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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을 잘 굴리자" "바탕을 나투자" -보림선원 서울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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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매순간 진검승부의 자세로, 아사히TV의 ‘미야모토 무사시’를 보고
선재법사 추천 0 조회 55 16.03.09 09: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매순간 진검승부의 자세로, 아사히TV미야모토 무사시를 보고

 

 

일본 아사히TV에서 제공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 2014)’를 보았다. 인터넷 자막으로 제공된 사이트를 통해서이다. 2시간 분량의 2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구성이 탄탄하고 대사에 교훈적인 내용이 많아 집중하여 보았다.

 

불사선불사악(思善不思惡)

 

대사중에 승려가 한 말이 있다. 선도 악도 도회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만 족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건전한 행위 역시 족적을 남긴다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족적을 남기면 그 족적을 조건으로 또 다른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악은 물론 선도 생각하지 말라고 허였다. 하지만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마하시 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공덕행을, 오직 윤회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말하며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선업은 무명을 조건으로 일어난 의도적 행위인 상카라(sa?kh?ra)라는 것입니다. sa?kh?ra paccaya vin??na, , ()을 조건으로 식()13 이 일어난다.’라는 12연기에 의하면, 선한 의도의 행위(kusala-sankhara)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을 일으키기 때문에 선업도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명백히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부정하고 크게 오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선업을 짓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악도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선업만 남게 될 것입니다. 끝없는 윤회의 진정한 원인은 무명(aviji?)과 갈애(ta?h?)라는 번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번뇌는 번뇌를 제거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행되었을 때, 그 선행에 의해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공덕만 쌓아도, 법문을 들을 수 있고 또 수행을 하여 성자가 될 수 있는 선처(善處,sugati)에 재생할 수 있으며, 이로서 악처와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하시 사야도, 초정법륜경  법문집 3)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따른 공덕행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덕행의 바탕하에 윤회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번뇌를 소멸하고자 하는 의도(cetana), 즉 선한 행위로 가능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가에서 말하는 ‘불사선불사악(思善不思惡)’이라는 말은 깨달은 자에게나 적용 되는 말이다. 진리의 길로 들어선 학인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정진하거나 알아차리면서 지혜를 계발하는 선한 행위를 가열차게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입신양명(立身揚命)의 검의 길

 

한편의 잘 만든 영화나 드라마는 강력한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다. 최근 아사히 TV에서 제작된 미야모토 무사시가 그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비록 일본에서 제작되고 일본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줄거리에서 배울만한 것도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는 서군의 일원으로서 세키가하라전투(??, 1600)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군은 이에야스의 동군에 패하였다. 이후 무사시는 낭사로서 살아가게 된다.

 

떠돌이 무사로서 검의 길을 가게 된 무사시는 검으로 입신양명(立身揚命)하고자 한다. 믿을 것은 검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라는 고수를 꺽어야 했다. 마침내 최대 무술조직의 하나인 요시오카일문의 수장과 진검승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제압해 버린다. 이에 복수를 맹세하는 요시오카 일문 70명과 맞붙는다.

 

 

 

 

 

 

드라마에서는 70명과 상대하여 모두 베어 버린다. 이렇게 하여 바라던 대로 이름을 드날리게 된다. 마침내 제안이 들어온다. 작은 성의 영주로서 모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사시가 과거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영웅은 살인자가 된다.

 

무사시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도쿠가와 시대가 존속하는 한 낭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을 보면 마치 연좌제가 생각난다. 한번 전과 기록이 있으면 등용 되지 않는 것과 같고 특정한 지역출신은 차별 받는 것과 같다.

 

불도(佛道)와 무도(武道)의 모순에 대해 고뇌하며

 

무사시는 검으로서 입신양명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검을 놓고 수행자로서 또는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지만 하나의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됨으로서 다시 검을 잡게 된다. 이때 정신적 스승을 찾아가 한 수 배우러 찾아 간다.

 

이전에 창술의 달인이었던 스승은 무사시에게 부드러워질 것을 충고 하였다. 검 하나에 의지 하여 당대 최고의 검사가 되어 입신양면을 꿈꾸었던 검사에게서 살기등등한 기운을 보았기 때문이다나무로 된 관음보살상을 깍으면서 참회의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검을 잡게 된 검사는 이미 부드러워져 있었다. 다만 무사시는 진정한 검의 길에 고뇌한다. 그것은 목숨을 살리는 ‘불도(佛道)와 목숨을 끊는 ‘무도(武道)의 모순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고견을 듣고자 이전의 스승을 찾는다. 이에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든 흑백을 가리고자 하네. 선이냐 악이냐 적군이다 아군이다 등의 흑백을 가리면 후련하니 기분은 좋겠지. 그러나 살아 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네. 흑과 백사의 회색, 거기서 머무는 것이 중요하네. 진실로 강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네.”

