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매8경 중에서 제3경인 꽁돌.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가지고 놀던 돌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2011.07.17~18(1박2일)/ ⓒ벅수.
▲ 관매8경 중에서 제5경인 하늘다리로 가던 중에 만난 참나리. 저 멀리 연인섬이 정겹게 마주보고 있다.
▲ 관매도 찾아 가는 길
▲ 관매도 공식 홈페이지 (클릭)☞ http://www.gwanmaedo.co.kr/
▲ 길 끝에는 항상 바다가 있고, 바다에는 또 다른 길이 있다.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다.
진도 남단에 있는 팽목항에서 24km, 하조도에서 7km 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관매도. 섬 속의 섬...관매도는 그렇게 바다위에 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또 하나의 그리움을 안고 떠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조씨 성을 가진 선비가 해변에 피어난 매화를 보고 관매도(觀梅島)라 했다 한다. 그러나 실제 관매도에는 매화나무가 없었다.
조도에서 날아오르던 새가 잠시 쉬어간다는 뜻을 가진 볼매도로 불리우다가 일제시대 때 지명 정비를 하면서 관매도(觀梅島)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맞는 듯하다.
▲ 붉은 점선은 당일 오후, 파란 점선은 이튿날 오전에 걸었던 길이다. 관매 4,6,7,8경은 유람선을 타야 볼 수 있다. 민박집 '관매사랑'은 1박2일 팀이 묵었던 곳이다. 관매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여 마을 소득원으로 활용하고 있단다. 최근에 지은 곳이라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고, 바로 앞에 해변이 있어 제일 좋았다.
▲ 일탈(逸脫)...한 달 동안 내리던 비가 멈추었다. 당초 계획은 추자도였다. 완도항에서 짙은 안개로 인해 배는 결항되었고, 결국 진도 관매도로 갔다.
▲ 창유는 조도 어류포항의 다른 이름이다. 조도면 창유리...
▲ 팽목항에서 관매로 가는 12시 배 승선표를 끊고...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농협에서 운영하는 배를 이용하면 약40%정도 비용이 절감된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배편은 약8만원...민간업체가 운영하는 배편은 약13만원이 들었다. (성인 9명, 카니발 한 대 도선...그러나 관매도에서 차량은 필요 없었다)
▲ 팽목항...현재 접안시설 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 팽목항에서 1시간 20분 만에 도착한 관매도.(돌아올 때는 2시간 30분 걸렸다. 빠른놈과 느린놈의 차이다.)
배에서 내려 오른쪽에 관호마을, 왼쪽으로 가면 관매마을이다. 우린 관매해수욕장이 있고, 해변 앞에 있는 민박집 관매사랑을 찾아서 왼쪽으로 간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산우(山友)들...10명이 그곳에 먼저 짐을 풀었기 때문이다.
▲ 선착장에서 걸어서 5분도 안된 거리에 관매해수욕장이 있고, 첫번째 건물이 바로...관매사랑 민박집이다.
▲ 민박집 관매사랑은 관매마을 공동으로 건축하였고 공동관리하면서 마을주민 수입원으로 운영하고 있단다. 1박2일 팀이 이곳에서 묵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짐을 풀고 곧장 트레킹을 나선다.
▲ 관매도해수욕장은 관매8경 중에서 제1경이다. 해수욕장 길이는 약3km 폭은 80m정도다. 경사가 완만하고 맑고 깨끗한 물이 유혹적이다. 해수욕장 주변 모래사장과 해송 숲속에 모두 19기의 몽골텐트도 있다.
▲ 관매도해수욕장 뒷편에 울창한 해송 숲은 관매마을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역활을 하고 있다.
해송은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소나무로 수피가 검은색을 띠어 흑송 또는 곰솔이라 부르기도 한다. 육지에 자라는 소나무는 육송이라하며 수피가 붉은색을 띠어서 적송이이라고도 부른다. 넓이가 약 3만평인 관매도 해송숲은 관매도해변을 따라 넓고 길게 형성되었다.
길가에는 붉은 산딸기가 지천이다.
▲ 해변에 가득 피어난 큰달맞이꽃...
▲ 사랑의 무게는 마음에 반비례한다...
▲ 1억 3,500만 년 전의 퇴적암. 상상할 수 없는 시간동안 퇴적되어 바위로 굳어진채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독립문으로 가는 길에는 울창한 비자림이다.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
▲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소나무...
▲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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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래난초
▲ 바늘엉겅퀴
▲ 큰까치수염
▲ 방아섬으로 가는 길...
▲ 방아섬의 남근바위 - 선녀가 내려와 방아를 찧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 개발나물(미나리과)
▲ 방아섬 뒷쪽 해안가의 절경...
▲ 방아섬과 관매도 동쪽해변
▲ 방아섬과 남근바위...관매제2경
▲ 숙소 '관매사랑'으로 돌아와...저녁 식사를 한다.
