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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2 - 로마 왕정 사비니인과 알바롱가 라틴인을 합쳐 세 부족으로 완성되다!
트로이 멸망후 피란온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는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세운 로마 왕정은
건국 244년째인 기원전 244년에 7대왕인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왕이 아들 섹스투스의
추문으로 루크레티아 집안 콜라티누스와 시민에 의해 추방되고 로마는 공화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244년간에 걸친 로마 왕정에 대해 로마를 건국하고 사비니인과 합친 로물루스왕과
사비니인으로 초빙되어 내실을 다진 2대왕 누마 그리고 3대왕으로 라틴족의 본가인
알바롱가를 흡수한 툴루스왕 까지, 3부족이 합쳐져 로마의 인적 토대가 마련됐으니
이를 왕정 전기로 하고 이후 4명의 왕의 시대는 왕정 후기로 나누어서 올릴까 합니다.
'영원한 도시(la Citta Eterna)' 라고 불리는 로마에 대해서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격언이 있으니 세르반테스가 처음 말했고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 에서 말했으며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 에서 또 언급했습니다.
오늘날 시오노 나나미는 이 말을 그녀의 책 <로마인 이야기> 제1권의 제목으로 차용했는데....
이 말을 되집어 생각하면 로마는 처음부터 제국이 아닌 아주 미약한 세력이라 인구가
적으니 주변의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과 매년 힘들게 싸워도 영토는 생각만큼 빨리 늘어나지
않았으니 오랜 세월이 걸린지라 대기만성형 국가인데 로마의 멸망도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1. 로마의 건국
기원전 753년 테베레강 동쪽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팔라티노언덕에 정착한 로물루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자리 잡은 쌍둥이 동생 레무스와 세력투쟁이 전쟁으로 번져 그를 죽인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이름을 지으니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는 흰 암소와 수소에 쟁기를 매서
깊은 도랑을 팠고 도시 성벽의 경계로 삼았으니 성역으로 지정되었고 후에 '포메리움' 으로 명명합니다.
이때 이탈리아반도에는 5개 민족이 거주했으니 북쪽 포강이북 알프스산맥 이남에는 후일 로마인
들이 갈리아인이라고 부른 프랑스에 살던 갈리아인과 같은 민족인 켈트인들이 있었고 그 아래
피렌체 지방에는 에트루리아인이 살았으며 모마 주위는 라틴인들이 거주햇고 남쪽 산악지대에
삼니움인 그리고 나폴리와 타란토등 바닷가 해안지대에는 이민을 온 그리스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제1권에서 “지성에서는 그리스인 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 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 보다 못하고, 경제력
에서는 카르타고인 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 이라고 로마인 스스로 인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이 번영할수 있었을까요,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유지할수 있었을까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해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강한 군사력 덕분이고, 쇠망의 길을 걸은 것은 교만 때문이었을까요....
저 말에 감동해서 로마인 이야기 15권에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까지 16권을 읽었으며 그외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세계와 황금빛 로마와 십자군 이야기등 모두 30권의 시오노 나나미씨의 책을 구입해 읽었습니다.
로물루스 이전에 로마에 도시를 세운 나라는 없었으니 북쪽 피렌체 지방에 거주한 에트루리아
인들과 남쪽 해안가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은 로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데
그리스인이야 통상을 위주로 하는 민족이니...... 해안지대가 아닌 내륙인 로마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게 당연하지만 12개의 도시국가를 세운 에트루리아인은 왜 관심이 없었을까요?
에트루리아인들은 적군의 침입에 대한 방어와 여름철 더위 및 말라리아를 피하기 위해 산 언덕에 도시
를 건설했는데 로마의 입곱개 언덕들은 낮은데다가 협소해서 도시를 세울수 없었고 또 일곱
언덕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 다른 언덕에 적대세력이 둥지를 틀수 있었으며....... 또 언덕 사이
저지대는 습지여서 사람이 살수 없으니 여긴 도시국가를 세우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근처에 다른 언덕이 없고 너무 낮지 않은 넓은 언덕에 도시를 세웠으니
피에솔레(피렌체), 시에나, 볼테라, 페루자, 키우시 및 오르비에토가 그들의 도시인데...
