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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님의 어린 시절
오늘날 ‘판석’ 성주님께서 새하나님이라고 하시니, 어떤 자는 눈이 휘둥글 해 가지고 한참 머리를 굴리면서 곰곰이 생각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감히 ‘새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생각이라도 해본 자가 없을 것이다. 이는 분명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신의 경지다. 지난 서기 2001년에 처음으로 새하나님의 출현을 선언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태초의 하나님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가운데 새하나님을 어찌 상상인들 할 수 있겠는가? 주인공이신 성주님 자신이 “내가 바로 새하나님이야!” 하고 당당하게 직접 드러내시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새하나님’이란 명칭을 말하는 자가 없었고, 상상이나 엄두도 못 내보는 높고도 두려운 존재요, 지존의 명칭이다. 이와 같이, 창세 이후에 한 번도 못 들어본 엄청난 경지의 말씀을 하시는 분은 분명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은 아니다. 이제부터 이 분 새하나님이 마귀와 어떻게 싸워서 이기고 나오셨는지 그 과정을 대강 설명하려는 것이다.
새하나님이신 성주님의 본명은 이현석(李鉉錫)이시며, 전라남도(全羅南道)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의 가난한 한 농가에서 1948년(戊子生) 음력 8월 5일 아침 8시에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암공파 31세손으로 탄생하셨다. 어린 세 살적에 6•25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여이고 어머니마저 생이별을 하는 불운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셨다. 그러나 본래 하늘의 감추었던 한 씨가 이 세상에 하강하신 분이시기에 어릴 때부터 그 자라는 모습이 일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예사롭지가 않았다.
1949년 5월경 어느 날,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아주 초라한 초가집에 삿갓을 쓴 도사 한 분이 찾아왔었다. 이 초라한 초가집에는 한 여인이 마루에 앉아서 이제 갓 세 살 난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삿갓을 쓴 그 도사님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셨다.
“이 댁의 성씨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물은 다음, “이씨 가문에 큰 인물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그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름을 ‘판석’이라 지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마당에서 큰절을 하며 경배를 드리고 떠난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이 댁에서는 그 아이가 자라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오늘날 성주님의 자라시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당시에 그 삿갓을 쓰고 나타났던 도사님은 바로 박태선 장로님이었다는 사실이 후일 밝혀졌던 것이다. 박태선 장로님은 이렇게 새하나님의 자라나시는 모습을 남몰래 자주 찾아뵙기 위하여 지리산 구례산판을 하면서 토지면 오미리를 수없이 자주 지나다니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와 같은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은밀히 하셨다. 훗날에도 절대로 밝혀서 드러나게 하지 않으셨다.
태초의 하나님이신 박태선 장로님은 오리라 한 엘리야로서 말세에 오시는 새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먼저 오셨으며,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감추었던 새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셨음을 확인하고 경배를 드리고 난 후에 비로소 하늘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처럼 “이씨 가문에 큰 인물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라고 했던 그 삿갓을 쓴 도사님 한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오신 새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에 아버지를 잃고 말았으니, 토지면 소재지에 있는 토지 지서에서 수직을 하던 야밤에 오미리 하죽 동네 20명의 청년들이 백운산 인민군들에게 포위를 당해 한 명만 살아나고 19명이 전사를 당하는 사건으로 전사를 하셨다는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밥을 먹고 살기가 힘이 들어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어려울 때인데, 현석은 어린 동생(유복자: 현수)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 가탄부락에 외갓집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식구가 많으면 먹고살기가 어려우니 식구를 한 명이라도 덜어야만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외갓집은 큰 외삼촌이 화개면의 면장으로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 유지였으며, 부자였기 때문에 어려운 보릿고개를 넘길 때까지 외갓집 옆에다 방을 얻어서 도움을 받으며 살겠다는 어머님의 의견을 할머니께서 들어주셨다. 그런데 그 후에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저 현석이 현수 두 형제가 너무나 영특하고 똑똑하니 앞으로 잘 가르치면 큰 인물이 되겠다. 그러니 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훌륭하게 가르쳐서 키우려면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좋은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해야 한다.”라고 설득하셨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려는 욕심으로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재혼을 결심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재혼을 하시자, 어느 날 구례에서 할머니가 찾아오셔서 “너는 이제 재혼을 하였으니, 이씨 가문의 자손들 내놓아라!” 하시며, 작은 숙부님과 함께 오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마루에서 6살짜리 현석을 앉혀놓고 “너는 이 할머니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아라. 네 어머니는 다른 데로 재혼을 하였으니, 너는 나이는 어리지만 대장부로서 이제 이씨 가문의 장손이니 이씨 가문의 기둥이고 대들보이니라. 그러니 대장부가 재혼한 어머니 치마폭에나 싸여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이씨 가문으로 가서 가문을 일으키고 지켜야 하느니라. 어떠냐? 네가 하자는 대로 하마. 네 어머니한테서 자라고 싶으냐? 아니면 이 할머니를 따라서 구례로 가겠느냐? 네가 결정하는 대로 하마. 네가 말해보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 어머니는 마루에 서서 여섯 살짜리 어린 아들의 입에서 어떤 결정이 나오나 하고 아이의 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런데 어린 현석은 “할머니 따라서 구례 집으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즉시 방안으로 들어가셔서 엎드려 통곡을 하며 우셨던 것이다. 네 살짜리 동생 현수는 “할머니는 미워! 엉엉!” 하면서 마구 울어댔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 현석아! 그러면 어서 가자!” 하시며, 재촉을 하시면서 방안에 어머니를 향해 “현수는 너무 어려서 안 되겠다. 네가 더 키우고 있다가 초등학교 입학시킬 때 데리고 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현석은 마루에서 내려가 토방에 서서 방안에서 울고 계시는 어머니를 향하여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하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서 동동동동 걸어서 구례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어린 현석은 그때부터 구례 집에 돌아와서 지내다가 어떤 때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숙모님께서 “현석이 너 어머니 생각하느냐?” 하고 큰소리로 야단을 치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행여나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할까 봐 일부러 자주 어머니를 욕을 하셨다. 그러나 현석은 어머니가 자기들을 버리고 재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더욱 잘 키워보시려고 일부러 재혼을 하셨다고 알고 있었으며, 절대로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현석은 어려서 키가 너무 크지 않아서 동갑내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때 할머니께서 “우리 현석인 키가 너무 작으니 조금 더 키워가지고 늦게 보내야겠다.”고 하면서 9살에야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셨기 때문에 다른 이이들보다 늦게 학교를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 집에서는 부모가 없는 자식으로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 갔다가 오면 오후에는 언제나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루에 한 짐씩 해오고, 또는 풀을 한 짐씩 해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날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서둘러서 점심을 먹고 나서 낫을 갈아가지고 지게를 지고 어른들이 다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해가지고 왔다.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에도 높은 산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낫으로 마른 나무 가지를 치려고 허면 낫질이 서툴러서 번번이 손을 쳐서 피가 흐르곤 했다. 날씨가 추워서 손이 시려서 웅크리고 낫질을 하다가 잘못하여 낫으로 손가락을 쳐서 보면, 살이 벌어진 사이로 뼈가 하얗게 드러나 보이고 그 사이로 시뻘건 피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손가락을 움켜쥐고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하고 울었다.