한우와 삼겹살이 익어가는 소리에 맞춰...소주병과 맥주병은 힘없이 쓰러져 쌓인다. 바닷가에서 마시는 술은 왜 취하지 않은 거지? 답 없는 물음에 의문을 갖으며 술잔을 꺾는다.
새벽 1시까지 술자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고 또 끊어졌다 이어진다. 그녀의 달콤한 입술에 불혹의 나이는 힘없이 무너지고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도 본능의 뜻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게 관매도의 밤은 깊어지고 매화향기는 밤바닷가에 자욱했다.
▲ 새벽3시에 일어나 24시간이 지난...다른 날 새벽 3시에 잠들다.
그 많은 시간동안 대부분 술을 마시는데 썼고 나머지 시간은 걸어다녔다. 새벽 1시 쯤...뜨거운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알몸으로 밤바다에 뛰어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가슴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선배님이 끓여주신 따뜻한 라면에 소주 한 잔. 그렇게...뜨거운 가슴을 모두 내어주고서야 잠이 들었다. 인과응보...결국 그토록 갈망했던 일출 사진을 못 찍었다.
누가 옆에서 말했다. "해는 내일도 떠요."
▲ 아침 6시 50분... 최대한 빨리 찍은 관매도해수욕장이다. 가까운 해송 숲에 들어가 아침 안개 퍼지는 소나무를 찍고 싶은데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침 겸 해장국을 먹는다. 감자 된장국에 붕장어를 넣었는데 속이 확~~풀린다.
▲ 관호마을 전경...이 언덕을 넘어서면 관매도 남쪽해안이다.
▲ 돈대산 가는 길...관매해수욕장과 아름답던 해송 숲 그리고...관매마을이 보인다.
▲ 꽁돌...관매제3경이다. 주변에 돌묘과 공룡알처럼 생긴 암석들이 있다.
▲ 직경 5m 정도인 꽁돌과 저 멀리 연인섬(형제섬)이 정겹다.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가지고 놀던 꽁돌인데 두 왕자가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지상으로 떨어뜨렸고, 옥황상제는 하늘장사를 시켜 꽁돌을 주워오라고 명을 내린다.
하늘장사가 왼손으로 꽁돌을 받쳐들고 막 하늘로 올라가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에 매료되어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고, 옥황상제는 다른 사람을 시켜 하늘장사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 또한 거문고 소리에 빠져 헤어나올 줄 모르고 화가 난 옥황상제는 모두 돌무덤을 만들어 그 곳에 가두어버렸다 한다. 그 돌무덤이 바로 꽁돌 옆에 있는 돌무덤이란다.
꽁돌에는 하늘장사가 움켜쥐었던 왼손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 하늘장사가 갇혀있다는 돌무덤...
▲ 또 다른 옥황상제의 사자의 돌무덤...
▲ 하늘다리 가는 길에 바라 본 돈대산(219m)
▲ 하늘다리...높이 50m 길이 4m의 짧은 다리다. 하지만 하늘을 걷는 듯한 느낌은 충분하다.
▲ 하늘다리 중간에 설치된 투명 유리 아래로 바닷물이 보인다.
▲ 하늘다리와 돈대산(219m)
▲ 유람선에서 바라 본 하늘다리
▲ 관호마을...요즘 미역이 제철인 듯 마을은 온통 미역으로 덮혀 있다.
▲ 13시 50분 팽목으로 가는 배...2시간 30분 후에 팽목 도착. 왼쪽에 보이는 곳이 관매해수욕장이다. 검푸른 해송숲이 있고, 숲 뒤편에 관매마을이 있다. 선착장에서 5분 거리다. 차량은 꼭 도선 할 필요가 없다.
▲ 배는 관매도해수욕장을 스쳐 지나고...
▲ 선착장과 관호마을
▲ 방아섬과 남근바위
▲ 관매도 - 전체길이가 약 3km 정도인 작은 섬, 126가구 212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 조도대교 - 왼쪽이 하조도, 오른쪽이 상조도다.
▲ 하조도(下鳥島)
▲ 하조도 등대
▲ 하조도 어류포(창유) 선착장
▲ 녹진전망대에서 바라 본 울둘목과 진도대교 - 바다가 운다. 그대는 바다가 우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물길이 암초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매우 커 20리 밖에서도 바다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 울돌목이란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명량해협(鳴梁海峽)이라 불린다.
유속은 약 10노트(시속20km)... 2008년 5월에 조력발전소가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최대 전력생산이 9만kw로 3,500가구가 이용할 수 있는 청정에너지를 생산할 예정이란다.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한 대규모 조류발전의 상용화는 세계최초다.
진도대교는 1984년 10월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과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에 세워진 길이 465m의 사장교(斜張橋 중간에 교각이 없고 쇠줄로 교량을 지탱하는 교각)다. 2005년 12월 제2진도대교가 개통되었다.
이곳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일본전선 133척과 싸워 승전한 곳이다. 10배가 넘는 적선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에 대해 쇠사슬(철쇄 鐵鎖)을 얘기한다. 그 쇠사슬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의문의 대상이다.