로마는 정착생활을 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집단이 그 시작이었기에 외부의 인재와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습니다.
해서 로마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인들의 건축술과 정치 체계를 본뜨게 되는데, 특히 에트루리아인들
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로마인들은 이름 - 씨족 - 가문 이름으로 나뉜 작명 방식도 모방하게
되고 또한 건축술, 종교, 정치제도의 모든 면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을 따라 하였는데..... 그 중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습지에서 물을 빼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니 로마에 매우 유익한 선진기술인가 합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인들이 기술을 배워와 일곱 개 언덕 사이에 자리한 저지대 습지에서 물을 빼고 도시를
확장하니 포로로마노인데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해발 300미터에서 500미터 높은 산에 견고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틀어박혀 안주한 에트루리아인들에 비해 가장 높은게 해발 50미터 카피톨리노언덕으로
방어가 불완전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밖을 향해 발전하게된 것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포룸 로마눔) 는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 저지대에 물이
고이는 습지를 5대 왕인 타르퀴니우스왕이 테베레 강까지 배수로 사업을 진행하여 땅을 간척해
건설했으니...... 1.원로원 2.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3.로스트리 연단 4.?? 5.비아 사크라
6.사투르노 신전 7.포카 황제 기념 원주 8.율리우스 시저 공회당 9.에밀리아 공회당 10.율리우스
시저 신전 11.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12.?? 15.안토니노 파우스티나 신전 16.?? 17.로물
루스 신전 18.?? 19.막센찌우스 공회당 20.콜로세움 21티투스 황제 개선문 22.팔라틴 언덕입니다.
2. 에트루리아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중부지역에 거주했으며 한때 티레니아해의 제해권을 놓고 카르타고
및 그리스와 격전을 벌여 코르시카 섬까지 지배했고 그리스와 함께 로마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언어가 다 해독되지 않아 아직까지 비밀이 많은 문명으로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에 거쳐서
이탈리아 북부 오늘날로 치면 토스카나, 움브리아 및 라치오 북부에 많은 도시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스어로는 티레니아 (Tyrrēnía) 라고 부르며 에트루리아인 스스로 라스나(Rasna) 라고
불렀는데 로마인들은 에트루스키(Etrusci) 라 부르고, 에트루리아 지방은 에트루리아 혹은
투스키아(Tuscia)라고 불렀으니 이것이 훗날 토스카나 라는 이름으로 현대까지 전해집니다.
고대 남서 유럽에는 에트루리아인의 조상인 Tyrsenian 인이 바스크인, 미노아인의 조상인 Vasconic 과 함께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8000년경 부터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현대의 남유럽인이나 중동인
처럼 검정색 계열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피부와 눈은 금발벽안인 사람에 비해 약간 까무잡잡했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에 우크라이나 동부 초원과 캅카스 북부에 거주하던 금발 벽안의 원시 인도
유럽인들이 남서 유럽으로 유입되는데 이들은 위에서 말한 세 민족보다 금속 도구 청동기
를 빨리 발명했고 전차를 먼저 활용했기 때문에 금발벽안이 유럽 전체에 퍼질 수가
있었으며 세 민족이 쓰던 언어는 고대에 멸종되어 바스크어만 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트루리아인의 기원은 기원전 900년경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에 있었던 빌라노바 문화(Villanovan culture)
가 기원으로 생각되는데 빌라노바 사람들은 이탈리아 반도에 철기 기술을 전수했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장례법으로 화장을 지냈고 시신을 태운 재를 독특한 이중 원추 모양을 한 유골 항아리에 담아 묻었
으며 유골함은 토기 혹은 청동제였다고 하는데 때문에 에트루리아인은 처음부터 철기문화였다고 보입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에트루리아인은 아나톨리아의 리디아에서 유래한 종족이라고 하나,
디오니시오스는 이탈리아의 토착 민족이라고 말했으며 에트루리아어는
현재 해독이 어려운데 각종 금석문에는 라틴어에 있는 일부 어휘들이 발견되었으니
이로써 라틴어가 에트루리아어 단어를 외래어로 많이 받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트루리아 문화에서는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의 예술이 높이 평가되니 회화는 생동감 있는
