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6일
*군 사령부 - 참모총장 강조사항.
․인명피해 감소.
․폭도 생포 목적 달성.
04시
*화정동 통합병원쯤에 있던 계엄군이 탱크 5대를 앞세우고 시내로 1Km 전진. 백운동 쪽에서도 대동고교까지 탱크 3대 전진. 고속도로 쪽도 무등 경기장까지 1Km까지 진격. 이 사실은 KBS에서 방송.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이유는 서울 . 목포간 도로 개통 위해. 수습대책 위에서 항의, 군이 들어온다는 소식 따라 도청경비 삼엄. 모두 총 들고 일일이 확인. *도청으로 계엄군이 진주한다는 소동이 벌어지자 김성룡은 김종배에게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탱크 앞으로 걸어가 총받이가 되자. 계엄군이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으면 전 시민이 무장 게릴라전을 펴고 싸우다가 안되면 끝에 가서 전원이 자폭해야 한다.”고 권유.
04시~06시
*봉쇄병력 시내로 압축.
․통합병원 - 공단입구 사거리.
․광주 - 나주간 도로 봉쇄지점 2Km전진.
04시 30분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바짝 압축해 들어오고 있다는 제보를 접수한 수습위는 “계엄군이 진입하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 것이 자명하다며 약속을 안 지키는 계엄군의 총에 먼저 죽자.”고 결의,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농촌진흥청 앞 탱크 앞에 드러누워 “우리 먼저 깔아 뭉게라.”며 시위했다.
*계엄군이 시내에 포진하자(화정 동서 농성 동까지 2Km 진격 포위망 압축) 특공대를 조직하는 등 분위기가 다시 경직.
*계엄군이 시위대들과 대치해 있던 시내 쪽으로 진입해 왔다고 시민들이 불안해 했다. 시위대들도 수습위원회에 “군이 약속을 어겼다.”며 항의했다. 장우석 목사 등 도지사 집무실에서 밤새워 대책을 협의하던 4~5명의 수습위원들이 현장까지 달려가 이를 확인했다. 현장을 본 이들은 “우리 손으로 곧 사태를 수습하겠으니 계엄군을 다시 먼저 대치장소로 철수해 달라.”고 계엄분소장에게 요청했다.
05시 45분
*계엄군 3개소에서 시가지를 향하여 1Km씩 전진 이동함.
*계엄사령부 발표 ― 계엄군은 소요 진원지인 광주시를 효과적으로 차단, 봉쇄함으로서 기타 전남 일대는 25일 현재 평온을 찾았다.
*내무부 안병하 전남 도경국장을 치안본부 대기 발령, 치안본부 작전과장 안병섭 경무관을 전보 발령.
06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다시 진입해 온다는 첩보에 따라 양기남은 임성택, 구성회 상황부실장과 함께 무장한 채 군용지프 차를 타고 농성 동 한국전력 앞까지 순찰을 나가 동 소 100M전방에서 계엄군 장갑차 1대를 발견하고 임성택은 진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공중을 향하여 1발 위협사격을 가함. 구성회는 2발.
08시
*계엄분소는 “외곽통로를 트기 위한 조치였지 진압은 아니다.”며 먼저 위치로 되 돌아갔다.
08시 40분
*수습위의 항의로 계엄군 퇴각함.
09시
*NYT지 기자가 시위대들과 인터뷰하면서 “앞으로 5일만 버티면 당신들이 승리할 것이다.”고 격려했다. 수습 위는 계엄분소를 방문, 4시간 30분 동안 대화했는데 계엄분소의 부사령관 (김소장)은 ①무장해제 ②수거된 무기를 계엄사 측에 반납할 것을 종용하면서 사태수습을 위해 계엄군 대신 경찰이 치안을 위해 시내에 투입할 것을 약속했으나 “오후 6시까지 무기반납 하라. 최후통첩이다.”라고 말하는 등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강력히 시사했다. 하편 이번 사태로 아들을 잃었다(미확인)고 전해지는 안병하 도경국장이 이 날짜로 치안본부로 대기발령 조치되었다.
