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해선 안될 사랑을 호기심으로 시작하고,
남자는 해선 안될 사랑을 이기심으로 시작한다.”
죽도록
사랑하다가
◈ 03.
스파게티 집 알바가 끝나면 승현이를 만나 점심을 같이 먹고,
손 잡고 길거리를 돌아다닌다던가 카페에 들어가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나와 함께 할 김승현이 없다는걸 알고 하늘이 돕는건지..
편의점 사장님이 일이 생기셔서 나보고 세시간이나 일찍 오란다.
오늘 열두명의 점심값을 외상한 만큼은 벌어야겠지. 후아.
힘 없이 걸었던 발걸음을 멈춰세우고 3시를 가리키는 손목시계와 편의점 안을 번갈아본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지, 나갈 채비를 끝내고 카운터에 서계시는 사장님.
지금 들어가면 또 밤 늦게 나오겠지.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어라 돈만 벌고있는걸까.
고등학생땐 내가 번 돈으로 먹을 거든 옷이든 뭐든 다 살 수 있어서 힘들게 일해도
즐겁기만 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스무살 내 인생에 대한 회의만 짙어진다.
일주일 전..? 내게서 김승현이 사라지던 때부터..?
“다원아 안들어오고 뭐해!”
급한 얼굴로 나와 내게 손짓하는 사장님. 넋 놓은 채로 있던 난 나를 끌고가려는 사장님의
손길에 정신을 차려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느릿느릿하게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고
입은 옷 위로 유니폼을 대충 입는 나를 보며 사장님은.
“우리 다원인 정말 일 잘한다니까.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그만 두지도 않고 성실해!”
“에이.. 뭘요.”
“시급 더 올릴까 생각중이야~ 다원이는 잘하니까.”
예전같으면 정말이냐며 들뜨고 기뻐해야되는 이다원이 실없이 웃어넘긴다.
내 어깨를 두툼한 손으로 서너번 토닥거리시고는 나가시는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그 좁은 카운터 안에서 주저앉듯 스르르 앉아버렸다.
어제까지만해도 내가 잡고있었던 그 아이의 손이 손끝에서 느껴지는것만 같아 주먹을 꽈악 쥔다.
‘너 대학가면 예쁜 여자들 많이 만날거지?’
‘예쁜 여자들이 누가 있는데?’
‘몰라. 아무튼 그럴거야? 안그럴거야?’
‘안그래야지.’
‘솔직하게 말해. 지금 솔직하게 말하면 나중에 한번쯤은 걸려도 용서해줄 수 있어.’
‘진짜야. 안 만나. 예쁜 여자들이 누가 있어?’
승현이의 대학 합격을 축하해주며 밥을 같이 먹었던 날.
정말 큰 용기내서 장난치는 듯 물어봤었는데.. 그런 생각 왜 하냐면서 내 머리까지 손가락으로 띵
튕기며 믿게 만들었던 김승현이었는데..
그걸 또 바보같이 믿어버렸던 난데..
거짓말 친 너보다말야.. 병신같이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내가 더 미워.
자꾸만 떠오르는 승현이 웃는 얼굴에 눈을 감…
“저기요, 계산이요.”
쉴 틈도 없이 일하는 구나, 나는.
몸을 일으켜세우고 짧은 사과와 함께 계산대 위의 물품들을 계산한다.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내 자유는 피곤에 싸여 잠에 취해 보내는 주말뿐이였지.
승현이 만날 틈.. 승현이를 만나 사랑할 시간.. 김승현이 나만 바라볼 시간을 주지 않았구나.
내 탓이네.
나를 사랑할 시간도, 남을 사랑할 시간도 잃어버린 이다원 탓.
*
하루종일 우울하다. 승현이를 생각하는게 힘들어서 손님이나 정신없을정도로
많이 와주면 괜찮을것 같았는데.. 오늘따라 손님은 몇명 오지도 않는다.
고등학교 끝날 시간쯤에 몇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우르르 나가더니..
어느덧 밤이 되버리고.. 우현이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정우현 이 새끼가 빨리 와야 내가 밥을 먹던가 말던가 하지!
