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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절대 복음은 자유 입니다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2장1절-10절
설 교 자 : 박 한 서 목사 <2015년 2월 22일 주일 오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찬송가 509장)은 <엘라이져 케슬>(Elijh Cassel)이 지은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라는 곡입니다.
<엘라이져 캐슬>은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의사였고
평신도 지도자로서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그가 출석하던 <네브라스카>의 한 침례교회에서 모범적으로
봉사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는 특별한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전도하며 자신의 사명은 복음 전도라고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
전도하시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렇고 말구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그의 말에 감동이 되어,
집에 돌아와,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하겠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음악을 전공했는데,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것이,
(찬송가 508장)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에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 하겠네
화목케 하라 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의 나이 60를 넘기면서, 그의 마음에
파트타임 아닌 풀타임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드리면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목회에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첫 부임지인 <콜로라도 덴버>의 한 작은 침례교회의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 부부는 취임 예배에서 취임사 대신에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부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와서 물었습니다.
“목사가 되신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부인이 그렇게 빨리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캐슬>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에 행복한 전도자의 곁에 머묾이 자기의 행복이라고,
혹시 자기가 먼저 가게 되더라도 변함없이 당신의 하늘의 응원자가 되어,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아내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서 다시 회중들이
(찬송가 508장)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는 복음’ 전하는 것을,
천사에게 맡기지 않고, 왜 사람에게 맡기셨을까요?
본문 <갈라디아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8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역사하셔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역사하셔서,
나를 무엇으로 삼아 주셨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이 땅에 살고 있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누구나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생명 주셨을 때, 우리에게 기회 주셨을 때,
우리에게 은혜 주셨을 때, 주를 위하여 힘써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은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입니다.
화목케 하라 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시는 기둥 같은
주의 일군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11절-12절 말씀에서
11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 니라
12절 이 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복음을
<갈라디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에, 들리는 소식은
“그들이 복음을 떠난 삶을 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갈라디아서> 1장 6절 말씀에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갈라디아서> 1장 8절 말씀에
8절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복음이 있습니까?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직접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에
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 사도가 죽음을 각오하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에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바울> 사도가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에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 요한이 말했습니다.
<요한 일서> 5장 12절 말씀에
12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바울> 사도는 <예수> 믿을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 5절-6절 말씀입니다.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그런데 <다메섹> 가는 길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게 됩니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4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5절 “주여 누구시니이까?”
5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이 <다메섹> 체험을 통하여, 놀랍게 변화됩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빌립보서>3장 7절 -8절 말씀에
7절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주의 보혈, 부활”입니다.
복음을 잘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잘 전달되려면
‘복음의 내용’ 못지않게,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같은 내용의 복음일지라도 어떤 사람이 전하느냐에 따라서,
받는 사람의 감동이나 느낌이나 결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복음을 말해 주는
목사님이나 전도자가 신뢰할 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면, 전해지는 그 복음을 믿을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사이비’, ‘이단’으로 의심이 되면,
아무리 내용이 좋은 복음을 이야기해 준다 할지라도, 거부하게 됩니다.
복음의 내용 못지않게, 전하는 사람도 중요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18절-24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길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사이비’ 내지는 ‘가짜’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에 기독교를 심히 핍박했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하니,
이는 필시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 된 것처럼
위장하여 교회를 핍박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를 받고 있는 <바울>이,
아무리 계시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해도,
사람들이 <바울>이라는 인간 자체를 지금 믿지 않기 때문에,
그가 전하는 복음 역시 거부당할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메섹>의
회심체험을 강하게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20절 말씀에
2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을 변호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누군가 공신력 있는 다른 사람이나 단체에서 변호를 해 줄 때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갑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로 믿기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바울>을 복음의 동역자로 인정하고 선포해 주면,
<바울>은 거침없이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고 사람들도 그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증거나
인정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복음의 문’이 막히는 것을 우려하여,
먼저 된 자들과 동역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문이 막히는 것을 걱정하여
자신이 사도인 것을 적극 변명하고, 공신력 있는 제자들과 더불어
동역을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모든 사람들에게 믿도록 만들고,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인 것을 사역을 통하여 증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4절 말씀에,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했다”고
<하나님>의 역사를 아울러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고,
어떤 열매가 맺어가고 있는지 그것을 보고 나의 사도됨을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열매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백날 입으로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맺은 열매가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매를 많이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의 놀라운 체험을 한 뒤,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15일 동안 머물면서,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나 교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2장1절-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14년 만에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간 <바울>은,
사도들을 만난 후, 그동안 자신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8절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8절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전한 복음의 내용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일치한지 확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바울>이 지금껏 전한 것이 다른 복음이었다면, <바울>이 멀고 먼
이방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전한 일이 헛수고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이나,
지금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은 일치합니다.
복음은 하나입니다. 구원을 얻는 복음은 하나입니다.
태양이 하나이듯이, 달이 하나이듯이, 구원을 얻는 복음은 하나입니다.
‘절대’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는 복음이,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사조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절대 변할 수 없는 이유로
<바울>은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 복음은 <하나님>께로 온 계시이기 때문이라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참고 성경 <갈라디아서> 1장12절)
문제는 이 복음이 시대에 따라 자꾸 변한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서 제가 청년기에 들었던 복음과
지금 듣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다릅니다.