그러면 그 소리에 산 메아리가 울려서 “왜 그러냐? 현석아-!” 하면서 어머니가 가까이 소리치며 달려오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현석은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한참을 울다가 보니, 옆에 서 있는 나무도 울고, 바위도 울고, 풀포기도 울고 있었으며,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한참을 울다가 풀이나 옷자락을 찢어서 손가락을 감고 다시 나무를 하여 지게에다 지고 산을 내려오곤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도 왼쪽 손등과 손가락에 낫으로 손을 쳐서 벤 흉터가 20여 개가 있다. 눈이 와서 얼어붙은 길바닥이 너무도 미끄러워 조심조심 내려오다가 그만 미끄러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지게와 나뭇짐은 다래넝쿨에 걸려 있고 현석은 언덕 아래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동생 현수도 형과 함께 지게를 지고 항상 나무를 하러 다녔던 것이다. 두 형제는 같이 붙들어 주고 서로 위로하면서 날마다 지게지고 나무와 풀을 해다가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석은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 하고 언제나 우등상을 탔으며, 방학을 마치고 과제물 전시회에서 모든 분야에서 항상 1등 상장을 타게 되므로,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할머니 앞에다 상장과 상품을 펼쳐 보이면서 설명을 하다보니까, 할머니가 갑자기 뒤로 돌아 앉아 계시는 것이었다. 현석은 왜 그러시는가, 했더니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러면서 “너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아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부터는 학교에서 상장을 받을 때마다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는 손자가 학교에서 타온 상장을 처음에는 방안의 벽에다 줄을 지어서 붙여놓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상장이 너무나 많아지니까, 아예 대나무로 만든 상자에다 차곡차곡 모아두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어느 날 어머니께서 공부하고 있는 학교에 찾아오셔서 복도에서 얼싸안고 울면서 연필과 공책과 크레파스도 사주시고 돈도 얼마를 주시고 가셨다. 그러나 엄하신 할머니한테는 어머니가 다녀갔다는 절대로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름방학을 하자, 현석은 호랑이 같이 무서운 할머니께 마루에 앉아서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다. 화개에 사시는 어머니를 방학을 낼 때마다 한 번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오게 해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어린 손자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씀을 드리자, 할머니는 “어린 너희들을 버리고 재가해간 어머니가 무슨 어머니 자격이 있다더냐?”라고 하시면서 엄하게 나무라셨다.
그 때에 현석은 할머니한테 “할머니 제가 한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시국을 잘못 만나서 아버지가 6.25전쟁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를 더 잘 키우기 위해서 일부러 재혼하신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부모 노릇을 못했다 해도 나는 부모님이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만약에 제가 다음에 커서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성공을 한 다음에 어머니를 부모 노릇도 못했다고 어머니를 박대하고 효도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천하에 못된 몸이라고 욕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에게 부모 노릇을 못하셨다 해도 나는 부모님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극진히 효도를 할 때에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칭찬하기를, 참으로 크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그토록 엄하신 할머니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지면서 “네 그 조그만 입에서 어찌 그리도 옳은 말만 하느냐? 이 할미가 너한테 졌다! 그럼 지금 당장에 네 어머니한테 다녀오너라! 동생을 데리고 갔다가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다녀와야 하느니라.” 하고 쾌히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 가탄부락까지는 약 30리가 되니, 12킬로가 되는 길이다. 그리하여 현석은 동생 현수에게 “너 발가락이 나온 떨어진 양말을 벗어놓고 새 양말을 신고 나하고 오늘 화개에 어머니한테 인사드리러 가자!”고 말하자, 동생은 너무나 꿈같은 일인지라 믿어지지 않는 모양으로 얼른 움직이지 않고 한참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형! 그거 참말이여?”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 형제는 나란히 다정하게 걸어서 비포장 자갈길을 걸어서 화개로 찾아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토지 동방천을 거쳐서 칠의사를 지나면 송정이라는 마을이 있고, 더 조금 가면 연곡사가 있는 피아골 입구를 거쳐서 한참을 더 가면 화개장터가 나왔다. 두 형제가 나란히 마치 쌍둥이 같이 사이좋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길가에 옹기종기 있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말을 걸었다.
“얘들아! 너희는 어디를 그렇게 쌍고라니 같이 나란히 가느냐?”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면 두 형제는 “예, 우리 어머니한테 인사드리러 가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아주머니들은 “아니, 너희는 왜 어머니하고 같이 안 사느냐?”하고 다시 물어보면, 두 형제는 그 사정을 자세히 설명을 하였으며, 그 아주머니들은 “그래 어머니한테 잘 갔다 오너라! 불쌍한 것들! 쯧쯧쯧!” 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 손짓을 해주셨다.