저녁밥도 못 먹고, 일 잘한다는 쓸데없는 칭찬만 받고서 이렇게까지 버티다니..
[누님! 우현이 조금만 기다려줘요! -광민]
우현이에게 연락을 할까말까 핸드폰만 열어놓던 참에 문자가 드르륵 울린다.
광민이? 우현이 친군가? 모르는 번호로 온 우현이 관련 문자에..
이 녀석이 늦을거란 생각이 팍 들었다. 아.. 배고파. 진짜 배고파죽겠어!
근데 밥보다 정말 더 간절한게 딱 하나있다.
알바중이니 참아야되는데.. 자꾸 저 끝에 보이는 녹색 병들이 날 유혹하려해..
고개를 휘휘 젓고 광민인지 누군지 하는 아이에게 문자를 하려 답장을 눌렀다.
[우현이 친구야? 우현이한테 누나 배고프니까 아무거나 좀 사오라고 전해줘~]
지금 내 배 상태라면 뭘 사오든 맛있게 먹어치울 수 있으니까..
이 늦은 시간에 먹으면 건강에도 안좋을 뿐만 아니라 살도 엄청나게 찔테지만 그냥 마음껏 먹고싶다.
우현이가 사오면 같이 좀 먹고나서 소주 두병 사가지고 가야지.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소주 두병 혼자 들이키고서 푹!! 자야지.
아무 생각도, 아무 걱정도 하지않고 그냥 푹 자버리는거야.
우현이만 기다리길 30분. 다른 날보다 오래 서 있는 터라 다리가 띵띵 부어오르는게 느껴진다.
종아리를 손으로 주무르며 마사지를 하고있는데…
“으아! 무거워!! 드디어 다왔네!”
“얌마 비켜!!”
“정우현 오늘 알바 하지 말라니까??”
“누나!! 순대랑 떡볶이 사왔다! 짜안~”
어정쩡한 포즈로 종아리를 주무르는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듬직한 남자 아이의 등에 질질 끌려오는 우현이.. 손에는 까만 봉지 하나를 흔들고
나를 바라보며 헤헤 웃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광민이?에게 말을 걸었다.
“우,우현이 왜 이래? 너네 술 마셨어?”
“누님 죄송해요. 알바때문에 안데리고 가려그랬는데..조금만 마신다그래서 따라왔다가
이 미친새끼가 혼자 세병이나 마셨어요.”
“아냐아냐! 나 진짜 소주병 뚜껑만큼 마셨는데! 나 얼마나 멀쩡해!! 그치, 조꽝?”
“닥쳐. 닌 오늘부로 알바 짤리는거다.”
“사장님 내 애교에 넘어오신다~ 꼴까닥!”
술취한 인간 두명만 들어왔을 뿐인데.. 알콜 냄새가 확 풍긴다.
정우현 니가 술을 마실게 아니라 누나가 마셔야 하는… 설마 윤가을 때문에 마신거야???
“누님 저 어디 가볼 데가 있는데.. 우현이 어떡할까요?”
“어,어? 우현이랑 같은 아파트 사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빨리 가봐.”
“얘 데리고 가기 힘드실텐데.. 이 주변에 있을테니까 아까 그 번호로 전화주세요.”
“응.. 그래. 잘가구..”
광민이가 나가고, 카운터 앞에 널브러져있는 우현이와 그런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나만 남았다. 우현이의 알바 시간은 새벽 4시. 집에가서 두시간 자고 또 학교 나가는 우현이..
학교에서 또 엄청 주무시니까 이런 폐인같은 생활이 이어질 수 있는거겠지.
“우현아..”
“누나 배고프댔지. 얼른 먹자.”
혼자서 잘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는 녀석이 안쓰러워서
카운터에서 빠져나와 우현이를 겨우 일으켜세웠다. 알콜 냄새와 함께 담배 냄새까지..
겨우 일어나선 또 쓰러지려하길래 녀석을 잡아준다는게 엉겁결에 안아버렸다.
두 팔에 힘을 꽉 주고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겨우 지탱하는 우현이.
“누나 나 아직 안취했어.”
