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충원 뒷쪽에 아늑하게 안긴 오래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 경내로 오르는 계단길 |
현충원 꼬리 부분에는
호국지장사라 불리는 오래된 절이 포근하게 터를 닦았다. 이름도 매우 우
아한 공작봉 숲속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도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이 절은 처음에는 현충원을 조성하고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만든 절로 여기고 들어가
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그곳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당기기 시작했다. 문
화유산을 풍부하게 소장한 제법 오래된 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한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은 북쪽으
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瑞氣)가 나오는 것이다. 그 서기
가 나오는 곳을 가보니 그곳에는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수가 솟아나고 있었는데, 자리를 보니 기
가 막힌 명당자리라 그곳에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처럼 과
연 도선이 세웠는지 강하게 의문이 들며,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선조 10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
로 이 절이다' 내용이 있어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래가지
못하고 망했다가 되었다가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하고 화장암(華藏庵)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 명종 때 창빈묘역이 절 부근으로 이장(移葬)되고, 1577년 선조가 동작릉으로 무덤의 격을
높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고 하며, 왕실의 지원에 힘입어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
(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어린 시절 공부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시절의 일화(아마도 해
우소 사건인 듯)는 널리 알려져 '오성과 한음' 이야기의 한 페이지가 되기도 했다.
그 이후 1663년 중수를 했으며, 영조 때 산경표(山經表)로 유명한 신경준(申景濬)의 '가람고(伽
藍考)'에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꾸준히 법등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고종 7년)에는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고종 30)에는 경운(慶雲)
, 계향(戒香)이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구품탱과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가 되었고, 1920
년에 대방을 수리하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북쪽에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자연히 그곳에 안장된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
는 사찰이
되면서 그에 맞추고자 지장도량(地藏道場)으로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1983년
혜성(慧惺)은 호국의 신들이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원력으로 모두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
에서 화장사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줄여서 '지장사'라고도 함>로 이름을 갈았다. 그야말
로 현충원과
호국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이승만 전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는데, 국립묘지를 둘러보고 이곳에 잠시 들려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다'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부분 동향(東向)을 취하고 있다. (능인보전은 북향) 경내 동쪽에는 약수가 흘러나와
인근 상도동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2,500여 좌(座)의 지장보
살을 봉안하고 있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구품도, 독성
도, 약사불도 등 무려 10여 점을 가지고 있으며, 철불좌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불화(
佛畵)이다. 이들은 괘불을 빼고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근래에 만든 요사(대웅전 좌측) 내
부에
담겨져 있으므로 관람은 가능하다. (단 봉안된 위치는 종종 바뀔 수 있음)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자리하여 산사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찾아와 안기고 싶은 절집이다.
또한 경내
에서 현충원 일대와 한강, 강북 지역(용산구와 남산)이 두 눈에 바라보이는 등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아 이승만이 괜히 침을 흘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절을 먹여살리는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을 일은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충원이
아니었다면 주택가에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땅에 자유와 번영을 안겨준 호국신들의 극락왕생과 내세(來世)에서 보다 행복한
존재로 환생
하길 간곡히 기원하며 절 관람을 시작해보자.
참고로 지장사는 호국신의 명복을 비는 곳이라 현
충원 홈페이지와 현충원 안내도에 나와있어 찾기는 편하다.
※ 국립현충원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찾아가기 (2012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4,7,8번 출구에서 도보 1분, 4호선을 이용할 경우 4번 출구가 가까우
며, 9호선을 이용할 경우 7,8번 출구가 가깝다.
★ 국립현충원 관람정보 (2012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쉬는 날은 없으나 민원실과 사진/유품전시관, 현충관 등은 동절기에 한해 토요일과 휴일에 휴
관함
* 국립현충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 국립현충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작역으로 이어지는 정문과 측문(정문 동쪽), 동문(측문 동쪽
)이 있으며, 흑석동 후문과 상도동 후문, 사당동 후문 등 3개의 후문이 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문의 ☎ 02-815-0625 / 813-9625)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 02-814-5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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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사 느티나무의 앞모습과 뒷모습 - 서울시보호수
20-5호 |
지장사입구에서
절로 오르는 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다소 가파르다. 이 길은 현충원내부순례
길(상도동 후문~호국지장사~사당동 후문)의 일원으로 상도동 후문과 동작충효길로 이어지는데,
절과 상도동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하나가 중생을 맞는다.
