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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제6강. #15, 16, 17, 18
* 일시: 2024년 4월 17일(수) 오후8시.
* 참석자: 박연옥, 서선미, 서은혜, 정단희, 정명수, 이샛별, 유혜숙, 조정은, 조세랑, 박영기 (10 명)
* 공지: 다음 주 세미나 1회 더 진행합니다. 마지막 강의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15, 16, 17, 18
* 벤야민 사유의 두 축: 1유대교 신비주의- 숄렘, 브레히트, 아샤 라시스(Asja Lācis, 극작가겸 배우)를 통해 접하게 됨. 2마르크스주의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연결함. 벤야민을 구성해왔던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이질적이기 때문에 숄렘은 기만이고 불가능하다고 말함. 그럼에도 벤야민은 둘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세계를 보는 다른 시선을 드러낸다.
유대교 신비주의 철학자 숄렘의 책은 국내에 벤야민과의 추억을 다룬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 만 번역되어 있다. 숄렘은 유대교 신비주의 철학을 유럽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 카발라: 전통. 전승. Tradition. 카발라는 토라의 주석이고 구전 전승이다. 카발라가 형성되는 배경에는 히브리 성서가 있다- 모세5경(토라), 지혜서(전도서, 시편, 잠언 등), 예언서(예언자의 전승). 문서를 판단하는 기준인 모세5경이 제일 중요. 카발라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의식이 있다. 계시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므로 이해 불가능성 속에 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은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써 신의 언어를 간직하게 된다. 즉 ‘표현 불가능성’ 이 담겨 있다. 랍비는 토라를 주석한다. 토라는 신의 언어, 주석은 인간의 언어이므로 해석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주석한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주석에는 우연히, 혹은 은혜 속에 파편 같은 것들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벤야민에게 표현 불가능한 것이고 그의 미학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벤야민에게 예술작품이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 아름다움이 진리와 관련해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표현 불가능성이다.
카발라의 구전 전승은 특별히 고난과 관련해서 강화된다.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바빌로니아가 유다 왕국을 침략해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고 유대 지도자들을 포로로 데려간 때부터다(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멸망 후 페르시아에 의해 유대인 귀환->제2성전시대로 정치공동체가 아니라 종교 공동체가 됨-> 그리스에 의해 성전 모욕 사건 발생. 그 과정에서 마카비 (BC 167-164) 혁명이 일어나 잠깐 동안 독립 왕국 경험-> 로마 통치 때 제2성전 붕괴. 땅의 이름조차 유대인의 땅이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땅이란 의미의 팔레스타인으로 바뀜.
그리스 시대에 지배자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면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억압하고 성전을 모욕. 이런 상황에서 토라를 해석하는 방식들에 긴장이 발생한다. 그 긴장의 문학적, 정치 저항적 형태가 묵시문학이다. 묵시문학은 세상의 파멸에 관한 담론. 아포칼립스. 카발라가 중세 말기에 새롭고 강력한 신비주의 운동으로 일어나면서 묵시 사상에 신비적이고 마술적 분위기가 가미되었다. 숄렘에게 중요한 카발리스트는 16세기 이삭 루리아 Isaac Luria라는 랍비. 그는 새로운 카발라 주의를 제창했는데 토라 주석 전통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것이 당대 유럽 유대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면서 곳곳에 다양한 메시아 운동이 일어나고 유대인들의 한계를 넘어 유럽 정신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카발라 전통은 벤야민과 같은 사람에게는 유럽 철학의 계몽주의 이후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유대적 정신으로 유럽 정신을 개선하고 변형시키려는 지적 차원에서 나타남. 반면, 민중 쪽에서는 타로 카드, 융, 뉴에이지 운동-> 신비주의적인 상품 소비, 일상의 종교 형태 등으로 나타남. 서구 불교는 마술적, 연금술적 전통과 결합된 짬뽕 문화. 문화이자 종교이자 철학. 그렇다면 영지주의와 벤야민은 친화력이 있나? 벤야민은 유대교 신비주의와 오늘날의 영지주의를 연결하는 길목에 유물론이라는 차단문을 설치했다.
