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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시흥시 향토유적 9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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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의 제27차 능원묘 답사의 일정에 제일 먼저 바닷가를 둘러 보는 코스 중에서 오이도 주변에 세종대왕의 8남인 영응대군의 묘가 있다는 것을 출발 전에 우연히 알게 되어서 오이도를 가기 직전에 영응대군의 묘를 먼저 둘러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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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응대군 묘로 가는 입구 전경 |
▲ 산길 입구 우측에 위치한 재실(경효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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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길을 조금 오르면 우측에 사당(경효사)과 사당 뒷편에 신도비(근래 조성)가 있음 |
▲ 신도비 뒷편의 후손 묘지를 지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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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은 조선시대의 왕자로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 이름은 염(琰)이다. 세종의 8남으로 세종 23년(1441)에 영흥대군(永興大君), 세종 25년(1443)에 역양대군(歷陽大君), 세종 29년(1447)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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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손 묘지를 조금 지나면 영응대군 묘역이 보이고 우측에는 신도비각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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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번역하였고,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세조 12년(1467) 2월
2일에 서울 견지방(堅志坊) 자택에서 사망하여 이해 3월 19일에 양주(楊州) 군장리(郡場里)에 예장을 치른 후, 연산군 4년(1498)에
신도비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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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응대군 신도비각과 신도비(1498년 조성)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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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광무 4년(1900) 9월 17일에 대군의 첫 부인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해주 정씨(海州鄭氏)와 둘째 부인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묘를 현 위치로 천장한 후 1968년에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부인 연안부 부인(延安府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 및 아들 청풍군(靑風君)과 손 화림정(花林正), 그리고 증손 흥선부정(興善副正), 흥정부수(興貞副守)의 묘를 옮겨 봉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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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응대군 묘역 전경 |
▲ 영응대군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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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대군과 해주 정씨 및 여산 송씨와 합장이고 그 왼쪽에 연안 김씨의 묘가 자리잡았고, 두 묘 가운데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그리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연산군 4년(1498)에 세운 것으로 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져 있는데, 기단석 대신에 귀부 위에다 비신을 세웠고, 다시 그 위에 옥개석 대신에 이수를 얹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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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응대군 묘역 내 조성된 문인석과 장명등 |
▲ 영응대군 묘역 좌측의 후손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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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의 규모는 높이 1.45m, 폭 84cm, 두께 21cm이고, 비면에는 『永膺大君 神道碑(영응대군 신도비)』란 전제(篆題)와 『有明朝鮮國 永膺大君諡敬孝公神道碑銘(유명조선국 영응대군시경호공신도비명)』이란 비제(碑題)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아울러 전액(篆額)했으며, 글씨는 기위부사정 박경(朴耕)이 썼다. 1992년에 신도비의 보호 철책을 세웠다. 묘 입구에는 대군의 시호명을 취한 재실(경효재, 1969년경 건립)과 사당(경효사, 1997년 건립)이 각각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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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편에서 바라 본 영응대군 묘역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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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 ~ 1450] 가계도 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 ~ 1446] 서1남 화의군(和義君) [1425 ~ 1460] (영빈 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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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응대군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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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주변에 영응대군 묘가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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