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한 동생은 제 친동생이 아니다.
물론 지금 돌아가셨다는 분도 물론 제 친 아버지는 아님은 물론이다.
1966년
고등학교 2학년.
고등학교를 겨우 입학하여 1학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도 없을 정도롤 아무 생각없이 학교에 시계추처럼 다니던 때
(지금도 고등하교 1학년때 짝지가 누구엿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자동으로 2학년이 되어
누구나가 모두
교실이 바뀌고
담임 선생님이 바뀌고
또한 짝이 바뀐다.
2학년
모두를 운동장에 모아 놓고 반배치를 알려주면
각자가 배정된 반으로 웅성웅성 모이면
담임선생님으로 되신 선생님께서
키가 작은 순서대로 서라고 하면
각자가 대충 알아서 자기가 들어서야 할 자리를 어림 짐작으로 찾아 들어가지만
누구나가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더 키가 크다고 착각을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조정은 언제나 선생님의 몫이고
그 후에도 여러 번에 걸쳐서 상고머리 밑에서 깍아쳐 올리듯 미세 조정 또한 선생님의 하실일..
그렇게 정해진 번호는 52번이었던가?
53번이었을게다.
(우리 학교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학교 와는 반대로 하는게 많았는데 번호도 그 중에서 하나다.)
그렇게 줄을 서서 뒤에서 부터 차례로 번호를 부여하고
그렇게 번호가 정해지지만 교실에서 앉을 자리는 앞에서 부터 정해지기 때문에
짝지가 되는 건 문과반이냐 이과반이냐와 반의 인원 수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어쨌던 우리 둘은 그렇게 해마다 관행적으로 정해지는 방법에 따라 짝지가 되었다.
2학년 부터 문과반 이과반을 분리하여 반을 정하는데
240명 중 이과를 지원하는 아이들이 140가량 문과를 지원하는 아이들이 100여명
남학생은 이과반 지원자가 약간 많아서 60번을 약간 넘어서 끝번이 70번까지 가기도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두번째 줄에 모서리에 앉았던 기억이다.
(대체로 구석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짝이 되어서
생년월일
사는 곳
부모님의 내력
형제내력 등을 서로 알려준다.
그렇게 알게 된 짝 ㄱ ㅈ ㄱ은
아버님께서 버스 운전하시고(1번 시내버스)
어머님은 전업 주부이신데 약간은 편찮으시고
밑으로 동생이 넷인데 모두 여동생이며
집안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과
사는 곳은 홍릉이며
고향은 용인이란다.
물론 저는
아버님은 행방불명
어머님은 물론 전업주부에 3집 살림이며
여섯형제중에서 막내이며
사는 곳은 전농동이며
고향은 의성이지만 서울에서 태어낫는데 한국전쟁때 피란하러 의성에 갔다
6헉년때 서울에 귀경하였다고...
1학년 때 특활활동으로 수영을 하여 왔는데
짝지에게 수영을 할지아는냐 물으니 "맥주병이란다"
그래서 하루 빨리 수영을 배워야 한다며
중학교 때 중량천에서 친구와 수영을 하다가
막아놓은 보 중앙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 죽을 뻔 한 얘기를 거품물고 반복하여
드디어 그 짝지가 수영반에 들게 되었다.
해마다 수영반은 입학하자마자 강당에 모여
선배들 소개와 환영인사를 받고
강당에 줄 맞춰 가벼운 맨손체조를 하고난 후
일제히 강당 연단 끝모서리에 앉게하여
두 손을 허공에 들게하고
상체를 눞혀 머리가 거의 바닥에 다을락 말락하게 하여
다리를 허공에서 교대로 위아래로 흔들게 한다.
이 운동은 물에 들어 갔을 때 다리를 곧게 펴도록 하게하는 것과
복근을 키워 힘과 지구력을 높혀주는 것..
하지만 이 운동은 심각한 후유증을 생기게 한다.
허리를 한동안 펴지 못하게 하고 걷기도 힘들게 만든다.
그렇게 한달 가량 강당에서 운동아닌 고문을 치루고
4월 초에 처음으로 진출한 곳은 "뚝섬"
그 곳에서 미리 입고간 수영북 차림으로 일렬롤 세우고
간단한 체조와 준비운동을 시킨후 물에 들어가란다.
4월초ㅇ의 날씨는 짐작이 갈 법한 것..
