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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컨대, 오늘날 우리 손에 들린 빠알리 니까야는 옛 바둑기보와도 같습니다. 바둑기보가 있으니 모든 것이 곧 명백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실 그 기보는 세월이 흐르면서 덧칠되거나 해지는 바람에 흑백을 분간하기 어려우며 수순 역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돌의 위치만 확인할 수 있는 기보인 셈입니다. 그런데 후대 부파의 해석전통이 확정한 흑백수순들이 그동안 정통으로 간주되며 유통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수의 학인들은 그 수순들이 옛 기보의 원래 수순들과 대폭 어긋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여서 옛 기보의 바른 수순을 복원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을까요?
결정적 국면에서 흑백수순이 뒤바뀌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아가 어느 국면의 수순이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었는데, 결정적 한수가 새로 확정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판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니까야 경전을 읽는 일은 어렵고 조심스럽습니다. 해석은 차치하고라도 한 낱말의 “번역어”만 달리 택해도 경 전체가 출렁이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제가 빠알리 니까야를 읽기 시작한 뒤로 처음으로 니까야 경전에 대하여 글을 써봤습니다만,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단 한수로 인하여 언제라도 전체 논지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을 해석함에 있어 어려운 것을 너무 쉽게 해석하거나 쉬운 것을 너무 어렵게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늘 경계합니다만, 그르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동학 제현들의 지적을 통해 제 해석의 부족한 점이 드러난다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으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겠습니다.
일전에 “요리사 경에 언급된 相과 心”을 다루고서 동학들의 의견을 접하고 보니, “전후상(前後想)”과 관련된 해석에 미비점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여 “전후상”과 관련된 경문을 선학 및 동학들과 함께 여러 각도에서 다시 살펴보고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해보자는 취지로 이와 같은 보완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시론에 불과함을 유의해 주셨으면 하며, 선학 및 동학들의 혜안으로 이 글의 결함과 오류를 고쳐가시면서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부 번역어는 이전 번역문과 다른 데가 있습니다.)
1. “전후상”과 관련한 주요 경문
먼저, “전후상”이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두 경전의 주요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사신족이 계발되어 무르익으면 큰 결실들과 큰 이익들이 있다. 사신족이, 비구들이여, 어떻게 계발되고 어떻게 무르익으면 큰 결실들과 큰 이익들이 있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欲(ㆍ精進ㆍ心ㆍ思量)三昧ㆍ精勤行이 구족된 神足을 계발한다, ‘나에게서 欲(ㆍ精進ㆍ心ㆍ思量)은 너무 이완되지 않게 계발될 것이며, 너무 다잡히지 않게 계발될 것이며, 안으로 모이지 않게 계발될 것이며, 밖으로 흩날리지 않게 계발될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는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머무른다,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아래’인 만큼 ‘위’로 ‘위’인 만큼 ‘아래’로,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어떤 欲이 너무 이완된 것인가? 비구들이여, 欲이 해이를 동반하고 해이와 결합되어 있다면, 비구들이여, 그것을 두고 이완된 欲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어떤 欲이 너무 다잡힌 것인가? 비구들이여, 欲이 도거를 동반하고 도거와 결합되어 있다면, 비구들이여, 그것을 두고 다잡힌 欲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어떤 欲이 안으로 모인 것인가? 비구들이여, 欲이 혼침ㆍ수면을 동반하고 혼침ㆍ수면과 결합되어 있다면, 비구들이여, 그것을 두고 안으로 모인 欲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어떤 欲이 밖으로 흩날리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欲이 밖으로 오욕락에 쏠려 자꾸 흩날리고 자꾸 흩어지고 있다면, 그것을 두고 밖으로 흩날리는 欲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전후상이 잘 잡히고 잘 작의되고 잘 유념되고 잘 이해되고 간파(慧)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전후상이 있는 자로서 머무른다,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아래’인 만큼 ‘위’로 ‘위’인 만큼 ‘아래’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바로 이 身을,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머리카락에서부터 ‘아래’로,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갖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하다고 비추어본다, ‘이 身에는 머리카락ㆍ털ㆍ손톱ㆍ이빨ㆍ살갗ㆍ살ㆍ힘줄ㆍ뼈ㆍ골수ㆍ콩팥ㆍ심장ㆍ간장ㆍ늑막ㆍ비장ㆍ허파ㆍ장ㆍ장간막ㆍ위ㆍ똥ㆍ담즙ㆍ가래ㆍ고름ㆍ피ㆍ땀ㆍ지방ㆍ눈물ㆍ기름ㆍ침ㆍ콧물ㆍ활액ㆍ오줌이 있다’라고.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아래’인 만큼 ‘위’로 ‘위’인 만큼 ‘아래’로 머문다.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상태들에 비해 어떤 특징들에 비해 어떤 相들에 비해 ‘낮’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을 구족한 神足을 계발하고 있으면, 그는 그 상태들에 비해 그 특징들에 비해 그 相들에 비해 ‘밤’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이 구족된 神足을 계발한다. 혹은 어떤 상태들에 비해 어떤 특징들에 비해 어떤 相들에 비해 ‘밤’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을 구족한 神足을 계발하고 있으면, 그는 그 상태들에 비해 그 특징들에 비해 그 相들에 비해 ‘낮’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이 구족된 神足을 계발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머문다.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광명상(光明想)이 잘 잡히고 주상(晝想)이 잘 확립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한다.
— “분석 경”(SN 51.20; SN v.267-268) 일부
No ce te evaṃ viharato tam middhaṃ pahīyetha, tato tvaṃ Moggallāna ālokasaññaṃ manasikareyyāsi {divāsaññaṃ} adhiṭṭheyyāsi; yathā divā tathā rattiṃ, yathā rattiṃ tathā divā. Iti vivaṭena cetasā apariyonaddhena sappabhāsaṃ cittaṃ bhāveyyāsi: ṭhānaṃ kho pan’ etaṃ vijjati, yan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No ce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tato tvaṃ Moggallāna pacchāpuresaññī caṅkamaṃ adhiṭṭheyyāsi antogatehi indriyehi abahigatena mānasena: ṭhānaṃ kho pan’ etaṃ vijjati, yan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만약 이와 같이 머물러도 그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목갈라나여, 광명상(光明想)을 작의하고 주상(晝想)을 확립하라,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하라. 그러면 그 자리(ṭhāna)가 확인된다. 이와 같이 머무름으로써 그 수면이 버려질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머물러도 그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목갈라나여,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경행을 확립하라,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밖을 향하지 않은 意(mānasa)로부터. 그러면 그 자리가 확인된다. 이와 같이 머무름으로써 그 수면이 버려질 수 있다.
— “끔벅임 경”(AN 7.58; AN iv.86-87) 일부
“전후상”과 관련한 경문들을 찾아보면서 파악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경전의 한구절 한구절이 마치 하나의 전고(典故)처럼 사용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경에서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라는 구절이 등장할 경우, 이것이 단순한 수사로 기능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반드시 이와 관련한 맥락이 어딘가 다른 경에 풀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재세시 비구들은 수행에 긴요한 경문들을 마치 구구단처럼 암송하고 있었으므로, 중요한 수행지침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는 것들은 축약된 형태로 얘기되기 십상이지요. 이것이 오늘날 학인들이 니까야 경전을 읽을 때 겪게 되는 어려움들 중 하나입니다.
