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일기(44) - <전의역>을 둘러보다
오늘부터 약 1달간은 ‘역 집중탐구’를 시작할 예정이다. 몇 년 전부터 ‘역답사’을 시작했고, 2023년 전반기에는 주로 경부선과 경북선 그리고 호남·전라선의 역들을 찾았다. 열차 연결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한 몇 개의 역을 제외하고는 현재 운행 중인 대부분의 역들을 방문했다. 그 중에는 도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곧바로 시내로 이동할 수 있는 역이 있는 반면에, 외딴 지역에 덩그라니 홀로 있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가기 위해서는 한참이나 이동해야 하는 역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역이든 역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지역은 풍성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역’이 갖고있는 전형적인 상징과 그 상징이 만들어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환상과 맞물려있을 것이다. 역은 움직이는 곳이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살아있는 존재의 반영인 것이다.
제법 많은 역을 찾으면서 매력적인 역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역 자체로 아름다운 역’이다. 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다가오는 역만이 가진 분위기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역들이다. 이 역들은 역사가 아름답고 독특한 외관을 띠고 있거나, 역 주변 경관이 개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역 바로 옆에 푸른 논이 펼쳐져있고 역 플랫폼은 좁지만 낡은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역과 멋진 둘레길이 연결되는 곳이다. 경부선의 <황간역>에서 하천을 따라 걷다보면 충북 영동의 ‘월류봉’이라는 풍경을 만나듯이 이런 역들의 앞에는 한국의 자연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산과 물 그리고 평야가 펼쳐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특별한 역사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역들이다. <대구역>은 도심에 있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대구 근대화 거리의 역사 속으로 걸어가며, <함창역>은 고대 ‘고령가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고분과 유적을 만날 수 있다. 남은 단기거주 기간에는 매력적인 역들을 다시 방문하여 그들의 아름다움을 꼼꼼히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좋은 것’은 다시 만날 때, 더욱 기분좋은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세종시에 속한 <전의역>은 오전에는 서울쪽 방향으로, 오후에는 대전 쪽 방향으로 열차가 집중 배치되어 있다. 아마도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열차배치인 듯싶다. 하지만 나와 같이 여행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불만인 배치표이다. 아침 일찍 남쪽으로 내려가는 열차가 없고 첫차가 11시 이후에야 시작되기 때문이다. <전의역>은 건물이 아름다운 역이다. 일본식 형태로 지어진 건물은 날렵하고 간결한 인상을 준다. 현재 많은 역들이 이런 특징을 지닌 역들이 많다. 그것은 비롯 일본강점기에 지어진 역들이지만 한국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역들이었기에 아직도 우리의 인식에 깊게 역들의 전형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 주변에는 주차장은 없지만 도로에 자유롭게 주차할 수 있어 주차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전의면’은 과거 현이었기에 향교를 비롯한 오래된 건물들을 찾을 수 있다.
‘향교’가 있는 지역은 과거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가 만들었던 ‘공교육’ 기관으로 공부와 제사라는 유교의 핵심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곳이다. 향교는 두 개의 중심 건물이 있다. 하나는 학생들이 유학을 공부하는 <명륜당>이고, 다른 하나는 유학의 선현들에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다. ‘대성’이란 말은 ‘공자’를 가리키는 말로써 ‘크게 도를 이루어었다는’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각각의 향교는 동재나 서재와 같은 기숙사 배치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대성전과 명륜당 중 무엇이 앞에 있는 가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저의향교>는 앞쪽에는 <명륜당>이 있고 부속건물을 뒤쪽에 배치한 <전당후묘> 구조이다. 이런 배치는 제사 기능의 <대성전>을 더 중요시하는 구조이다. 그런 이유인지 건물의 규모에서도 <대성전>이 더 크고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전의역> 앞에는 '전의 홍보관'이 있고 전의면을 홍보하는 자료를 갖추고 있다. 카페를 운영하는 분은 전의면 관광을 할 때에는 반드시 ‘성당’을 보라고 권고하였다. 성당에 ‘장승’이 있다는 것이다. 전의면 중심 지역은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아 1시간 정도면 여유롭게 볼 수 있다. ‘성당’ 안내가 눈에 잘 띄지 않아 길가는 남성에게 물었는데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부동산 중개사’였다. 우연한 만남이지만 <역인문학> 장소를 문의했다. 역 바로 옆에 24평 정도의 1층 건물이 있다고 안내한다. 건물이 닫혀있어 내부를 볼 수는 없지만, 연구실로 활용하기에는 적당한 크기와 위치였다. 임대비용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60만이다. 규모에 비해 비싸보이지는 않았다. <역인문학> 후보지로 점찍어 놓는다.
중개사와의 우연찮은 만남을 뒤로 하고 그가 알려준 성당으로 이동했다. 성당 입구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두 장승이 서있고 바로 옆에 성당이 있었다. 과거의 신앙과 근대의 신앙이 자유롭게 공존하고 있는 현장이다. 한국의 가톨릭은 지나치게 엄격한 교리를 중시한 파리 외방선교회의 초기 선교 때문에 불필요하게 많은 희생을 치러야했다. 종교의 개념도 명확하게 모르는 조선의 신자들에게 전달된, ‘조상숭배’가 ‘우상숭배’라는 왜곡된 가르침은 18세기 말에는 자신의 부모의 위패를 불태우는 <진산사건>이라는 끔찍한 폐륜사건으로 조선을 경악시켰다. 그후에도 ‘제사’를 금지하고 제사에 올린 음식도 먹지 못하게 하는 교리 때문에 조선의 민중들은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각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예법을 수용한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 수많은 신자들의 순교가 있고나서 부터이다. 그후 가톨릭은 한국적 예법을 받아들였고 문화를 존중하였다. <전의성당> 앞에 있는 ‘장승부부’는 종교 토착화라는 한국적 현상을 보여주는 ‘공존’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인상을 주었다.
<전의역> 주변은 지금 세종시에 속한 작은 마을이지만, 과거에는 연기군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과 따뜻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다. 공장과 축사와 같은 시설도 없고 지나치게 혼잡한 거리도 아닌 이 지역은 마을 전체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적 향기와 내가 좋아하는 <투다리>라는 술집이 있다는 점에서 호감을 주었다. 누구나 역에서 내려 1-2시간 여유롭게 걸어볼 만한 역으로 추천하고 싶다. 특별하지 않지만 향교와 성당이 아름답고, 뒷산이 있으며 역 앞의 카페에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 마음이 끌리는 것에서 공간적 흥미로움이 연결되는가 보다. 가벼운 발걸음이 이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