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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화두 수행 방법 ★
1. 화두공부의 3大 요령
1) 일체 망상(一切 妄想)에 신경쓰지 마라.
망상이 생기든 말든, 다만 화두만 하라.
만약 그렇지 않고 망상을 제거하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는 망상에 다시 망상을 더하는 일일 뿐이다.
2) 어떤 상황에서든지 話頭를 놓치지 말라.
공부의 비법은 딴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 설사 누군가가 머리를 베어가고 심장과 간을 오려내어
목숨이 끊어지게 될 지라도 - 결코 화두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애쓰고 또 애쓰다 보면 잠이 깊이 들었을 때도
화두가 이어 지는 때가 오는데, 이 경지를 지나면 깨친다.
3) 話頭에 최우선을 두라.
빨리 깨치려면, 다른 일은 다 때려치우고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화두에 두고 이것만 하라.
각주
위의 화두공부의 3대 요령은 성철스님이 평소에 후학들에게 항상 강조하시는 말씀을 가장 간약하게 단축한 기본 요점인 것 같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인 면이든, 모든 시간과 공간 활동에서 끊이지 말고, 이 화두일심(話頭一心)에만 매달리라는 가르침이다. 평범한 가르침이지만 그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꾸어진다.
2. 工夫의 先決條件
1) 무상(無常) 한 줄 알라.
목숨은 100년 뒤에야 비로소 죽는 것이 아니라, 실로 찰라찰라 간에도 수백 번 생멸(生滅)을 거듭하며 이어지는 것이니, 이를 알고 경각심을 가져라.
2) 동일시 착각에서 벗어나라.
자기를 몸이나 마음과 동일시하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이러한 착각이 무진 보장(無盡寶藏:자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진장의 보배, 진아)이 드러나는데 방해되고, 온갖 죄악을 일으킨다. 그리고 금생(今生)에 공부하지 않아도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진 않겠지 하는 자만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각주
수행의 선결조건이 바로 자신이 육체와 마음이라는 동일시 착각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 글 쓰는 이는 수행자체가 바로 자신이 육체와 마음이라는 동일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라는 사실을 말해 두고 싶다.
화두선은 원래 육체와 마음이 자기라는 동일시 생각을 없애고 나서 화두를 들어야 제대로 수행의 진전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육체와 온 마음을 부처에 완전 귀의 헌신하는 의식(儀飾)이 중요하다. 이러한 종교의식을 통해서 자기 개인 육체와 마음을 부처라는 전체의식(意識)에게 바쳐서 이러한 외부적인 것과의 동일시를 녹여 버려야 부처경지로 갈 수 있는 자질이 되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계실 때에 방문객은 누구든지, 신분,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부처님께 삼천 배를 완료해야만 자신(성철스님)을 면담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셨는데, 그분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부처의 권위를 위해서 그런 힘 드는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라, 면담자의 마음이 개인육체의 동일시에 물들어 있어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하거나 알음알이 지식만으로 헤아리고 따지는 마음자세를 누그려드려서 육체와의 개인 동일시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서 전체가 하나 되는 부처마음에 먼저 다가서게 하기위한 말없이 가르침을 펴는 사전 법문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보통사람이 처음으로 삼천 배를 하면, 그 인내심이나 신심이 보통이상은 되어야 하고, 그 의식상태도 경계가 넓어져서, 성철스님의 법문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고, 그 삼천 배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부처에 귀의하는 신심도 돈독해질 것이고, 자기 동일시 마음이 많이 녹아 버릴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이 명상수행을 하려면, 이 육체와의 동일시 개인마음이 정화되는 수행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명상의 입문과 같은 것이다.
불문에 입문하여 수계의식을 치르는 것은 개인인 자기가 부처마음에 귀의하는 것처럼, 일반인도 명상을 본격적으로 입문하려면, 무한의식에 자기의 육체와 개인마음을 전부 녹이는 자기 스스로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 의식이란 바로 참나를 찾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깨달음에 대한 열렬한 염원 밖에는 없다.