 

 

 

 

 

 

스승은 흑과 백의 이분법적 논리로 살지 말 것을 충고한다. 흑과 백 사이에는 회색의 경계가 있는데 거기에 머물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분자를 연상케 하지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중도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가운데 길로서 중도가 아니라, 양극단을 극복하여 올바른 길로 가는 정도를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정도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스승은 진정한 검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중도를 가르쳤다. 그것이 진실로 강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천해야 할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과자 씹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무사시, 사람들에게 묻는다고 답을 찾는 것이 아니네. 답은 내 자신에게 있네.” 라고 말한다. 이해 했으면 실천하여 체득하라는 말이다.

 

사사키 고지로와의 운명적 결투

 

다시 검을 잡은 무사시에게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 전전하며 낭사로 살아 가게 된다. 마침내 하나의 답을 찾게 된다. 그것은 싸우려는 목적에 대한 것이다. 예전이라면 명예를 위해 싸웠고 세상의 평가을 높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다름아닌 사리사욕으로 검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요시오카 일문 70명을 진검승부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하지만 세상에서 듣는 평판은 달랐다. 영웅이 아니라 살인자로서의 이미지이다.

 

이제 검술의 달인에게 있어서 명성도 세상의 평가도 필요 없게 되었다. 오로지 검 하나에 의지한 낭사에게 있어서 입신양명의 출세도 필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사시는 왜 다시 검을 잡고 싸우려 할까? 이에 대하여 드라마에서는 미래를 보고 싶어라고 하였다. 그것은 어떤 미래일까? 그것은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사사키 고지로와의 결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당대 최고의 검객은 사사키 고지로와 미야모토 무사시이었다. 두 최고의 검객에게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 이제 두 사람 중의 하나만이 남아 있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무사시는 고지로와 싸우고 난 뒤의 미래에 있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것은 죽음 아니면 삶에 대한 것이다.

 

진검승부에서 패자는 죽음을 의미하다. 70 70승의 무사시는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수십번 승부를 한 사사키 고지로 역시 한번도 지지 않았다. 두 고수는 운명적으로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입신양명의 출세를 포기한 무사시에게 있어서 고지로는 넘어야 할 벽이었다. 

 

누가 천하무적인지

 

미야모토 무사시는 간류지마로 향하였다. 바다 건너에 있는 작은 무인도이다. 그곳에서 당대최고의 검객 사사키 고지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시는 노를 깍아 목검을 만들었다. 고지로의 장검 보다는 사이즈가 더 큰 것이다. 본래 양검의 달인 무사시이었지만 한쪽 손에는 목검을 들게 된 것이다.

 

 

 

 

 

 

무사시가 간류지마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노 젓는 이가 왜 그곳에 가느냐?”고 물어 본다. 이에 무사시는 누가 천하무적인지 정하러 가는 것이라 하였다. 무사시는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아마 살인자라는 누명을 벗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고수 사사키 고지로를 꺽으면 명예가 회복될 것으로 본 것이다. 이미 입신양명의 출세를 포기한 무사시에게 아마 유일한 희망이었을 지 모른다

 

무사시는 진검승부에서 죽어도 좋은 것이다. 반면 고지로는 최강의 검객과 싸워서 이겨 보고자 했다. 이는 결투를 대하는 태도가 다름을 말한다. 무사시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였고, 고지로는 단지 자신이 최강임을 보여 주고 싶은 공명심이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목숨걸고 해라!

 

무사시는 왜 계속 싸우려고 하나요?” 이는 무사시의 친구가 승려에게 한말이다. 이에 승려는 너는 매일 네 게으름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무사시의 친구는 무사시와 함께 서군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 가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나중에 마음을 잡고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게으른 태도를 버리지 못하여 게으름과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건 전쟁은 아니다. 이에 승려 목숨을 걸고 해라라고 충고 한다. 사실 이 말이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2014년판 아사히TV미야모토 무사시를 보고 건진 것이 있다면 바로 목숨걸고 해라!라는 말이다.

 

승려는 게의름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자에게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쟁에서는 죽음과 삶만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말로만 전쟁을 한다고 하였을 때 이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진검승부하는 것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진검승부의 세계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는 당대의 천재검사이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필연적으로 한사람만 존재 해야 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두 천재의 결투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또한 같은 검의 길을 가는 길을 천재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내 두 검사는 간류지마 해변에서 만났다. 늦게 고지로는 도착한 무사시를 향해 목이 빠져라 기다렸어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고지로가 흥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흥분이 극에 달하면 진것이나 다름 없다고 본 것이 일반적이다.