이를테면, <끔벅임 경>의 “광명상(光明想)을 작의하고 주상(晝想)을 확립하라,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라는 경문은 “광명상”, “주상”, “낮/밤”의 수행법을 병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동일한 수행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분석 경”과 대조하여 읽어보면, “전후상”과 “낮/밤”의 수행법이 다른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이와 같은 경우 “모든 경문이 모순되지 않고 경에 합한다”는 “경문의 합경성(合經性)”을 전제로 경문을 비추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결국 아위자님도 바로 이 훌륭한 자세에서 출발하셨기 때문에 이제까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교학구조를 들여다보실 수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경문이 경에 합한다”는 것은 사실 동어반복의 무의미한 언술인데, 이를 부정하는 게 마치 지당한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굉장히 유의미하고 중요한 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경성”이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것은 아니며, <반니원경>에서 언급된 “경에 합하는 법이다”라는 의미의 “합경법(合經法)”에서 착안하여 제가 제안해 보는 것입니다.)
2. 경문의 합경성(合經性)과 전통적 해석
말은 쉽지만 실제로 “경문의 합경성”을 추구하다보면 우리가 불교입문 이래 배운 전통적 지식은 물론 지당한 상식의 인식론 및 존재론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우리가 경전의 내용을 두고 그토록 골치 아파 하는 이유는 사실은 “경문의 합경성”이 우리의 논리구조, 개념구조에 상식적으로 너무 어긋나기 때문이며, 전통적 불교지식과도 상당 부분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을 읽을 때 생각보다 엄청난 내적 저항이 있습니다. 경에 의거해 수행을 하시는 분들은 나름 체득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런 내적 저항, 즉 識의 저항을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만, 대부분 빠알리어를 잘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저항은 기존 수행전통 내지 학문전통에 속해 배운 바로 가득 채워진 분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자신이 배우고 익힌 바를 정면으로 부정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단순히 생각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전통에 속해 보낸 자신의 생애와 공부와 명예를 부정해야 하는 위기이며, 때로는 손절매의 억울함, 분노가 동반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문의 합경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경전 편집사를 근거로 경문을 무시하는 길을 택하지요. 결국 경의 내용을 자기 의식 수준에 맞는 속악한 수준으로 전락시켜 해석하고 번역합니다. 특히 어느 수행전통에 속해 (차마 공부라고 하기조차 힘든) 약간의 비상한 체험을 하신 분들은 더더욱 그 전통을 헤어나기 힘듭니다. 그래서 그 수행전통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할 경우, 혹은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경우 그분들의 인생과 공부가 잘못되었다는 일침과도 같기 때문에, 비웃음 아니면 거의 광기에 가까운 살벌한 눈초리를 답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잠부카 비구 같은 경우에는 53년 동안 재를 뒤집어쓰고 마른 똥을 먹으며 수행한 고행자였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고행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삼명을 체득하셨습니다. 지난 53년 간의 난행고행을 잘못된 것으로 결론지어야 할 때 얼마나 비통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자신의 인생 거의 전부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용맹하신 비구이십니까? 더 나아가 오늘날 공부인들과는 비교도 안될 훨씬 높은 수준의 신통력을 갖추었던 여러 바라문들이 자신의 수십년 공부인생을 몰수하고 부처님 앞에 귀의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니까야 성전을 읽을 때 이런 정도의 용맹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태양의 후예의 설법, 엄니 드러낸 사자의 사자후 앞에 몸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처럼 불교공부는 생애의 야전에서 벌어지는 실전이므로, “니까야를 니까야로 풀이”하는 여정을 걸으시는 분들은 “니까야 경문”에 저항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예상치 못하게 많은 이들로부터 힐난과 괄시와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만만치 않은 공부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공부인의 수준과 소속이 단 한수의 의견교환만으로도 금방 드러나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공부길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수많은 강호제현들이 지켜보고 있는 무림이므로. 이 무림은 자신의 앎과 수준을 변호하거나 설파하는 수고로움이 없어도 되는 한유로운 곳입니다, 댓글 하나 들고 등판하자마자 이미 그 수준이 훤히 간파되는 동네이니까요. 그러므로 풀처럼 누울 줄도 알고 태산처럼 일어설 줄도 알고 귀신도 모르게 칠 줄도 아는 것이 고수라고 하겠지요.
저는 불교를 처음 배우면서, “한 인간으로서 태어나 목숨보다 귀한 것을 배우는 것인만큼 언제나 사자처럼 당당하게 걸을 것이며, 어느 형세에 처하더라도 비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구마라집 삼장스님께서 여광의 군대에 의해 희롱과 모욕을 당하고 파계를 당하면서도 “얼굴빛을 바꾸지 않았다”는 고승전의 한 마디 기록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우리 앞에는 이처럼 기라성 같은 선학들이 밤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바, 삼가 그분들의 위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육근을 수호하고 빛나게 나아가는 공부인이 새삼 그립습니다.
선학들 앞에서 주제넘게 장광설을 펴는 이유는, 오늘날 한국어로 니까야 경전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불교 전래사에 오늘날처럼 교학과 수행법이 사정없이 회오리치는 시절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해, 모든 불교 전통과 수행법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되는 다시 없을 기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난세에 진정한 고급수준의 불교공부가 일면모를 드러낸다면 한국불교에 더없이 큰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곳 동학들 중에서 니까야 경전을 가장 적게 읽은 부류인 줄 알면서도 굳이 등판해서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를 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서로 간에 소중한 만남이기를 기원합니다.
3. “전후상” 관련 경문들의 시사점
하여튼, 경문의 합경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이제까지 배워온 바, 자신이 속한 전통마저 모두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오늘날 공부인이 구족해야 할 첫번째 공부자세이자 律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를 깊이 새기고서, 경문의 합경성을 바탕으로 앞에 인용한 두 경을 비교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전후상이 잘 잡히고 잘 작의되고 잘 유념되고 잘 이해되고 간파(慧)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전후상이 있는 자로서 머무른다,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상태들에 비해 어떤 특징들에 비해 어떤 相들에 비해 ‘낮’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을 구족한 神足을 계발하고 있으면, 그는 그 상태들에 비해 그 특징들에 비해 그 相들에 비해 ‘밤’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이 구족된 神足을 계발한다. 혹은 어떤 상태들에 비해 어떤 특징들에 비해 어떤 相들에 비해 ‘밤’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을 구족한 神足을 계발하고 있으면, 그는 그 상태들에 비해 그 특징들에 비해 그 相들에 비해 ‘낮’으로 欲三昧ㆍ精勤行이 구족된 神足을 계발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머문다.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광명상(光明想)이 잘 잡히고 주상(晝想)이 잘 확립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한다. (이상 “분석경”)
만약 이와 같이 머물러도 그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목갈라나여, 광명상(光明想)을 작의하고 주상(晝想)을 확립하라,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하라. 그러면 그 자리가 확인된다. 이와 같이 머무름으로써 그 수면이 버려질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머물러도 그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목갈라나여,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경행(caṅkama)을 확립하라,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밖을 향하지 않은 意(mānasa)로부터. 그러면 그 자리가 확인된다. 이와 같이 머무름으로써 그 수면이 버려질 수 있다. (이상 “끔벅임 경”)
위 두 경을 합경성에 입각하여 제가 이해한 바로는, “낮/밤”은 일상적인 의미의 대비로서 여러 상황에 맞추어 설명될 수 있는 일종의 비유로 보입니다. <끔벅임 경>에서는 “주상”과 “낮/밤”이 병렬적으로 시설되었지만 <분석경>에서는 “주상”과 “낮/밤”이 분리되어 시설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대비가 비유적으로 쓰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전후상”은 “광명상”, “주상”과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想”자가 붙는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아래/위”의 경우에는 不淨觀
내지 身至念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분석경> 중에서 총론적인 성격의 경문과 결론적인 성격의 마지막 경문은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아래에 경문을 다시 인용합니다.