이 나무는 나이가 320년 정도 된 느티나무(안내문에는 315년이라 나옴)로 높이 15m, 둘레 4.5m
에 이른다. 한참 녹음(綠陰)의 절정을 누리며 오르막길에 땀육수를 제대로 빼는 중생들을 격려
하며 시원한 그늘을 베푼다.
지장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
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울러펴지는 염불 소리에 아무리 천
근만근 무겁다는 번뇌도 줄행랑을 치고 만다. 허나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서 우두커니 기다
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나 성불(成佛)은 그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가 보다. |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그만 연못과 산사의 필수 요소인 약수터가 나온다. 이 샘터는 석
조나 돌통에 모인 물을 떠마시거나
흐르는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닌 수도꼭지로 통제하는 형태로
약합을 쥐어든 약왕보살이 엷은 미소로 중생을 굽어본다. 그런 보살 앞에는 약수와 샘터
관리비
좀 보태라며 돈통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있어 기분을 깨게 한다. (물론 그냥 마셔도 됨)
물을 한바가지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오장육부가 시원하다고 쾌재를 부르짖는다. 물맛은
글쎄 다른 약수터와 별다른 특이점은 없는 것 같다.
이곳은 물을 뜨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 사당동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물을
담아가며 가뭄 때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호국의 신과 자연이 베푼 마르지 않는 듬직
한 수원(水源)이 있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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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이 오른듯한 우측 사천왕상(四天王像) |
▲ 열이 나보이는 좌측 사천왕상 |
약수터를 지나면 좌우로 돌로 만든 4천왕상이 나온다. 그들의 거처인 천왕문을 따로 두지 않고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둔 것으로 비파와 칼을 든 우측 천왕(天王)들은 비파(琵琶) 연주에 흥
이 난 표정인데 반해, 좌측 천왕들은 악귀(惡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열불
이 난 표정 같다. |
▲ 능인보전(能仁寶殿) |
사천왕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경내가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석축(石築) 위에 터를
닦은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지나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철불좌상과 약사후불탱, 신중탱 등의 오래
된 문화유산과 태국에서 가져온 5좌의 여래좌상 등 여러 보물이 자리를 메우고 있어 꼭 둘러봐
야 되는 건물이다. 겉과 달리 속은 보물들로 눈이 부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
능인보전 불단(佛壇)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철불(鐵佛)은 말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많이
나타나며, 이 불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
에
창건된 것을 조금이나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여
기까지 흘러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느 어부의 꿈에 이 불상이 나타나 빛좀 보게 해달라
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는 다음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장소로 가보니 글쎄 녹슨 채
버려진 불상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상을 수습하여 깨끗히 목욕을 시키고 집에 모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불상이 좀 유별난지 그게 아
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곳 화장사(지장사)에 기증했다고 하며, 그 이후
부터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등으로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또한 어부(漁夫)가 강이나 바다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절을
만들
거나 절에 기증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이는 불상을 옮기던 배가 가라앉거나 취급 부주의나 재해
로 인해
강에 떨어지거나 떠내려온 불상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꿈까지는 아니지만 불상이
떨어져 있다면 발견되는 것은 가능하다.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
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진하고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그의 전체적인 표정은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나 단련을 한듯 매우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 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몇 안되는 약사철불좌상으로 그 당시 약사불 신앙에 중요한 자료라
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의 화
승(畵僧)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
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공간을 가지며 빼곡히 들어차 철불을 받쳐주고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들의 소망을 담아 하나씩 제작된 원불(願佛)
로 대략 400기 정도 된다. |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앞에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린 것
이다. 그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대
표적인 신들이 모두 묘사되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
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
▲ 지장보살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만든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 지장사 대웅전(大雄殿) |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
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훨씬 크다. 상당히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불화들이 내부를 가득 수식하여 그야말로 조그만 불화 박물관을 이룬다, 그
리고 건물 앞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연등은 위정자들이 현충일을 맞이하여 생색내기로 단 것으
로 의미들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욕심이 큰 만큼 일반 백성들의 연등보다 배 이상이나 크다.
