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막강한 사병집단에 대한 기록들
1. 가별초라는 이름
태종 21권, 11년(1411 신묘 / 명 영락(永樂) 9년) 6월 17일(병오) 3번째기사
동북면 가별초를 혁파하다
동북면(東北面) 가별초(家別抄)를 혁파(革罷)하였다. 이보다 앞서 동북면(東北面) 함주(咸州) 등 처의 양민(良民) 5백 가(家)가 태조(太祖)의 잠저(潛邸) 때에 역속(役屬)되어, 그 수령(守令)들이 이들을 부리지 못하였는데, 그를 가리켜 가별초(家別抄)라 하였다.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 그 반(半)을 감(減)하여 속공(屬公)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혁파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이것을 혁파하였으니, 그 누가 감히 점유[占執]하겠는가? 아들이나 사위의 집에 만일 그 백성들이 왕래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고하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임금의 무사(無私)한 데 감복(感服)하였다.
태종 시절 사병을 혁파하면서 동북면에 있던 사병도 혁파되었는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함주 등의 양민 오백여가가 이성계에게 예속되어, 그 고을의 수령들도 함부로 이성계의 허락없이 부릴 수 없었다는 내용 입니다. 이러한 가별초 집단 중에서 주요 사병들이 뽑힌 것으로 보입니다.
2. 동북면의 고려인 + 여진족
女眞千戶李豆闌帖木兒(녀진천호리두란첩목아) : 여진의 천호 이두란첩목아(李豆蘭帖木兒)가
遣百戶甫介(견백호보개) : 백호 보개(甫介)를 보내어
以百戶來投(이백호래투) : 1백 호를 거느리고 와서 투항하였다.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은 1371년 고려에 백여호를 거느리고 투항 합니다. 이지란신도비의 기록으로는 이성계와 이지란은 1367년 이전부터 알고 지냈다고 했고, 나하추와의 싸움에서도 이지란은 종군 했는데 그때가 1362년이었으니 이지란은 고려에 정식으로 투항하기 전부터 이성계를 따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이지란이 백여 호의 여진족을 거느리고 있었을 정도니, 이성계 휘하의 여진 병사들이 상당했던것 같습니다.
태조가 환조를 따라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짐승을 보고 빙판의 비탈길에 말을 달려서 쏘면, 번번이 맞히어 한 마리도 빠져 도망가지 못하였다. 야인(野人)이 놀라 탄식하기를,
“께서는 세상에서 당적할 사람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성계는 22살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 기록은 그보다 순서상 앞에 있기 때문에 관직 생활 이전의 기록으로 보입니다. 이성계가 뛰어난 솜씨로 사냥을 하자 변방의 야인들이 감탄했다는 부분인데, 이런 부분도 이성계와 그들의 가까운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싸움에 여진군(女眞軍)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함부로 죽이니, 태조가 영을 내리기를,
“적군이 궁지에 몰려 불쌍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성계가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할떄의 기록인데, 이떄는 분명하게 여진 병사들이 언급됩니다. 그냥 여진 기병이라는 식의 표현도 아니고 여진군이라고 표현되는것을 보니 휘하 여진족의 숫자가 한개 부대를 칭할 정도의 규모는 되었나 봅니다.
○ 동북면지역 백성들과 여진인들 가운데 당초 종군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태조의 회군 소식을 듣고 분연히 앞 다투어 모여들어 밤낮없이 달려 왔는데 그런 사람들이 1천 명이 넘었다.
위화도 회군 당시 당초 종군하지 않았던 동북면의 백성들과 여진인들이 이성계를 돕기 위해 천명이 넘는 숫자가 급히 개경으로 달려왔다는 부분인데, 이때 당시에도 여진병사들이 언급됩니다.
고려의 말기에 관(官)에서 군사를 등록시키지 아니하고 여러 장수들이 각기 점모(占募)하여 군사를 삼으니, 이를 패기(牌記)라 명칭하였다. 대장(大將) 중에 최영(崔瑩)·변안열(邊安烈)·지용수(池龍壽)·우인열(禹仁烈) 등은 막료(幕僚)와 사졸(士卒)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욕설로 꾸짖어 못하는 말이 없었고, 혹은 매질을 가하여 죽는 사람까지 있게 되니, 휘하의 군사가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태조는 성품이 엄중하고 말이 적었으며, 평상시에는 항상 눈을 감고 앉았었는데, 바라보기에는 위엄이 있으나 사람을 접견할 적에는 혼연(渾然)히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뿐인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하였다. 그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홀로 휘하의 사람들은 예절로써 대접했으며 평생에 꾸짖는 말이 없었으므로, 여러 장수들과 휘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였다.