그는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머무른다,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아래’인 만큼 ‘위’로 ‘위’인 만큼 ‘아래’로,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한다. (…)
그리고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하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광명상(光明想)이 잘 잡히고 주상(晝想)이 잘 확립된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한다.
첫째, “전후상”, “앞/뒤”, “아래/위”, “낮/밤”이 병렬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반드시 어딘가에 典故가 있을 것이므로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典故를 조사해본 결과, “전후상”은 총론적인 대비로, “앞/뒤”ㆍ“낮/밤”은 비유적인 대비로 읽어도 무방하지만, “아래/위”는 不淨觀 내지 身至念으로 읽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광명상”, “晝想” 및 “전후상”은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한다”는 그 자리를 확인시키기 위한 총론적 지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五蓋에 덮인 내면은 “어둠”이고 “夜”이고 “後”이므로, “광명”과 “晝”, “前”을 염두에 두고(=想) 心을 계발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따라서 “광명상”ㆍ“주상”ㆍ“광명상”이 心 계발의 총론적 指南이라면, “앞/뒤”ㆍ“아래/위”ㆍ“낮/밤”은 각론적 指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아래/위”라는 不淨觀 내지 身至念도 心 계발의 여정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경문과 함께 후술하도록 하겠습니다.
넷째, <끔벅임 경>의 전후상에서 언급되는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밖을 향하지 않은 意로부터”(antogatehi indriyehi abahigatena mānasena)라는 구절은 “안/밖”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앞서 댓글에서 말씀드렸듯이, “~로부터”로 해석한 빠알리어는 문법상 “탈격”, “구격” 모두 가능합니다. 따라서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대신에, “안으로 돌이킨 根들과 함께”로도 번역 가능합니다.) 흔히 “根들을 안으로 돌이키고 意를 밖으로 향하지 않음”이 대부분의 수행전통에서 수행의 기본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이 관점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제가 “탈격”으로 번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의 해석은 불교적 禪定의 규명과 관련된 복합적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섯째, “경행(caṅkama)”의 번역 문제입니다. 앞글에서 저는 이 “caṅkama”를 심리적 조율로 읽어야 한다고 보고 전문술어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의 “행보”로 번역했습니다. 그렇지만 경을 좀더 살펴보니, 실제로 발로 걷는 “경행” 자체가 “안으로 돌이킨 根들”과 “밖을 향하지 않은 意”를 잠시 거두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참으로 수월하게 안팎의 치우침을 거두는 공부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앞글에서 저는 쉽게 이해해야 할 것을 오히려 복잡하게 이해하여 잘못 번역한 실수를 범했다고 봅니다. 앞으로 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배웠습니다.
4. “맑은 相”에 心이 두어지는 계발
“광명상”, “주상”, “전후상”은
心을 계발하는
여정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수행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광명”, “晝”, “前”은 “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後”는
“오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앞/뒤”ㆍ“낮/밤”은 각각 “안/밖”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환히 빛나는 心”은 안팎이
따로 없는
것, 내외명철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이 내외명철이 "心一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흔히 “안으로 모임”을 入定으로 보기 십상이지만, 경은 “안으로 모임” (이를테면 “앞”, “낮”)과 “밖으로 흩날림”(이를테면 “뒤”, “밤”)이 모두 잦아들고 고요해지는 것(이를테면 “光明”, “晝”, “前”, “해탈”)을 두고 入定, 즉 삼매라고 말합니다. 결국 心의 入定에서 비롯하여 知見이 열리게 되지요. 그러므로 心이 入定이 없는 知見은 있을 수 없으며, 心의 入定은 반드시 오욕락을 떠남, 즉 律에서 시작됩니다. (“律”이라는 용어 자체가 “떠남”이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참으로 반듯한 공부길, 속일 수 없는 공부길인 셈입니다. 심사가 비뚤어진 사람은 접근 자체가 안되는 공부길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총론적 指南과 각론적 指南을 따라 心을 계발함에 있어 도움이 되는 또다른 가르침은 없을까요? 얼마 전 봄봄님께서 소개하신 경이 있습니다. “心의 두어짐”, “心의 두어지지 않음”이라는 수행지침을 가르치는 경입니다.
Tassa kāye kāyānupassino viharato kāyārammaṇo vā uppajjati kāyasmiṃ
pariḷāho cetaso vā līnattaṃ bahiddhā vā cittaṃ vikkhipati. Ten'Ānanda, bhikkhunā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itabbaṃ. (...)
Tassa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ato pāmu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edayati.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So iti paṭisañcikkhati. 'Yassa khvāhaṃ atthāya cittaṃ paṇidahiṃ so me attho abhinipphanno. Handa dāni paṭisaṅharāmī' ti. So paṭisaṅharati c'eva na ca vitakketi, na ca vicāreti. 'Avitakkho'mhi avicāro ajjhattaṃ satimā sukhitasmī' ti pajānāti. (...)
Evaṃ kho Ānanda paṇidhāya bhāvanā hoti. Kathañ c'Ānanda, appaṇidhāya bhāvanā hoti?
Bahiddhā Ānanda, bhikkhu cittaṃ appaṇidhāya, 'Appaṇihitaṃ me bahiddhā cittan' ti pajānāti. 'Atha pacchāpure asaṅkhittaṃ vimuttaṃ, appaṇihitan' ti pajānāti. Atha ca pana 'Kāye kāyānupassī viharām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sukham'asmī' ti pajānāti. (...)
Evaṃ kho Ānanda, appaṇidhāya bhāvanā hoti. Iti kho Ānanda, desitā mayā paṇidhāya bhāvanā, desitā appaṇidhāya bhāvanā. (SN 47.10; SN v.155-157)
그가 身(ㆍ受들ㆍ心ㆍ法들)에서 身隨觀(ㆍ受隨觀ㆍ心隨觀ㆍ法隨觀)하는 자로서 머무를 때, 혹 身(ㆍ受들ㆍ心ㆍ法들)에 걸려(= “攀緣하여”) 身에서 들뜸이 일어나거나, 혹 마음(ceto)이 이완되거나, 혹 밖으로 心(citta)이 흩날린다.
그러면, 아난다여, 그 비구에 의하여 “다름아닌 어느 맑은 相(kiñcid'eva pasādanīya nimitta)”에 心이 두어져야 한다. 어느 맑은 相에 心이 두어진 그에게는 기쁨이 생긴다. 기쁜 그에게는 희열이 생긴다. 意가 희열한 그에게는 身이 경안해진다. 身이 경안한 그에게는 안락이 지각(受)된다. 안락한 그에게는 心이 入定된다. 그는 이렇게 살핀다, ‘나는 어떤 뜻을 위해 [맑은 相에] 心을 두었는데, 그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졌다. 자 이제 나는 [맑은 相에 心을 둠을] 거둔다’라고. 그는 이렇게 거두며, 尋하지 않으며, 伺하지 않는다. ‘나는 無尋하며, 無伺하며, 안으로 念하는 자로서 안락하다’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음이, 아난다여, [맑은 相에 心이] 두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계발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아난다여, 두어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계발인가?