“웃기지마. 너 빨리 술 안깰래?”
“나..떡볶이랑.. 순대랑.. 엄청 많이 사왔는데..”
제길. 여기까지 들었어야했는데..
“누나 나 딱 한병만. 진짜 딱 한병만.. 응??”
나도 꾹 참고있는걸.. 니가 그렇게 물어보면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날 믿고 있는 사장님의 얼굴이 휙 하고 지나갔지만.. 난 이제 이 편의점에서 짤려도
아쉬울게 없다고 생각되니까..
“그럼 같이 마시자. 편의점 문 잠그고. 창고에서!”
“와우! 누나 최고!”
내 어깨를 꽉 누르더니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며 힘겹게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윙크하는 정우현.
무거운 우현이를 편의점 창고 쪽으로 겨우 옮겨두고서 편의점 문만 잠갔다.
떡볶이와 순대를 들고 소주 세병을 꺼내 CCTV를 향해 죄송하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 창고로
쏙 들어갔다.
내가 가지고 들어온 떡볶이를 뺏어들곤 열심히 떡볶이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우현이.
니가 지금 제 정신이 아닌데, 그렇게 손이 미끄러져서야 그 작은 매듭 하나가 풀리겠니..
한심해보일만큼 술에 꼴아버린 정우현을 또 먹여도 되나 걱정이 들었지만.. 뭐 괜찮겠지.
순대를 펼쳐놓고, 정우현이 바보처럼 풀지도 못하는 떡볶이를 내가 대신 풀어 펼쳤다.
그랬더니.
“우왕~ 누나 짱! 멋있다!”
“정신을 놨어, 아주 그냥.”
“우혀니 정신 요기 있는데요!”
지 머리 카락을 쭉 잡아늘어뜨리며 애기 목소리를 내는 정우현을 보다가.. 소주병을 깰 뻔 했다.
굳은 내 반응에 민망해졌는지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콕 찍어먹는 정우현.
소주병 뚜껑을 따고 소주병을 정우현 하나, 나 하나 가졌다.
병채로 마실수 있는게 참 행복하다. 원샷으로라도 다 마셔버리고싶으니까.
순대를 하나 먹고, 소주 한 모금을 들이키는데 우현이가 말을 꺼낸다.
“누나.. 나 가을이 때문에 힘든거 아니다?”
“...당연하지! 니가 걔 때문에 힘들리가 있어?”
믿는 척 넘어가주면.
“윤가을이 내 마음 갖고 놀았던 것보다 난.. 걔가 변한게 더..싫어.”
변했긴 변했더라. 화장도 그렇게나 두껍게 하고, 남자친구도 아닌 애한테 대놓고 그렇게 붙어다니고..
“나도 힘들고 짜증나서.. 그렇게 막 변해볼까 했는데.. 내가 왜 걔 때문에 그래야돼?”
“그래..니가 그래야될 이유 없어..”
“그래서 나 다른 사람 좋아할거야.”
“누구??”
“윤가을보다 훨씬 예쁘고 착한 사람 찾을거야.”
헤 웃는 우현이 웃음에서 슬픔이 묻어나오는 것 같아서.. 안쓰러워 우현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우현이 너가 이제서야 그런 마음 갖게 됐는데.. 난 승현이 말고 다른 사람..
언제쯤이면 꿈꾸게 될까.
아직도.. 헤어진게 믿기지가 않아. 이렇게 있으면 또 나 데리러 올것만 같고..
내가 힘들고 아파하면 옆에서 날 꽉 안아줄 것만 같은데..
마음이 아프려해서 소주를 들이켰다. 쉴 틈도 없이 쓰디쓴 알콜을 마셔넘기는데..
안그러려고 했는데 눈물이 흐른다. 그걸 또 우현이가 볼까봐 눈물을 쓱 훔치고 떡볶이를 먹었다.
순대도 먹고.. 배고팠던 걸 채워주는데.
“어.. 맞다. 누나 승현이형은 오늘 안 와?”
아씨. 쥐고있던 이쑤시개를 떡볶이 국물에 떨어뜨려버렸네.
“으응.. 승현이.. 이제 안올걸..”