* 벤야민이 보는 유대교의 세 가지 힘: 1보수적인 힘-전통을 지키려는 힘.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킴. 2 유토피아적 힘. 전통 지키는 것과 관련. 천지창조의 그 완벽한 형태를 재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유대인을 그 일에 부르셨다(선택 백성). 유토피아, 에덴동산 같은 향수가 있다.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 힘이 유대인의 한편에 있는 반면, 유토피아 힘은 전통의 근원으로서 역사 이전의 유토피아를 그리게 하는 것으로 현실에 비판적 사유를 끌어들이고 다른 미래를 추동하는 힘이 됨. 이 두 보수적 유토피아 힘 사이에서 변증법적 긴장 속에 발생하는 것이 세 번째 힘인 3 메시아적 힘이다. 이것은 파국을 만드는 힘이며 오늘 여기 존재하는 현실을 중단시키는 힘.
* 루리아의 창조론: 벤의 언어 철학의 근원에 깔린 개념. ‘아인소프 Ayin-Sof’ = 하나님.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므로 부르지 않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림. 성서에는 자음만 적혀있다. 그것을 야훼로 추정해서 읽는 것.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오늘날도 개신교에서 하나님, 야훼로 쓰지 않고 ‘주님’으로 번역. 그래서 당대에 하나님의 이름에 가장 걸맞다고 생각한 개념을 ‘아인소프’로 정함. ‘절대자, 무한, 한계 없음, 모든 원인들의 원인, 자기 원인’ (고대의 나날이란 의미도 있음).
* 침춤(Zimzum): 아인소프는 침춤이란 특별한 행동을 한다. 그것은 수축, 퇴각, 철수. 신의 임재(빛으로 나타남)란 뜻. 하나님이 온 세계에 편재해 있는데 스스로를 수축시켜 이 수축된 공간에 아인소프의 빛이 임하게 된다. 이 빛은 다양한 층위가 있다. 세계를 그릇처럼 구성한 빛은 하위의 빛이고 상위의 빛을 담다가 그릇이 깨져버렸다. 하나님의 창조가 흩어져 버렸다. 파편의 일부는 창조의 재료가 되고 일부는 악의 힘이 되었다. 신은 다시 빛을 내려보내서 세피라(빛)를 하나씩 채워 나감. 10개의 빛의 층위가 있음. 제일 중요한 첫 번째 왕관이라는 빛. 빛은 거기로 임재하고 왕관의 빛이 넘쳐서 지혜의 층, 지성, 자비, 두려움, 은총….맨 마지막이 땅의 층. 하나님의 빛으로써 상호 관련성을 가짐. 이는 22가지로 얽혀있다. 이 세계는 생명의 나무로 구성되어 있는데 카발라는 10층위에서부터 명상, 수련 등을 통해 첫 번째까지 올라감.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이 카발라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유대신학과 개신교 신학은 차이가 없는데 숄렘이 연구한 신비주의는 독특성이 크므로 학문적, 보편성 측면에서는 소수자적 관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침춤은 케노시스와 같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바울 개념). 예수가 성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겸비, 혹은 겸손으로 많이 번역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 지젝은 노골적으로 이것을 fall이라고 표현한다. ‘타락’.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타락했다. 사랑이란 것은 떨어짐을 동반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세상을 완전하게 채우는 완벽한 존재를 포기하고 그 빈 공간에 빛을 내리면서 세상이 창조된 것->침춤. 유대교 신비주의는 창조 자체에 이미 하나님의 자기 비움, 신성의 양보가 있었다는 것. 이것은 결국 ‘무신론적 순간’이다. 하나님이 자기 존재가 없는 곳에 세상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하나님이 물러난 곳에서 시작되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영원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되는 이 사건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원하는 구원이란 궁극적 성취가 일어날 수 있다.
#15
혁명 계급들은 대게 하층민이다. 당대의 모순을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사람들. 격발하면 파괴적일 수 있다. 역사가 자연스러운 흐름에 의해 조화롭게 존재하고 있다가 그 질서가 의심받기 시작하는 순간 억압받는 계급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행동을 한다.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역사의 연속체란 역사주의적 역사 기술의 역사로 오늘날까지 이어온 역사이다. 이 역사가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깨야 한다. 혁명 계급이 이 행위를 하는 순간 역사의 연속체는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시간이 도래하기 시작한다. 역사의 연속체가 정지되는 이 순간은(흐름을 바꾸는 것이 아닌 중지) 수많은 가능성이 담지 되는 시간이다.