밖으로, 아난다여, 그 비구는 心을 [맑은 相에] 두지 않고서, ‘나에게서는 밖으로 心이 두어지지 않았다’라고 알아차린다. 또한 앞뒤로, ‘[心이] 모이지 않았으며 해탈되었으며 두어지지 않았다’라고 알아차린다. 더 나아가, ‘나는 身(ㆍ受들ㆍ心ㆍ法들)에서 身隨觀(ㆍ受隨觀ㆍ心隨觀ㆍ法隨觀)하는 자로 머무르며, 밝혀가는 자ㆍ正知하는 자ㆍ念이 있는 자로서 안락하다’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음이, 아난다여, [밖으로] 두어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계발이다. 이렇게, 아난다여, 두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계발과 두어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계발을 나는 가리켰다.
위 경문에서 “身(ㆍ受들ㆍ心ㆍ法들)에 걸렸다”라는 구절을 저는 “身(ㆍ受들ㆍ心ㆍ法들)”을 호오에 입각하여 좋아하는 대상으로 접근했다는 의미로 읽고 싶습니다. 즉, 수행함에 있어 “身(ㆍ受들ㆍ心ㆍ法들)”을 “意에 의해 식별되어 좋아하고 사랑하는 등등의 法들”로 접근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로 “身(ㆍ受들ㆍ心ㆍ法들)에 걸렸다”라는 의미로 읽고 싶습니다. 그렇게 “혹 身(ㆍ受들ㆍ心ㆍ法들)에 걸려 身에서 들뜸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身에서 들뜸(=“열기”)이 일어난다”는 것은, 身계발이 미진하여 거기에서 맴돌고 있다는 의미로 읽고 싶습니다.
身에서 들뜸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혹 마음이 이완되거나, 혹 밖으로 心이 흩날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心이 입정되지 않겠지요. 이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身의 들뜸”, “마음의 이완”, “心의 밖으로 흩날림”에서 벗어나 心의 入定에 이를 수 있을까요?
이러할 때, 경은 “다름아닌 어느 맑은 相(kiñcid'eva pasādanīya nimitta)에 心이 두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맑은 相에 心이 두어지면”, “기쁨”과 “희열”이 생기고, “身이 경안”해지고, “안락이 지각”되고, 마침내 心이 入定됩니다. 이렇게 하여 “身에 걸림” 등등에서 벗어나 “心의 入定”에 이르면, 맑은 相에 두었던 心을 다시 거둡니다. 이것이 “두어짐으로써 이루어지는 [心의] 계발”입니다.
그리고 경을 해석해 보건대, 이와 같이 “어느 맑은 相에 心이 두어짐”은 “밖으로 心이 두어짐”입니다. 결국, 心이 入定되지 않을 때 心이 어느 맑은 相에 두어짐으로써 그 장애가 해소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心마저 그 相에서 거두어짐으로써 “밖으로 心이 두어지지 않으며”, 그리하여 心이 ‘앞으로(=안으로) 모이지도 않고’ ‘뒤로(=밖으로) 두어지지도 않아’ 해탈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心이 밖으로 두어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계발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心 계발에 커다란 이익이 되는 “다름아닌 어느 맑은 相”이란 무엇일까요?
5. “어느 맑은 相”
경전에서는 “어느 맑은 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그다지 중요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까닭에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후자로 해석하고 싶으며, 근거는 다음 경문입니다.
Anacchariyaṃ kho pan'etaṃ Ānanda, yaṃ manussabhūto kālaṃ kareyya. Tasmiṃ tasmiṃ ce maṃ kālakate upasaṅkamitvā etam atthaṃ paṭipucjissatha. Vihesā p'esā Ānanda, assa Tathāgatassa. Tasmā ti h'Ānanda, dhammādāsaṅ nāma dhamma-pariyāyaṃ desissāmi. Yena samannāgato ariyasāvako ākaṅkhamāno attanā va attānaṃ vyākareyya: 'Khīṇa-nirayo'mhi khīṇa-tiracchānayoniko khīṇa-pettivisayo khīṇā-pāya-duggati-vipāto. Sotāpanno'ham asm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
Katamo ca so Ānanda, dhammādāso dhamma-pariyāyo yena samannāgato ariyasāvako ākaṅkhamāno attanāva attānaṃ vyākareyya: 'Khīṇa-nirayo'mhi khīṇa-tiracchānayoniko khīṇa-pettivisayo khīṇā-pāya-duggati-vipāto. Sotāpanno'ham asm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
idh'Ānanda, ariyasāvako buddhe avecca pasādena samannāgato hoti: 'Iti 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 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u anuttaro purisa-damma-sārathī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ti.
Dhamme avecca pasādena samannāgato hoti: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 ti.
Saṅghe avecca pasādena samannāgato hoti: 'S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uj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ñāya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sāmīci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yad idaṃ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purisapuggalā, 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Āhuneyyo pāhun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anuttaraṃ puññakettaṃ lokassā' ti.
Ariyakantehi sīlehi samannāgato hoti akhaṇḍehi acchiddehi asabalehi akammāsehi bhujissehi viññuppasatthehi aparāmaṭṭhehi samādhi-saṃvattanikehi.
Ayaṃ kho so Ānanda, dhammādāso dhamma-pariyāyo yena samannāgato ariyasāvako ākaṅkhamāno attanāva attānaṃ vyākareyya: 'Khīṇa-nirayo'mhi khīṇa-tiracchānayoniko khīṇa-pettivisayo khīṇā-pāya-duggati-vipāto. Sotāpanno'ham asm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 ti.
불가사의하지 않은 일이, 아난다여, 사람이라는 존재가 때를 맞는 일이다. 만약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그대들이 내게 다가와서 그 뜻에 대해 묻는다면, 그것은, 아난다여, 여래에게는 번거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실로, 아난다여, ‘법경(法境)’이라는 이름의 법문(法門)을 가리키겠노라. 이것을 구족한 성제자(聖弟子)는 스스로 원할 경우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다, ‘나는 지옥이 다하고 축생의 태(胎)가 다하고 아귀의 경계가 다하고 퇴락(頹落)ㆍ악취(惡趣)ㆍ퇴전(退轉)이 다하였다. 나는 예류자(預流者)이며 퇴전(退轉)하지 않는 법이며 반드시 정각에 도달할 자이다’라고.
그러면, 아난다여, ‘법경’이라는 법문이 어떤 것이기에 이것을 구족한 성제자는 스스로 원할 경우 스스로에게, ‘나는 지옥이 다하고 축생의 태가 다하고 아귀의 경계가 다하고 퇴락ㆍ악취ㆍ퇴전이 다하였다. 나는 예류자이며 퇴전하지 않는 법이며 반드시 정각에 도달할 자이다’라고 답할 수 있는가?
여기, 아난다여, 한 성제자가 붓다에 대해 확고하게 맑음(pasāda)을 구족한다, ‘그분은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자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ㆍ불ㆍ세존이시다’라고.
법에 대해 확고하게 맑음을 구족한다, ‘세존에 의하여 잘 설해진 법은 드러나 보이는 것,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 와서 보라는 것, 인도하는 것, 지자(智者)들에 의하여 낱낱이 밝혀지는 것이다’라고.
승가에 대해 확고하게 맑음을 구족한다, ‘잘 걸어간 것이 세존의 제자승가이며, 곧게 걸어간 것이 세존의 제자승가이며, 맞게 걸어간 것이 세존의 제자승가이며, 바르게 걸어간 것이 세존의 제자승가이니, 바로 이 사쌍팔배가 곧 세존의 제자승가이시다. 공경받을 만하며, 환대받을 만하며, 공양받을 만하며, 합장받을 만하며, 세간의 위없는 공덕이시다’라고.