그리하여 화개 가탄부락에 들어서자,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어머니가 사시는 집으로 가지 않고 외할머니와 큰 외삼촌이 계시는 외갓집으로 먼저 갔다. 왜냐하면, 어머니보다 더 높으신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오빠가 되시는 큰외삼촌을 먼저 뵙고 인사를 드려야 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멀리서 외손자들이 오는 모습을 보시고 맨발로 대문 밖까지 뛰어나오셔서 얼싸안으면서 “아이쿠! 어서 오너라! 내 강아지들아!” 하면서 반기셨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에게 절을 하고 나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외할머니께서 “네 어머니는 집에 있더냐?”하고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그때에 동생 현수가 “아직 어머니 집에 안 갔어요. 형이 외할머니하고 큰 외삼촌이 더 높은 어른들이니까 외갓집에부터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나서 어머니는 나중에 가야 된다고 해서 외갓집으로 먼저 왔어요! 형은 맨날 그런다니까.”라고 말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혀를 차면서 탄복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방학 때마다 화개 어머니를 찾아가 인사하고 돌아오곤 했다. 외갓집 동네 사람들도 어린 두 형제의 이야기로 화젯거리가 되었으며, 모두 칭송이 자자했다.
어머니를 만나 뵈니 너무나 반갑고 기뻐하셨다. 해가 지기 전에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도 해주시고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시다가 벌써 해가 넘어가려고 한다고 하시면서 다시 헤어지는 것을 너무나 아쉬워하셨다. 어머니는 마을 언덕에 서시어 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시며, 시냇물을 건너서 두 자식들이 걸어가다가 홱 돌아보다가 가고, 또 얼마를 가다가 다시금 홱 돌아보곤 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고 후일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그리하여 가슴앓이 병이 다 생기셨다는 것이다. 현석은 후일 장성하여 그토록 어릴 때부터 그리워하던 어머니에게 효도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게 된 것을 지금도 너무나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할머니의 친정어머니께서 아들이 없으시니 연세가 많아 몸이 아프고 하여 따님 집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상 할머니께서 치매가 걸려서 소 대변을 가리지 못하여 할머니께서 그 뒤치다꺼리를 하시면서 자주 투덜투덜 불평을 하시는 걸 보다가 현석은 할머니께 말씀드리기를,
“할머니가 너무 함 들게 일을 하시니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하여 얼마 동안 그 일을 직접 다 하였다. 그러자 얼마 동안 지켜보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아서라, 너는 다음에 큰 인물이 될 대장부가 이런 일을 해서 되겠느냐. 이제부터는 할미가 하겠다. 너는 공부나 해라.”라고 하시면서 직접 뒤치다꺼리를 하시면서, 그때부터는 할머니께서 절대로 군담을 하시거나 불평하시는 일이 없었다.
또한, 때로는 동생 현수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서 “형! 왜 항상 우리 둘이만 나무를 해오라고 하는 거야?”라고 하고 울면서 불평을 하기도 하였지만, “아니야! 현길이는 어린 동생을 봐야하기 때문에 집에 있어야 되지 않니?”라고 잘 타이르면, 금방 이해를 하고 함께 나무를 해오곤 했던 것이다. 사촌동생 현길이는 현수와 나이가 동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석은 동생 현수에게 우리가 더 많이 일을 해야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쉬실 수 있도록 하자고 의논을 하여 더욱 열심히 일을 하였다. 동생 현수는 형의 말이라면 아주 잘 따라주는 착한 동생이었다. 그런데 가난한 집안에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들이 6명이나 되니 모두 열 두 식구가 한 집에서 살다보니,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아 하시던 할머니께서 크게 결심을 하여 작은아버지 식구들을 분가를 시키기로 결심을 하셨다.
“우리 늙은이들이 논에서 일을 하다가 논 언덕에 쓰러져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부모 없는 손자들하고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구나. 그러니 네 삼촌네 식구들을 분가를 시켜서 내보내야겠다. 논을 가는 일은 소를 몰고 쟁기질을 해야 하니, 네 삼촌에게 좀 부탁을 하여 하고, 나머지 어려운 일은 품을 사서 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힘든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어보셨다.
현석은 할머니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희 두 형제가 더욱 열심히 일을 해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잘 살아가도록 해보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5학년 때 숙부님 가족들과 분가를 하여 독립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집안에 큰일은 머리가 허연 네 삼촌들하고는 의논을 안 해도, 어린 너한테 의논을 한다. 너는 비록 키가 작고 체구는 작아도 네 마음은 저 태산보다도 더 무게가 있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현석, 현수 두 형제는 일찍이 조실부모를 하였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다행히 두 분의 숙부님이 계셨기 때문에 울타리가 되어 그리 불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일찍이 부모를 잃었으나, 주위의 모든 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항상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여 그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뿐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성품이 항상 온화하시고 말씀이 별로 없으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시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시는 그런 분이셨다. 할머니께서는 누구에게나 잘못이 있으면 즉시 호되게 나무라시는 아주 대쪽 같으신 성품이셨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집안이 가난해서 중학교는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집안이 너무나 가난해서 현석을 중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할머니는 날마다 너무나 가슴 아파하셨다.
아침에 현석은 동네 앞으로 흘러가는 도랑물에 할머니가 사용하신 요강을 씻고, 또 걸레를 빨고 있을 때에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책가방을 들고 멋진 모자를 쓰고 여럿이 지나가다가 “현석아! 너 무엇 하느냐?”하고 물으면, “나 걸레 빨아!”라고 대답을 하면서 “학교에 잘 다녀오너라!”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그럴 때에 조금도 부끄럽거나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왠지 모르게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친구들을 대했다. 비록 어릴 때에도 그처럼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비관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성품이 당당하고 어른처럼 의젓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지만 얼굴엔 항상 귀공자와 같은 여유 있는 미소가 있었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 박종배 선생님께서 어느 날 현석의 집에 찾아오셔서 할머니께 “할머니! 현석이 같이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시골에서 지게질이나 시키고 농촌에서 썩히면 안 됩니다. 현석이를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대학교도 보내고 미국 유학까지 보내서라도 크게 성공을 시키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좀 더 생각을 해본 다음 사흘 후에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흘만 말미를 좀 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흘이 되도록 할머니는 밤마다 잠도 못 주무시고 밤새토록 담배만 피우시면서 고민을 하시다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손자를 마루에 불러 앉혀놓고 말씀을 하셨다.
