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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일요일, '산모퉁이'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백작부인은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가고 나는 베낭을 매고 백사실 계곡으로 향했다. 서울 도심 속 도롱뇽이 사는 유일한 계곡이라 자랑하는 곳이다. 처음에는 백사실계곡을 구경하고 세검정초등학교 정거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요즘 내린 비로 깨끗해지고 玉流가 흐르는 홍제천을 만나니 개울가를 따라 집까지 걷고 싶었다. 이 날 걸었던 풍경들이다. 산모퉁이까페→뒷골마을→백석동천, 백사실계곡→현통사→세검정→홍지문→옥천암→집... 장마진 여름, 땀으로 훔뻑 젖은 4시간의 도보길이었지만 서울 한양의 500년 역사는 결코 간단치 않다는 걸 다시금 느껴보았다.
'산모퉁이'카페를 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백사실계곡을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뒷골마을로 내려오면 고향친구인 고영훈 화백의 화실이 보인다.
이 가게의 왼쪽으로 백사실계곡이란 팻말이 보인다.
(뒷골마을 삼거리 구멍가게, 작년 친구들과 고영훈 화백의 화실에 놀러가며 찍어둔 사진)
백사실계곡 초입에 처음 만나는 백석동천 음각...
‘동천(洞天)’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 유명한 동천이 두 곳 있었으니 하나는 북악산 자락의 백사실계곡이 있는 ‘백석동천’이고 다른 하나는 인왕산 자락 청계계곡이 있는 ‘청계동천’이다. 이곳이 ‘백석동천’으로 불리는 곳인데 백석은 백악 즉 북악산을 말한다. 그러니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란 뜻이 되겠다.
(누리장 나무들이 꽃을 피웠다.)
예부터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두고 ‘백사실계곡’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사람 이항복의 호가 ‘백사’이기 때문에 그가 이곳에 별장을 짓고 계곡 이름을 ‘백사실’로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부암동에 자리한 옛 명소 중에서 북악산 서북쪽에 안긴 백석동천이 백미라 할만하다. 백석동천은 백사실(백사골) 계곡을 일컫는 말로 계곡 중간에 19세기에 조성된 별서유적이 남아있다.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의 ‘참봉집’에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동천과 모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부터 조그만 별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석동천에는 둥그런 연못터와 육각형 정자터, 사랑채터와 안채터 등이 남아있으며, 백석동천(白石洞天)과 월암(月巖)이란 바위글씨(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어 당시의 풍류를 아련히 전해준다. 2010년 여름부터 사랑채터와 안채터를 발굴조사하여 많은 유물이 나오고 있으며, 현재 발굴 뒷정리를 하고 있다. 이곳은 부암동 주민들만이 알고 있던 그들만의 피서지였으나 이제는 휴일과 여름이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백사실계곡을 내려오다 보면 '현통사'를 만난다. 일붕선교종단 소속 절이라 한다.
현통사 입구 바위에 일붕 서경보 스님의 애국시가 붙어있다. 일붕 스님은 1914년 제주 서귀포 출생이며, 산방굴사에서 수계득도 하신 분이다. 일붕(一鵬) 스님은 1950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거쳐 1969년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말레이시아 불교 종단으로부터 명예대승정, 1973년 타이베이원화대학[臺北文化大學]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충남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80년 미국 히드대학에서 명예종교학박사 학위 등 67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보유했다. 동국대학교 교수(1962), 불국사 주지(1963),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1969), 세계선(禪)학회 회장(1976), 한중불교학술연구회장(1982), 자비원장학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으며, 주요저서로는 〈불교입문강화 佛敎入門講話〉(1948)·〈불교사상〉(1979) 등 다수와 〈부처님의 위대한 열반〉(1979) 등의 번역서가 있다.
白石淸流洞 看花聽鳥聲 一鹏禪日月 愛國萬尊淸
이름하여, 백사폭포...
백사실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도롱뇽, 개구리가 사는 청정한 곳이며, 계곡 하류 현통사 앞에는 하얀 반석을 타고 내려오는 조그만 폭포인 백사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이 폭포는 서울 도심의 유일한 자연 폭포이다. 백석동천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뒷골마을(능금마을)이란 마을이 나온다. 여기가 도심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완연한 산골마을로 도심 속의 두메산골로 통한다. 예로부터 능금나무 자생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며 현재 10여 가구가 산다
백사골이 북한산 계곡과 만나 홍제천을 이루며 부암동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그 중간에 세검정이 있다. 연산군 시절 탕춘대의 부속 정자로 세워졌다고 하며, 광해군 때는 김류, 이귀 등이 물에 칼을 갈며 반란(인조반정)을 모의하던 곳이다. 칼을 씻었다는 뜻의 세검정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보수하면서 군사와 일꾼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허나 개발의 물결에 밀려 홍제천이 오염되고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그 운치는 사라진지 오래다.
계곡을 벗어나 탁 트인 언덕배기에 서니 북악산 뒷동네 여름풍경이 시원하다.
왼쪽이 세검정초등학교 버스정류장이다. 홍제천 상류쯤 된다. 여기서 버스를 타지 않고 개울가로 내려갔다.
