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해군 본부로 편지 배달을 갔던 레몬이 돌아왔다. 레몬은 발목에 커다란 봉투를 묶고 있었다. 에페루스에서 왔던 것과 같은 규격이다. 카인은 그 편지가 신에게로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지를 펼쳤다.
『To. 신, 그리고 우리 아들 일행.
세계 정부에서 호칭 변경을 승인했다. 내년 1월 1일부터는 <비류>라는 정식 명칭이 붙을 것이야. 알려줄 게 두 가지가 있어. <로튼 애플> 이 해군 본부의 감옥에 갇혔다. 살인을 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무기징역이지. 그리고 내년부터 레이더 스플린터 해적단은 해적 현상금 수배자 명단에서 제외된다. 그러니 앞으로는 귀하라는 호칭을 따로 쓰도록.
-해군 본부 대위 포워드.D.그레이드』
그 날로부터 나흘 후(원래인 1주일 뒤), 12월 25일.
치프와 칼리프와 오스카는 낚시 대회가, 다이아와 라이아, 그리고 신은 케이크 대회가 열리는 옆 나라 <이로이나>로 갔다. 말을 타고 국경 지대만 넘으면 되기 때문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여섯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덕에 카인은 남았다.
배가 이 왕국, 샤드사우레루의 남쪽 항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싫어도, 죽어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그래서 남았다.
“…!”
책을 계속 읽고 있던 카인은 갑자기 고개를 휙 들었다. 배가 있는 항구 방향에서 사람이 여럿 있는 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은 에드리브 호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카인의 얼굴이 약간의 차가움을 벗었다.
벌떡 일어난 카인은 책을 잠시 덮어 의자에 올려두고 방을 나왔다. 여관을 나온 뒤 그는 공중비행으로 항구까지 한걸음에 왔다.
척.
무릎을 꿇어서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짜릿함을 눌러 내린 카인은 곧장 에드리브 호로 달려갔다. 그 사이 에드리브 호에 왔던 사람들은 이미 배를 타고 대륙을 떠난 후다. 멀리 보는 원근 시력을 쭉 키워왔던 카인이 저 멀리 가는 배의 깃발을 못 알아볼 리 없다.
그 깃발을 알아본 카인은 약간의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확 굳어졌다. 살짝 떠진 눈꺼풀 안의 적색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없어.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미간을 살짝 좁힌 카인은 배를 살폈다. 2층으로 내려간 그를 반긴 건 꽁꽁 얼어붙은 옆면과, 처참히 부서진 배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용골이었다. 용골을 부순 이유? 당연히 대륙에서 못 나가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배라는 것은 용골을 중심으로 세워진다. 가운데 아래쪽, 바다의 물살을 가장 크게 받는 곳이라서 힘이 가장 세야 한다. 파도의 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 용골이 무너진 이상 이 배, 나오 급의 에드리브 호는 여기서 끝이다. 지금처럼 서있을 수는 있어도 항해는 못 한다. 폐기만이 남은 길이다.
굳이 용골이 아니라도 에드리브 호는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1주일 밖에 나뒀더니 배 아래가 확 얼어버린 것이다. 얼음을 깼다가는 배까지 부서진다.
돌로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그와 동시에 어느 기억이 떠올랐다. 하류의 치세이에서 있었던 사칭 사건이.
“훗.”
빙하를 씌운 것만 같은 카인의 얼굴에, 차가운 연분홍색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도 차가웠다. 비웃음이었다. 못 나가게 한다고 못 나갈 그들이 아니다. 여기는 하류의 구석탱이에 붙어 있는 외로운 섬이 아닌, 중류라는 뚫린 곳에 뚫려 있는 대륙이다.
일행 중 넷의 출신 섬인 에페루스도 배 제작이 가능한 섬이다. 중류의 대륙 <샤드사우레루> 라고 못 하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일행이 놀고 있는 옆 나라 <이로이나>로 가기로 한 카인은 곧장 지갑을 열었다.
“어. 다 썼다.”
6인용 마차를 빌릴 때 쓴 돈이 25만G다. 지갑의 잔액은 8700G. 우습게도 이 돈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가만히 지갑을 보던 카인의 머릿속을 어느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냥 날아갈까?
결심이 선 카인은 갑판으로 올라왔고, 바닥에 내려서는데 때마침 조선소 주인이 도착했다.