물론 동북면의 고려인 + 여진군 외에 계속해서 충원되는 고려 병사들도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 말기에는 무장들이 사병을 거느리는 것은 물론이고 재상들이 여타 지역을 관할하듯 하며 병사를 거느리기도 했는데, 이성계가 아랫 사람들 대하는게 좋아 병사들이 몰려들었다는 부분인데 사람 좋다는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병사들이 이성계 밑으로 가길 원했다는것을 보면 이후에도 계속 복속되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일개 병졸들 외에도 이성계의 전투에서 언급되는 고여 등의 인물은 황산대첩 부근부터 이성계의 밑에서 움직이더니 어느순간 정몽주 참살에도 관여할 정도의 측근이 되는데, 이성계가 동북면 외에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계속 전투를 치루는 동안 수하 측근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던것 같습니다.
3. 규모
1361년 - 박의의 군대를 진압하며 1,500명 동원1362년 - 개경 탈환전에서 2,000명 동원
1364년 - 최유의 군대를 격파할때 1,000여명 동원1370년 - 1,600여명 정도가 1차 요동 원정에 동원
사병의 숫자가 기록되지 않은 전투에서도 이지란 등의 참전을 보면 여타 사병들이 참전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합니다. 대략 그 숫자는 1,000여명에서 2,000여명 정도 입니다.
4. 특유의 대라소리
조가 마침내 암방사(巖房寺)의 북쪽 고개로 올라가서 대라(大螺)를 한 차례 불게 하자 모든 부대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통상 전투를 벌일 때 다른 장수들은 대라를 사용하지 않았고 태조만이 선두에서 대라를 불게 했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은 대라 소리만 듣고도 다들 태조의 부대가 도착했다고 기뻐했다.
고려사 우왕 14년
이튿날 바로 적이 주둔한 토아동(兎兒洞)에 이르러서, 동(洞)의 좌우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 적의 무리가 먼저 동내(洞內)의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을 점거했는데, 멀리서 소라 소리[螺聲]를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이성계의 로 만든 소라 소리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이성계의 부대는 소라로 만든 군사 악기를 전투에 나서면서 불러대었는데, 이게 다른 장수들이 쓰는 군사용 악기와는 좀 다른 걸 썻는지 그 소리만 듣고도 고려 사람들도 "이건 이성계의 부대가 왔다는 소리다." 라고 알고, 적인 왜구들도 "이 소리를 들으니 이성계가 근처에 왔다는 소리다."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금 후에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螺]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그 유명한 황산대첩 당시의 기록 중 하나인데, 당시 이성계는 적의 막강한 저항 때문에 군대가 공격에 어려움을 겪자 소라로 만든 악기를 불게 하여 군대를 정돈시켰습니다. 저 소라로 만든 악기에 대한 기록이 꽤 자주 보이는데 저게 당시 이성계 군단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듯 보입니다.
5. 막강한 기병집단
1. 왕은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날랜 군사[精兵]를 거느리고 안주(安州)로 빨리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指揮)하게 하고, 태조에게 명하여 동북면으로부터 날랜 기병[精騎]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2.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3. 적군이 최영을 쫓으니, 최영이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날랜 기병[精騎]을 거느리고 바로 나아가서 백연과 합세하여 쳐서 적군을 크게 부수었다. 최영은 적군이 쓰러져 흔들림을 보고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곁에서 적군을 치니, 적군이 거의 다 죽었으며 남은 무리는 밤에 도망하였다.
4.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하였다.
5.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순서대로 최유의 공격 - 지리산에 침입한 왜구와의 사투 - 해풍 전투 - 황산대첩의 기록들 순 입니다. 해풍 전투 당시는 이성계 휘하의 막강한 기병들의 역습이 전황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지리산에서의 전투에서는 정찰을 나간 비장(이후에 정종 이방과도 나서서 비슷한 보고를 올립니다)이 싸우기 어렵다면서 하는 이야기가 "말이 지나갈 수 없다." 는 이야기 입니다.
또한 황산대첩 당시에 적의 지리적 상황이 좋자 이성계가 병사들에게 당부한 것은 "말을 넘어지지 않게 하라." 는 이야기고, 최유의 공격 당시에는 아예 공민왕이 직접 이성계에게 동북면의 기병 천여명을 이끌고 가도록 했습니다. 이런 점을 볼때 이성계 사병집단은 막강한 기병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이성계의 대부분 싸움이 수성전보다 회전 위주였다는 점에서도 그런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황산대첩 당시의 기록을 보면 포위된 이성계가 주위 휘하의 기병들과 같이 빠져나오는 부분이나, 이성계의 옆에서 처명 등이 싸우는 장면들이 보이는데, 적을 휘젓고 다니는 이성계의 전설도 이런 부분에서 어느정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성계 혼자 돌아다닌게 아니라 주위에 측근인 친병들이 같이 호위를 하며 말을 타고 돌격을 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