그는 성자들이 사랑하는 戒들, 즉 흠결이 없고 결함이 없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고 정결하고 지자(智者)들이 상찬하고 오염이 없고 入定으로 이끄는 戒들을 구족한다.
이것이, 아난다여, 그 ‘법경’이라는 법문이니, 이것을 구족한 성제자는 스스로 원할 경우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다, ‘나는 지옥이 다하고 축생의 태가 다하고 아귀의 경계가 다하고 퇴락ㆍ악취ㆍ퇴전이 다하였다. 나는 예류자이며 퇴전하지 않는 법이며 반드시 정각에 도달할 자이다’라고.
— “‘법경’이라는 이름의 법문”(SN 55.8; SN v.357-358)
“맑음을 구족한다”라고 번역한 대목을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pasāda”는 “淨信”, “신심”, “맑은 신심”이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원문은 그냥 “맑음(pasāda)”입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경문의 “맑은 相(pasādanīya nimitta)”의 “pasādanīya”는 “pasāda”의 형용사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법경’이라는 이름의 법문>은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신심, 귀의와 관련된 법문이므로, 이 경문은 필시 신참비구라면 반드시 암송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따로 설명이 필요없이 “법경”이라는 한마디로 상호 소통되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다름아닌 어느 맑은 相”이라는 구체적 설명이 없는 표현이 다른 경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ㆍ법ㆍ승에 대한 세 가지 “맑은 相들” 중에서 “어느 한 맑은 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맑은 相”이 身계발 및 心계발에 이익이 되는 이유는, 그 성스럽고 위대한 “불ㆍ법ㆍ승”의 相에 心이 두어지면, 그간 身에 얽혀 오욕락으로 흩어지던 흐름이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람에 먼지가 쓸려가듯이요. 실참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입선한답시고 자리에 앉을 때 끝없이 밖으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안으로 침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그때 “불ㆍ법ㆍ승”의 相에 心이 두어지면 자연스럽게 기쁨과 희열이 일어납니다. 이 “기쁨”과 “희열”이 ‘身에 얽혀 들뜨는 열기’를 끊어버리고 身을 “경안하게”(=“잦아들게”) 합니다. 체로금풍인듯 身의 열기가 쓸려가 소쇄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락”을 지각하게 되며, 마침내 心이 入定됩니다.
참고로 살피자면, 부처님께서 고행을 끝내시기 직전, 과거 유년시절 초선에 入禪하셨던 일을 떠올리십니다. 그때 초선에서 지각(受)하셨던 “안락”을 흠칫 두려워하시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왜냐하면 고행주의에서는 “안락”을 위시한 그 어떤 受도 모조리 제거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겠지요. 각묵스님께서 “지워없앰 경”, 전재성 박사님께서 “버리고 없앰 경”이라는 경명으로 번역하신 경(MN 8)이 바로 이 결정적 분기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두 분의 번역은 “안락”을 둘러싼 거인들의 전쟁을 포착하지 못한 면이 있어 아쉽습니다.) 관련 경문을 번역해 보겠습니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 yaṃ idh'ekacco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jhānaṃ upasampajja vihareyya. Tassa evam assa: 'sallekhena viharāmī' ti. Na kho pan'ete Cunda ariyassa vinaye sallekhā vuccanti.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 ete ariyassa vinaye vuccanti. (MN 8; MN i.40-41)
이런 자리는, 춘다여, 확인된다, ‘여기 어떤 비구가 다름아닌 욕락(kāma)들로부터 떠나고 불선법들로부터 떠나, 尋이 있고 伺가 있는, 떠남에서 비롯한 희열과 안락, 초선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라는 자리. 그에게, ‘나는 떼어내야 할 것과 함께 머무르고 있다’라는 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춘다여, 성자의 律에서는 ‘떼어내야 할 것들(sallekhā)’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성자의 율에서는 ‘현현법(現見法)에 안락하게 머무름들(diṭṭhadhammasukhavihārā)’이라고 불린다.
경에서는, 어떤 비구가 초선에 들어 “尋”, “伺”, “희열”, “안락”이 가리키는 자리가 확인될 경우, 그 초선의 요소들이 “떼어내야 할 語行” 내지 “떼어내야 할 受들”로 다가올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요컨대, “안락”의 자리가 확인될 경우, “안락”도 하나의 受이므로 제거하고 없애야 할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성자의 율에서는 그것들이 “떼어내야 할 것”이 아니라 “現見法에의 樂住”라고 불린다고 설하십니다.
저는 이 경문이 부처님께서 보살이었을 적에 초선의 “안락”을 수용하기로 결단을 내리시고 고행을 끝내신 바로 그 자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이 전환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군이며, “성자의 율”이 드러내는 혁명적이면서도 매우 비밀한 소식이라고 봅니다. “안락이라는 受”가 心의 入定에 이르는 문이라는 얘기이니까요. 그리고 “안락하게 머무름”과 함께 心이 순조롭게 계발되고 무르익는다는 얘기이니까요. (그러나 이 “안락”은 범부 차원의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초선에서의 “안락”임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身계발이 상당히 이루어진 뒤에 열리는, 心의 입정에 이르는 문이니까요. 아울러 대부분의 각종 수행전통은 “안으로 모임”, “혼침”, “고행” 등등을 心의 入定이라고 간주하고 들어가는 공부, 즉 청정범행을 드러내지 못하는 공부로 보입니다. 그만큼 착오를 범하기 쉬운 지점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안락하게 머무름”은 “안락에 心이 고정됨”과는 또 다르므로, 이 “머문다”는 말 역시 참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미묘한 자리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초선의 “안락”을 수용하셨지만, 우리는 心 계발의 여정에서 “불ㆍ법ㆍ승”이라는 “맑은 相들”, 다름아닌 “법경”이 있어서 누구보다, 어느 전통보다 수월하게 “안락”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보다 큰 은전이 어디 있겠습니까? 흔한 말로, 도인의 기운만 쐬어도 공부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도 “불ㆍ법ㆍ승”이라는 맑은 相들에 心이 두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불ㆍ법ㆍ승”의 위대함을 몰라보기 때문이겠지요. 선사는 위대하게 볼지언정, 남방의 사야도는 위대하게 볼지언정,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가리키신 法”과 “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로비구들”의 위대함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건조한 불교지식으로 무장한 분들은 이와 같은 “법경”을 특히 괄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적 탐색과 사유가 훨씬 고상하고 자립적이며, 이와 같은 “법경”은 의존적이고 유약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껄껄, 참으로 우습습니다그려!
6. “법경을 쥐고서 나는 비추어 보았노라”
Pañca nīvaraṇe hitvā yogakkhemassa pattiyā
dhammādāsaṃ gahetvāna ñāṇadassanam attano
paccavekkhiṃ imaṃ kāyaṃ sabbaṃ santarabāhiraṃ,
ajjhattañ ca bahiddhā ca tuccho kāyo adissathā 'ti.
(Puṇṇamāso thero. Th. 171~172)
오개(五蓋)를 버리고서, 유가안온을 얻고서
법경(法鏡)을 쥐고서, 스스로의 지견(知見)을 [얻고서]
나는 비춰보았노라, 이 身, 안팎으로 一切인 것을.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텅빈 身이 보였도다.
