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중대는 84년 2월 초순부터 진해에서 QRF주둔에 들어갔다. 병력은 중대규모이나 실제는 기존 부대에 배속 형식으로 편성되며 오히려 소대에 가까운 숫자였고 대원들이 배에 타면 본대에서 고참들을 제외하고 오기 때문에 중간기수에서 막내기수까지의 기수차이가 빡빡한 편이다. 늘 그렇듯이 툭탁거리면서도 점잖게 때리고 맞고 하던 어느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그날은 민방공훈련의 날이었기 때문에 병력이 오전중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였다.
나는 그때 약 2달간만 일시적으로 상황병을 맡았는데 상황병이란 행정사무를 담당하며 해병참모실과의 연락병이었다. 내 사무실로 8기 선임인 454기 심 △△ 해병이 들어왔다. 그는 금산출신으로 나와 동갑이며 대단한 체질에다가 현재는 통제부 육상당직실에서 TCP 호각수로 근무중이었다. 그는 키가 173-4 정도로 TCP 에는 부적합하지만 워낙 자세가 나오니까 선임기수로 호각을 잡고 있었다. 평소 쾌활했던 그는 그날따라 어두운 얼굴로 근심스럽게 말했다.
'야 저거 김 xx 아무래도 이상하다'
병력이 민방공훈련후 내무실에서 구보중의 낮은 군가소리를 이유로 약간의 집합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내 선임기수에서 내 한참 후임기수 졸병들을 집합시켰던 것이다.
'뭐 별 일 있겠습니까?'
'아냐! 아무래도 이상해'
' . . . '
'때린 건 누굽니까?'
'이 OO 해병이야.'
' . . . '
맞은 놈은 재수가 더럽게 없었던 거다. 그는 나보다 10기 선임이며 제주도 합기도 시범단 출신으로 나이도 한 살 위이고 중키에 단단한 체격이었으나 워낙 신사이고 학교도 제대로 다닌 사람이며 날아오는 각목을 어깨나 가슴으로 막아서 부러뜨리는,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알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주먹질을 안했다.
'이놈이 숨을 안쉬어 . . '
'예? 정말입니까? 언제부터요?'
놀란 내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떨어트리며 '한참 ?獰?.' 하고 말다.
나는 뭔가 해야만된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무얼 해야되는지는 몰랐고 더구나 '설마 . .' 하는 안이함도 있어 1분이나 2분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중대장실로 통하는 사무실 창문이 벌컥 열리며 중대장이 고개를 내밀더니 '야! 빨리 앰블런스 불러!' 하고 뛰어나가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다만 지금 생각해도 우리는 특수훈련때 따라오는 구급차만 봤지 구급차를 불러본 적이 없어 어디로 연락해야할지 아마 난감했을 것이다. 전화연락 여부는 모르겠고 여하간 내무실 복도로 뛰어나가니 중대장이 축 늘어진 김XX을 들쳐안고 병사 밖으로 달려나갔고 그뒤를 중위 홍 소대장이 쫓아가고 있었으며 대원들은 각 내무실 출입구에 몰려서서 이를 보고만 있었다. 내가 달려나가자 해군 병사쪽 공터에는 이미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군용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중대장과 장교들이 김xx 을 싣자마자 차는 즉시 출발했다.
앰블런스가 떠나고 나자 내무실은 두런두런할 뿐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는 있었는데 뭔가 분명하게 감지할 수는 없는 그런 분위기가 되었다. 이때 40자 기수 후반부터 50자 기수 전반까지 모종의 작전회의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망자는 사망자지만 우선 사건을 숨기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에 따라 집합도중 숨진 것이 아니라 고참 심부름으로 2층 침상에 올라가서 장기판을 꺼내다가 떨어진 것으로 입을 맞추었고 따라서 심부름 시킨 자, 목격자 등 임무분담이 있었다.