혁명 계급들이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하는 그 순간은 영원히 기억되는 기념일이 된다. 그 기념일이 오면 다시 그 순간이 시작되는 것. 그 정지의 순간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대혁명 달력을 도입하며 달력이 시작하는 날은 저속촬영기로 기능한다. (시간 수집기로 번역한 것은 잘못)
왜? 표준 촬영은 1초에 24프레임. 저속은 24프레임 이하, 고속은 24프레임 이상.
_저속은 예를 들어 1시간에 1프레임 찍어서 1초에 24프레임으로 돌리면 1초에 24시간이 지나간다. 30초면 한 달. 패스트 비디오. 짧은 시간 안에 긴 시간을 압축할 수 있다.
-고속은 많이 찍어서 24프레임으로 표준 영사를 한다. 1초가 1시간으로 늘어난다. 슬로우 비디오.
공휴일은 혁명기념일일 뿐 아니라 이 혁명을 완수하길 고대했으나 과거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전통까지도 그 시간 안에 통합시켜 놓는다. 저속촬영이 영사되는 장면은 아무 상관 없었던 과거의 어느 순간과 오늘 여기 시간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의미의 연관 속에서 한순간에 연결해 준다. 극단적 저속촬영은 10년 전 과거가 방금 전 과거처럼 느껴질 것이다. 과거의 봉기일, 혁명발발일을 지금 시간으로 경험하는 날이 공휴일이다. 공휴일과 저속촬영기는 벤야민이 말하는 변증법적 이미지이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어떤 것을 보았을 때 마치 저속촬영된 장면처럼 보아야 한다. 그 장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이 어떤 과거와 연결되는지 한순간에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문제인지 모든 사람이 안다. 그럼 대안은 공산주의? 실패했다. 오늘 자본주의 현실에 존재하는 눈으로는 자본주의 외부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우리 삶이 거기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모른다. 오늘 여기가 문제인 것만 안다.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벤야민은 그래서 파국과 중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지젝을 비롯한 공산주의 철학자들도 중지를 강조한다. ‘중지’는 우리가 경험한 삶보다 비극일 수 있고 감당 못할 파국일 수 있다. 이 위험 속에서, 모르는 시간 속에서 나의 길을 가야 한다. 무시무시한 결정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여기 우리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면밀히 파악하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나라는 존재와 관련해서 얼마나 개방된 시간이고 공간인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상상을 통해 그 경험을 할 수 있다. 내 삶을, 내 잠재성을 억압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나는 여기서 삶을 부지해 나간다(ex하기 싫은 직장 일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보냄). 이것은 모순이다. 내 삶을 대가로 내어주고 내 삶을 유지하는 모순. 내 삶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내 삶을 유지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 질문에서 자신으로부터 변화를 모색할 것이고 그 모색 속에서 다른 관계를 형성할 것이고 새로운 존재 체험을 할 것이고 혹은 벤야민이 말한 행복을 경험하면서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7월 혁명(1830) 파리. 당시 주변국과의 전쟁 때문에 일반인인 군인에게 총기가 보급되었다. 혁명 당시 누군가 파리 곳곳에서 시계탑에 총을 쏘았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적 행동이다.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하는 행동에서 나 자신의 진실이 드러난다. 내 욕망의 진실. 내가 왜 쏘는지 모르지만 쏘고 있는 것. 인간이 존재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는 사고를 하는 것은 자신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이다. 우리 삶과 행동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모두 통제되지 않는다. 의식의 순간은 길지 않다.
#16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과거는 지나간 옛일이 아니다. 과거는 오늘 여기와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전통이다. 억압받은 존재들의 투쟁의 전통이자 나를 기다려온 전통이다. 인간은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한계가 없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며 무시하는데 익숙하다. 라캉이 ‘너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무의식적 욕망은 인간적으로 더 풍부한 존재, 더 다양한 가능성의 실현을 요청하고 있다.
#17
역사주의는 보편 사회에서 정점을 이룬다. 역사는 모두 비슷하다는 것. 이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를 평균적 인간으로 만든다. 인간은 다 똑같다-> 하향 평준화. 보편사. 보편사는 서구 지배자의 시선에서 제3세계,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보편은 구체와 대립한다. 유물론적 역사 서술은 보편사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보편사는 역사의 증거들을 모아 이야기로 구성한다. 유물론적 역사가는 주어진 자료가 아니라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구성의 원칙이란 오늘날 우리를 기다려왔던 투쟁의 옛 선배들의 시선에서 오늘 세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구성하는 것. 역사주의자의 과거는 변경 불가한 지나간 사실들이라면 유물론적 역사가에게 과거는 생생히 살아 오늘과 연결되며 오늘의 연속된 시간을 파괴하기 위해 과거와 이어지는 별자리를 구성한다.