“현석아! 우리 형편에 상금학교에 진학을 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네 가 어린 세 살 때 어떤 삿갓을 쓴 도사님이 찾아오셔서 너를 보고 다음에 커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이렇게 중학교에도 보내지 못할 형편이니 어떻게 네가 큰 인물이 된단 말이냐?”하고 한탄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그러자 현석은
“할머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높은 학교에 못가도 다음에 꼭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높은 학교 나오고 공부를 많이 해야만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발라야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비록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지게 지고 농사꾼이 되어도 분명히 다음에 할머니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하고 할머니를 위로하였다.
할머니는 다시금 또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 너의 마음 쓰는 것으로 봐서는 네가 선생님의 은혜로 외국 유학까지 다녀오고 크게 출세를 하고 나면 너는 너의 선생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평생토록 그 선생님의 종노릇밖에 더 하겠느냐.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이 할미가 결정을 잘못해가지고 네가 큰 인물이 될 것을 가로막아버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네 애비는 왜 이런 큰 짐을 나에게 넘겨놓고 먼저 죽었단 말이냐?! 너를 높은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이 할미의 가슴이 너무나 찢어지도록 하프구나!”하고 한탄을 하시며 우셨다.
그때에 현석은 “할머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중학교에 가지 않아도 강의록을 사서 공부를 하면 선생님이 없이도 혼자서 공부를 하면 얼마든지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하고 할머니를 위로하면서 함께 울었다. 그리하여 현석은 강의록으로 독학을 하기로 굳게 결심을 하였으며, 선생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 그 고마우신 뜻을 사양하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손자하고 다른 사람들 부러워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처지와 형편대로 살기로 하자고 결심을 하고 다짐을 하였다.
그리하여 3일째 되는 그날 박종배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셨던 것이다. 선생님이 오셔서 “현석이 학교 진학문제를 어떻게 생각해 보셨습니까?”하고 말씀하시자, 할머니께서는 “선생님의 그 말씀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하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은혜를 거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형편대로 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 현석이가 강의록을 사서 독학을 해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해서 꼭 크게 성공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였답니다. 선생님이 그토록 생각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현석은 그날부터 중앙강의록을 주문하여 혼자 독학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문한 강의록이 우편으로 배달되어 오는 날은 얼마나 반갑고 기쁜 날인지 몰랐다. 날마다 시간표를 정해놓고 밤이면 몰려오는 잠과 싸우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그 무렵, 밤이면 공부하느라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낮으로는 산에 들에 나가서 일을 하기 때문에 현석은 몸에 살이 빠지고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두꺼운 솜 방석을 만들어 주시면서 “이걸 깔고 앉아서 공부하여라. 그 엉덩이가 얼마나 고이겠느냐? 너 그 원수 놈의 공부 좀 그만 할 수 없느냐? 아무리 공부가 좋다 해도 그렇게 공부하다가 네가 몸이 약해져서 병들면 그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하시면서 통곡을 하며 우셨던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제발 공부 좀 하라고 성화를 대도 도저히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데, 이 집은 제발 공부 좀 그만 할 수 없느냐고 걱정을 하는 지경이었다. 이와 같이, 낮으로는 열심히 일을 하고 밤이면 늦게까지 공부를 하니, 온 동네에 소문이 나서 동네에서 가장 부자로 사시는 할아버지들 세 분이 동네 회관에 모여서 의논하시기를
“저 현석이 같이 조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하며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요즈음 세상에 저런 효자가 없네. 우리 동네에서 그래도 제일 넉넉히 산다는 우리 세 사람이 힘을 모아서 저 현석일 학교에 보내고 외국 유학까지라도 보내어 우리 동네에서 큰 인물이 나오도록 한번 해보세.”라고 의논을 하셨다는 것이다.
회관에 다녀오신 할아버지께서 그와 같은 말씀을 말씀하시니, 할머니께서는 “지난번에 학교 선생님이 학교를 보내주신다는 것도 사양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학교를 보내준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우리 손자는 절대로 남의 도움을 함부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시면서, 할머니의 올곧으신 판단으로 동네 사람들의 도움도 사양하셨다.
할머니는 참으로 훌륭하신 어른이셨다. 현석이 공부하고 있는 방에 들어오시려다가 문고리를 흔들어 노크를 하시고 “할미다! 나 좀 들어가도 되겠느냐? 방안에 시렁위에 올려놓은 소쿠리 좀 내려와야겠다.”라고 하시면, “아니, 할머니 들어오시지 않고 왜 그러세요?”라고 말씀드리면, “아니다. 아무리 늙은 할미지만 대장부가 공부하고 있는 방에 허락도 없이 할미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공부하고 있는 손자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물통을 소리 안 나게 가만히 들고 부엌 문턱을 넘어서 발자국 소리도 안 나게 조용히 마당으로 살짝 몰래 지나가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안에서 현석은 얼른 눈치를 채고 날래게 뛰쳐나와서 할머니 손에서 물통을 빼앗아서 “할머니! 힘드신데, 왜 저를 불러서 물을 길러오라 하시지 않고 할머니가 물을 길으러 가세요? 제가 길러오겠습니다.” 하고서, 마을 앞 도랑에 나가서 물을 길러오곤 하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바람에 흔들려 떨어진 옷가지를 절대로 그대로 입히는 일이 없이 대야에다 담아가지고 도랑에 나가시어 그 옷을 다시 빨아서 널어 말리시는 것이다. “아무리 흙이 묻지 않았어도 대장부가 입을 옷인데 어찌 바람에 흔들려서 땅에 떨어진 옷을 그냥 주워서 입힐 수가 있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토록 손자를 위하는 마음과 정성이 특별하셨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속된 말로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른다.’는 정도로 문맹이셨지만, 할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대하시고 항상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배려하시는 성품이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주변에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하실 뿐만 아니라, 절대로 경오가 바르지 못한 일은 용납하지 않으시는 그야말로 대쪽 같으신 성품이셨던 것이다.
⑵ 걸레가 되게 해주세요.