잠시후 김XX는 사망했다고 연락이 왔으며 그렇게 결부를 시키는 것인지 그날 저녁 막걸리(암구호)는 '천국 - 장미'여서 묘한 여운이 들게 했고 게다가 죽은 XX에게는 털보라는 서울 친구로부터 편지까지 왔다. 내용은 여동생을 주네 어쩌네 하는 그나이 통상의 농담들이었지만 막상 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과 직면하자 문구 하나하나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날밤에 헌병대 수사관들이 6-7명가량 들이닥쳤는데 이미 상황파악이 거의 되었던 것으로 보였고 첫마디부터 "야! 해병대 니네 왜 이렇게 살아?"였던 것으로 미루어 해군이 주축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졸병들 모두 옷을 벗기고 상처여부를 죄 확인하였고 나는 마이가리로 병장을 달고있어서 제외되었다. 이때 내가 상황실에서 복도를 지나 소대내무실로 들어가는데 복도에 OO이 서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손을 못 본 것 같은데 아마도 수갑을 차서 숨긴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잠시동안이지만 서로 아무 말도 못했다. 기억에는 그냥 경례만 했던 것 같다.
수사관들은 할 일이 다 끝나자 OO 을 데리고 철수했고 우리는 그날 밤부터 영안실로 병력 4명이 교대로 나가서 시체감시를 맡았다.
이튿날 xx의 사망과 OO 의 구속이 기정사실화된 후 증언에 참여한 고참들 2명이 또 구속되었다. 피해가 커지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상황실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입대, 힘들게 꾸려온 18개월여의 이생활, 죽은 XX, 해병 483기, 서울지원, 개새끼 그렇게 약한 놈이 뭐하러 지원입대했어? 그는 진해 출정 이전에도 포항에서 집합도중 사건을 만들어 졸병 하나를 영창에 보낸 적이 있었고 나는 그날 내 소대후임, 즉 내 사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때리지 않았다. 그것은 탈영이나 자살 등 더 큰 사고를 우려해서였는데 죽은 XX는 입대후 10개월이 되도록 그만큼 군대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몹시 괴로웠다. 마침 해군 운전병이 몰래 구해준 댓병 소주가 있어서 그걸 약 3/2를 마시고는 만취하여 밤 늦게까지 내무실에서 뛰어다니며 난리를 피우다가 그날부터 감기몸살에 걸렸다. 아마 그날 그렇게 만취하고도 집합이 안걸린 것은 틀림없이 XX 사망 후유증일 것이다. 나도 그 이후 10월달까지 손으로 졸병을 때린 적은 없었다.
부검까지 마치고 그다음날 장례식이 진행?榮?. 날씨는 차가운데 죽은 자의 어머니는 관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고, 그의 형은 영안실 벽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죽인 자의 어머니는 죽은 자의 어머니를 끌어안고 내자식이라도 데려가라고 한탄을 하는데 정말 처연한 광경이었다. '고인의 약력 보고'는 급거 포항에서 날아온 중대선임하사가 했는데 나약함으로 일관하다가 죽은 XX가 강인한 해병으로 둔갑하여 훈련중 순직한 것으로 바뀌자 기분이 씁쓸했다. 더구나 이미 가해자가 입창이 되었는대 왜 그걸 반드시 숨겼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하여간 이날 나는 감기로 음성도 잘 안나오고 상태가 개판인데도 어이없게 중대장이 내게 조사를 낭독하게 하여 몹시 고생했다. 식이 대충 끝나고 해군 의장대 애들이 조총을 몇발 쏘고 나팔수가 트럼펫 솔로로 진혼곡을 불었다. 놈은 예복도 없이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와서 건물 옆에 숨어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자 나팔을 불었는데 . . . 자식의 그 눈빛은 정말 기분나빴다. 그 눈빛은 마치 "으이구 한심한 자식들 . ." 하는 눈빛이었다.