이 글쓰는 이를 예로 들어 본다면, 매일 아침 냉수욕 의식으로 이런 기도 내지는 귀의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대신하는데, 찬물을 머리위에 끼얹으면서, 항상 깨어있음에 대한 결심과 무한의식에의 귀의에 대한 염원을 나름대로 수행의 한 측면으로서 끈질기게 계속 해오고 있다.
모든 것이 무상한 줄 이해해야 된다. 그 무상한 변화를 아는 것은 변하지 않는 항상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려야 한다.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모든 것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없이 변화 그자체인 것이다. 모든 현시된 현상들은 그저 활동의식의 움직이는 흐름일 뿐이다. 즉, 파동의식의 무상한 움직임만이 현시되는 것이다. 파동이란 항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났다가는 가라앉고, 다시 일어나고, 가라앉는 생멸의 연속인 것이다.
어떤 주기로 생멸하는 것이 바로 파동상태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 움직임은 파동의식에 의해 매순간 깜박거리며 점멸한다. 모든 것이 매순간 생겼다가 사라지는 점멸의 깜박임 속에 있다. 그 깜박이는 변화를 아는 자는 바로 그 깜박이는 변화가 나온 원천이라는 것을 알아 차려야 한다. 그 활동의식의 원천이 바로 비활동 존재의식인 주시자인 것이다. 그 무상한 변화를 알고 있는 주시자,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무한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변화하는 모든 것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무한자일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무한자 속에 완전 합일되어 녹아 버려야 비로소 궁극적인 참나의 진지(眞知)를 얻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공부를 해도 영험(靈驗)이 없는 경우
中峰明本
1) 古人들과 달리 도업(道業)을 이루려는 의지(意志)와 기개(氣槪)가 없다.
2) “生死가 無常하다”는 사실을 큰일로 여기지 않는다.
3) 무량겁(武量劫) 동안 익혀 온 습(習)과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좌복에 않아서는 혼침(昏沈) 아니면 산란(散亂)에 빠져 있다.
4) 깨칠 때 까지는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갖추지 못했다.
※ 세상에 나면서부터 미륵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요즈음 성취가 없는 이들은 자기가 애쓰지 않은 것은 꾸짖지 않고 불법이 쇠하고 총림은 저물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면서, 위로는 자기를 단련시켜 줄 선지식이 없고, 옆으로는 정진을 책려해 주는 도반이 없다고 한다.
게다가 房舍가 불편하고 음식이 맛이 없고, 대중의 규칙도 시원찮고, 주위 환경이 시끄러워서 공부가 이처럼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누구나 핑계 대는 소리다.
이는 마치 농부가 물이 가문 것만 책망하면서 김을 매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러고서 어찌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바라겠는가?
학도인이라면 역순의 경계를 대하더라도 한 생각이라도 분별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겁토록 생사에 얽매이게 된 허물이 바로 이러한 “경계를 분별하는 생각”을 그 밑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발심할 때에 본래 “결정코 生死大事를 해결하리라” 하고 기약하고서, 20년이나 30년씩 공부했어도 만약 깨치지 못했더라도 부디 다른 방편을 구하지 말라. 다만 마음에 딴 생각하지 말고 오직 화두에만 마음을 쏟아 부지런히 부지런히 쉬지 말고 공부해라.
단지 參究하던 話頭위에 굳건히 서서,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 죽어서 조차 항상 화두를 여의지 않으리니, 만약 철저히 깨치지 못한다면, 3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결정코 공부를 쉬지 않겠다!” 하는 이런 바른 因만 있다면 大事를 밝히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없다.
각주
위의 말씀은 성철스님의 말씀이 아니라 옛 선지식(중본명본)의 말씀을 교재내용의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삽입한 것 같습니다. 밑의 해설부분은 성철스님의 말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4. 學道者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바른 믿음
中峰明本
1. 자기의 方寸(좁은) 마음속에 喜怒哀樂(희로애락)하는 주인공은, 三世諸佛(부처, 조사)과 터럭만큼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
2. 무량겁 이전부터 色聲(시각과 청각)과 愛憎(사랑과 미움)에 물들어 익히면서 흘러온 까닭에, 일종의 무상한 생사를 이루어, 사대(지수화풍)로 이루어진 몸속에서 찰라찰라 표류하며, 끝없이 바뀌면서,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
3. 옛 분들이 자비를 드리워 남기신 한 말씀 반 구절은, 마치 하늘에 기대는 긴 칼과 같기에, 이것으로서 공부를 등한히 함을 다그쳐 없애면, 분명히 命根(나라는 생각)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
4. 다만 공부를 하지 않거나 공부하더라도 끝내지 못할까 염려하면서, 평소 생활하는 가운데서 순간도 방일하지 않고, 精微롭게(꼼꼼하게) 공부해 나간다면, 결정코 透脫(해탈)할 때가 있다는 사실.