현석은 아침 일찍 잠을 깨고 일어나면 새벽에 도랑에 나가서 먹는 식수를 길러다가 항아리에 부어두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방과 마루 마당을 빗자루로 쓰고 걸레를 빨아다가 방과 마루를 깨끗이 닦아서 청소를 하였다. 그리고 골목길도 대빗자루로 깨끗이 쓸어서 청소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매일 계속해서 하는 동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더러운 데를 걸레로 닦으면 깨끗해지고 더럽혀진 걸레를 다시 깨끗이 빨아서 또 닦으면 더욱 깨끗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 나는 다음에 커서 이 세상에 더러운 것을 저 걸레처럼 깨끗이 닦아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다. “저는 다음에 커서 이 세상에 더러운 것을 깨끗이 닦아주는 걸레와 같은 존재가 되겠습니다. 걸레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걸레를 깨끗이 빨아야만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줄 수가 있다는 생각으로 그 때부터 매일 강의록으로 독학을 하면서 마을 동편에 흐르는 시냇가 가마소에서 며칠 만에 한 번씩 목욕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라도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냉수마찰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밖에 나와서 바위위에 서 있으면 발이 쩍쩍 얼어붙었다. 냉수마찰을 하면 팔뚝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매우 살갗을 칼로 베는 듯이 몹시 추워도, 얼음 속의 물속은 오히려 덜 차가왔던 것이다. 냉수마찰을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내죽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발길을 멈추고 서서 혀를 끌끌 차면서 “바깥동네 동춘 댁 큰손자래요. 공부를 너무나 많이 해서 머리가 돌았나봐! 이렇게 추운 날 저렇게 얼음을 깨고 목욕을 하다니 아무래도 머리가 돌았나봐”라고 하면서 불쌍하다고 측은히 여기며 지켜보다가 지나가셨다.
대개 어릴 때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물으면, “대통령이 될래요.” 또는 “장군이 될래요.” 아니면, “부자가 될래요.”, “화가가 될래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석은 하고많은 것 다 놔두고 걸레가 되고 싶다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어찌 어린아이의 생각이라 할 것인가. 이때에도 벌써 하나님의 신이 마음속에 계셨으며, 이미 그때부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에 의하여 예정된 각본대로 착착 진행이 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성주님께서는 어리실 때에 그와 같은 기도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고 죄를 씻어주시는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깨끗한 의인이라야 죄인들의 죄의 오염을 받아서 죄를 깨끗하게 씻어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현석은 두 번째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혼자서 호롱불을 켜놓고 때로는 촛불을 켜놓고 공부하면서 깨달았던 것이다. 촛불은 자기 몸을 지글지글 불태워서 주위에 어둠을 밝혀주는 것이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희생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석은 하나님 앞에 두 번째 기도를 드렸던 것이니, “저는 다음에 커서 내 몸을 불태워 희생을 해서라도 이 세상의 밝은 빛을 비추어 어둠을 밝히는 저 촛불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남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석은 그 얼마 후에 세 번째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니, “제 생명을 하나님께 모두 바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현석은 어릴 때에 하나님께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기도를 하였는데, 결국 이 세 가지의 기도가 후일 모두 다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현석이 중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에 모두 되어진 사실이다. 나이가 이릴 때지만 생각하는 것이 보통 아이들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번번이 현석의 말을 들으신 할머니께서도 “아니 너는 그리도 어린 것이 어찌 그렇게 어른들도 생각하지 못하는 놀랄 말을 하느냐?”고 하시며, 칭찬을 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던 것이다.
동네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요즈음 세상에 저런 효자가 어디 있느냐?”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신 6.25전몰군경유자녀 학비보조제도에 의해서 중학교 수업료를 국가에서 보조해준다는 통지서를 받고서야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네가 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 이것은 네 아버지가 나라에 목숨을 바쳐서 피 흘린 값으로 국가에서 너를 공부할 수 있도록 혜택을 베풀어주는 것이니, 이제는 중학교에 들어가도록 하자. 너는 아무래도 공부를 꼭 해야만 될 팔자인가 보구나!”라고 매우 하시면서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중학교를 다닐 때도 새벽 4시 반이 되면 뒷동산에 올라가 바위위에 앉아서 기도를 하였으며, 해가 동편 산위에 두둥실 떠오르면 산에서 내려와 학교에 가곤 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올 때엔 두 다리의 바지자락에 서리와 눈이 얼어붙어서 부딪쳐서 버걱버걱 소리가 났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방과 후에 미술실에서 석고 데생을 하며 밤 늦게 학교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어떤 때는 밤 11시나 12시에 미술실에서 나와서 학교 운동장으로 나오면 너무 어두워서 발이 밑으로 쿵쿵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였다.
보슬비가 오는 밤에는 저 멀리 산 밑에 마산면 하사리 동네에 반짝이던 전기 불빛마저 정전이 되어 새까맣게 어두우니 온 세상에 불빛 하나 없고, 시커멓게 높이높이 뻗어있는 가로수 포플러나무 사이로 공목 천을 길게 깔아놓은 것처럼 희뿌옇게 보이던 비포장 자갈길도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젖어서 시커멓게 보이니, 온 세상에 다 컴컴하게 어두운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약 6킬로가 넘는 먼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어떤 날은 학교에서 출발할 때부터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서 머리를 조금 숙인 자세로 그대로 걸어서 마을에 들어서서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 자세 그대로 들어설 때도 있었다. 그토록 매사에 어떠한 주저함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그리고 방안에 들어서면 할머니께서 방 윗목에 밥상에 손자가 오면 먹을 밥을 차려놓고 흰 보자기로 덮어놓은 것이다. 그러면 현석은 그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주무시던 할머니께서 잘을 깨에 일어나시어 보시니, 현석이 식사를 하는데 졸면서 밥 수저가 입으로 가지 않고 귀 쪽으로 가는 걸 보시고 “현석아! 너 밥 수저를 떠가지고 입으로 안 가고 어디로 가지고 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이현석은 토지면 오미리까지 오는 동안에 도깨비가 나온다고 장에 나가셨던 어른들도 무서워서 못 다닌다는 비행장 배고픈 다리를 건너오다가 달밤에 너무나 피곤하여 토지면 용두리 언덕에 있는 어떤 사람의 무덤의 잔디밭에서 한참을 쉬었다가 오는 정도로 무서움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현석은 오미리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새벽닭이 “꼬끼오!” 하고 우는 때도 있었다.