마침내 운구. TCP 근무자들이 관을 들고 나갔다. 언제 저런 걸음걸이를 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
이후로 우리는 비록 단기간이지만 졸병 때리는 걸 무지하게 조심했다. 약 10일 정도 후에 위증으로 달렸던 선임들이 돌아와서 우리는 내기수까지 동참하여 2층에서 소주와 두부를 먹었고 그때 가해자인 OO 선임은 14개월형을 받아 남한산성으로 이송됨을 처음 들었다. 진해에서는 소주 구하기가 상당히 힘이 드는데도 술자리는 매우 씁쓸했다. 서로가 슬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슬픔보다는 군대생활 잘 하다가 묘하게 사건에 휘말린 괜찮았던 전우에 대한 슬픔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진해에서 며칠간을 더있다가 군항제가 끝날 때 쯤 포항으로 이동하였고 당시 부왕수병이었던 440기 이천우 선임은 제대하는 날 집이 포항인데도 집에 안가고 남한산성으로 OO 에게 면회를 갔다고 한다. 이 면회 행렬은 이후 몇 명이 더 이어졌고 우리는 바쁜 훈련속에 차츰 이일을 잊어갔다. 군대생활은 그런 것이었다. 더구나 그해 겨울에 우리는 대대급으로 울진에서 상륙기습훈련을 했고 그뒤 태안반도상륙작전을 중대 단독으로 수행하여 중대장은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졸병이 맞아죽은 데 대한 지휘책임보다 대규모 훈련의 성과가 더 중요시되는 것이다. 더구나 군대란 졸병을 죽이는 것보다 상관의 뺨을 때리는 것이 더욱 중죄였던 것이다.
해가 바뀌어 제대를 두달 가량 앞두고 내가 2월달에 5분대기 왕수병으로 있던 어느 금요일 오후였던 것 같다. 난로가 의자에 기대앉아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복도에서 큰소리로 "필승"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는 이미 고참이니 문밖에 사단장이 왔어도 뛰어나갈 일은 없지만 '총원 차렷 필승'이 아닌 여기저기에서 개별적인 경례를 하는 것이 시끄러워서 "야 저 뭐야 좀 나가봐"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도 벌떡 일어나서 "필승"을 때렸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제주도 출신 해병대 452기 OO 선임이 돌아온 것이다.
한동안 말을 못했다.
그는 더 의젓해진 것 같았고 더 무게가 나가보였다. 여러 인사가 오간 후 그는 모범수로 복역을 조기에 마치고 사단 O연대로 복귀해서 남은 군대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보다 5개월 선임인데 나보다 10개월 가량을 늦게 나가게 되는 것이었다.
열심히 그에게 술을 청했으나 그는 현 소속부대에서 자신에 대하여 요주의 관찰중이므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여 저녁무렵에 돌아갔다.
그는 그렇게 돌아왔지만 그때의 그사건은 그에게도 평생 짐으로 남을 것이었다. 그시절 우리는 참 모질게 살아온 것이다. 그와는 그후 직장생활중 전화통화를 두어번 했으나 내가 망하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어느 시골이나 전화번호가 모두 길게 바뀌어 당장은 찾기도 만만치않다. 그러나 앞으로 어디선가 우연히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죽기 전에 반드시 . . .
[ 진해 QRF 병사 앞에서 . . .우측 비탈밑 도로를 건너면 대식당이 있다.
좌로부터 436기 부산 김동학, 나, 439기 경북 김인목, 450기 나주 나종소 ]
84년 9월 중대체육대회때 병사앞에서 . .
좌측 464기 울산 송호경, 해사출신 울산 신홍규 중위(현 신병교육대장), 453기 삽교 정용덕
85년 3월 내무실 내자리에서.
손으로 짚은 날이 내 전역일이다. 84년 16월 20일
獨島에 海兵隊를 주둔시키자.
011-9974-1766
http://blog.empas.com/mcl826
靑淸水의 푸른 물을 그리며 . . .
첫댓글 과뇽이 간만이네 새삼스레 앤날 생각하게만드는 구만 잘잊제 얼굴 본지가 꽤되엇구만 목포에서 깽이
고맙네 션량이
관용아 너의글 참으로 잘읽었다 . 진짜옛날 생각 나는구나 나종소선배 정용덕선배 송호경. 정용덕선배는 예산전우회 우리동기 김정열이한톄물어봐라 알수있을꺼야.잘지내라.
생각해보니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