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없는 도전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집으로 돌라온 영우는 아주머니와 단둘이 앉았다. 영우가 방석에 앉자마자 아주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영우가 밖에 나가있는 동안 아주머니는 영우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머니네는 대학생 아들이 둘이 있는데, 둘 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단다.
아주머니는 이른 나이에 직업군인하고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 이곳에서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는데 3년 전 아저씨가 군 훈련 중 폭발물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시어머니도 쓰러지시고 몇일 뒤 명을 달리 하셨다고 했다. 자식 낳고 시어머니 모시며 단란하게 살던 아주머니네는 하루아침에 식구 두 명이 돌아가시고 집안은 풍지박산 난 꼴이 되어버렸다. 어젯밤 보았던 장독대에 항아리가 많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한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방황하던
아주머니는 자식들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국가에서 나온 보상금과 퇴직금으로
이곳 큰 길가에 조그만 상가를 구입해서 거기에서 나오는 가겟세와 병휘오빠한테서 받는 방세로 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영우가 심심해할까 봐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고 이곳 사정도 시시콜콜 알려 주었다. 그리고 어제 영우가 거짓으로 한 말을 의식이라도 한 듯 걱정
말고 잘살아 보라면서 용기를 북돋는 말도 빼놓지 않고 하셨다. 하지만 영우는
아직 누군가와 결혼을 하거나 동거를 할 생각도 없었고 그러기에는 영우 자신도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냥 병휘오빠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따라왔을 뿐 병휘오빠와 결혼을 하더라도 몇 년은 지나고 자신이 세상을 충분히 알았을 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오후 버스로 집에 갈 작정이다.
아주머니가 저녁 밥상 차릴 준비를 하신다 ‘병휘오빠도 아직 안 왔는데 우리끼리
저녁을 먹자는 말인가?’ 의심도 잠깐 병휘오빠가 퇴근해서 돌아왔다. 병휘오빠는
출근도 일찍 하지만 퇴근도 일찍 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병휘오빠가
퇴근해서 마음이 편했다. 아주머니는 병휘오빠의 퇴근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퇴근시간에 맞춰서 저녁 준비를 하신 거였다. 하숙을 하는 병휘오빠는
평소에는 시간 맞춰 퇴근을 하는데, 부대에 비상이 걸리거나 해서 늦거나 할 때는 아주머니께 미리 말씀드려서 헛일을 안 할 수 있게 서로 의견조율이 되어 있었던 거였다.
병휘오빠와 헤어질 생각에 마음이 심난해서 였는지, 아주머니가 영우를 위해 정성껏 차려준 저녁밥이 맛있는 줄 모르고 먹었다. 저녁밥을 급하게 먹은 영우가
방으로 들어갔고 곧바로 병휘도 뒤따라 들어왔다. 막차가 출발하기 전에 버스를 타야하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막상 집으로 가려니 가슴이 아릿했다. 가방을 집어든 영우의 손을 잡은 병휘가 영우의 몸을 돌려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병휘가 영우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병휘의 눈빛이 애잔해 보였고 그 눈 속에 영우가 들어가 있었다.
“더 있다 가면 안돼?”
병휘의 눈을 올려다보는 영우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방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며 방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병휘가 영우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영우는 병휘의 간절한 눈빛을 냉정하게 뿌리칠 만큼 모질지를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두 번째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다음날 병휘는 변함없이 출근을 했다. 영우는 이곳에 머무르는 날이 길어질 것
같은 생각에 집에 계신 부모님 걱정이 앞섰다. 아무래도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편지지를 사기 위해 문밖을 나섰다.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아보았지만
문방구가 없었다. 난감했다. ‘이곳 사람들은 편지도 안 쓰나?’그러다 문득 학교가
떠올랐다.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있을 거야’ 영우는 지나는 사람들한테 학교를
물어 찾아갔다.
마을을 조금 벗어난 큰길 너머로 제법 넓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물을 건너야
하는데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개울 위쪽으로 올라가면 마차나 경운기가 건너는
다리가 있기는 한데 멀리 돌아가는 건 귀찮아서 싫었다. 돌다리를 건너기로 마음먹고 한발 한발 조심해서 건너가는데, 중간쯤에 돌다리 몇 개가 어긋나 있었다.
아마 지난여름 큰비에 밀려난 것을 아직 손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어긋난 돌다리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던 영우가 돌다리 건너기를 포기하고 한쪽 발을 물에
빠뜨렸다. 물이 종아리를 적셨다. 그 느낌이 좋아서 나머지 한쪽 발도 물속에 담갔다. 그리고 앞에 놓인 돌다리는 무시하고 흐르는 냇물을 첨벙첨벙 헤쳐 걸었다.
