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바둑판·장기판·고누판

고려왕궁(만월대)터에서 발굴된 고누놀이판을 새긴 바닥벽돌(왼쪽)을 탁본하는 모습과 복원도.
13세기 중반기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에 납품할 바닥벽돌 제작자들이 벽돌을 구우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려서 놀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7년 여름,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굴한 북한 개성
고려왕궁터에서 800여 년 전 국내 최고(最古)로 추정되는 고누놀이판이 나왔다. 만월대 7호 건물터였는데, 바닥을 장식한 가로 세로 30cm
짜리 벽돌(전·塼)에 새겨져 있었다.
얕은 선으로 사각형을 4개 만든 뒤 여기에 대각선을 그은 것으로,
사각형이 세 개인 오늘날의 ‘참고누’와 유사했다. 발굴단은 “왕궁 마당에서 한가하게 고누를 두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며 “벽돌 제작자들이
벽돌을 구우면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새겨 놓고 놀았던 것인데, 왕궁에까지 깔게 된 것”으로 추정했다.
말(=알)을 사용하는 놀이로는 바둑과 장기가 대표적이다.
국내에 가장 오래된 바둑판은 2004~2005년 경북 경주
분황사에서 발굴된 1300년 전 바둑판이다. 역시 흙벽돌에 만들었다. 가로 42cm, 세로 43cm에 각 칸의 너비는 평균 2.8cm로, 현대
바둑판 규격(가로 세로 약 42cm×45㎝, 각 칸 너비 2.3㎝)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이 바둑판은 가로 세로 각 15줄이며, 화점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가로 세로 각 19줄인 요즘 바둑판과는 포석 등이 달랐을 것이다. 한데 14세기 전반에 침몰된 원나라 무역선인 전남 신안
해저유물선에서도 가로 세로 각 15줄짜리 목제 바둑판이 출토된 바 있다. 바둑서지연구가 안영이씨는 “15줄로도 바둑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나 중세에는 15줄 바둑이었다는 말일까?
반증 자료가 있다.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보물 창고)에 있는 바둑판은 19줄짜리다. 낙타 등 각종 동물이 화려하게 장식된 이 바둑판은
백제에서 건너갔다고도 하고, 혹은 당나라 전성기 때 것이라고도 한다. 화점이 17개(현재는 9개) 표현된 것 외에는 요즘 것과
동일하다.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보물 창고)에 있는 바둑판
(백제 의자왕이 보낸 것으로 추정)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는 남부여(백제)의 의자왕이 보낸
바둑판과 바둑알, 바둑통이 보관되어 있다.
바둑판의 정식 명칭은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이며
바둑통의 정식 명칭은 ‘은평탈합자’이다
쇼소인은 일본
쇼무(聖武·701~756)왕이 사망하자, 그의 명복을 빌면서 왕비가 유품을 도다이지에 바치면서 생겨났다. 일본 왕실 최고의 ‘보물 창고’이다.
쇼소인에는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년)이 당시 일본에서 대신(大臣)으로 명망이 높던 후지와라(藤原鎌足·614~669)에게 하사한 화려한
장식의 바둑알과 바둑알통도 있다. 이 바둑알은 후지와라의 손녀가 일본 쇼무왕의 비(妃)가 되면서 쇼무의 애장품이 됐다가 쇼소인에 들어가게
됐다.
쇼소인에 보물이 소장된 과정을 기록(서기 756년)한
‘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에 따르면, 의자왕은 후지와라에게 바둑알과 알을 담는 통 4개를 하사했다. 코끼리무늬 등을 장식한 목제 바둑통에는 붉은
색과 감색(紺色) 바둑알(각 160개), 그리고 흑백 바둑알(각 140개)이 담겼다. 바둑알 지름은 1.5~1.7㎝, 두께 0.6~0.9㎝이다.
이중 붉은 색과 감색 바둑알은 상아에 색칠을 한 뒤, 선을 깎아서 야생 오리와 꽃무늬 등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무늬가 없는 흑백 바둑알은 각각
석영과 사문석(蛇紋石)으로 만들었다.
‘백제 바둑알’은 백제
미술의 세련미를 상징하는 동시에, 백제의 ‘바둑 문화’가 얼마나 수준 높았던가를 증명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은
바둑에 빠졌다가 정사(政事)를 망치고 장수왕에게 침략을 당해 죽음을 맞는 것으로 적혀 있다. 한국 바둑의 1인자 적통이 조남철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등 모두 백제의 후예, 호남 출신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이같은 ‘역사성’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바둑에 비해 좀더 대중적인 장기판이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예는 아직 없다는 게 정설이다. 충북
단양8경으로 꼽히는 사인암에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장기판이 돌에 새겨져 있다. 토지박물관이 소장한 장기판(조선시대 추정)에는 “한 수를
무르고자 하면,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壹數欲退 非父之子)라는 문장이 장기판 한
가운데에 적혀 있다.
목화자단기국을 보면,
자단이라는 나무에 상아를 정교하게 박아서 만들었는데, 두 재료 다 백제(남부여) 본국에서는 나지 않는 것들이다.
자단나무는 바라트(인도)
남부나 스리랑카에서 자라고, 상아는 코끼리가 있는 바라트나 실론 섬(스리랑카)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이들 지역에
담로(해외 식민지이자 무역기지)를 만들어 그곳에서 재료를 사 왔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실론 섬과 바라트의 벵갈 주에는 담로계 땅
이름이 나와 남부여(백제)가 이곳에 담로를 세웠음이 입증된다. 의자왕은 이 담로들을 다스리는 담로주로부터 바둑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둑판에 낙타가 새겨진 것이나 은평탈합자에 코끼리가 새겨진 것도 백제가 해외 무역으로 이런
동물들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코끼리는
바라트/스리랑카(실론)에 살고 있는 동물이라 그곳에 담로를 세운 백제인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고, 낙타는 백제와 접촉한 북조 왕조나 바라트와
교류한 페르시아에서는 흔한 짐승이었기 때문에 백제인이 북중국이나 바라트에서 낙타를 본 뒤 그 생김새를 바둑판에 새겼으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왜에 낙타를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
첫댓글 백제 목화자단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