*이 때까지 궐기대회. 20,000여 명 “계엄군이 약속을 어겼다.”고 성토대회. 시 외곽 양계장 사료 떨어져 닭이 죽어 나오고, 소, 말, 개줄 먹이가 거의 곤란. 계엄군 전진으로 대통령 담화 나가는데도 무시하는 듯.
*2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 궐기대회 갖고 훌라송 곡에 맞추어 “계엄철폐” 등 외치며 가두시위. 고교생들의 시위참가 촉구하는 벽보 나붙기도. 대책위는 유명무실한 존재. 시민들도 사태 추이 몰라 궁금해 항상 5만~1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있다. 학생들의 도청 경비 강화됐다. 수습위원들이 전원 대체되고 목사, 신부, 변호사들이 보강됐다.
10시
*목포 ― 역 대합실에서 민주화를 위해 꽃다운 나이에 숨져간 광주 학생, 시민들의 영혼을 달래는 분향 소를 설치했다. (#조선일보 취재일지)
11시
*시내 곳곳에는 계속 수습대책위 등의 이름으로 각종 안내문이 나붙기 시작. 안내문은 “①시민 군을 믿고 적극 협조해 주십시오. ② 질서회복에 힘써 달라. ③평상생활로 복귀하자.”는 등 상가, 수퍼마켓 시장개시, 운수기관 차량 운행 재개, 직장 정상근무 및 학교 등교, 생필품 확보 및 안전수송을 호소했으나, 26일 현재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목포 ― 시내고교 및 대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은 역전 광장에 모여 연좌시위를 하면서 줄지어 분향하고 있다.
12시
*도청 도지사 실에서 김종배, 정상용은 전남 도지사 장형태를 만나 메스컴에서 광주 시민에 대해 폭도라고 보도하는데 항의하던 중, 장형태 도지사에게 “광주 시민이 폭도라는 누명만은 벗어야 되겠다. 대통령 담화문 내용을 믿을 수 없다. 대통령의 광주사태 담화 발표 후 이어서 광주사태 일부에 대한 TV방영은 우리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고 정부 당국의 처사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계속 강경하게 대치할 것을 경고.
*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엄주태는 선두에서 약 2만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금남로 - 광남로 - 양동 복개상가 - 광주공원 - 전남대 병원 - 전남여고 앞 등을 시가행진.
14시
*도청 내무국장 실에서 김종배, 정상용, 정해직 등이 광주시장 구용상 및 도청 각 국장들에게 “① 1일 쌀 한가마니 반씩 제공해 달라. ② 부식 및 연료를 제공해 달라. ③ 관 40개를 제공해 달라. ④ 앰블런스 1대를 지원해 달라. ⑤ 5. 27부터 경찰이 치안유지를 담당해 달라. ⑥ 시내 버스를 타고 다니도록 하고 상가를 개점토록 해달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도청 부지사 실에서 김성용, 조아라, 홍남순, 이기홍, 명노근, 송기숙 등 재야인사들과 모인 자리에서 김성용 신부는 허규정 등에게 “ 우리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우자.”고 격려.
14시 30분
*도청 기획관리실에서 기동타격대 대원 30여명을 모아 발대식. 김종배는 “지금 우리가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광주 시내가 너무 무질서하게 되면, 도청을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이미지가 나빠진다.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시내 치안질서와 순찰의 임무를 부여하고, 여러분들만이 총을 휴대하고 시내 순찰을 하며,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을 줄 테니 임무를 수행해 달라.”는 격려사를 함.
*부지사 실에서 김신근 목사의 광주 시내 기독교인 대표 4명으로부터 사태수습비로 1천만 원을 모금 중에 있는데, 그 중 일부라며 금 100만원을 제공하는 것을 김종배와 함께 수수함.
15시
*유족대표와 부지사가 도청 부지사 실에서 “냄새나므로 빨리 장례 치러야...” 말하고 이에 대해 부지사는 “힘있는 대로 돕겠다.” , “장지는 광주시 망월동 광주 형무소 뒤 시립 공원묘지, 시민 장으로 하겠다. ”. 유족들도 시민 장 요구. 장례는 28일 예정.