“형 왜 안와??”
“….”
“누나 설마..”
헤어졌냐는, 깨졌냐는, 끝났냐는 그런 말은 듣기 싫은데. 나도 인정하기 싫은 단어들을..
다른 사람 입에서 쉽게도 단정 지어버리는거 정말 싫은데.
“형이 그랬어?”
“임마. 니꺼 이쑤시개 내가 쓴다. 니가 놀래켜서 빠뜨렸잖어!”
“형이 그랬냐고.”
“아니.. 아니야. 그런 얘기 하지말자..”
“아나 술이 확 깨네. 유현주 미친..”
술이 확 깼다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쌍욕을 혼자서 내뱉는 니가.. 아직도 정신이 없어보여.
승현이 얘기는 그렇게 넘어갔지만..
아직 아무도 모르는 김승현과 내 사이를 이제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알아가겠지.
난 한명에게조차 말하는게 조심스럽고.. 힘들고 그런데..
김승현 너는 그 여자랑 행복하니까.. 이다원이랑 헤어졌다는 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지?
그래도 아프지도.. 않지? 행복한 감정이 더 크지?
네가 나 없이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오늘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체념하고 마음 다스려야되는데도 난.. 그게 안돼.
나랑 헤어지고 나서 아파야할 니 몫까지 내가 다 가져온거겠지.
내가 너처럼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 찾기 전까지 아파야되는거겠지..
근데.. 나 그런 행복 안찾아도 좋으니까.. 더 아파도 좋으니까 제발.. 니가 와줬으면 좋겠어..
정우현이 먼저 남은 소주병 하나를 잡을까봐 내가 먼저 들고있던 소주병을 다 마신후
남은 소주병을 들었다.
눈까지 풀린 주제에, 내가 소주병을 쥐자 나를 째려보는 우현이.
뭐, 뭐! 째려보면 어쩔건데?
“누나 반띵!”
“너 그거까지 네병째고, 누난 두병이야. 넌 이제 고만 마셔.”
“치사해..”
치사하다는둥 치사빵구라는둥 정우현 말은 다 무시해버리고 마지막 한병을 쭉 들이켰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
내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고 주구절절 신세한탄이 시작됐다.
“누나.. 돈벌어서 뭐 할건지 알아?”
“아니.. 나도 그게 제일 궁금했어. 누나 한달에 얼마 벌어?”
“많~이. 근데.. 그 돈 쓸 시간 조차 없다? 웃기지..”
“왜? 다른 애들 보면.. 옷도 사고 귀걸이도 사고 뭐.. 그러던데 누나도 그러면 되지.”
“그럴 시간조차 없거든..”
차라리 공부를 할걸 그랬지. 재수라도 할걸.
학교라도 다시 다니고싶다. 다시 다닌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거 같은데....
나 어쩌다가 이렇게 망가진걸까.. 그나마 하나 자랑스레 갖고있던 그 아이까지 잃어버리고..
“누나 알바 다 관둬.”
“..응?”
“나랑 같이 수험생해서 공부해서 우리 대학가자!”
“풉.. 됐어. 이제와서 무슨 공부야. 괜찮어..”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제일 빠른거랬다!”
공부라니.. 책만 펴도 머리에 쥐가 날것같아 죽으려고 하는 사람한테 공부를 하자니..
“재수하는거야! 어때?”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일은 관둬. 그리고.. 누나도 누나만의 시간을 가져.”
나만의.. 시간?
“미용실 가서 머리도 하고, 예쁜 옷도 많이 사고, 누나 하고싶은거 다 해. 누난 스무살이야.”
“알바 다 때려 쳐?”
“응. 그만하고 이젠 쉬어. 독서실 끊어서 공부도 하고!”
“공부.. 하하.”
“우리 대학생 되서 진짜 좋은 애인 만나는거야! 어때? 좋지!”
들뜬 얼굴인 우현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고 만족스런 웃음을 보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우현이.
“내일 알바 다 때려치우기.”
“응.”
“내일 미용실 가서 예쁜 머리 하기.”
“응.”
“백화점 가서 예쁜 옷 사 입기.”
“응.”