5. 생사가 무상함이 작은 일이 아니니, 만약 분발하여 快烈한 의지로서 獨脫(혼자 힘으로 해탈)할 것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삼악도를 저절로 면하는 방법은 없다는 사실.
각주
윗글도 역시 중봉명본 선사의 글인데, 교육용 교재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의 구성을 맞추기 위하여 구도자들에게 중요한 사항이므로 삽입한 것 같다. 한문 단어가 옛날 쓰던 단어들이 많이 나와서 읽기가 거북하겠지만 차근차근 읽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5. 古人들이 參禪 學道하신 모양
石屋淸珙
1) 몸을 잊을 정도로 간절히 法을 구했다.
2) 禪知識의 一言半句에도 決定信을 가져서 疑惑이 없었다.
3) 宿世에 심은 因이 깊고도 발라서 큰根器를 갖추었다.
4) 오랜 시간과 노력도 없이 경솔하게 깨치려 하자 않았으며, 반드시 크게 쉬어버린 경계를 알고자 했다.
5) 알음알이를 斷然히 버리고,實답게 參究해서 實답게 깨쳤다.
6) 佛祖를 초월하려는 決定志를 갖추어 퇴전심이 없었다.
7) 대중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기를 잠시도 그만두지 않았다.
8) 참선학도 하는 모양이 있으니, 이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부처님들이 한길로 열반하시는 門으로써, 과거의 여래들도 이문을 성취하셨고, 현재의 보살들도 각각 이를 통해 圓明에 들어가며, 미래의 修學者들도 이와 같은 법에 의지할 것이다.
주장자를 1번 내리치고 下座하다.
각주
윗글은 석옥청공 선사의 수학자들에게 경책하는 글을 삽입한 것 같다. 다소 옛 한문단어들이 나오지만 글자 한자 한자의 뜻을 뜯어보면 그 단어의 뜻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6. 참선경책(參禪警策)
退翁性澈
1. 가난을 배워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안팍으로 가난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
2. 경험을 익히지 말라.
자기 마음속의 無盡藏 보배倉庫는 개발하지 않고, 佛祖의 言說만 익히면 남의 보배만 헤아리는 꼴을 면치 못한다. 道를 닦는데 경험을 익히고 외우는 것만큼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 이것을 단연코 버리고 용맹정진 하여 자기의 보배창고를 활짝 열면 未來劫이 다하도록 써도 무궁하나니, 불법은 부가사의한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다.
3. 話頭參禪은 가장 쉽고 빠르며 확실한 見性法이다.
4. 실제로 參究해서 실제로 깨쳐라
오직 實參實悟에 있을 뿐이니, 불조의 공안을 마음을 다해 參究해서 조금도 미진함이 없이 뚫어야 한다.
5. 수행자의 자세
우리가 참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남이 아무리 나를 비방하고 욕해도 그것에 마음이 얼마나 움직이지 않고 반대로 甘露水 받아 마시듯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6. 사량분별을 경계함 (공안을 푼다고 생각으로 이리저리 따지지 말아라)
불조의 공안은 大寂光三昧 중의 玄機大用이다. (불조사들의 화두는 가장 심오하고 높은 삼매를 이루는 데는 가장 좋은 방편이다) 그러므로 무심무념하고(그러므로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常寂常照하며(항상 고요함을 유지한 채, 자신을 비추어 보아라) 圓證見性한 대원경지의 김강정안이 아니면(석가세존이 일러준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올바른 지혜의 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런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외에는), 공안의 落處는 아득히 알 수 없으니(공안의 최종 효과와 해답을 아는 사람은 전혀 없으니), 사량분별로서 공안을 헤아리려 한다면(생각으로 이리저리 헤아리면서, 이러쿵저러쿵 따져 들자면), 반딧불로 산을 태우려는 것과 꼭 같다(반딧불로 산을 태우려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다 끊고 대원경지를 성취하기 까지는(그러므로 망상과 생각을 다 끊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까지는) 공안을 참구하여 관문을 뚫는 한길 밖에 없으니(화두를 붙들고 늘어져서 화두로서 깨치는 한 방법 밖에는 없으니), 이것이 圓增見性하는 지름길이요, 바른 길이다(이것이 조사들이 제시하는 바른 깨달음의 지름길이다).