표현이 강하다는 점이 인상적인데 조각으로는 아레초에서 발견된 키마이라 상이 유명하며
당시 주변 국가와는 달리, “여성의 독립적인 인격을 인정”했으니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남성
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고, 연회나 운동경기에서도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남존여비 가부장적 문화를 가진 그리스인들에게는 섬관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여성들이
집안에서 벗고 생활하며 집밖에서 제 멋대로 돌아다니는 에트루리아의 상황이 매우 충격적
이었으니, 때문에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에트루리아 문화를 타락했던 것으로 보았는데 하지만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정 반대로 이런 에트루리아 여성들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진 고대 로마에 비해서는 가정 내에서 어머니의 권위도 상당히 존중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에트루리아 전통양식의 비석에서는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고 있으니 고대 로마에서는 여자 이름을 기록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기 때문이며
에트루리아에는 그리스 본토에서 만들어진 항아리들이 많이 발굴되니 해상무역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트루리아인의 신앙은 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다신교였으니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자신
들 보다 신을 더 중시한다고 평가했으며 대체로 그리스 신화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로마 신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크게 보아 에트루리아 토착신과, 로마 신화와
유사한 신, 그리스에서 유입된 신으로 나누어지며 사자(死者) 숭배가 번성했고, 죽은 자의
무덤을 생전의 집과 똑같이 만들며 관은 사자(死者) 의 모습을 생생하게 조각하여 장식했습니다.
에트루리아 족의 도시국가들은 통합적인 국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2도시 연맹이라는 느슨한 연맹체
를 형성하였고 제사와 군사 등에서는 협력하였는데.... 타르퀴니아, 키우시, 베이오, 체르베테리
(카에레), 아레초, 볼테라,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페루자 등이 유력한 도시로 이 중에 7개 도시가
오늘날에도 건재한데, 기원전 390년 에트루리아가 포강 북쪽에 가주하던 켈트족 갈리아인들에게
약탈당해 도시 두 곳을 빼앗겼는데, 이때 빼앗긴 도시들은 메디올라눔과 보노니아로 개칭되었습니다.
라틴족인 로마는 처음에는 같은 라틴족 도시들과 싸웠지만 이후 에트루리아인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로마가 왕국이었던 초기에는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했으니.... 로마 국왕 가운데
5대왕 부터 7대왕 까지 3명이 에트루리아인 혈통이었으며, 실제로는 더 많았다는 주장도 존재합니다.
다르게는 로마는 라틴족 도시 가운데 에트루리아 앞잡이 노릇을 하던 도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인데.... 에트루리아와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어 로마 문화에 에트루리아의 색채가 짙게 베이게
되었으니 로마의 대표적 복식으로 인식되는 토가도 에트루리아인들의 의상에서 유래되었고, 이름짓는
법도 에트루리아식이며 아치형 건축도 에트루리아에서 먼저 시작된 것을 로마인들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에트루리아 도시들은 점차 로마에 복속되어 로마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에 동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나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은
만큼 에트루리아 문화를 존중한 편이었고 에트루리아에서 사람과 맹수가 싸우는 경기를 로마가
받아들였으며 특히 점술 등에서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로마인들이 에트루리아로 유학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로마 유명한 귀족 가문중 리키니우스, 트레보니아누스, 케이오니우스 같은 공화정, 제정시대 귀족 가문
들이나 이름난 정치인, 장군 중에 에트루리아계가 많으며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1차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크라수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로 공화정 말, 제정 초기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이름난 마르쿠스
아그리파, 문화부 장관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이케나스, 간신이자 권신 세야누스가 에트루리아 혈통입니다.