“이거 다 정우현이랑 같이 하기.”
마지막 말에 데이트냐며 푸하하 웃다가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해버렸다.
이럴땐 정우현이 진짜 내 친동생이였으면 싶다.
난 동생도 없고 언니도 오빠도 없으니까.. 엄마 아빠가 여행갈때면 어찌나 외로운지..
근데 언제하냐고 물어보자 내일이 놀토라며 내일 하자는데..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이겠지.
나도 여잔 맞나보다. 나 꾸미고 뭐하고 한다는 기대에 두근거리다니..
“카아~ 맛있다“
“너 죽을래! 언제 뺏어갔어!! 내놔!”
그 두근거림만 느끼다가 손에 있던 소주도 녀석에게 뺏긴걸 인식하지 못하고있었지.
자기 몸도 못추스리는 두명이 술병 하나 가지고 티격태격 싸우는데..
“너네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바로 뒤에서 화난 듯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 몇시간 전만해도 환한 웃음으로 내게
일을 잘한다느니 시급을 올려주겠다느니 칭찬을 가득 해주셨던 사장님이었다.
“아니,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문 잠가놓고 이게 뭐야? 술은 또 누구 허락맡고?”
“사장님 우현인 잘못 없…”
“다원이 누나 잘못 없어요!! 제가 누나 꼬신거…”
“소주 꺼낸건 저예요! 제 잘못이에요!!”
“지금 둘다 똑같은데 누가 더 잘못했다는거야?”
술냄새가 풀풀 풍기는 창고를 깨끗하게 치우고는 사장님께 꾸중을 받는 나와 우현이는
술이 확 깨버린지 오래다.
난 이제 곧 짤려도 상관없기에 우현이를 감싸면 정우현은 또 날 감싸느라 바쁘다.
으구.. 이걸 착하다고 해줄수도 없고!
주머니에서 담배까지 하나 꺼내 물으셨던 사장님의 담배는 어느덧 짜리몽땅하게 작아져있고
나와 우현이는 땅바닥만 쳐다보며 사장님 눈치만 보고있다.
아 어차피 나 관두기로 했는데.. 나 관둘테니 용서해달라 그래야겠다!
“사장님..제가 관둘게요. 그러니까 우현이 자르지 말아주세요..”
“내가 언제 너네 둘 자른다 그랬어? 실망했을 뿐이야.”
“우와앙~ 역시 우리 사장님!! 저처럼 새벽타임 꾸준히 나오는 애가 어디있…”
“꾸준히 나와서 나 안오는 날마다 소주 꺼내 마셨지??”
“에?? 아니에요!! 오늘이 처음! 진짜 처음이라니깐요.”
자를 생각까진 없으시는 듯 보이자, 촐싹쟁이 정우현이 사장님 한쪽 팔에 매달려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린다. 여자애들한테나 보이면 다들 넘어갈듯한 눈웃음까지 치면서..
아 저게 여자였으면 진짜 꼬리 몇개는 달고 다닐 여우였겠다 싶은 징그런 생각이 들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담배 불을 끄신 사장님이 우현이 머리를 콩 쥐어박고, 내 머리까지 콩 쥐어박으신다.
그리곤..
“둘다 한번만 봐주는거야. 다음부터 이러면 얄짤 없어. 알았어?”
“당근!! 오늘만 봐주쎄요~ 잘할게요~”
“저기.. 사장님 저는 관두려구요.”
“뭐?? 왜 관둬! 우현이 녀석은 용서하기 힘들지만 다원이 봐서 용서하는건데..!”
날 보고 용서한다는 말에 우현이가 사장님 팔을 휙 내팽개친다. 사장님을 노려보는
정우현을 보고 웃다가.. 이제 그냥 조금 쉬고싶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나 같이
열심히 일하는 알바생을 놓치긴 싫은지 계속 안놔주시는 사장님..
역시 난 이런 존재라니까..??라는 생각이 들쯤.
“그럼 일주일에 세번만 해~ 어때 좋지?”
“다원이 누나는 엄청 좋아하구..”
“넌 임마! 다원이랑 같아??”