7. 萬事를 잊어라.
무쇠로 만든 바보같이(어떤 좋은 경계든 나쁜 경계든 모두 환상으로 보고 무심한 것) 일체 만사를 아주 잊고, 숙면일여의 깊은 경지에서 활짝 깨쳐 진여본성을 철견하리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8. 참답게 정진하라.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셈치고,
만사를 제쳐놓고,
대용맹심을 일으켜,
허망한 꿈에 속지 말고
참답게 정진하라
9.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라.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최저의 생활로서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라.
10. 知見病에 빠지지 말라.
內外明徹이 되기 전에는 고인의 공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믿고, 부디 지견병에 빠지지 말고 참답게 정진하여 참답게 깨쳐라.
11. 자기를 믿어라
“저 사람이 丈夫면 나도 丈夫다” 라고 하였으니, 자기를 깊이 믿고 용맹정진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한번 뛰어 如來知에 드는 것이니, 참으로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道를 얻지 못했으면서도 道를 얻었다고 하는 것만은 절대 금물이다.
12. 多聞知解를 경계함.
누구든지 妄滅證眞하여 峴見本性하지 않으면 佛法中人이 아니요, 옴 오른 여우라 함은 고금을 통한 불변의 원칙이니, 多聞知解를 뱀허물 벗듯이 버리고, 實證에만 노력하여 圓證見性해야 한다.
(누구든지 생각의 망령을 말살하여 진리를 실질적으로 체험하여 본성을 직접 접해보지 않으면 불법인이 아니다. 알음알이 지식을 많이 공부한 사람을 깨달음 수행에 있어서는, 옛날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옴 오른 여우새끼 같다고 하였다. 많이 얻어들은 지식으로 화두를 풀려고 하는 생각은 뱀이 허물 내버리듯이 전부 알음알이는 벗어던져 버리고 실제 수행으로 경험하여 위없는 깨달음에 도달해야한다)
13. 持戒의 필요성
戒란 생사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 밝고 깨끗한 원천으로 돌아가게 하는 큰 나룻배이며, 그릇된 것을 버리고 바른 것에 들게 하는 요긴한 문이다.
14. 열반과 三寶
열반이란 거울에 낀 때를 지우는 작업이 끝났을 때의 대광명과 대적정과 대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大自由와 大平等과 大和合이 佛法乘 三寶의 근본 뜻이다.
15. 禪
禪이란 自性에 이르는 통로에 불과하다. 우주만물의 근원을 파악하고 一如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禪이다. 그래서 선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直視하고 스스로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16. 허다한 시련과 이기기 어려운 고난과 죽음과 같은 고독을 극복해야만 깨달음의 문턱에 도달할 수가 있다.
17. 중생의 불성
중생의 불성은 부가사의하여 불조의 聖訓에 따라 여실히 수행하면 五逆十惡의 중죄인도 당세에 견성할 수 있음은 불조가 통설한 바이니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 이는 오직 當者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각주
성철스님의 평소 가르침 중에서 선수행자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는 내용만을 뽑아서 간단하게 체계화한 선문경책인 것 같다. 한문이 많이 섞여서 읽기가 좀 거북할지는 모르겠다. 중간에 일부는 이 글을 타자치는 이(무한진인)가 대략적으로 ( )안에 해석해 놓았다. 생전처음으로 한국어를 한국어로 해석해 보았다. 성철스님의 평소의 강인하고 투철한 성격이 말씀 중에 엿보이는 것 같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