 

 

 

 

 

 

 

 

 

 

유튜브에는 수 많은 간류지마 결투에 대한 동영상이 올려져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이야기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로 수 없이 소개 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한 장면을 보면 매우 짧은 순간적인 결투 장면이다. 한번 스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승부가 나는 장면을 말한다. 그러나 아사히TV의 무사시를 보면 이와 다르다. 실력이 엇비슷한 두 고수의 결투는 막상막하이다. 마침내 무사시는 높이 뛰어 올라 노로 만든 긴 목검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진검승부에서 패자는 죽음을 의미한다. 두 고수의 대결에서 승자는 살아 남았고 패자는 죽었다. 이것이 진검승부의 세계이다.

 

매사 진검승부의 자세로

 

미야모토 무사시 드라마를 보면서 단순하게 재미로만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문화를 동경하거나 소개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심 있게 본 것은 진검승부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진검승부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진검승부의 자세로 살자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건진 것이 있다면 두 고수의 진검승부 장면이 아니다. 승려가 게으른 제자에게 한 말이다. 게으른 제자가 저는 게으름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을 때, 스승은목숨을 걸고 하라라고 말한 것에서 감명 받았다. 긴 드라마에서 딱 건진 말이 바로 매사에 목숨 걸고 하라는 말이다.

 

지혜의 검으로

 

드라마에서는 검을 주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검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까? 청정도론 오프닝테마라 볼 수 있는 게송이 하나 있다. 대림스님이 옮긴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S1.23)

 

 

청정도론은 이 게송을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게송에서 엉킴을 푼다라고 하였다. 전재성님은 매듭을 푼다라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ja??에 대한 번역이다. 여기서 ‘ja??’는 ‘tangle, braid, plaiting, 結縛, ’의 의미이다. 무언가에 매여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j??a에는 ‘born; arisen; becom, 已生的, 發生的, 生起的’의 뜻도 있다. 엉킴을 풀지 못하면 태어남을 유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게송에서 말하는 엉킴은 갈망으로 얽혀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엉킴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석에 따르면 사람이 땅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질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 버린다. (Srp.I.150)”라 되어 있다. 여기서 지혜의 칼이 나온다. 통찰지를 지혜의 칼로 본 것이다.

 

지혜의 칼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매우 실감나게 묘사 하였다. 그래서 비구는 마치 사람이 땅 위에 굳게 서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을 잡고 큰 대나무 덤불을 자르는 것처럼 할 것이다.(청정도론 1 7)”라 되어 있다. 마치 빅쿠가 무사가 된 듯 하다. 그것도 진검승부를 앞에 두고 있는 무사처럼 보인다.

 

일격필살의 자세로

 

진검승부에서는 단 한번의 결투로 승패가 갈린다. 패한다는 것은 죽음과 다름 없다. 그래서 일격필살이다. 첫 번째 공격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두 번째 공격을 장담하지 못한다. 실패 하였을 경우 헛점을 보여서 바로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베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연습을 실전처럼 해야 한다.

 

일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 2008)를 보면 사츠마번 무사의 수련장면이 나온다. 오로지 내려배기기술 하나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지겐류(示現流)’의 검법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무사들은 실전을 대비하여 매일 목검으로 통나무치기를 만번 한다. 통나무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로 집중하는 것이다.

 

지겐류의 공격을 받으면 일격에 무엇이든지 두 동강이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막말 당시 교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지겐류의 일격은 무조건 피하고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어떤 일이든지 진검승부의 자세로 임하면 실패가 없을 것이다. 헛점을 보이면 곧바로 죽음이라는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되었을 때 매사에 주의하게 된다. 그런 진검승부에 대한 한 예를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비록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사실상 진검승부나 다름 없는 장면이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Sn3.2)에 실려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Es? namuci te sen?,

ka?hass?bhippah?rin?;

Na na? as?ro jin?ti,

jetv? ca labhate sukha?.

 

나무찌여, 이것들은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나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 (stn439)

 

 

Esa mu?ja? parihare,

dhiratthu mama j?vita?;

Sa?g?me me mata? seyyo,

ya? ce j?ve par?jito.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stn440)

 

 

부처님이 성도과정에서 악마 나무찌와의 싸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죽기를 각오하고 악마와 싸울 것을 결의 한다. 그래서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Sa?g?me me mata? seyyo, ya? ce j?ve par?jito)”라 하였다. 바로 이런 말이 진검승부의 정신이라 볼 수 있다.