시원함이 온몸으로 전해졌고 물에 잠긴 발이 살짝 시렸다.
개울 중간쯤에 풀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우의 발이 풀등 옆을 지나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풀등을 보금자리 삼아 숨어있던 버들치들이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놀라
황급히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풀등에서 벗어난 버들치들은 이리저리 물속을 헤매다 결국 물길따라 속절없이 아래로 떠내려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풀등에서 잠자고 있던 물고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풀등 속에 물고기가 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아래쪽에는 풀등이 없다. 있어도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하는데 그곳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다.
개울 건너편 뚝방 위에 넓은 배추밭이 펼쳐져 있고 배추밭 옆으로 제법 넓은 길이 닦여져 있었다. 아마 학교로 가는 길 일 것이다. 배추밭 옆 길가 사이에 코스모스가 심어져 있는데, 꽃이 핀 것도 있고 아직 몽우리만 올라온 것도 있다. 이맘때는 어디를 가나 코스모스가 눈에 띄었다. 쉽게 볼 수 있고 흔해서 그렇지 코스모스야말로 참 예쁜 꽃인 것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쉬웠다.
저 앞에 초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예상대로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있었다. 반가움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문방구 안에는 시끌벅적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다음 과목에 필요한 준비물을 사려고 하는가 보다. 아니면 군것질을
하려고 그러는지도 모른다. 영우가 편지지를 사기 위해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좁은 문방구 입구에 아이들이 막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얘들아 아줌마 들어가게 조금만 비켜줄래?”
자신이 말해 놓고도 깜짝 놀랐다. ‘내가 아줌마라니,,,’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네’ 하며 통로를 벌렸다. 그중에 키가 좀 커 보이는 한 아이가 더 적극적으로 영우의 길을 터 주었다.
“야야! 아줌마 들어가게 비켜,,,”
아이들의 협조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편지지를 살 수가 있었다. 문방구를 나오면서 아까 그 키 큰 아이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아이는 서슴없이 영우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줌마 안녕히 가세요”
영우도 가볍게 웃어 보이며 인사말을 건넸다.
“그래 고마워! 공부 열심히 하고 또 보자,,,”
아이들 마음 씀씀이가 어른스럽고 대견했다. 그래도 아줌마 소리를 듣는 건 창피했다. 갑자기 자신의 처지를 들킨 것 같아 아이들 보기에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편지지를 돌돌 말아 쥔 채, 거의 뛰다시피 발걸음을 재촉해서 개울가 앞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한시름 놨다.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아줌마면 어떻고 누나면 어떤가,,, 이런저런 생각에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다시 개울 앞에선 영우는 망설임 없이 처음부터 물에 발을 담근 채로 건넜다. 개울을 건너선 영우가 물이 줄줄 흐르는 젖은 바지를 손으로 꾹꾹 눌러서 짜내며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젖은 바짓가랑이는 보기에 민망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널걸 그랬나 싶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이대로 집으로 가려던 생각을 바꾸어 잠시 쉬어가기로 작정하고 주위에 평평한 돌덩이를 골라서
그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눈앞에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흐르고 물속에는 큰 개구리가 헤엄을 치며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에 취해
버린 꽃처럼 영우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취한 채, 물소리를 벗 삼아 잠시 상념에 잠겼다. 대학입시공부, 부모님 생각, 병휘오빠와 관계, 이곳에서의 생활방식,
어느 것 하나 정리된 것 없이 세상의 번민과 고뇌가 연기처럼 피어났다 사라졌다.
바지 밑동이 물에 젖은 채로 집에 들어온 영우는 옷부터 벗어놓고 그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엄마하고 아버지 두 분 중에 어느 분한테 보낼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엄마한테 편지 쓰기로 마음먹고 편지지를 꺼냈다. 그런데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 편지지 놓을 공간이 없었다.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티브이가 놓여 있어서 좁기도 한데, 소설책 만화책 잡지 따위의 잡동사니가 잔뜩 올려져있어서 이것들 먼저 치워야 될 것 같았다. 책들을 책상 아래로 가지런히 쌓아놓고, 적당히 책상정리를 하고나서 펜을 들었다.
‘엄마 저 영우예요,,,,’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 문안 편지는 하루만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이곳 분들이
너무 잘해주시고 좋아서 며칠 더 있다가 갈 테니 제 걱정 마시고 잘 계시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담는데, 엄마한테 거짓말 하는 게
죄스러워, 마음 한 편을 아프게 찔렀다.
우체통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막상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니 이런
저런 갈등과 고민이 사라졌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마을 중앙에 있는 오거리를 한 바퀴 휘 돌아서 영우네 집 보다는 조금 낮은 지대에 있는 동네 골목을 탐사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