“아이고, 미안하오! 수리 재료가 다 떨어져서는. 무슨 일이오?”
“배 용골이 부서졌습니다.”
카인의 말에 조선소 주인은 혀를 찼다.
“저런. 쯧쯧. 항해를 얼마 안 해본 배 같은데.”
그가 보는 에드리브 호는 ‘바닥만 빼면’ 멀쩡했다.
“이런 저런 날짜 다 따져보면 2년은 넘었습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짓을 한 것 같군요.”
“그럼 그 범인은 어디에?”
“이미 이 대륙을 떴습니다. 안의 짐은 배가 완성되고 나면 옮길 테니 며칠만 이대로 놓아두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선소 주인의 귀가 쫑긋거렸다. 완성?
“새로 만들고 싶소?”
“예. 제가 직접 배의 설계를 해두었습니다. 동료들에게도 나오처럼 뻑뻑한 배보다는, 제가 만들어둔 배가 훨씬 나을 것 같군요. 하지만 전 그림은 그릴 줄 모르므로 동료들에게 그림을 부탁해야 하지요. 이번 주 안으로는 돌아올 테니 배 좀 봐주시기 바랍니다.”
“아, 귀중품은!”
“다 갖고 있으므로 걱정 마시길.”
후다닥 조선소를 나온 카인은 그대로 부웅 떠올랐다. 코트, 장갑, 모자 등 중무장을 확실히 했지만 바람 차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원 공중비행을 할 줄 알면서도 마차를 타고 간 건 순전히 날씨 때문이다.
그가 <이루이나>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떨어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탓에 맑은 노을은 볼 수 없었다. 그게 조금 아쉬운 카인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행의 기운이 느껴졌다. 막 끝난 모양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오스카가 카인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다른 일행도 그를 보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칼리프와 치프는 담배를 물고 있다는 것 정도.
“카인 형이다! 우리 밥 먹고 가요, 카인 형!”
카인은 왼손을 들어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근처의 커피숍과 식당은 모두가 대회 참가자들도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가까스로 어느 식당에 한 자리 잡은 일행은 저녁을 라면과 떡볶이로 통일해 주문했다. 헌데 그 안에 신과 라이아의 몫은 없었다. 두 왕족은 케이크로 배를 이미 채운 후다.
그 식당 밖에는 6인용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 치프와 칼리프가 끌고 온 것이다. 물론 그들이 갖고 있던 낚시가방은 마차에 실려 있다.
카인은 마차를 보며 물었다.
“대회는 어땠어, 물고기는 많이 잡았어?”
“그냥 그럭저럭.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남은 앙금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해서일까. 카인의 물음에 대답하는 치프의 얼굴은 상당히 풀려 있었다. 동상 걸릴 뻔 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았을 그 때의, 의형제를 바라보는 치프의 시선은 상당히 안 좋았었다.
“치프 녀석, 100마리를 넘게 잡고 다 놓아준 거 있지? 오스카 녀석도 한 80마리 잡았고, 나도 70마리는 넘게 잡은 것 같아. 방금 말했듯이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들 놓아줘야만 했지.”
음식점인 데다가 사람이 많아서 담배를 간신히 자제하는 칼리프다.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인의 시선은 두 왕녀와 한 황태자에게로 건너간다.
“마마 세 분은 어땠습니까?”
“한동안 케이크는 가까이 하기도 싫어.”
신의 말에 다이아가 눈썹을 물결 모양으로 만들며 웃었다. 다른 다섯은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놀람을 표시했고, 카인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게, 너무 먹는다 했어요. 언니도.”
“맛있는 걸 어떻게 해. 아~ 배불러. 다이아, 신, 우리 걸어갈까?”
“춥다.”
아무리 배불러도 춥기 때문에 걸어가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식당 내 분위기로 봐서는 라면이 나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았으므로, 카인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말했다.
“에드리브 호의 용골이 부서졌다.”
“뭐라고?”
모두 배를 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그냥 넘어갔지만 다이아만 달랐다. 그녀는 쌍둥이 언니에게 용골이 뭐냐고 물었고, 라이아는 배의 심장이라고 대답했다. 이해했으리라 여긴 라이아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심장 = 용골?