“장로게(테라가타)”와 “장로니게(테리가타)”는 부처님 입멸 이후 읊은 노래를 포함하고 있으며, 아난다 존자께서 언급하신 “팔만사천의 법문”에는 포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4부 니까야 교학의 엄밀한 술어들이 약간 느슨하게 쓰이는 대목들이 눈에 띕니다. 교학적 엄밀함을 살피고자 하신다면 이 두 경전은 조심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 재세시 출가비구들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소화하시고 어떻게 성취하셨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는, 4부 니까야에 대한 제1차 해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푼나마사 장로의 사구게 두 수는 “법경”이 “五蓋”, “유가안온”, “知見”, 그리고 “有身見”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身계발 및 心계발, 그리고 “예류자”와 관련된 것이며, 앞서 인용한 <‘법경’이라는 이름의 법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Kullo sīvathikaṃ gantvā addasaṃ itthiṃ ujjhitaṃ
apaviddhaṃ susānasmiṃ khajjantiṃ kimihī phuṭaṃ.
āturaṃ asuciṃ pūtiṃ passa Kulla samussayaṃ
uggharantaṃ paggharantaṃ bālānaṃ abhinanditaṃ.
dhammādāsaṃ gahetvāna ñāṇadassanapattiyā
paccavekkhiṃ imaṃ kāyaṃ tucchaṃ santarabāhiraṃ.
yathā idaṃ tathā etaṃ, yathā etaṃ tathā idaṃ,
yathā adho tathā uddhaṃ, yathā uddhaṃ tathā adho.
yathā divā tathā rattiṃ, yathā rattiṃ tathā divā,
yathā pure tathā pacchā, yathā pacchā tathā pure.
pañcaṅgikena turiyena na rati hoti tādisī
yathā ekaggacittassa sammā dhammaṃ vipassato 'ti.
(Kullo thero. Th. 393~398)
나 쿨라는 묘지에 가서 보았네, 버려진 여인
무덤에서 나뒹구는 그 시신, 바글거리며 갉아먹는 구데기떼.
병들고 부정(不淨)하고 부패한 덩어리, 쿨라여 보라,
진물이 나 뚝뚝 듣는 것, 무지한 자들이 즐기는 것!
법경(法鏡)을 쥐고서, 지견(知見)을 얻고서
나는 비춰보았노라, 이 身, 안팎으로 텅빈 것을,
‘이것’인 만큼 ‘저것’으로, ‘저것’인 만큼 ‘이것’으로,
‘아래’인 만큼 ‘위’로, ‘위’인 만큼 ‘아래’로,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다섯 가지 악기로 빚어진 즐거움으로는 미치지 못하네,
心이 一境인 자, 바르게 法을 觀하는 자(vipassanta)의 즐거움.
쿨라 장로의 사구게 여섯 수입니다. “법경”이 “부정관/묘지관”, “지견”, “유신견”, “전후상”, “심일경”, “위빠사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위빠사나”를 논외로 하자면, 이제까지 논의한 모든 것이 이 게송에 담겨 있습니다. 두 분 장로들의 게송을 함께 엮어 얘기하자면, “법경”을 쥐고서 “이 身, 안팎으로 일체인 것”,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텅빈 身”, “이 身, 안팎으로 텅빈 것”을 비춰본 자가 바로 예류자입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나는 지옥이 다하고 축생의 태가 다하고 아귀의 경계가 다하고 퇴락ㆍ악취ㆍ퇴전이 다하였다. 나는 예류자이며 퇴전하지 않는 법이며 반드시 정각에 도달할 자이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류자는 초선에서 제4선에 이르는 여정 중에 탄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자 이제 나는 [맑은 相에 心을 둠을] 거둔다’라고. 그는 이렇게 거두며, 尋하지 않으며, 伺하지 않는다. ‘나는 無尋하며, 無伺하며, 안으로 念하는 자로서 안락하다’라고 알아차린다”는 경문은 초선에서 제3선에 이르는 여정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법경”, “맑은 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푼나마사 장로와 쿨라 장로는 바로 이 “법경”을 쥐고서 “유신견”을 타파하여 흐름에 든 성자가 된 것입니다.
7. “광명상(光明想)”과 사선(四禪)
우리는 四禪의 정형구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꼭 그 틀만 가지고 四禪을 들여다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心계발이라는 측면에서 四禪을 들여다보면, 초선에서 제4선에 이르는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 가르침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다이 경>(AN 6.29)이 그 좋은 예입니다.
<우다이 경>은 수념처(anussatiṭṭhāna, 隨念處)와 관련한 경입니다. 세존께서 존자 우다이에게 수념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시자, 우다이는 머뭇거리다가 숙명통을 수념하고 있다고 답합니다. 이에 세존께서 우다이를 두고 “心에 이르름(adhicitta, 增上心)”에 전념하지 않음을 크게 꾸짖으시고는 시자 아난다에게 수념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존자 아난다께서 다섯 수념처를 말합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념처는 “초선ㆍ제2선ㆍ제3선”으로, 現見法(diṭṭhadhamma)에 안락하게 머무르게 됩니다.
둘째 수념처는 “광명상ㆍ晝想”으로, 知見(ñāṇadassana)을 얻게 됩니다.
셋째 수념처는 “아래로/위로”로, 欲貪(kāmarāga)을 버리게 됩니다.
넷째 수념처는 ‘묘지관’으로, ‘나는 있다’라는 慢(asmimāna)을 근절하게 됩니다.
다섯째 수념처는 “제4선”으로, 種種界(anekadhātu)를 통달하게 됩니다.
존자 아난다께서 답하신 다섯 수념처 순서를 살펴보면, “초선~제3선”과 “제4선” 사이에 “광명상ㆍ주상”, “아래로/위로”, “부정관ㆍ묘지관”이 있으며, 그 결과로 “지견을 얻음”, “욕탐을 버림”, “‘나는 있다’라는 만의 근절”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四禪의 정형구가 너무나 익숙한 탓에 위의 다섯 수념처 순서를 무시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광명상ㆍ주상”, “아래로/위로”, “묘지관” 등이 四禪과 무관한 수습으로 간주되며, 37조도품과 四禪 역시 별개의 수습으로 간주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 순서가 정확히 수습차제에 맞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四禪과 관련한 수습에 해당한다고 간주하면 상당히 유의미한 검토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유사한 예로는, 잘 알려진 두 <교리문답경>을 들 수 있습니다. 먼저 <大교리문답경>(MN 43)에서는 초선과 제4선 사이에 “五根의 의지처인 意”, “죽음과 想受滅의 차이점”이 문답되며, 초선을 얻기 전의 것으로는 “오개의 버려짐”이, 제4선 이후에는 “무상심해탈, 무량심해탈, 무소유심해탈, 공심해탈”이 문답됩니다. <小교리문답경>(MN 44)에서는 초선과 제4선 사이에 “貪의 버려짐”, “有對(paṭigha)의 버려짐”이 문답되며, 초선 이전에는 “想受滅”과 “受”, 그리고 제4선 이후에는 “無明”, “明”, “해탈”, “열반”이 문답됩니다.
이와 같이 <교리문답경>을 보면, 적어도 四禪은 “受”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想受滅”은 제4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受”의 대표주자로는 “安樂(sukha)”를 들 수 있습니다. 다름아닌 싯닷타 태자가 유년시절에 경험했던 초선의 “安樂” 말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다이 경>을 함께 살피자면, “광명상ㆍ주상”, “아래로/위로”, “묘지관” 등을 四禪의 “受”와 관련한 수행지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五根과 意”, “心”, “知見”, “欲貪”, “慢”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경우, 四禪 및 구차제정에 더욱 풍요롭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상과 같이 “전후상”과 “四禪”에 대하여 간단한 문제제기만 하고 나머지는 동학들의 독자적인 공부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관련 있는 경문을 삼가 읽어보고, 제 소견을 조심스럽게 덧붙혀 봅니다.