먼 후대에 로마 황제 중에서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루키우스 베루스, 푸피에누스, 트레
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등이 모두 에트루리아 혈통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외조부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역시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이리고 합니다.
또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에트루리아계라고 하니, 베르길리우스의
풀네임이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인데 그의 성 마로가 에트루리아식 네이밍
이라서 베르길리우스는 고대 에트루리아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여겨지며 전승
에 의하면 베르길리우스 본인 스스로도 종종 자신을 에트루리아계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먼 훗날인 1801년 피렌체의 토스카나 대공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잠시 단절되며 에트루리아
왕국이 건국되었으니 프랑스 부르봉 가문 파르마 공작의 아들 루도비코 1세를
모셔와 왕으로 삼긴 했는데 프랑스의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고 1807년 프랑스에
병합되었는데 물론 고대의 에트루리아와 같은 지역이라는 것 말고는 큰 연관성은 없습니다.
3. 그리스 도시
그리스인들은 이탈리아에 이민와서 식민도시를 다수 건설했으니.... 기원전 8세기 그리스는
귀족이 통치하는 도시국가였는데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던 오아정시대에 비해 귀족정
때는 공업과 상업 및 해운업에 손을 뻗친 결과 경제발전으로 인구가 늘어나자 권력투쟁
에서 패배한 귀족과 토지를 잃은 가난한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 새 도시를 건설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리스인들은 진취적이 정신에다가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던지라 이런 해외 식민
사업은 활발하게 펼쳐졌으니 동쪽으로 흑해에 이르렀고 서쪽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섬
그리고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니스 그리고 스페인에 이르렀는데 나폴리, 타란토, 쿠마이,
메시나, 시라쿠사 및 아그리젠토가 그런 도시들이니 통틀어 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리었습니다.
높은 문명을 가진 그리스인들이었으니 시행착오가 없었고 해당지역에는 인구가 희박해서 원주민과
크게 충돌하는 일도 없었으며 조국을 버리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실패하면 갈곳이 없다는 각오를
가진지라 급속도로 번영을 이룩했으며 모구과의 관계에서도 독립심이 강했으니 타란토 사람들
에게 스파르타는 타국이고 시라쿠사 사람들에게 코린트는 타국이었지만 무역 교류는 활발했습니다.
그리스인에게는 먼곳으로 여행할 때 육지로 걸어 가는 것 보다 배를 타고 가는데 훨씬 익숙했으니 교류
는 활발햇지만 한가지 단결심과는 인연이 없는 민족인지러 그리스의 원래 모국 도시와도 전혀 다른
나라인양 갈라졌고 여러 도시들이 힘을 합쳐 외적을 상대하는 법도 드물었는데 신생 약소국 로마가
온전할수 있었던 이유는 에트루리아나 그리스인에게 로마는 매력이라고는 없는 촌이었기 때문 입니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은 물건을 사주지도 않고 팔 물건을 만들지도 못하는 도시는 가지 않으니 농업과
목축박에 모르는 로마는 아테네 장인들이 만든 아름다운 항아리를 살 돈도 없고 에트루리아인들이
만든 정교한 금속 도구를 구입할 돈 역시 없었스니 상인들에게 무시당했던 것이니 에트루리아인은
테베레강을 따라 내려와 로마옆 작은 섬을 지나 강을 건너서 그리스인이 있는 남쪽으로 갈 뿐이었습니다.
4. 초대 왕 로물루스
3천명의 양치기와 농민 등 라틴족을 거느린 18세의 로물루스는 일곱 개 낮은 언덕 중에서
방어만 생각하면 해발 50미터 카피톨리노언덕이 좋겠지만 부지가 협소한지라 신전을
짓기로 하고 언덕 위 면적이 10헥타르로 넓으며 테베레강과도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을 수도로 선택해 753년 4월 21일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치고는 성벽을 쌓았습니다.