시대에 따라 복음이 다른 모습을 하고 나옵니다.
제가 청년일 때에, 유행했던
주된 복음은 ‘<예수님> 재림’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부흥회는
거의 초점이 ‘재림’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열 뿔 달린 짐승이 어떠하고, 휴거가 어떠하고...”
교회에서 휴거에 관한 영화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강단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설교가 ‘재림 설교’입니다.
반세기도 안 돼 복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에는
“복 받으라”는 설교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적극적인 사고방식”
“불가능은 없다”
“정상에 도전하라”
한국 경제개발 이라는 사회 현상이
복음도 개발식 복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한참 지나니까 ‘불 받으라’는 설교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오순절 교회에서 시작된 불 받기 운동은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장로교 할 것 없이
자기 고유의 옷을 다 버리고 불 받기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불이 좀 꺼지고 나니까 요즘은
종교 다원주의가 판을 칩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
“불교도 좋고, 힌두교도 좋고, 이슬람도 좋고,
유교도 좋고, 다 같이 가자.” 교인들이 헷갈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시대에 따라, 옷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듯이,
강조점이 좀 다를 수 있지만,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복음이란 바로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2절 말씀에,
2절“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14절에는
14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23절에는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 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네 가지 복음에 대해 또 강조합니다.
(1) 십자가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듭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 말씀에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모두가 죄인을 정죄하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골짜기로 다니시는 <예수님>입니다.
(2) 십자가는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킵니다.
<로마서> 5장10절 말씀에,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3)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신비입니다
<로마서> 8장15절 말씀에,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시기 때문에
나를 책임져 주시고, 나의 가정을 책임져 주시고,
나의 미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4)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신비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17절 말씀에,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생각이 새로워지고, 인생의 목표가 새로워집니다.
이것이 십자가 은혜입니다. 참 복음은 ‘자유’를 줍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4절 말씀에,
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알 때 ‘자유’가 생깁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에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1) 죄인을 의인이 된 것을 알 때,
(2)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된 것을 알 때
(3)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알 때,
(4) 죄인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알 때
자유가 임합니다. 자유는
평안을 필연적으로 가져다줍니다.
자유와 평안은 하나입니다.
자유에 대한 인식이 자동적으로 평안을 줍니다.
이 둘은 기차의 레일과 같습니다.
자유와 평안은 나란히 갑니다.
그래서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2장 3절-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절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아멘.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왜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을까요?
사실 그 당시 사도 <바울>이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함께 간 것은 대담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도전 행위로 볼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디도>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간 것은
불화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복음의 진리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한 조건으로,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으로 받아들여지며,
또한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이
교회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
할례 받은 사람만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만
생각하던 그때에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긴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전향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게 되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5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진리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에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마 여러분께서는 “여섯 맹인의 코끼리에 대한 논쟁”이라는
이야기를 다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인도의 여섯 명의 맹인이 각자 코끼리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말만 듣던 코끼리 구경을 하게 되니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첫 번째 사람이 코끼리를 더듬어 보며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이 내게 코끼리를 보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는 코끼리의 배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꼭 담벽 같구먼”하고 만족 해 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둥글고 부드러우면서도
뾰족한 상아를 만지면서 소리쳤습니다.
“아, 코끼리는 창날 같구나!”
세 번째 사람이 “어디 보자”하면서 코끼리에게 다가서서
코끼리 코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용감하게 외쳤습니다.
“코끼리는 꼭 구렁이 같다.”
네 번째 사람은 더듬으며 코끼리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고
손에 잡히는 코끼리 다리를 꽉 붙들며 감격해 했습니다.
“분명히 코끼리는 나무와 같구나.”
다섯 번째 사람은 코끼리의 귀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코끼리에 대해서 말한 네 사람의 말을 전적으로 부인했습니다.
“이 사람들, 말 같지 않은 것은 하지도 말게.
이것 보게 코끼리는 분명히 부채 같지 않은가?”
이때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사람이 안타깝게 기다리다가
잡히는 대로 잡은 것이 코끼리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그 꼬리가 흔들흔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섯 번째 사람이 “여보게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다구?
이것 보게 코끼리는 바로 밧줄 같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사람은 자기가 본 코끼리 때문에,
오랜 시간 아주 심각하게 자기가 본 것만이 옳다고,
바로 보았다고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부분적으로 볼 때는 모두가 옳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볼 때는 모두가 틀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지금은 부분적으로 압니다.
그러나 온전히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평화를 유지해야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1절-3절 말씀에
1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2장 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9절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악수례로 맞이한 것은
그들이 서로 전도자로서의 대등의 위치에 있는 것을 보이고,
<바울>의 사도 권을 공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사이의 단 한 가지 차이는 그 복음을 전파하는
영역이 다르게 할당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오직 한 가지 복음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서 방식의 차이는 있습니다.
강조점의 차이도 있습니다.
가령 <바울>은 율법주의자 들을 향해 편지를 썼고,
<야고보>는 도덕률 폐지론자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서로 보완했습니다.
단지 한 가지 복음, 사도적인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해 가르쳐진
교리의 중심 부분만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여러 가지 다른 복음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복음입니다.
세기가 바뀌어도 이 복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과학자나 비 과학자나 누구에게나 전해져야 할 복음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다른 권한을 받았지만
그들은 공통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잘 지켜 나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절대 복음을 믿고, 자유와 평안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