큰 숙부님은 현석의 집으로 찾아오셔서 “너는 도대체 간이 얼마나 크단 말이냐? 어른들도 배고픈 다리쯤 오다보면 도깨비에게 홀려서 산으로 끌려갔다가 마산면 사람들이 몰려가서 데리고 오고 했다는 걸 들어서 알지 않느냐? 그래서 어른들도 장에 갔다가 날이 저물면 무서워서 오지 못하고 구례읍 친척집에서 자고 오는데 너는 도대체 어린놈이 무섭지도 않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처음에 중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때 전교에서 4등을 하여 2학년 4반이 되었고, 2학년 때는 전교에서 수석을 하여 3학년 때는 3학년 1반 우수반(진학반)으로 편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교 재건학생위원장(총 학생회장)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써 당선되었다. 그리고 미술부장으로서 미술부 활동을 열심히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신병을 늘 자주 아프시면 밤새토록 간호를 하고 나면 다음날 중간고사 시험에서 졸다가 시험지를 백지로 내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현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바로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현석이 중학교 2학년 때쯤이었다. 하루는 큰 숙부님이 찾아오셔서 할머니한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 우리 동네에 중국에서 유명한 관상가 한 사람이 왔는데, 우리 집에서는 현석이나 한번 관상을 보았으면 합니다.”라고 하시며, 학교에 가려고 나서려는 현석을 데리고 회관 쪽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저만치 멀리서 관상가라는 사람이 오고 있었다. “저 분이다. 중국에서 아주 유명한 관상가란다.” 그 분이 가까이 오시자, 숙부님께서는 현석을 소개하셨다. “우리 조카인데 한번 봐 주십시오.” 그 관상가라는 분이 현석에게 오른손 주먹을 한번 쥐어보라는 것이었다. 관상을 본다는 분들이 흔히 손금을 본다고 손바닥을 펴보라고 한다는데, 이 분은 대뜸 주먹을 쥐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석은 오른손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러자, 그 관상가가 말하기를 “이 학생은 다음에 수만 명의 장군들을 앞에 모아놓고 높은 단상에 올라서서 지휘봉을 쥐고 호령하는 상입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학교에서도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 아침 등교 시에 거수경례를 하는 이현석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 “이 군은 앞으로 육군사관학교를 가도록 해! 이 군은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완전히 장군감이야! 상대방을 완전히 부동자세를 취하게 만들어버리는 위엄이 있어! 이 군은 학교생활도 절도가 있고, 걸음걸이와 거수경례 하는 모습이 완전히 장군감이란 말이야! 이 군은 다음에 꼭 육군사관학교를 가도록 해!”라고 격려를 해주셨던 것이다.
현석이 어릴 때에 처음 만나는 분들이 “학생은 눈매가 아주 매섭다. 다음에 커서 꼭 눈 값을 할 거야! 눈매가 아주 매섭다.”고 말씀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석이 걸음 걷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마다 “학생은 걸음걸이가 아주 좋아. 걸음걸이가 정말로 훌륭해!”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현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특히 그림을 그리는 실력이 아주 특출하였으며, 중학교 3학년 때는 세계미술교육전람회에 수채화를 그려서 출품하였는데 입선을 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이 전국적으로 미술사생대회를 나가서 학교의 명예를 높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현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0일 만에 결혼을 하였으니, 학교 선배들 간에는 “중학교 학생회장 결혼한대!” 하고 소문이 났던 것이다. 이현석은 가마를 타고 장가를 가게 되었고, 고등학교 선배들이 가마를 메고 갔던 것이다. 현석이 그처럼 일찍 결혼을 하게 된 동기는, 큰 숙모님과 고모님 두 분이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온 현석에게 “네가 학교 다닐 때에 혹시 사귀거나 마음에 둔 여학생은 없었느냐?” 하고 물어보셨다. 항상 열심히 공부만 하고 학교생활에 충실하였는데, 여학생을 눈여겨본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잘 아는 여학생도 전혀 없고 마음에 든 여학생도 없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그러자, 두 분께서는 할머님이 항상 부모 없는 손자들을 키우시면서 고생하시다가 노환으로 늘 앓아누우시며 늘 평소에 노래를 부르듯이 “우리 현석이 결혼시켜서 손자며느리 손에 따뜻한 밥 한 그릇 얻어먹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현석이 고등학교를 광주로 나가서 유학을 해야 하니, 시골에서 할머니를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결혼을 하면 손자며느리가 할머니를 모시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할머니께서는 이미 이웃 동네에 한 처녀를 눈여겨 봐두셨다는 것이다. 현석이 너만 허락을 한다면 결혼을 할 수 있게 양가에는 언약이 다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큰 숙모님과 고모님의 말씀에 따라서 할머니를 위해 일찍 결혼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석은 어릴 때부터 나를 길러주시고 그토록 사랑하신 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의 심정으로 할머니를 위해 일찍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10일 만에 결혼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현석의 나이는 19세였다. 결혼식 날, 그 무렵에는 대개 예식장에서 결혼 예식을 하고 택시를 타고 장가를 가는 것이 유행인 시대인데, 현석은 시골집 마당에서 전통혼례식으로 하였으며, 가마를 타고 장가를 갔는데, 동네의 학교 선배들이 가마를 메고 갔던 것이다. 학생들 간에는 “중학교 학생회장 결혼한대!” 하고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이미 중학교에서는 졸업을 했지만 3학년 담임 유규선 선생님께서 몇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오셔서 축하해주셨으며, 지리산 새싹회 회원들도 함께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결혼이란, 일생을 통해 중요한 인륜지대사이거늘, 현석은 이때부터 벌써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해서라도 그 사랑의 빛을 비추어주는 촛불과 같은 존재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후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어느 중학교 동창생 박 모 대학교수는 참으로 크게 될 인물인데 너무 일찍 결혼을 하여 발목을 잡히는 것을 매우 가슴 아파했다는 것이다.