대웅전 옆에 있는 3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뜰에 있었는데, 원래는 경주 남산(南山)에 있던 신
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정확한 것은 아님) 그러다가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옮겨와 경상도를 상징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
하여 보수를 했다고 한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는 근래에 보수를 해서 새로 달았다. |
▲ 대웅전 내부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불 |
대웅전 불단에는 태국에서 가져온 금동석가불이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거느리며 3존불을 이루
고 있다. 원래는 아미타불이 중심에 있었으나 석가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뒤에는 나
무로 조각해 도금을 입힌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는데, 죄다 금색 투성이라 눈
이 너무 부셔 두 안구에 너무 많은 부담을 안긴다. |
▲ 대웅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외 3명의 화승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을 하는 모습을, 그 주변
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하는 승려들의 모습과 산수
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에서 19
세기
후반의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 대웅전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나눠 담은 그림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
렸다. 이곳의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만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내용
은 잘 모르겠다.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후반 불화양식을 반영한다. |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영입된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도
없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림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韋太天)과 범천(梵天),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
소 어수선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
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깔이 퇴색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
격을 높였다. |
▲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
아미타불도는 1870년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렸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권속들을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
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사가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적색과 녹
색의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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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
지장시왕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렸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
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
다. 원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한 광배, 도식(圖式)적
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
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어
있다.
이들 외에도 극락9품도(極樂九品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와
현왕도(現王圖,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119호)가 있는데, 모두 1893년에 제작되었다. 원래 대웅전에 같이 있었으나 지금은 별
도의 공간에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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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과 마주한 지장사 종무소(宗務所)
▲ 지장사 삼성각(三聖閣)
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내부를 장식하는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는 지방문화재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
삼성각 불단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치성광여래(칠성)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석가불과 많이도
닮았다. 가슴과 가슴선을 진하게 드러내고 있어 눈길을 끌며,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드
리워져 있다. 그리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들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
살은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낸다고 하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
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의 뒤에 걸린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폭의 좌우대칭으
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구조이다. 경직된 형태와 선, 탁한 색채 등은 20
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반영하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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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
와 독성상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
서
몸을 일으켜 출세한 존재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인다.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는 뒤에 있는 독성도의 독성 머리 부
분 대문에 머리에 큰 혹이 난 것처럼 보여 웃음
을 자아내게 한다.
독성상 뒤에 걸린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
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는 독성 할
배의 모습을 그렸는데, 전형적인 19세기의 독성
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
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
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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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
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지
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
이를 쓱쓱 쓰다듬는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
한들 산신 앞에서는 꼬랑지를 살랑살랑거리는
귀여운 고양이에 불과하다. 산신 옆에 서 있는
동자는 무척이나 앳되 보여 할배와 손자가 나란
히 있는 듯 단란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
湖若效)가 제작했다. 민화(民畵)풍의 나무와 폭
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의 산신도 양식
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이던 당
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
한 점이 특징이다.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
굴 묘사가 돋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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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사의 명물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입상) |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명물은 경내 뒤쪽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2,500좌
가 넘는 조그만
석조지장보살의 장대한 물결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선 지장보살입상 일대를 지
장전이라 부르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지만 노천 법당으로 석불이나 마애불을 두고 전(殿)
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에 서린 오랜 보물도 중요하긴 하
지만
현재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기 때문이다.
지장전은 1983년에 주지 혜성(慧惺)이 현충원에 잠든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길쭉한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바라보는 지장보살의 뒷통
수에는 동그란 모양의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지
장보살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어 조그만 지장보살을 한가
득 만들었는데 무려 2,500좌가 넘어 가히 장관을 이룬다.
지장보살 좌우에는 홀쭉한 5층석탑이 2기 서 있는데,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오래된 때가 조금 묻어나 보인다. 허나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애를 태우게 한다. 적
당한 정보도 없고 탑의 때를 봤을 때 왜정(倭政)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
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지장전을 장엄하게 꾸민 정성이 부디 명부(저승)를 감동시켜 이곳에 잠든 호국신들이 하나의 낙
오자도 없이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며 국립현충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첫댓글 창빈 이야기 잘 일고 많이 배웠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그냥 지내고 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