그러고는 로마의 권력을 왕인 자신과 원로원 및 민회로 3분했는데 종교 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정했으며 100명의
장로들을 모아서 원로원을 창설했는데.....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뜻하는
“파테르” 라 불렀으니 이 말에서 귀족을 뜻하는 “파트리키” 라는 말이 생겨나게 됩니다.
민회는 로마시민 전원으로 구성됐는데 왕을 비로 정부 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
이었으니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 하는
권한을 가졌으며 전쟁을 하거나 강화를 할 때도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저 3천명은 대부분이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아주 적으니 사비니족 여인들을 납치해야
했는데 이들이 거의 남자들이었다면 아마도 기존의 각 부족에서 밀려난 사람들로 보이는데 훗날
로마가 커지면서 저런 실정이라면 체면이 서지않는지라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
이며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원천인 알바롱가를 세운 것으로 미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딸들을 강탈당한 사비니족이 쳐들어와 4차례 전쟁을 치루는데 3번은 로마 우세속에 전투를 했으나 한번
은 팔라티누스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에서 전투를 했으니 사비니족이 로마 안으로 밀고 들어온
것인데 강탈당한 사비족 여인이 끼여 들었으니 오라비와 남편이 죽이고 죽는 꼴을 볼수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로물루스왕과 사비니족의 타티우스왕은 그녀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전투를 멈추고
화평이 이루어졌으니 결국 두 부족이 합치게 되는데 서양에서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전해지니 이 사건 이후 시작된 로마의
풍습이 이어진 것이라고 하며 사비니족은 퀴리날리스 언덕에 주거지를 제공받았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 패자 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댁구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라고 말했으며 그후 타티우스왕이 전사했고 37년에 걸친 로물루스의 생에는
라틴 부족들간의 전투로 점철되었는데 100명으로 구성된 백인대인 “캔투리아” 제도를 고안했습니다.
재위 39년째인 기원전 715년 로물루스가 군대를 열병하고 있을때 하늘이 흐려지면서 소나기
가 쏟아졌고 장대같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며 우레소리가 주변을 압도했는데 비가
그친후 옥좌는 텅 비어 있었으니 사람들은 왕이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으며 로마의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시기로 했는데..... 원로원이 시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5. 2대왕 누마
로물루스가 죽은후 사비니족 누마는 로마로 들어오지 않고 조상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덕망과 깊은 교양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지라 라틴파와 사비니파로 갈라져 대립하던 로마
는 그를 왕으로 추대했으니..... 장로들의 삼고초려로 로마에 왔으니 군장을 갖추지도 않았고
호위병이 도끼자루에 한묶음의 막대기를 묶은 왕의 권표를 받쳐들고 뒤를 따르는걸 사양합니다.
민회의 찬성을 얻어 누마는 왕이되었는데....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는 왕이 곧 신(神) 이었
으며 메소포타미아왕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관과도 같았고 그리스의 왕은 부유하고
유력한 일족의 우두머리라는 생각이 강했지만 로마의 왕은 민회에서 선출되어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에 불과한지라 심지어 왕위가 자식으로 세습되지도 않았습니다.
로물루스의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된다는 생각은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없었으니 종신 대통령
격인데 역사가 리부우스는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질서)과 풍습을
개선하며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에 건전한 기풍을 심어주려고 했다” 라고 적었습니다.
누마왕은 전쟁의 신으로 반대방향을 향하 2개의 머리를 가진 야누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
는데 신전의 문은 전시에는 열리고 평시에는 닫힌다고 선언했는데 43년 집권 동안 저
문은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으며 왕이 죽은 후에는 문은 항상 열린채로 세월이 흘렀다고 합니다.