오히려 머릿속의 물음표만 더 늘어난 다이아다. 사람으로 따지면 심장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부위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그녀다. 연인의 속내를 모르는 카인은 담배를 손에 들기만 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용골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날씨 때문에 모조리 얼어붙었어. 녹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냐.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여섯 남녀는 집중해서 카인의 말을 경청했다. 주위가 너무 산만했기 때문에 치프가 기를 펼쳐 방어막을 만들어야 했다.
“이제 좀 낫군.”
“확실히.”
“집중해요, 두 분.”
소곤거리는 신과 라이아를 향해 다이아의 작은 경고가 날아들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레이더 귀하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그랬음은 분명하다.”
“스플린터, 아니, 레이더가 여기서 왜 나오나.”
“놈들은 레이더 귀하의 깃발을 갖고 있었어.”
카인의 말에 일행은 미간을 구겼다. 치프가 대표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카인?”
“응. 두 눈으로 확실히 봤어. 하지만 난 믿어. 위장선이야. 레이더 귀하가 그럴 리 없어.”
“우리도 믿어요, 카인.”
다이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더임을 몰랐을 때를 제외하면, 다른 재회는 모두 웃으면서 만났다. 헌데 그 용무는 모두가 진지 그 자체였다. 친분이 꽤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가 아니라는 확신도 곧장 할 수 있으리라.
“어쨌건 밥 먹고 돌아가서 내일, 할 일이 두 개가 있어.”
“그게 뭐에요, 카인?”
다이아의 물음이다.
“설계도를 그리는 겁니다. 그걸 바탕으로 배를 다시 제작하는 거지요.”
카인처럼 담배를 손에만 들고 있기 시작한 칼리프가 되물었다.
“제작한다고?”
“어. 새로 만든 배로 항해를 시작하는 거다. 놈들의 정체도 다 밝혀야겠지.”
“레이더에게 원한이 있거나 우리에게 원한이 있거나, 둘 중 하나네.”
왼손으로 턱을 괸 라이아의 중얼거림이었다.
“우리에게 원한이 있는 게 더 확실할 겁니다.”
“누가 물어봤어?”
라이아의 퉁명스러운 받아침이었다. 치프는 열을 발끈 받았지만, 오스카의 저지로 표출하지는 못 했다. 라이아는 턱을 괸 그 상태로 카인을 바라봤다.
“그럼 며칠이나 걸려?”
“모르지요. 전 설계사가 아니니까요. 오스카와 칼리프라면 알지도요.”
“설계도를 그려봐야 알겠어요.”
오스카의 말에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뜻이다. 가만히 듣던 치프가 물었다.
“그럼 또 하나의 일은 뭐야?”
“그림 보러 가자.”
“그림?”
카인을 뺀 여섯이 동시에 물었고, 카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라면과 떡볶이를 받으며 말했다.
“선실에 그림 액자 걸어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따끈따끈한 국물과 면, 떡볶이로 몸을 다시금 녹인 일행은 마차를 타고 <샤드사우레루>로 돌아왔다. 다른 새들과 함께 대회를 즐겼던 레몬은 돌아오는 주인의 어깨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날.
칼리프와 오스카는 카인의 말대로 설계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에드리브 호가 종이 위에 실리는 순간이다.
배는 선실 2층 포함 총 3층이고, 이번에는 창문이 선실마다 달린다. 선수에는 레몬을 본뜬 선수상을 달고, 돛대는 총 3개. 앞에 계단을 놓고 뒤에 돛대 하나, 조타실과 측량실, 돛대, 2층 건물에 1층은 식당 및 식량 보존고, 2층은 함장실, 뒤에 돛대, 2층짜리 선미.
1층은 앞뒤로 물자창고지만 선실을 따로 배치하지 않고, 2층짜리 간이침대, 커다란 탁자와 의자 9개, 침실 3개, 뒤쪽은 마찬가지로 물자창고. 선실 따로 배치하지 않고.
2층은 1층과 크게 다르지 않고, 침실 4개, 화장실과 욕실, 그리고 창고.
각 침실은 침대와 옷장, 걸상과 책꽂이, 무기고. 들으며 그림을 그리던 칼리프와 오스카가 고개를 들었다.
“무기고?”
“탄환 때문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따로 필요한 건 또 없어, 다들?”
“나와 오스카, 지도는 어디다가 넣어?”
“책꽂이에 보관해.”
“…….”
명쾌한 결론(?)의 기운에 눌려, 일행은 아무 토도 못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