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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 백두산. 두만강 역사탐방
2006년 8월 1일 화요일~8월 6일 일요일 5박 6일
간곳 : 천진, 북경, 연길, 백두산, 도문, 두만강, 용정
2006년 8월 1일 화요일 인천공항 출발, 천진, 북경
인천공항 출발, 천진공항 도착, 경진고속도로, 북경 도착, 중국 3대 기예 공연 관람, 오리구이 석식, 왕부정 거리, 중국의 인구 정책, 춘휘원 호텔
* 인천공항 출발
중국은 세 번째 여행이다. 요번 여행은 우리 가족 모두 함께 떠나는 뜻깊은 나들이다. 두 아들에게는 북경이, 나와 남편에게는 백두산이 기대된다. 북경은 계절에 영향이 그리 좌우되지 않지만 백두산은 고지대로서 낮은 온도로 여름에만 가능한 여행 코스다.
지루했던 장마와 태풍이 지나간 8월의 첫날, 오늘은 날씨가 좋다. 인천국제공항 L과 M 사이 5번 하나투어 테이블에서 12시 미팅이다. 집에서 오전 10시에 콜택시를 불러 타고, 한일타운 앞에서 리무진 공항 버스로 11시 30분경 공항에 도착했다.
작은 아들이 군미필이어서 출국신고서를 제출하고, 신세계 백화점에서 디카 충전 건전지를 사고, 다 함께 모여 출국신고를 마친 후 14:20분에 24번 게이트에서 보딩했다. 장마 후 해외 여행객이 몰려 공항이 복잡하다.
대한항공 KE 863, 천진공항 비행기에 탑승하여 두 아들은 54A, 54B, 나와 남편은 54C, 54D, 창가와 통로 중앙 좌석에 앉았다. 정시에 출발했다. 14:50분에 인천 공항을 이륙하여 북경 천진 공항까지는 1시간 45분 소요 예상이며, 중국과의 시차가 중국이 1시간 늦어 천진공항에는 현지 시간으로 15:35분 도착 예정이다.
하늘은 쾌청하여 청빛 창공과 하얀 구름이 아름답다. 기내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신문을 보며, 모니터 비행 상황을 보며 갔다. 인천 공항에서 황해를 관통하여 천진 공항으로 날아간다. 거의 바다 위로 비행하는 붉은 라인이 자막에 나타난다. 언제나 해외여행은 설레이고, 새로운 땅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소중한 기회이기에 신비와 기대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 천진공항 도착
한국의 인천과 같은 도시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큰 편이다. 역시 정시에 도착했다. 공항은 에어컨으로 시원했으나 바깥은 상당히 더운 날씨다.
북경 가이드 강연화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교포 3세로 조선족이며 연변생이고 길림성에서 대학을 졸업한 36세 여자다.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었으며, 조부의 고향은 경남 마산, 조모의 고향은 경기도라 했다. 발음이 어눌하지만 한국어를 잘 한다.
북경공항이 복잡하여 입국수속이 수월한 천진공항으로 와서 전용버스로 북경으로 이동 중이다. 천진에서 북경까지는 1시간 50분 소요된다. 공항의 사정으로 이런 코스를 정했지만, 나는 천진 공항에서 북경으로 이동하는 동안의 중국 풍경을 보는 것도 큰 관광이라 생각되어 직접 베이징 공항으로 가는 것보다 더 좋다. 이곳 천진 역시 맑은 날씨다.