성주님께서는 어린 중학교 3학년 때(1965년) 그해 여름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많은 비가 내려서 구례 뜰이 모두 물에 잠겨서 바다와 같이 되어서 학생들이 구례읍내에서 친척집이나 친구 집에서 그날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때 이현석 학생은 구례읍 뒷산인 봉성산 중턱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정처 없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길 가에는 큰비가 오고 난 후라서 죽순들이 어른의 키보다 더 높이 자라 있고, 나뭇잎들이 마치 열대 지방의 밀림지역과 같이 우거져 있었다.
얼마 동안 올라가니 우거진 수풀 속에 묻혀 있듯이 십자가가 있는 아담한 교회가 하나 있었다. 교회당의 현관문이 열려서 바람에 삐걱삐걱 흔들리고 있었고, 목사님 사택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얼마나 오래도록 비어 있었는지 주인 없는 교회가 아주 괴괴하고 고저늑하기만 하였다. 학생은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목사나 전도사가 설교하는 단상 위에 강대상이 놓여 있고, 양 옆으로 조그만 기도실이 있었다. 기도실 문을 열어보니, 두 사람이 앉아 있기도 어려울 만큼 아주 좁은 마룻바닥에 솜 방석이 종잇장처럼 얇게 눌려서 깔려 있었다.
학생은 기도실 안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도록 하자.”고 생각하였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도 없는 교회의 조그만 기도실에서 온 밤을 새워가며 “오늘밤 안으로 하나님을 나에게 보여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산속 수풀에서 몰려온 모기들이 학생의 팔뚝과 얼굴과 목에 새까맣게 달라붙어서 마구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학생은 처음엔 모기를 쫓아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여 단념하였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몰려드는 모기를 쫓으려면 도저히 밤새도록 기도는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 얼굴과 목과 팔뚝에 덩어리가 지도록 모기들이 달라붙었고, 양쪽 귀에는 아예 귀걸이처럼 덩어리가 져서 길게 그네를 뛰는 것이 아닌가? 온 얼굴과 코끝에도 매달렸다. 학생은 그 모기들이 콧바람에 놀라서 한 마리라도 놀라서 도망을 가지 않도록 오히려 조심히 하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에만 집중하였다.
밤새도록 기도의 제목은 오직 ‘오늘밤 안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세요!’라는 단 한 가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기도실 밖의 예배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은 생각하기를 ‘교인들이 새벽기도를 드리러 온 것일까?’ 생각하고, 이제는 예배실로 나가야겠다고 일어나면서 눈을 뜨고 보니, 온 팔뚝에 부스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손으로 팔뚝을 훑어 내리니 부스럼 딱지가 우수수 다 떨어져 나가고 피부가 뽀얗고 멀쩡했다. 그리고 얼굴에 부스럼 딱지도 다 훑어서 떨어버리고 기도실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온 예배실 안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차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얼굴을 바닥에다 대고 엎드려서 울면서 통성 기도를 하고 있었다.(영들)
학생은 그 앞으로 단상 앞을 지나서 걸어가니 맞은편 벽에 커다란 대형 거울이 걸려 있었고, 그 대형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이 웬 일인가.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머리는 눈이 내린 듯이 온통 하얀 백발이었으며, 눈썹도 온통 하얀 백설과 같았으며, 눈은 매우 근엄한 모습이었고 하얀 수염이 배꼽부근까지 느려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백옥같이 하얀 도포를 입었으며, 왼손엔 묵직한 검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하여 꿈인가 하여 손등을 꼬집어보니 “아!” 하며 따갑게 아팠다. “아! 꿈이 아니구나!” 하고 정신을 차려서 보니, 학생은 기도실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다리가 온통 굳어져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얼른 일어날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 몸부림을 하여 겨우 일어났다.
동편에 떠오르는 태양빛이 눈부시게 유리창으로 비쳐서 예배실 바닥에 비치고 있으며, 주위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들과 온갖 풀벌레들의 합창이 마치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였던 것이다. 학생은 책가방을 들고 그 교회 예배실을 걸어 나와서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등교하였다.
학생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지만 예수의 아비라는 자가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이라는 어떤 아무런 존재도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모습만 보여주셨다. 학생은 그 당시에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지만 자신의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니, 사실 하나님은 다른 데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계시는 것이며,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함께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학생은 이 일을 일기장에 별지에다 기록하여 붙여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만 깊이 간직하고 있다가 이긴자가 되어 오늘날 구세주 새하나님의 출현을 선포하시면서, 비로소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때가 이를 때까지 당신의 정체를 숨기셨던 것이다. 학생은 본래부터 하나님이요, 감추었던 한 씨의 하나님으로서 이현석이라는 본인도 모르게 감추었던 사실을 후일 에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린 세 살적에 태초의 하나님만은 미리 아시고 삿갓을 쓴 도사님으로 변장을 하여 찾아와서 경배를 드리고 가셨던 것이다.
박태선 장로님은 처음부터 성주님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셨으며, 아무도 모르게 성안에 감추어 모셔놓고 그 앞에 부복하여 이마를 땅에다 대고 “아버지여! 이 구더기만도 못하고 벌레반도 못한 이 누추한 것이 감히 이 누추한 입술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입술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하소서! 하고 지금도 거기 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 … 내 가짜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게 되어 있어!…”라고 말씀 하셨던 그 진짜 하나님 새하나님이 바로 성주님이었던 것이다.
박태선 장로님은 태초의 하나님으로서 감추었던 한 씨의 새 하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러 먼저 나타나신 오리라 한 엘리야였으며, 역곡의 해와 주님은 엘리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주님이 어린 3살적에 태초의 하나님이신 박태선 장로님이 삿갓을 쓰고 변장하여 찾아오시어 이 세상에 오신 새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맞이하였던 것이다.
성주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비로자나부처님인 것이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비로자나 부처님은 이 땅에 한 번도 현신하여 나타내신 적이 없으시며, 감추었다가 말세에 미륵부처님으로 현신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실 구세주 새부처님님이시다.