 

매순간이 전쟁이다

 

매순간이 전쟁이다. 어떤 이는 게으름과의 전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또 어떤 단체에서는 범죄와의 전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정부에서는 부패와의 전쟁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이나 단체, 정부에서도 전쟁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쟁에 임해야 할까? 드라마에서 승려가 말한 것에 답이 있다. 그것은 목숨을 걸어라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전쟁은 죽느냐 사느냐의 진검승부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게으름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전쟁에서 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죽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닦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닦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 두 개의 예를 들어 보았다.

 

악마 빠삐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청정도론에서는 계행과 관련하여 하나의 경을 예로 들어 설명되어 있다.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여 계행이 무너졌을 때 부처님은 저 연소하고 작열하는 불꽃 튀는 커다란 불더미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과,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A7.72)”라 하였다. 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물음이다.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형상을 보고, 귀로는 아름다운 소리 등을 접하였을 때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감각적 욕망에 끄달리면 패하는 것이다. 진검승부로 따지면 그 순간 죽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악마의 밧줄의 경(S35.115)’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정신으로 인식되는 사실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환희하고 환호하고 탐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자라고 한다. 그는 악마 빠삐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S35.115)

 

 

초기경에서 악마(Mara)는 악마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악마가 있다. 사악함의 화신으로서 빠삐만과 나무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주석서에 따르면 신으로서의 마라,  번뇌로서의 마라, 오온으로서의 마라,  업으로서의 마라, 죽음으로서의 마라로 분류한다. 여기 감각적 욕망에 흔들리는 것은 오온으로서의 마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은 매순간 감각적 욕망이라는 악마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자풀을 머리에 매고

 

부처님이 악마 나무찌와 싸움에 임하면서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Esa mu?ja? parihare)”라 하였다. 여기서 문자풀(mu?ja)을 걸치다는 것은 결의를 뜻한다. 고대 인도에서 문자풀을 입에 문다는 것은 항복의 표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자풀을 머리에 띠처럼 맨다든가 무기에 매는 행위는 결전에 임하는 결의의 상징과도 같다고 하였다.

 

문자풀을 맨 부처님은 악마와의 일전을 각오하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움에 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욕망이라는 싸움 역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진검승부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알린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선언한다.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한 성품을 지녔고, 부정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감추는 일을 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 체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오염되고 혼탁한 자에게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이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보다, 저 연소하고 작열하는 불꽃 튀는 커다란 불더미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때문에 그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지만, 그러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나지는 않는다.

 

계행을 지키지 않고, 악한 성품을 지녔고, 부정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감추는 일을 하고,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 체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오염되고 혼탁한 자에게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이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을 초래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A7.72)

 

 

감각적 욕망이라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하면 악처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싸움에서 이겨 내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신과의 싸움에 지는 자는 안락함을 추구하는 자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름다운 소녀를 품에 앉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싸움에서 패하지 않으려면 문자풀을 머리에 매고 결전에 임하는 것처럼 욕망과 진검승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자신과의 싸움을

 

사람들은 매일매일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게으름과의 전쟁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알코올과의 전쟁일 수도 있다. 대부분 욕망과 관련된 것들이다. 과연 이런 전쟁에서 이겨 낼 수 있을까?

 

담배와의 전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오래 된 흡연습관을 끊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심삼일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떤 이는 몇 달을 용케 참아 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남들이 담배를 한모금 맛있게 빨 때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고 하였다.

 

금연중인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분은 새해가 시작 되자 금연을 시작 하였다. 몇 달 후 식사자리를 가졌다. 그 분 말에 따르면 담배를 입에 대는 순간 물거품 될 것이라 하였다. 담배를 한모금 빠는 순간 이제까지 금연해 왔던 노력이 다 소용 없게 됨을 말한다.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이는 중독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담배맛을 감각감기관이 알게 되었을 때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한모금 빠는 순간 계속 피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 사람은 담배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이기는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방심하였을 때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마치 진검승부에서 패하는 것과 같다.

 

진검승부에서 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당대 최고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의 간류지마 결투에서 무사시는 노로 만든 긴 목검으로 이겼다. 승자는 살아 남았고 패자는 쓰러져 말이 없다. 매사에 전쟁을 치루는 수행자들은 오늘도 내일도 진검승부하듯이 살아 간다. 게으름과의 전쟁도 말로만 전쟁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 일본 아사시TV 2014년 판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건진 것은 목숨걸고 해라!라는 한구절이다.

 

 

2015-07-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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