Idha, bho, bhikkhu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kāye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DN 18; DN ii.216)
여기, 대덕이시여, 비구는 안으로 身에서 身隨觀하는 자로서, 밝혀가는 자ㆍ正知하는 자ㆍ念하는 자로서 머무릅니다, 세간에 대한 붙듦과 꺼림을 떠나서. 안으로 身에서 身隨觀하는 자로 머물러 바르게 入定하며, 바르게 明澄합니다. 그는 거기에서 바르게 入定하고 바르게 明澄하여, 밖으로 他身에 대한 知見이 생겨나게 합니다.
Puna ca paraṃ bhante, bhikkhu ālokasaññaṃ manasikaroti, divāsaññaṃ adhiṭṭhāti. Yathā divā tathā rattiṃ, yathā rattiṃ tathā divā. Iti vivaṭena cetasā apariyonaddhena sappabhāsaṃ citataṃ bhāveti. Idaṃ bhante anussatiṭṭhānaṃ evaṃ bhāvitaṃ evaṃ bahulīkataṃ ñāṇadassanapaṭilābhāya saṃvattati. (AN 6.29; AN iii.323)
더 나아가, 대덕이시여, 비구는 光明想을 작의하고 晝想을 확립합니다.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합니다. 이 隨念處(anussatiṭṭhāna)는,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계발되고 이와 같이 무르익어 知見을 얻기에 이릅니다.
“心에 이르는(adhicitta)” 초선ㆍ제2선ㆍ제3선을 통해 “現見法”에 安樂하게 머무르며 光明想을 작의하고 晝想을 확립합니다.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그렇게 五蓋가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을 계발합니다. 心이 계발되는 비구는 (사념처를) 隨觀하는 자로 머물러 바르게 入定하며 바르게 明澄합니다. 그가 바르게 入定하고 바르게 明澄하여 心이 계발되고 무르익으면, 밖으로 他身에 대한 知見이 생겨납니다.
이와 같이 心이 계발되고 무르익어 他身을 알고(知) 봄(見)으로써, 즉 他身을 “아래로/위로” 비춰봄(부정관ㆍ신지념)으로써 “욕탐”을 버리며, 他身이 늙고 죽고 썩을 것임을 비춰봄(묘지관)으로써 “‘나는 있다’라는 慢”이 근절됩니다. 그리고 안팎으로 “他身”, 즉 “이 身”이 텅비었음을 비춰보고 마침내 불퇴전의 學人이 됩니다.
法鏡을 쥐고서, 知見을 얻고서
나는 비춰보았노라, 이 身, 안팎으로 텅빈 것을!
다섯 가지 악기로 빚어진 즐거움으로는 미치지 못하네,
心이 一境인 자, 바르게 法을 觀하는 자의 즐거움.
그는 오욕락이 빚어내는 즐거움을 더 이상 즐기지 못합니다. 그는 聖弟子이며 예류자입니다. 心이 一境인 자, 바르게 法을 觀하는 자, 그는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옥이 다하고 축생의 태가 다하고 아귀의 경계가 다하고 퇴락ㆍ악취ㆍ퇴전이 다하였다. 나는 예류자이며 퇴전하지 않는 법이며 반드시 정각에 도달할 자이다.” |
첫댓글 회원님들께서... 쉽게 댓글을 못달고 계시네요...^^;;
마노로 고찰만 하거나... 찌따로 위딱까만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글입니다.
회원님들께서도... 위짜라로 법의 상태를 음미, 경험하면서... 읽으시길 권합니다.....
나무님의 글 내용에 대한... 답글이나 댓글은... 더 읽고 드려야 하겠습니다...
일단 무조건 감사합니다.......
身에서 들뜸이 일어나거나, 혹 마음(ceto)이 이완되거나, 혹 밖으로 心(citta)이 흩날린다.
그러면, 아난다여, 그 비구에 의하여 “다름아닌 어느 맑은 相(ki?cid'eva pas?dan?ya nimitta)”에 心이 두어져야 한다.////본문
밖으로 ...찌따를 두는 수행이잖아요.
밖으로 찌따가 흩날리는 ... 문제에 봉착하면....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안으로 찌따를 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 역시 밖으로 찌따를... 맑은 니미따에 둡니다.
5감을... 안으로 돌이켜 유지할 정도의... 사띠가 없는 수행자가...
억지로 애를 쓰다가 ... 좌절하는 경우가 ... 아주 많은 것을 감안하면..
아주 의미 깊음.
예전에 제가 올린 글 중에...
사띠 절하기... 가 개인적인 수행기법으로는.... 이 문제를 개선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사띠 절하기를 하며... 청정한 믿음을 고취시키는 대상..... 이라는 번역으로 알고... 지내다가...
이번에 ... 맑은 니미따... 번역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다시 받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번역이 아예 빠진... 맑은 니미따.........
밖으로 둔 찌따가... 맑은 니미따와 하나가 되겠죠.........
맑은 찌따 니미따..........^^
이 니미따를 인식하면서... 희열과 행복이 느껴지는 자나로 인해.........쓰윽 ...안으로.....
니까야님 봄봄도 역부여시... ㅎㅎ
먼저 눈에 띄는 번역 [어떤 상태들에 <비해> 어떤 특징들에 <비해> 어떤 相들에 <비해>]...에서의
<비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로 사용하신지... ? [질문이 아주 초보 수준인가.^^;;]
문법상으로는 "탈격(ablative)"입니다.
여러 의미로 번역 가능한데요,
기본적으로는 "~로 부터", "~에서 출발하여", "~을 기준으로" 등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제가 번역한 것은, "~을 기준으로"에 상응하는 "~에 비해"로 옮겼습니다.
흔히 두 대상을 비교할 때 이 "탈격"을 씁니다.
@나무 [수단격]과 [탈격]은 [대비]되는 개념인데...
모양이 거의 유사하네요.
본 경문에서는 그 의미차이를 확연히 느끼지 못하고 있기는 한데...
다른 경문에서 [수단격]으로 읽어 본 것을 [탈격]으로 <ex. nimittehi가 나오는 경문이 더러 있음>
읽어 보니 [느낌]이 확 다르네요.
...그럼에도 우리 언어 습관상 [수단격]이든 [탈격]이든 - 두 가지를 혼용해도
결국 의미 전달은 되기는 하네요. ㅋ. 맛은 다른데... 감사합니다. _()_
또 눈에 띄는 것 한 가지마 더... ㅎ
본문 큰 제목 5. 바로 위
[그리고 경을 해석해 보건대, 이와 같이 “어느 맑은 相에 心이 두어짐”은 “밖으로 心이 두어짐”입니다. ]
...에서 <밖으로> 心이 두어짐...이라고 하셨는데...
따라 가기가 쉽지 않네요.
니까야님은 감이 잡히시는 모양인데...
봄봄은 영~ 감이 잡히지 않네요. ㅠㅠ
@봄봄 만약 이와 같이 머물러도 그 수면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목갈라나여,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경행(ca?kama)을 확립하라, 안으로 돌이킨 根들로부터, 밖을 향하지 않은 意(m?nasa)로부터. 그러면 그 자리가 확인된다. 이와 같이 머무름으로써 그 수면이 버려질 수 있다. (이상 “끔벅임 경”)///본문
저는 위 전후상을..... 수행함으로 해결을 보았습니다.....^^
5감 마노의 안과.. 대비되는 밖의 전후상.......