사유에는 생각의 흐름뿐 아니라 정지도 포함되는데 정지는 마치 저속촬영기가 시간을 압축해 놓는 것처럼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을 말한다. 시간이 공허하고 균질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그 시간 안에 정지의 순간이 포함되며 많은 것들이 응축되고 응결될 것이다. 다른 시간의 독특성을 경험할 것이고 바로 그 속에서 선조로부터 이어온 해방의 힘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은 하나의 단자(모나드)로 결정된다. 모나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세계의 모습을 하나의 덩어리 속에 가지고 있는 것. ‘구체적 보편’이 ‘단자’다. 구체적 보편은 내가 보는 이 세계는 나에게 드러난 특수한 시간과 장면이 아니라 투쟁의 역사가 응축된 순간으로 보는 것.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계시의 순간이며 신적인 파편을 발견하는 것이다.
#18
단 하나, 어떤 한순간으로 역사를 꿰뚫고 있는 진실들, 혁명적 힘들을 포착하는 것이 단자다. 역사적 유물론자가 보는 세계는 응축된 시간, 응결(정지) 된 순간이다.
자본주의적 근대는 역사를 역사주의적 보편사로 보고 시간을 초침이 지나가는 것처럼 균질하고 공허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지 않는다(ex놀 때와 일할 때의 1시간은 다르다). 균질하고 공허한 잣대로 세상을 보는 것은 자본주의 근대화와 연관되어 있으며 벤야민은 이것을 포착하고 있다.
* 상품: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상품분석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상품이라는 자본주의적 사물이야말로 변증법적 이미지이고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상품은 사용 가치와 교환가치가 있다. 사용 가치는 정신적인 것일 수도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정신적 위안을 위한 소비도 하기 때문->만족을 주는 물질의 유용성. 인간이 상품을 사용할 때 사용 가치는 실현된다. 교환가치는 상품과 상품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가치다(금 반 돈 = 쌀 한 가마니). 교환가치는 상대적 가치다. 금이 흔한 곳에서는 성립 불가. 이 교환을 매개하기 위해 화폐라는 독특한 상품이 나오게 된다. 상품 가치에서 사용가치를 제하면 교환가치만 남는다.
상품 그 자체의 무언가가 있기에 교환이 가능한데 그것을 마르크스는 ‘가치’라고 한다. 가치는 무엇일까? 금이 흔해져 가치가 하락하면 금을 구하는데 인간이 큰 힘을 들이지 않으므로 값이 떨어진다. 모든 상품에 들어있는 가치가 바로 인간의 노동이다. 자본주의는 상품과 상품의 교환 관계로 구성되기 때문에 인간의 교환을 추상적인 유용노동으로 구성한다->일을 잘하든 못하든 한 시간의 임금이 정해져 있다. 사회가 평균 노동을 계산해서 상품의 가치를 정한다. 인간의 차이를 사장하고 평균적인 존재의 능력으로 추상화한 어떤 내용이 상품의 가치를 구성한다.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동력, 정신적 힘은 추상화, 균질화에 있다.
모든 것은 교환 가능해진다. 하지만 사용 가치는 교환 가능하지 않다. 애인에게 선물할 장미 한 송이와 장미기름을 제조하는 사람의 장미 한 송이는 완전히 다르며 비교 불가하다. 이것이 바로 구체성이다.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노동만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성 자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 사회에서는 인간을 판단하기 쉽다. 옷, 아파트, 차, 가방, 신발 등… 우리가 이미 그렇게 추상화된 것에 적응되어 있기에 그 판단은 거의 맞아떨어지고 그런 경험 속에서 인간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세계의 경험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벤야민이 구원하려는 것은 억눌린 사람들의 소망이고 오늘 여기서 활짝 열려 있는 혁명의 가능성인데 그 혁명은 바로 모든 ‘인간의 단수성’이다-> singularity, 독특성’, ‘단독성’, ‘비교 불가능성’, ‘판단 불가능성’.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신적인 내용이다. 혁명이란 메시아적인 난입에 힘입어 공허하고 균질한 시간을 중지시키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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