학생은 이미 어릴 때부터 능력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그 일을 가만히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있었으니, 아무도 눈치를 채는 자가 없었다. 학생이 자라는 어릴 때부터 보통 어린이들과는 다르고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사람이 아니고 신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학생(현석)이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광주에 나가서 유학을 해야 하므로, 할머니께서는 손자의 앞길에 염려가 되어 어느 무당에게 가서 손자에 대하여 물어보니, “이렇게나 엄청나게 높고 무서운 분의 이름을 여기에 써가지고 오면 안 됩니다. 이 큰손자는 엄청나게 높으신 분입니다. 나는 이 큰손자의 점은 볼 수가 없습니다. 어서 이 이름자 쓴 종이를 가지고 가십시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큰손자 때문에 집안의 조상들이 제삿밥을 한 번도 못 얻어먹고 탈탈 굶었습니다. 제삿날에 조상의 영혼들이 찾아와서 울타리 사이로 들여다보니, 큰손자가 방안에서 벙글벙글 웃고 앉아 있고, 지붕 위에는 하늘에서 불 칼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을 보고 조상의 영혼들이 혼비백산 줄행랑을 하여 도망을 치고 맙니다. 그래서 이 큰손자 때문에 그 동안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모신 것이 모두 다 허사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할머니의 말씀을 들은 현석은 “할머니 이 손자가 무서워서 도망을 치는 조상들이라면 그 영들은 진짜 우리 조상님들이 아닙니다. 그 영들이란 한낱 잡귀들입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정 원하신다면 제삿날은 제가 저 아래 행랑채에 내려가 있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추석 명절날 차례 상을 차릴 때도 현석은 아예 행랑채에 내려가서 책만 읽고 있었던 것이다. 현석은 이와 같이 할머니 마음에 서운함이 없으시도록 순종하는 마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때부터 벌써 마귀(잡귀)의 영들은 하나님(미륵왕)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토록 무서워 벌벌 떨며 도망을 쳤던 것이다. 진짜 조상님의 정령이라면 손자(미륵부처님)에게 찾아와서 감로수를 받으며 한없이 기뻐하고 만족해 할 것이다. 지금도 이미 죽은 자의 영들도 신령한 양식 감로수의 이슬 은혜를 받기 위해 성주님 앞에 구름 떼같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석이 어리신 학생 때는 마귀가 무서워서 도망을 치는 정도였지만, 그 후에 장성하여 이긴자가 되어 승리하신 하나님이 되신 판석(判席) 성주님을 보기만 해도 마귀들이 죽고 마는 것이다.
학생은 그 무렵에 날마다 이른 새벽 4시 경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음 뒷동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숙모님이 새벽에 제삿밥을 지으시려고 큰집으로 오시다가 뒷동산을 보니 어떤 불빛이 번득거리는 걸 보시고 큰집에 도착하시자마자, “어머니! 어머니! 뒷동산에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오다가 보니 뒷동산에서 호랑이 불이 번득 번득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치셨다.
그러자, 할머니는 “저 아랫방에 현석이가 있는가, 가봐라!”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급히 가서 문을 열어보니 현석이 없지 않는가. 현석은 이미 새벽 4시에 후랫쉬를 들고 뒷산에 기도하러 올라갔기 때문에 그 후랫쉬 불빛을 호랑이불이라고 놀라셨던 것이다. 학생(현석)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어떤 사람이 이 학생을 저주하였으나 결국은 그가 자기가 했던 저주를 자기가 그대로 받았던 일을 하나만 소개하려는 것이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리에 굉장히 강한 무당 한 명이 있었다. 그 무당이 악담을 하고 저주를 하게 되면 그 말대로 되고 만다고 모두들 무서워서 벌벌 떤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생이 방학기간에 구례 시골집에 가서 있을 때 어느 날, 할머니가 학생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고모와 동네 몇 분들과 같이 그 무당집에 매일 다니면서 공을 들이기로 하였다. 네가 잘 되라고 공을 들이는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학생은 깜짝 놀라면서 “할머니 그런데 잘못 빠지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그 무당의 말에 속아서 넘어가면 안 됩니다. 만약에 그 무당집에 다니시면 제가 가서 그 무당집에서 기도를 하게 되면, 그 무당은 다시는 점을 칠 수도 없고 무당신이 거기에 오지 못하도록 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아서라. 너 그런 말 함부로 하면 큰일 난다. 그 무당이 악담을 하고 저주를 하면 그대로 저주를 받고 만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다.”고 눈이 휘둥글 해지셔서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후에 학생이 한 말이 그대로 무당에게 전해져서 무당이 노발대발 성질을 내면서 “어디 이현석이 너 가만 두지 않겠다! 이현석이 너는 앞으로 3년 안에 정신병자가 되어서 앞으로 콱! 엎어져서 혀를 깨물고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 두고 봐라!” 하고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들은 학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구만!”라고 한마디만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학생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서 지내다가 구례 고향집에 다니러 가서 할머니와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말씀을 드리던 중에 용두리 그 무당의 안부가 궁금하여 할머니께 여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야, 말도 말아라. 그 무당이 그 후에 얼마 안 돼서 그만 정신이 이상해져서 미쳐버렸었다. 그러더니 앞으로 넘어져서 피를 토하고 죽었단다. 그리고 초상 마당에서 자기 자식들과 전실 자식들이 재산 싸움으로 칼부림이 나서 피를 흘리고 난장판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차고 조롱거리가 되었단다.”라고 말씀하셨다.
학생은 “그때가 언제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3년 안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무당은 자기가 학생(성주님)을 악담 저주했던 것을 자기가 그대로 받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은 그와 같은 말씀을 듣고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을 행하는 자는 그 악의 대가를 자신이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남을 악담과 저주를 하면, 상대방이 그 저주를 받을 만한 죄가 없을 시엔 그 모든 저주가 저주를 한 자신에게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을 저주하는 자는 곧 결과적으로는 자기를 저주하는 꼴이 되고 만다.
악을 행하는 자는 그 악의 보응을 받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그 선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친히 ‘나’라는 존재 마귀를 죽이고 이기고 나오신 성주님께서는 오늘도 만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담당하시면서 당신을 죽이려고 대적하는 자들의 죄까지 담당하고 걸머지시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새하나님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