“뭐가요! 뭐가 다른데요!”
“니 친구들한테 담배 파는 모습 저기에 다 찍혔다, 이 놈아. 할말 있어?”
할말은 없는지 조용히 수그러드는 정우현. 역시..저 CCTV가 무섭긴 해.
어제 담배 그 자식한테 안 판게 정말 다행이야!!
일주일에 세번정도? 할만한데.. 어차피 스파게티 가게는 아예 관두고 싶고..
세번 정도는 편의점 알바 해서 내 용돈 벌던가 해야겠지.
“어때? 월 수 금 세번 하는거야.”
“음.. 세번은 괜찮네요.”
“그래. 오늘은 문 일찍 닫으려고 온건데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 좋은 사고를 쳐주시나~”
용서해주는 사장님이셨지만 계속해서 비꼬듯 말장난 치는 사장님.
사장님 얘기를 조금 더 듣다가.. 가게 정리를 깨끗하게 하고서 사장님을 포함해 셋이서
편의점에서 나왔다. 아직도 휘청거리는 정우현을 내가 잡아주고.
“다신 이런 일 만들면 안돼! 어서 가서 쉬어!”
“네 죄송해요. 안그럴거예요! 잘 들어가세요~”
“얼짱 사장님 잘가세요!!”
사장님이 저 멀리 가실때까지 얼짱이라느니 최고라느니 사장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치는 정우현을 끌고 집을 향해 걸었다. 아효.. 얜 왜 이렇게 무거운거야?
새벽이라 그런지 차도 몇대 다니지않고 사람도 안보인다.
이 조용한 새벽을 깨는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널 사랑하게 됐는지 내가 왜 이 꼴이 됐는지~”
정우현의 노래소리. 내 귀를 마이크라고 생각하는건지 내 귓가에다가 크게 외친다.
음정박자 다 무시하고 부르는건 뭐니.. 진짜 하마터면 무슨 노랜지 못알아들을뻔했어.
듣기싫어서 입을 막아보려는데 나를 보면서 하는 말이..
“그런 나를 부르면 오 마이 허어니이~~!”
“어이구야..”
허니라면서 나한테 들이대는건 또 뭐냐구.. 어서 집에 가기만을 바란다.
오늘 따라 집이 너무 멀다고 느껴져. 다리는 또 왜 이렇게 아픈거야..!
그나저나 정우현.. 이렇게 무거운줄 몰랐는데 엄청나네 무게가!
제발 입이라도 다물어주면 좋겠는데.. 언제 좀 다물래!!
“너무 나쁜 나쁜 그대 다 모르는 척 웃고만 있네~ 베이베!”
“야 시끄… 악!”
아 씨!! 보도에 깔려있는 블럭이 하나 빠져있는것도 못보고 걷다가 걸려넘어졌다.
덕분에 나만 믿고 걸어가던 정우현 역시 같이 넘어져버리고 노래소리가 뚝 끊겼다.
아프다며 소리치는건 나밖에 없고 정우현은 아예 대자로 뻗어버렸다.
아 이걸 진짜..!!
“아씨.. 아파. 야 너 사장님 앞에선 술 깬 척 잘 했잖아. 빨리 일어나!”
“누나 나 졸려..”
“어여 집가서 자자. 여기서 잘거 아니지?”
“우현이 좀 데따 주세요..”
“나 너 놓고간다??”
난 휘청 거리는 몸으로 힘겹게 일어났지만, 이렇게 뻗어버린 넌 어떡하면 좋니..
누난 너 업고갈 힘도 없어.. 알지.. 누나 이래뵈도 연약해.. 힘 없다구..
놓고간다는 말에도 꿈쩍 안하는걸 보니 그래도 된다는거구나?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렇게 놓고 가도 되는거지? 간다? 간다?
“간다? 누나 간다?”
발로 툭툭 쳐도 움직이지도 않는 정우현.
아씨, 몰라. 난 갈거야.
우현이를 팽개치고 집에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난 다시 주저앉아서 우현이를 흔들어댔다.
“응. 이제 집 가고 있어. 잘 들어갔어?? 전화 끊어도 되니까 빨리 들어가. 쌀쌀해.”