문은 열린채로 있다가 기원전 240년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한후 잠시 닫혔으나 곧 열렸고,
카이사르 암살후 내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쳐부순 기원전 31년 이후 세 번째로 닫혔다고 하는데 누마는 전쟁을 벌여
이웃 국가를 약탈을 하지 않아도 로마가 생활할수 있도록 농축산업 진흥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로물루스 시절에 로마에서는 1년의 날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누마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1년을 12달로 정하고 1년의 날수를 355일로 정햇으니 남는 말수는 20년마다
결산했으며 이 달력은 650년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1년을 365일로 정할 때 까지 이어졌습니다.
또한 로마인들은 춘분이 속한 3월을 1년의 첫달로 지냈는데 누마는 11월과 12우러을 앞으로
가져와서 1월과 2월로 삼았지만 달의 명칭까지는 바꾸지 않앗으니 9월 이후부터는
명칭이 본래의 뜻과는 맞지 않게 되었으며 매달 아홉 번째 날과 15번째 날에는 장이 서니
이 2일이 휴일이었으며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축제일이 1년에 45일을 헤아렸으니 휴일입니다.
누마는 신들을 정리했으니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그리스의 제우스- 영어 주피터), 아내인 유노
(헤라- 주노), 미와 사랑의 신 베누스(아프로디테- 비너스), 수렵의 여신 디아나(아르테미스-
다이애나), 학문과 예술의 신 아폴로, 지혜의 여신 아테네, 전쟁의 신 마르스도 그리스 처럼
로마에는 중요한 신들이었으며 로마 고유의 신으로는 야누스가 있고 로물루스도 신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로마는 다신교이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일신교인데 그
차이는 다신교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는데 비해 일신교는 그것이 신의 전매특허이니....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결점을 갖고 있으나 일신교의 신들은 완전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게 차이인가 합니다.
로마인은 신에게 인간의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요구하지 않은 대신에 수호신 역할을
바랬으니 로마를 지키는 것은 유피테르이고 전쟁터에서는 마르스나 야누스가 지켜주고,
농업은 케레스여신이 포도주 제조는 바쿠스신이 상업에는 메르쿠리우스신이 병이
나면 이스쿨라피우스신이 그리고 행복한 결혼을 지켜주는 것은 유노 여신 이었습니다.
로마는 추상적 사고를 하는 그리스와는 달리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 신의 수가 수만이
넘었으며.... 로마인들은 타 민족의 신들도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니
신이란게 수호신 개념인지라 남의 민족의 신이라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부부싸움의 신은 비리프라카 여신인데 말다툼이 생기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지라 목청이 커지고
떠들게 되니 신전에 가는데... 신관도 없고 그냥 여신상이 있을뿐으로, 규칙은 한번에 한사람씩
여신에게 호소해야 하는 것이니 한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편은 말을 끊지 못하고 꾹
참고 들어야했는데 그러다보면 상대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화해를 하게 된다는?
훗날 가톨릭교회는 일신교인지라 수호신의 역할을 성자들이 대신 맡게 되었으니 “수호성인”
이라 하는데 도시마다 수호 성인에 성유물이 있었고 나라에도 수호성인이 있으니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은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이며 동방정교회의 이콘 숭배입니다.
누마는 신관조직도 정비햇으니 최고신관 아래 5~10명의 대신관과 성화를 지키는 무녀
(베스타) 가 있었는데 무녀는 30년동안 봉직하면서 처녀성을 지켜야 했으며 그 밖에
새가 나는 모습이나 모이를 쪼아먹는 방법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사제가 10명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로마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종교에만 속한 전문 사제가 없었다는 것이니 일반인들이
임기제로 돌아가면서 잠시 동안 맡았는데.... 신의 존재를 보여주거나 대리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신관들은 모두 민회에서 선출돼 짧은 임기를 맡을 뿐이었으니 임기제 공무원 으로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대신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니 "폰티맥스 막시무스" 최고 신관 이라?