처음에는 살얼음 낀 물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과 같지만
들어가서 한참 수중 운동과 역영을 하다보면
밖으로 나오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지는 건 모두가 알 것..
"뚝섬"하면
얼마전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를 지으려고 한다는 곳...
이 둑섬이라는 곳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아니 전국에서 유일하게 협괴 전차가 있었던 곳
흔히들 기동차라고 하였다.
청계천 7가
즉 동대문에서 샛길로 들어오면
그 기동차 종점인 청계천 7가
청계천 7가에서 종점인 뚝섬 성수동까지
이 기동차는 전차와는 달리 차가 작고 속도도 느리고
무엇보다 철길 주변이 무지하게 더러웠던 기억이 남은건
아마 기동차 철로연변에는 서울의 도시영세민들이 살았었나 보다.
졸업 선배님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하는 특활시간은
자금 여력이 없고 국립학교의 지원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게다.
그리고 마침 을지로 5가에서 청게천 7가가지는 걸어서도 얼마되지 않은 거리인데
지금 생각하니 기동차 차 삯이 전차보다 쌋엇다는 기억이 되살아 난다.
그렇게 뚝섬에서 특별활동을 하고 기동차를 타고 청계천 7가 종점에 오는 동안
우리는 파김치가 되어 서서 머리를 못 가눌정도로 고개를 이리 저리 떨구며 졸았던
아니 아예 골아 떨어졌다는 표현이 맞을게다.
(그 때는 우리 같은 어린 학생은 자리가 있어도 앉으면 않된다는 사회적 묵시적 규정과
억압이 팽배되어 있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비어있는 자리가 있을 수 없는게 현실이니)
기동차는 그렇게 지저분하다면 지저분하기도 하지만
딸랑 딸랑 하는 종소리가 매우 정겹게 들리기도 하였다.
기동차는 헤아릴 수도 없이 종을 울리면서 달리는데
그 만큼 철길위로 다니는 사람도 많고
무단 횡단하는 사람도 부지 기수였다.
그리고 기동차는 잘 아실테지만 횡단보도가 별도로 없고
아무곳이나 사람들이 무단횡단하도록 되어 있었고
철로 변에는 판자집들이 끝없이 연이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머리를 감는 모습도 보였고
이불을 널어놓은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종점 청계천 7가에서 내려
우리는 또 버스를 타야 한다.
그는 1번 버스
나는 9번 버스
우리는 빠이 빠이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면 헤어진다.
그러던 어느날
종점인 청계천 7가에서 짝지가 짜장면을 먹자고 한다.
그 날 우리는 정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짜장면 한 그릇을 해 치우고 아쉬운 발길로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매일같이 그와 같은 성찬은 있을 수 없는것..
특히나 용돈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자장면은 언감생심..
그렇게 우리들의 방과후의 생활은 5월말까지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그리고 매일같이 그림의 떡을 보며 지나치기를 며칠
어느날인가 우리 둘이는 눈이 맞았다.
집까지 데려다 줄 버스 삯을 털어 우리는 그 동안 참아왔던 탐욕스런 식욕을
한꺼번에 털어 내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같이 버스 삯으로 그 곳에서 배를 채웠고
그 대가로 걸어서 집으로 가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것은 합숙을 하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되었다.
6월1일
전국에 하나 밖에 없는 국제 규격의 수영장이 문을 여는 날...
수영장은 두개로 나눠져 있는데
하는 일반인들 모두에게 개방하는 일반인 수영장
그 곳에는 어린이들이 수영하는 앝은 수영장과
어른들이 이용하는 깊은 수영장 두 곳이 나란히 있고
그 너머 언덕위로는 국재 규격의 수영이 있는데
이곳에는 선수증이 있는 사람만 입장을 할 수 있다.
그 곳에는 50미터의 수영장과 다이빙 풀이 나란히 있는데
학교마다 시간배정하는대로 교대로 사용하게 된다.
처음에는 일반인 수영장에서 약간의 몸을 풀고
우리 배정시간이 되면 그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수영하는 학교가 몇되지 않는데다
몇 학교는 교내에 짧은 수영장이 있어 혼잡하고 얼마쓰지 못하는 이곳보다
교내에서 수영연습을 했을 것이다.
서울운동장이 개장하면서부터
우리는 합숙이 시작되기 며칠전
집에서 담요 두장을 가지고 오게하여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고
문제는 이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