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삶은 기쁨만 가득한 삶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의 삶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 삶은 삭막하고 어둡고 피곤하고 불행하기만 합니다.
또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로만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위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또 진심으로 율법을 실천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말만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 또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는 것, 그런 것은 모두 위선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은, 그렇게 위선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올바른 실천을 하도록 바로잡으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2) 유대인들은 안식일 문제나 정결 예식 문제 등으로 예수님과 충돌하면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지하려고 하시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음식에 관한 규정과
이혼장에 관한 규정 등을 당신의 권한으로
폐지하셨습니다(마르 7,19; 마르 10,5-9).
그러나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을 폐지하신 적은 없고, 바리사이들이 만든 규정들이나 유대교에서 만든 규정들만 폐지하셨을 뿐입니다.
그런 규정들이, 인간들에게 계명들을 내려 주신 하느님의 본래의 의도와 사랑을 거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은 종말이 될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영원히 변함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즉 인류 구원 사업이 완성된 다음에는,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 있는 나라입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계명들을 자기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것은 무시하고 안 지키는 자”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자기 혼자서만 위선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가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큰 죄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자기 자신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잘 인도하는 신앙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