나무님께 질문드립니다.........
전후상의 본문해석이.......
전은 안으로...
뒤는 밖으로... 라고 해석하셨던데요........
저의 해석의 타당성은 어떤지요???
@니까야 그는 전후상(前後想)이 있는 자로서 머무른다, ‘앞’인 만큼 ‘뒤’로 ‘뒤’인 만큼 ‘앞’으로, ‘아래’인 만큼 ‘위’로 ‘위’인 만큼 ‘아래’로, ‘낮’인 만큼 ‘밤’으로 ‘밤’인 만큼 ‘낮’으로. 이렇게 걷힌, 덮이지 않은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한다. (…)///본문
위 경을 보면... 마치 광명상이 전체 대비들을 아우르는 결론을 짓듯이...
전후상도... 전체 대비를 아우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육처 상윳따 보릿단 경 등에서...
감각단속의 정의로... 1몸에 대한 사띠와 2한계 없는 찌따가 나오는데...
1은 안으로...에 대입되고..
2는 밖으로...에 대입될 수도 잇습니다.
@봄봄 외람되게도 이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아마도 心계발이 되신 분들은 절묘한 수순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있겠고요,
心계발이 미진하신 분들은 헷갈리기만 한 그저 그런 흔할 말로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문에는 아무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성벽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니까야 여러 쟁점들을 다루느라
"전후상"에 대해서는 미처 니까야님만큼 깊이 사고하지 못했습니다.
니까야님의 의견처럼, "전후상"은 "광명상", "주상"과 마찬가지로
여러 세부적 대비들을 아우르는 전체 대비로 판단됩니다.
@니까야 경을 읽을 때 "주상"과 "낮/밤", "전후상"과 "앞/뒤"가
표현의 유사성 때문에 동일한 전고처럼 읽히기 십상인데,
"주상"과 "전후상"은 전체 대비(즉 "心" 대 "오개")를,
그리고 "낮/밤"과 "앞/뒤"는 세부적 대비(즉 "안"과 "밖")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니까야 "광명상", "전후상"에 대해서 경은 "작의한다"고 표현합니다.
이점에서 분명 "광명"과 "전후상의 前"은 "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요,
"전후상의 後"는 "오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앞/뒤"의 "앞"은 "안"을, "뒤"는 "밖"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니까야님 덕분에 더욱 세부적으로 살필 수 있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나무 본문의 여러군데에서... 감사드릴 내용이 더 많이 있는 입장입니다.....
댓글에서도... 세부적인 고찰을... 다시 배웁니다.
경문에 나오는 말씀들이... 그저 그런 흔한 말로 보인다면........아직 계발되지 못한 것이라는 말씀..........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속이 시원합니다........감사합니다.
2. 경문의 합경성(合經性)...............내용에...
반성하면서...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저는 실참을 경전과 연결하는 노력을 많이 하겟습니다.......
앞으로 잘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고요.
함께 경을 읽으면서 탁마를 통해 함께 경에 깊이 진입하는 여정이 지속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번역이 참 훌륭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誤字인 듯 싶은데요 ...........
오개(五蓋)를 버리고서, 유가안온을 얻고서 / 법경(法境)을 쥐고서, 스스로의 지견(知見)을 [얻고서] / 나는 비춰보았노라, 이 身, 안팎으로 一切인 것을. /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텅빈 身이 보였도다.
에서 ........ <법경(法境)>은 <법경(法鏡, 법이라는 거울>의 오자이신듯 ..............
글 ......... 감사합니다.
'아위자'가 워낙에 <dhamma>라는 용어에 '민감한 놈'으로 소문이 다 나서, <과잉반응>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는 있겠지만요 ............ <법경(法鏡, 법이라는 거울>이라는 용어에 <dhamma의 본래 의미>가 모두 담겨져 있다고 저는 봅니다. <무엇을 비출까요?> ........ 경전에는 <무엇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 설해지는가요?>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는 것은 쉽습니다. 경전을 읽어 보면 수시로 나타나는 '답'이니까요.
그런데 <그 '답'>에 <道(막가)>가 있습니다. 活路가 있다는 지적. 이 苦海인 삼계에서 <영원히 '벗어나는'(=위무띠)' 빠디빠다>가 있습니다.
@아위자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공부할 거리도 주셔서. 잘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법우님들께서 지적해 주신 사항들, "전후상"과 관련한 부분들과 사소한 오타를 수정했습니다.
수정해 두지 않으면 경 이해에 장애되는 바가 있어 고쳤음을 알려드리며,
공부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혹시 전후상을 (전생을 포함한) 원인과 결과로 읽을 수 있는 여지는 없는지요?
이와 같이 비구여 비구는 전후상을 갖고 머무른다는 것 즉 어떻게 앞일이 뒷일이고 뒷일이 앞일이 되는가?
비구여, 비구는 전후상을 잘 잡는다. 즉 잘 주의 기울이고, 잘 이해하고, 잘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비구여, 비구는 전후상을 가진 자로 머문다. 저 앞일이 이 뒤의 일이고 이 뒤의 일이 저 앞의 일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본다면 전후상이란 연기법을 잘 이해한다라고 볼 수 있지도 않을런지요?
해석은 자유입니다만, 경을 엄밀하게 읽는 분들이라면 우암님과 같은 해석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 그렇다면 왜 부정관을 위와 아래라고 하셨을 까요? 단순히 몸의 위 부터 아래까지를 지칭하기 위해서??? (머리카락에서 발바닥까지)
혹시 위 아래라는 빨리어인 uddha, adha가 dha(놓아버림)에 대한 가르침이 아닐까요? 부정관이란 내려 놓지 못함(묶여있음)에 대한 문제이므로 .
아래란 놓지 못함을 뜻하고 위란 놓음을 일으킴이란 뜻이 아니냔 의미입니다.
제 견해는 위와 아래를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중의적으로 놓음과 놓지 못함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 아니냔 견해입니다.
@雨庵 또한 밤 낮의 문제는 부정관을 일으켜서 공부를 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 공부를 유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하고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밤이든 낮이든 언제나 일관되게 유지하라는 말씀은 아닐런지요?
다시 말해 전후상이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총론에 해당한다면
수행하는 방법으로서 부정관 (위, 아래)을 하고 (한국 불교 개념으로는 꿈이라고 인식하고)
그걸 항상 유지하며 (밤낮)
그래서 alokasanna 즉 항상 지혜롭게 (세속적이지 않게; 내(atta) 이익에 함몰되지 않게) 인식하라는 말씀 아닐런지요?
divasanna(주상) 혹은 alokasanna(광명상)란 결국 vijja (명지)의 지혜를 뜻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雨庵 뒤가 앞이 되고 앞이 뒤가 된다는 의미는
그래서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이 된다는 것이죠. (나가르쥬나의 중론에도 나타나는 표현이지요.)
결국은 연기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그래서 들었습니다.
위와 아래 혹은 놓음과 놓지 못함이 연기의 원인이고
또한 밤낮으로 일관되지 못함이 연기의 원인이다???
發阿樓多羅三邈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는
云何應住(운하응주) : 어떻게 머무르고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 : 어떻게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여러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가르침이란 생각이 듭니다. _()_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나무 불법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