..정우현 개 자식아 일어나..
“학교는 왜 또 안가. 오늘 개교기념일이여서 푹 쉬었잖아. 푸하.. 웃기지마 진짜. 됐다니깐?”
김승현.. 승현이 온단말야. 여기루 걸어온단말야..
그렇게 눈 꼭 감고 자는 척 하지말고!! 일어나란 말야, 이 새끼야!
“일어나.. 정우현.. 일어나봐.”
승현이가 그냥 지나쳐주길 바라는 마음에 조용히 우현이를 깨웠다.
머리라도 한대 쳐서 정신 차리게 해주고싶지만.. 그럼 여기 이렇게 쭈그려앉아있는게
나라는걸 알거아냐. 누군지 볼거아냐. 그럼.. 나 진짜 그럼.. 울어버릴거 같단말야.
오늘 다른 여자랑 함께 있던 모습 생각나고.. 지금 통화하는 사람도 그 여자겠지..
“일어나.. 제발 일어나. 정우현 진짜 놓고가기전에 일어나. 3초 준다. 3..2..…”
“야 임마. 안일어날래??”
“…”
울먹거리는 목소리까지 나왔지만 그 목소리는 3초 카운트 다운이 다 끝나기도 전에 쏙 사라졌다.
승현이가.. 전화통화는 언제 끝냈는지.. 내 옆에 와서 발로 정우현의 다리를 툭툭 건들인다.
별안간 정우현의 우악스러운 괴음이 들리면..
꼼짝도 안하는 정우현의 정강이를 김승현이 차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 정신이 차려진건지 벌떡 이러나 통통 뛰어다니며 아픔을 해소시키는 우현이.
난 쭈그려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멍하게 있을뿐 아무 행동도 아무 말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아오!! 아파!! 누나 정말!! 어..형??”
“너 누가 술마시고 길바닥에서 꼬장부리래?”
“꼬장은 무슨!! 아 아파죽겠잖아! 정신이 확 드네!”
“정신 확 들라고 찬거다. 다원이 혼자 끙끙대는거 안보이냐?”
거짓말처럼 일어난 우현이는 아픈 정강이를 연신 문질러댔고.. 김승현한테 온 신경이 반응하는
멍청한 이다원은 그 아이에게서 나온 ‘다원이’한 마디에, 예전같다는 착각 하나에
또 마음이 콕콕 쑤셔온다. 이대로 있다가는 고개도 못들고 울어버릴거같아서..
일어나서 우현이 팔을 잡았다.
김승현 얼굴 볼 용기를 못내서 그렇게 정우현만 끌고 가려는데..
“이다원..”
승현이 목소리에 몇걸음 못가 멈춰서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때 다가와. 난 언제든 이렇게 있을테니까.”
하. 예전처럼이 뭔데.. 뭘까, 김승현..
우리 둘이 함께였던 예전? 아니면..
나 혼자서 너 하나만 죽어라 좋아하던 예전?
승현이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내가 김승현의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말했다.
“행복하니?”
“...”
“오래 되어봤자 몇개월 됐을텐데.. 2년 사랑 버리고 풋풋한 사랑 하게되서 행복하냐고.”
“..이다원…”
“그렇게 기다려봐. 니가 말하는 예전이라는게 언젠진 모르겠지만, 그 예전이라는 때가
되돌아올때까지 기다려봐. 넌 나 버렸어. 난 돌아가고 뭐고도 없어. 난 이대로야.
…니가 돌아온다면 모르겠지만.”
니가 돌아온다면 모르겠다는 말은..
내 자존심 다 버린 말이야, 김승현..
아무한테나 하는 말 아니야. 너니까 너한테 할 수 있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잘 알아들어서 나중에 후회할 짓 만들지마..
나 아픈거 싫어하잖아. 미치도록 싫어하잖아. 그럼 제발 니가 먼저 돌아와..
그때까지 네가 아닌 내가 언제든 이렇게 있을테니까..
내 할말을 마치고는 우현이를 데리고 걸어왔다.