16시
*도청 내에서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는 상황실장 박남선으로부터 동운동 방면에 계엄군이 진입해 오니 순찰하라는 지시를 받고, 기동타격대 1조로부터 6조까지 타격대원에게 전원 출동하라는 명령을 하여 계엄군의 동태파악과 담당구역의 순찰을 돌도록 지시.
16시 06분
*한국화약 광주화약고 경계병 배치(31사 1 / 11).
16시 55분
*장형태 전남 도지사가 기지회견을 갖고 사의를 표명함.
17시 30분
*03시에 시작된 궐기대회가 거의 끝나갈 5시 30분 무렵, 30대 초반의 한 고교 교사가 연단에 올라와 “나는 학생수습 위의 한 사람으로 고생하는 후배들을 옆에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주책없이 끼어 들었다. 내일이면 여러분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신분을 밝힌다.”고 말했다.
18시
*광주 시민 3만여 명이 자전거를 타고 행진을 하면서 지난 25일 내걸었던 7개항의 요구조건을 요구, 도청 앞 광장에서 시위.
*전 교사 - 3관구 수송자동차 중대 도착.(48대)
*휴가 귀대병력 복귀(6 / 106).
*도청 부지사 실에서 시민대표 및 학생대표들인 이종기, 김재일, 장세균, 조비오, 조아라, 황금선, 구성주 , 노승암, 김화성, 정상용, 김종배 등이 모인 자리에서 김창길이 “오늘 낮에 계엄분소에 다녀왔는데, 계엄 당국에서 금일 24시가 무기반납 시한이라고 하더라. 빨리 무기를 반납하라.”고 하자, 김종배는 “지금 총기를 반납하면 전부 죽으란 말이냐. 나는 여태까지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여 온 것이다.”고 반대의사를 표시함. 김종배는 밖으로 나와 2층 복도에서 상황실장 박남선을 만나 “지금 김창길이 우리들을 계엄군에게 넘기려고 한다.”고 하자, 박남선이 회의장에 들어가 회의를 무산시킴.
18시 30분~20시
*전 교사 - 사령관 외곽지대 순찰.
19시
*외국인 207명(미국인 134명, 일본인 9명, 영국인 3명, 기타)이 광주시에서 철수함.
*도청 기자실에서 성명불상자로부터 “국내외 여론이 광주사태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5일만 더 버티면 문제해결이 될 것이다.”라고 김종배 등을 격려.
밤
*마이클 아마코스트 미국무성 아시아 태평양담당 부차관보 발표 ― 지금의 상황에서는 질서확립에 중점이 주어져야 한다.
21시
*전 교사 문관 도청 잠입.
․지하실 TNT 2상자 뇌관 분리제거 후 복귀.
․특전대 하사관 편의대 복장으로 시내 투입 정찰 실시.
21시 20분
*기동타격대 시내 순찰.
22시 30분
*박남선은 YWCA에서 1백 명의 청년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을 하고 그 중 49명을 도청으로 인솔, 도청 사회과 사무실에 재웠다.
23시
*군 병력이 사복으로 시가지에 잠복. 이어 헬기로 병력을 계속 시내로 실어 나르면서 거리에 있는 학생들을 점거하기 시작.
*YWCA에서 성명불상자로부터 “YWCA에 예비군들이 대기 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쪽지를 김종배가 전달받고, “지금 도청 내에는 수용능력이 부족하니 우선 YWCA에서 대기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함.
23시 30분
*도보로 시내로 투입되기 시작, 요소 요소에 배치됐다.
*도청 내에서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온다는 첩보를 듣고 정부 종합청사 상황실로 전화를 하여 계엄군 진입여부를 확인한 결과, 성명불상자로부터 “계엄군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라는 말을 듣고, 김종배는 “계엄군이 선제 공격을 해오면 우리도 대응하겠다.”고 경고.
24시
*독침사건, 기자들이 의사에게 문의, “독약 침투 사실 밝혀지지 않았다. ”고 학생들이 독침 맞은 사람 신병확보, 경위 조사 중(사태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독침을 맞았다는 장계범씨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종적 감춰) 조작 가능성 많다는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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