장마진 날이 계속되다 보니 홍제천 물은 더 께끗해졌다. 아이들이 즐겁다. 홍제천을 따라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물 맑은 개울가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오른족으로 세검정이 보인다. 세검정 [洗劍亭]
세검정은 신영동(新營洞) 홍제천 가에 있는 정자이며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T자형 3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세검정은 1747년(영조 23)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원래의 정자는 1941년에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명칭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거사 후 이곳의 맑은 물로 칼을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 북악산 남쪽 기슭 백운대에서 이어지는 사천계곡(沙川溪谷)을 중심으로 한 세검정 주변 일대는 경관이 아름다운 풍치지구로 유명하다. 세검정을 지나 홍은동 방면으로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이 나온다. 숙종 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만들면서 낸 관문으로 한북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문 곁에는 홍제천을 흘러보내는 오간대수문이 있으며, 지금의 문은 1977년에 복원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면 옥천암이란 암자와 함께 고려 때 조성된 하얀 불상, 보도각백불이 나온다.
홍지문 너머로 인왕산이 보이고...
오간대수문
홍지문을 지나서 더 걸으면 옥천암 보도각백불이 나온다. 옥천암의 보도각백불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할 때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고종의 어머니이자 대원군의 부인이 아들 고종을 위해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하니 한 왕조의 처음과 끝을 살았던 왕실 사람들의 기원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약 5m 높이의 하얀 불상이 범상치 않다.
옥천암 경내...
보도각백불의 정확한 명칭은 '홍은동보도각마애보살좌상(弘恩洞普渡閣磨崖菩薩坐像)'이다. 흰색의 호분(胡粉)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기 때문에 백불(白佛) 또는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불상에 호분을 칠하여 백불로 부르고 있는 예로는 이 불상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울 안암동 보타사마애보살좌상과 안성 굴암사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는데 특히 보타사 마애보살좌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원래 이곳은 신라시대 절인 장의사(藏義寺)의 경내로 추정되나 현재는 옥천암이라는 작은 암자만 남아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이 마애불상 앞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가 고종의 천복을 빌었다고 하는 왕실과 관련된 관음보살 도량으로 유명하다. 현재 마애불상은 근래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도각이란 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1906-7년 사이에 찍은 독일인 헤르더 산더의 사진첩에 들어있는 ‘한양 인근에서 찍은 흰 부처상’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사진.
마애보살상은 커다란 사각 형태의 바위면에 저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바위의 남면은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내곡(內曲)된 구조로 되어 있다. 바위의 왼쪽 편과 뒷면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를 갈았던 붙임바위가 남아 있어 민간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애보살상은 바위의 크기에 맞게 양 무릎을 넓게 벌리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에 쓴 원통형의 보관(寶冠)이나 목걸이 장식, 그리고 대의(大衣) 안쪽으로 보이는 대각선으로 입혀진 내의(內衣)의 표현에는 금색을 칠하여 장식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또한 관의 좌우에 뻗어 있는 관대(冠帶)에도 타원형의 금판(金板)이 달려있어 화려함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조각기법에서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며 관 밑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다. 이 불상은 머리에 쓴 보관으로 보아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짐작되지만 대부분의 관음보살이 보관에 화불(化佛)을 새기는 것과 달리 이 보살상의 보관은 세 칸으로 나뉘어 각각 그 중심과 모서리에 연꽃을 장식하였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입이 표현되어 있어 고려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옷 주름은 전반적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면서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손에는 지물(持物)을 들지 않고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대고 있다.
보도각백불은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대체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된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구제하는 매우 대중적인 보살로 관음보살의 보살행에 대해서《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그 내용은 무고한 형벌을 받을 때,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맹수에 쫓길 때, 화재를 만났을 때 등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도움을 주는 자비의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관음보살은 민간에서 많은 신앙을 받고 예배되었던 불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조성되었다.
옥천암을 지나면 도시하천의 평범한 이웃들의 담장과 화초들을 만난다.
유년의 추억을 만드는 아이들...
버들치인지 송사리인지...
나는 이 깃발을 보면, 히틀러의 철십자를 생각하며 피식 웃곤한다.
울 고향집 여름 뒷뜰에 가득 피었던 그 빨간 칸나...
서울의 기차길과 하천변은 언제부턴가 소시민들의 거처가 되어왔다.
담장 위에는 뜻밖의 목화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수수... 시골 고향이 그리운 이 집의 주인장 마음을 짐작하겠다!
서울 복판에 호박꽃...
동네아이들은 즐겁다! 세상의 시름은 아직 이들의 것이 아니었으면...
삶은 빈궁하지만 꽃을 심은 마음만은 부자이리라...
그리고 집 가까운 오늘의 홍제천 도보길 출구에서 본 땅나리... 홍제천은 여기서 계속 8Km를 더 흘러 한강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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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좋은곳입니다,서울시내에 이런 보석같은곳이 있다는것이 믿기지 않을정도로.시간되면 한번같이들갑시다.
세억이 위수지역인데...ㅎㅎ
허락없이 갑자기 기분이 동해서
산모퉁이카페 들리고 좀 걸었습니다! ^^
무릎은 이제 좀 걸을만 한가 보르겠네.
암튼 빨리 쾌유하시길~
세억인 성북동 귀신인데 몇게 못산게 지금도 한숨소리가 들리는것 담다.
아 그게 성북동귀신 한숨소리였구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