* 경진고속도로
북경과 천진을 잇는 고속도로 이름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 관계로 도로 곳곳에 공사가 많아 시간이 예상보다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천진 시내를 지나올 때 호수변에 야광 나무가 보였다. 한 두 그루도 아니고 긴 물줄기를 따라 수없이 늘어서 있다. 가로등 대신 가로수 밑동 부분에 하얀 야광 석회를 발라 놓은 것이다. 벌레 예방과 운전 기사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에너지 절약 차원이다. 지난번 여행 중 명13릉 가는 길에서 보았던 야광나무를 천진 시가지에서 지금 만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가이드는 여행 일정과 명소 관광에 대하여 설명한다. 오늘은 북경에서 저녁 7시 30분에 무예쇼 공연을 관람하고, 오리 구이 북경 특식으로 석식하고, 한국의 명동 거리인 왕부정 쇼핑가를 보는 것으로 마치고 내일은 아침 5시 50분에 기상인데 그 시간은 매일 그렇게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백두산 관광 시즌이어서 곳곳에 인파가 밀려 서둘러야 한다며 백두산은 눈뿌리가 빠지도록, 북경은 다리가 부러지도록 보는 것이란다. 그만큼 백두산은 차를 많이 타고, 북경은 많이 걸어야 하는 관광이란 뜻이다.
버스는 어느새 천진 시가지를 벗어나 천진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달린다. 가도 가도 산이 없고 들판이다. 하늘이 뿌옇다. 비온 뒤라서 한국이라면 청명할 텐데 중국은 아무래도 대기 오염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변에는 가로수가 울창하고 들녘을 가로지로는 물길이 많다. 곳곳에 물을 가두어 민물고기 양식하는 풍경도 보인다. 농촌에 지은 연립주택 단지는 동일한 붉은 집들이다. 지붕, 벽 모두 붉은 색 기와, 벽돌인 집들도 있다. 물이 많아서일까. 버드나무 가로수가 많은데 집단 수목하고 있다. 땅이 넓은 나라의 한 단면이다. 중앙 분리대도 벽이 아닌 나무 군락이다.
오후 5시 30분, 북경계(北京界)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경진(京津)고속도로 안내 문구도 스쳐지나간다. 이제 천진에서 북경으로 행정구역을 넘어온 것이다. 여전히 도로변은 울창한 수림이다.
고속도로 양변에 파랗게 군락으로 서 있는 나무들, 그 아래 방목하는 양떼가 하얀 색으로 점점이 수놓고, 또 말과 젖소도 한가로이 거닐며 풀을 뜯고 있다. 이런 풍경이 천진에서 북경까지 거의 이어진다. 부럽다. 국토가 드넓은 나라의 여유로운 풍경, 내 조국 어느 고속도로변에서 이런 풍경을 볼까. 북경에서 우리가 머무는 숙소 또한 별장이라 하니 기대된다.
북경에 거의 진입해서야 가이드는 일어섰다. 고속도로에서는 서서 마이크를 들고 말하다 걸리면 운전기사의 점수가 빠져나가 운행정지 당하기 때문이다. 이 고속도로가 짐차가 많아 속력을 못 내는 곳인데 오늘은 소통이 원활했다. 일명 ‘빵 빵 도로’ 인데 크락숀을 많이 울리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트럭 집차의 졸음 운전으로 인해서다.
원래는 5t까지 싣고 달리는 한계인데 보통 7t을 싣고 달린다. 벌금이 한화로 5만원인데 물건을 판매하면 그보다 더 많이 벌기 때문에 날마다 정량을 지키라고 해도 매일 초과해서 싣는다. 뿐만 아니라 트럭 한 대가 장거리를 뛴다. 과로로 졸음 운전을 많이 하여 주변의 차들이 ‘빵빵’ 크락숀을 울려대는 것이다. 참으로 위험한 고속도로다.
이런 상황의 도로를 무사히 달려온 것으로 보아 이번 팀의 관광이 순조로울 것 같다는 행운을 전한다. 이제 서서히 어두워지고 차는 북경 시내에 들어왔다.
* 북경 도착
내가 북경에 온 것은 두 번째다. 2004년 9월에 다녀갔으니 정확히 2년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소나기가 오려는지 검은 구름이 갑자기 내려온다. 북경은 바닷가가 아니라서 태풍은 없다. 연길에 비가 오면 백두산 관광은 힘들지만 북경에는 비가 와도 자금성, 만리장성, 용경협 모두 관광이 가능하다고 안내원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높은 건축물이 시가지 양변에 솟아 있다. 모두 아파트다. 급속도로 발전, 변화하는 곳이다. 2008년 세계 올림픽에 대비하여 2006년까지 완공해야 하는 건축물들이기 때문이다. 2년 전과는 무섭도록 다르다. 그때는 도심에서도 멀리 고층건물이 하나씩 보이고, 고층 아파트도 손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으리으리한 빌딩이 갖가지 건축 양식물로 하늘 높이 솟구친다.