쇠사슬이 기적같은 승전의 의문을 풀기위해 급조된 설화일지라도 그 당시 지옥같았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민중들은 로버트태권v라도 찾았을 것이다. 만약 명량대첩이 패전이 되었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 년 후, 1598년 12월 퇴각하는 일본수군. 조명연합함대가 노량해전을 승전으로 이끈다. 이순신 장군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16세기 말 동북아 3국전쟁(임진왜란)은 7년에 걸친 싸움을 멈춘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들은 변했고, 전혀 다른 세상인 17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길목 그 중심에 진도 울돌목이 있었다. 오늘도 빠른 조류처럼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있다. 그 시간속에 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랴.
2011.07.27(수)/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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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진도(珍島)'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릅니까.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가 있고 홍주가 있고 몸에 좋은 울금막걸리가 있는 곳입니다.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는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의 본거지, 유라시아대륙을 호령하던 징키즈칸의 후예들과 싸우며 우리 한민족의 자주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투혼이 살아 있는 울돌목 즉, 명량해전이 일어났었던 곳입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지 못했다면 우리나라는 훨씬 오래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도문화해설사 공부를 하면서 최근에 자주 접하게 되는 섬입니다. 예전에는 도로사정으로 광주에서 진도 여행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해안고속국도가 목포까지 연결되고 최근에는 광주에서 무안공항으로 가는 자동차전용도로가 개통되어 도로여건이 더 좋아졌습니다. 현재는 목포에서 영암 금호방조제를 지나 진도로 이어지는 77번 국도가 4차선 확장공사를 하고 있으니 얼마 후면 더 편하고 빠른시간에 진도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겠지요.
그만큼 우리들 곁으로 한발짝 더 다가온 진도(珍島). 오늘은 '보배로운 섬' 진도를 다녀왔습니다. 진도군은 유인도 49개와 무인도 212개로 이루어져 있고, 진도는 제주도 거제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세번 째로 큰 섬입니다. 그래서인지 일단 섬으로 들어가면 섬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고, 200~400m 정도되는 낮은 산과 구릉사이로 논과 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땅이 기름지다하여 '옥주(沃州)'라 불리기도 했고 '한해 농사 지어 삼년을 먹는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농토는 기름졌습니다. 농사가 잘되니 목숨 걸고 바닷일을 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해산물이 귀해서 '해변산중'이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오늘도 창가로 보이는 진도 들녘는 마늘과 보리가 한창 푸르름을 더해 주고 있었습니다. 바닷가 갯내음보다도 흙내음이 더 강렬한 곳입니다.
진도(珍島)라는 이름은 이미 백제 때부터 사용했고, 고려 성종 때 옥주(沃州)라 개칭하기도 했지만 곧 진도로 환원되었습니다. 후삼국 시대에 전라도 일대에서 견훤과 세력을 다투던 왕건은 909년에 진도 일대를 공략, 서남해안의 해로를 장악함으로써 나주평야까지 세력권에 편입하게 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1270년(고려 원종 11)에는 삼별초 군사들이 몽고에 투항한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진도에 본거지를 두고 대몽항쟁을 벌였습니다.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패해 제주도로 물러난 후, 진도 사람 1만 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13년 후에야 돌아오는 동안 섬은 황폐해졌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진도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1597년(선조 32)에 정유재란 때는 명량해전을 비롯한 수 많은 전투속에 많은 진도사람들은 죽어나갔습니다. 지금도 진도 여기저기에는 그때 희생된 사람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름없는 떼무덤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굵직한 갈림길 중심부에 있었던 진도는 희생이 많았고 그 눈물겨운 희생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노래와 놀이와 굿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씻김굿, 다시래기 4종목이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이며, 진도 만가와 북놀이가 전남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려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진도로 많은 유배객들이 귀향을 왔습니다. 당시의 귀양객들은 대부분 중앙 정계의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양반 지배층이었고, 그들은 노래나 글 그림으로 실의를 달래며 서당을 열어 진도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전파하게됩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소치 허련(1809~1892)은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나 조선 말기 화단에 최고의 남종화풍을 토착화 하였고, 그의 화풍은 가전되어 오늘날 호남화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자 1856년 고향 진도 첨찰산 아래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은거하게 됩니다.
진도(珍島)는 말 그대로 보배로운 섬입니다. 진도8경은 울돌목, 운림산방, 금골산, 남도석성, 용장산성, 조도, 관매도, 신비의바닷길 인데 이런 자연적 풍광보다도 역사적으로 큰 갈림길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견뎌왔던 진도 사람들 모두가 진정한 보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진주 조개가 외부의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내 듯이 바로 진도사람들이 그러지 않을까요. 시대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 몸으로 느끼며 그 시대의 주연으로 남고자 했던 우리 진도민을 비롯한 남도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보배이며 자랑입니다. 2011.07.30(토) 1차수정. /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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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hoto Trekking 원문보기 글쓴이: 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