마지막에 승현이의 말을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김승현에게 난 여전히, 그리고 계속 너 하나만 기다리겠다는 말 하나 했으니까..
미련 없이 걸어왔는데..
‘아파하지마. 조금만 아파하고 일어나. 이다원답게.’
...나다운 게 뭔데. 이다원다운 게 뭔데.. 뭔데 니가 이렇게 날 아프게 해.
니가 뭔데.. 김승현 너 왜 이렇게 나 힘들게 만드는건데?
우현이네 아파트 106동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그렇게 소주를 마셨는데도 이렇게 정신이 멀쩡하다니..
김승현 하나에도 이렇게 아플줄이야. 술도 다 필요 없나보네.
뭐에 기대라고.. 나한텐 아무것도 없는데 도대체 뭐에 기대라고..
“누나.. 울어?”
“어? 아니. 눈에 눈썹 들어갔나봐. 따끔해.”
“내가 호 불어줄까!”
“됐어. 어서 들어가.”
“형도 진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괜찮다고 우현이를 들여보내기 위해 계속 등을 떠밀지만 들어갈 생각도 안하네.
“누나 내일 당장 나랑 데이트 해!! 현주보다 이쁘게 만들어줄게, 내가!! 죽었어..
나 여자 보는 눈 쫌 높은거 알지??? 나만 믿어. 내 스타일로 만들어놓겠어!”
“현..주?”
“어...어이쿠 머리야. 누나 나 머리 깨지겠다. 들어갈게~ 빠이~”
“야 현주가 누구야.”
머리 아픈척 빙글빙글 돌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정우현 옷자락을 잡고
현주가 누구냐고 묻자 난감한 얼굴을 보이는 우현이.
누구야.. 현주가 뭐 하는… 설마.
“..김승현 여자친구야?”
“노..노노..노..노!”
“아냐? 맞잖아. 갑자기 걔보다 이쁘게 한다는게 왜 나와. 걔가 뭔데. 연예인이야?”
“응. 김현주!! 나 너무 좋아해~ 김현주 예쁘지않아?? 아 보고싶다~”
“진짜.. 연예인 말하는거야?”
“어!! 나 팬이야!”
안믿는 눈으로 쳐다봐도 맞다고 어찌나 크게 대답하는지..
귀가 아파서 믿어넘겼다. 옷자락을 놓아주자마자 인사와 함께 휙 사라지는 우현이.
대충 손을 흔들어주곤 바로 옆인 107동으로 들어왔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는 쓸쓸한 집이지만.. 나 혼자니까, 펑펑 울어도 날 볼 사람이 없다는게 좋아.
이다원이 남자 하나에 이렇게 약한 애라는거 아무도 모를테니까 너무.. 좋아.
김승현 너 하나 때문에 밤새 운다는거.. 넌 알기나 할까.
♥
사실 저 이렇게 성실하지못한 사람인데...
이 3편을 쓰는게 거의 반년이 넘었던 게으른 글쟁이입니다ㅠㅠ
팬카페와 타카페 연재속도에 차이를 주기위해
4편은 팬카페에 5편이 올라오면 올리도록할게요.
분량이 쫌 많고 제가 게을러서 쓰는데 오래걸려요^^;;;;
그래도 오늘 내로 5편쓰고 인소닷에 4편 올릴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첫댓글 승현이 너무 나빠요!!!! 하지만 그래도 승현이랑 다시 잘 됬으면 좋겠네요...승현이가 크케 아팠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당^^ 다음편두 기대해주세요!!!!!!!
내가 열한시에 안왔다고 사라진 님... 슬픕니다. 나 여덟시에 잤다구요.
ㅋㅋㅋ......미얀......ㅠㅠ.....
풉~ 네 맞아요~ㅎㅎㅎ 이번편두 재밌게 읽구 가요~~ㅌㅌㅋ
★으왕 너무 늦게 발견해서 미처 댓글 못달았는데!!!!담편엔 제이름도 올려주세요!!!!
★찾앗숩니다!ㅋㅋㅋㅋㅋ
이번편두 넘 재밌어요~!!승현이한테 뭔가 비밀이 있는거 같은,,,ㅎㅎ다음편두 기다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