북경 아파트 한 채 값과 프랑스 아파트 한 채 값이 같다. 상당히 비싸다. 은행 대출로 산다. 88층 아파트가 늘고 있다. 고층아파트가 차도 곁에 줄지어 서 있다.
북경 자가용이 하루에 120대 씩 는다. 싼 것은 500만원이다. 두 가구당 한 대씩이다. 택시도 노란색 다마스 구형은 없어지고 한국 현대 소나타가 북경 택시로 이용된다. 30만대가 2008년까지 모두 교체된다. 북경과 한국이 합동하여 소나타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이 결국 자본주의에 가까워지는 증거다. 오픈하면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전에는 북경 53건물이 한국 63빌딩처럼 가장 높은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더 높이 솟아 있다. 버스 안에서 본 북경 53건물은 서울 경, 넓을 광, ‘경광중심(京廣中心)’ 이라는 한문상호와 영어로 ‘JING GUANG CENTER' 라는 영문 상호가 붙어 있다. 63 빌딩처럼 전면이 유리 건물이다. 이곳에서 ‘中心’은 ‘센터’란 뜻이다. 중국에서 미국식 영문 상호를 보는 것, 또한 공산주의에서 탈피하는 싸인이다.
북경은 하늘에서 보면 접시 모양 도시다. 천안문과 자금성을 핵심으로 둥글게 퍼져나간다. 번화가일수록 높은 고층건물이 없다. 600년 고풍 건물을 유지토록 하기 때문이다.
도로도 둥글게 이어져 있다. 지금 우리를 태운 버스가 삼순환도로를 지나고 있다. 삼순환로, 이 순환로가 많은데 신호등이 없고 고속도로를 빼고는 가장 빨리 통과하는 도로다. 차량이 앞뒤로 수없이 이어져 밀려 오간다. 불빛과 함께 아름답다.
자가용 번호가 京丁 73447, 京B, 京F, 京H, 京G… 이런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 京CE4567, 京BG6504… 이런 차도 있다. 북경 전차는 레일이 없고 위에 두 줄의 전선만 있어 무공해 교통 수단이다. 길고 안내원이 두 명 있다.
먹자거리인 동자문 거리는 홍등이 즐비하고, 중국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밤 새우려고 오는 사람도 있고, 새벽에도 많이 오는 음식가다. 지금 그 유명한 거리를 지나고 있다.
북경 초입에서부터 천둥 번개와 함께 내리던 비가 점점 굵은 빗방울로 우두둑 우두둑 떨어진다. 자건거를 탄 사람들은 머리에서 손끝까지 감싸는 우의를 입고 타고 간다. 금새 아스팔트 바닥이 물바다로 찰랑거린다. 나라가 크니까 빗방울도 큰 것일까.
북경은 남쪽지방과 가까워서 비가 많이 온다. 습도가 높고 온도가 고온이다. 최고 40~42도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여름은 무덥다. 한국보다 위도상으로는 위에 있지만 날씨로는 한국보다 더 더운 날이 많다.
아무튼 북경의 밤은 아름답다. 어둠과 함께 일어서는 도심의 불빛이 화사하게 우리를 반긴다. 비가 오는 풍경도 큰 낭만이다. 소나기라서 오다, 그치다를 반복한다. 한국의 을지로, 혹은 충무로를 지나듯, 혹은 현대식으로 잘 발전된 서양의 한 도시를 지나듯 낯설지 않은 북경이 우리의 의식과 가까워지고 있다. 점점 해가 갈수록 더 큰 변화로 우리와 친숙하리라.