따라서 종교를 지나치게 존중해야 할 필요도 없었으니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니시오스는 “로마
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라고 말했는데 광신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타 민족의 종교에 배타적이지도 않았고 이단이나 이교도 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흉하다는 점괘가 나오면 군대가 출진을 중지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효력이 없으니 사제가 눈을 감으면 그만이었으며 새가 군다 지휘관이
바라는대로 점괘를 내놓게 하는 것은 사제에게는 식은 죽먹기였으니 융통성이 있었다고 할까요?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은 로마는 엄격한 가부장제로 다스렸고
그리스는 그 역할을 철학에 요구했으니..... 인간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유대인
은 종교에 맡겼고 그리스인은 철학에 맡겼으며 로마인은 법률에 맡겼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누마는 왕에 추대되었지만 로마시민도 아니었고 지지세력도 없었으며 로물루스와 같은 군사적
업적도 없었으니 왕위에 오른후 선왕 로물루스의 호위대 300명을 해고했으며 왕을 상징
하는 보라색 옷을 마다하고 하얀 토가를 걸치고는 숲속에 틀어박히고는 했으니 43년
재위 기간동안 로마인들은 그가 숲에서 님프를 통해 신들의 계시를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6. 3대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3대왕 툴룻 호스틸리우스는 라틴계로 로물루스처럼 공격형 지도자니 누마가 43년동안 고구려
소수림왕 처럼 내부 안정을 다졌기에 이제 광개토대왕처럼 외부로 향해 팽창하기
시작했으니 라틴족의 발상지로 선조의 땅인 “알바롱가” 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습니다.
80년 역사를 가진 로마에 비해 알바롱가는 400년 역사를 가졌으니 간단히 제압할수 있는
상대가 아닌지라 툴루스왕은 북쪽에 강대한 에트루이아가 존재한느지라 쓸데 없는
출혈은 양국 모두에 이롭지 않으니 대표자 끼리 결투를 벌여서 승부를 결정하자고 제안
하니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과 클리아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가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6명의 전사들은 양군이 보는 앞에서 결투를 벌였으니 로마군 병사 2명이 쓰러지고 혼자
남게된 로마 병사는 공포로 인해 달아나다가 돌아보니 뒤쫓아오는 알바롱가 전사들이
서로 거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맨먼저 달려온 전사를 쓰르뜨리고 두 번째
전사도 쓰러뜨렸으며 세 번째 전사를 상대해 이긴 것은 로마군 호라티우스 였습니다.
하지만 알바롱가의 왕은 단 한번의 전투로 나라가 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수는
없으니 약속을 저버렸고 이웃 부족들을 선동해 로마에 맞서게 했으니 로마는
알바롱가왕에게 약속 이행을 강요하기 전에 먼저 이웃 부족부터 상대해야 했으니
그동안 알바롱가왕은 태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전황을 주시하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여러 다른 부족들과 싸워 그들을 묶어 놓는데 성공한 툴루스왕은 진짜 적이 누군지
잊어버리지 않았으니 물밀 듯이 알바롱가를 기습하자 미처 전투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던 알바롱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왕은 포로가 되었으니 두 필의
말에 왕의 다리 하나씩을 묶은다음 채찍질해 반대방향으로 달리게 하니 능지처참입니다.
알바롱가시는 철저히 파괴되고 주민들은 강제로 로마로 이주당했는데 하지만 노예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였으니 이들은 주거지로 카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 할당
되었고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그리고 훗날 카이사르가 태어나는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어 원로원 의석을 배당 받았습니다.
알바롱가는 라틴족의 본향이었으니 이제 로마는 자기 부족에서 밀려난 자들이 세운 분가가 아니라
라틴족의 본가가 되었는데 사비니족과 합쳐져 늘어난 로마인은 이제 ㅇ라바롱가의 합세로 대폭
늘었으니 고만고만한 라틴 부족들 가운데서 가장 인구가 많은 강국이 되었으니 늘어난 병력으로
톨루스는 32년간 전쟁을 거듭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리비우스는 그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