* 중국 3대 기예 공연 관람
원래는 석식 후 관람하려 했는데 심하게 내린 비로 북경 시내의 교통이 막혀 늦게 도착해서 순서를 바꿨다. 공연은 오후 7시 30분부터 1시간이다. 북경에서 서커스를 보는 것은 세 번째다. 그런데 이번에 보는 것은 서커스+무예쇼+변검, 즉 중국의 전통 3대 기예를 공연하는 것으로 무예쇼와 변검이 기대된다.
극장에 들어서니 어린 소녀들이 곳곳에 서서 들어오는 관람객을 정리 중이다. 우리 일행은 무대의 중앙 중간 자리에 안내받았다. 않고 보니 의자 등받이에 ‘하나 투어’ 라는 한국어가 박힌 카바가 씌워져 있다. 하나투어에서 제공했고, 하나투어 손님은 VIP로 가장 좋은 좌석에 배치된다. 그만큼 중국에서의 한국위상이 높아졌음이다.
맨 처음 공연은 서커스다. 사진 촬영 금지라서 나는 대신 순간순간의 공연을 메모지에 다 적었다. 어두운 조명에서 적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이어지지 않는 기억의 한 도막을 어찌하겠는가. 그날 적은 그대로 지면에 사진 찍듯 쏟는다.
1. 서커스
배경그림이 호수와 수상 집, 버드나무의 한 시골 정경이고 저작거리 상인들이 나와 갖가지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된 가운데 시작이다. 그러니까 한 장터에서 서커스를 보는 분위기다.
<1> 장구쇼 - 4명의 여아가 조그만 장구를 위, 옆으로 던지며 묘기
<2> 모자쇼 - 5명의 남아가 모자 세 개로 오재미 놀이하듯이 주고 받으며 하는 묘기
<3> 도자기쇼 - 1명의 남아가 붉은 옷차림, 흰 도자기 그릇을 돌리고, 던지고, 받고, 이고, 몸에 굴리고 무서운 절도의 대소 화분 2개의 묘기.
<4> 자전거쇼 - 1명의 여아가 맨 처음 나온 2명의 여아로부터 보조 받으며 그릇을 발에, 머리에 10개 정도, 국그릇+공기+수저, 차곡차곡 얹으며 벌이는 1륜 자전거 묘기
<5> 항아리쇼 - 2명의 중년 남녀가 붉은 의자에 누워 복항아리를 돌리는 묘기. 20~30대쯤의 여자가 누워서 남자 장정 5명이 들고 온 무거운 복(福) 항아리를 계속 돌린다. 굴리고 세우고, 눈물겨운 고난이다. 객석 손님을 무대로 올려 항아리 무게를 확인한 후 항아리 속에 그 서양인을 넣고, 1명은 함께 항아리를 들어서 올리고, 그릇 위에 또 무거운 여아가 타고, 맨 아래 여자는 계속 돌린다. 기막힌 힘, 기막힌 여인의 절규다.
2. 무예쇼
서커스에서 무예로 넘어가는 구분은 없지만 힘이 세어보이는 탄탄한 남자들이 칼, 창, 장대, 철퇴 등의 무술 도구를 들고 나와 펼치는 무예쇼다.
<1> 장검 무예 - 중년 남자 2명이 흰 바지, 검은 조끼 차림으로 장검을 들고 객석을 돌며 날과 칼의 위력을 확인시킨 후 무대로 오른다. 의자에 1명이 눕고 1명은 막대 들고 의자 위 남자 배에 칼날 대고는 때린다. 기합을 넣은 후 나무 조각을 배에 올리고 칼날을 대고는 때리는데 나무판은 갈라지고 배는 무사하다. 소름 돋을만큼 아슬한 무예다.
<2> 쌍창 무예 - 두 남자가 양쪽 뾰족한 창을 목에 박고 돈다. 무대는 어두워지고 배경이 구름 하늘로 바뀌고 운무가 분무한다.
<3> 의자 무예 - 남자가 높이 장대에 의자를 이고 여아가 높이 의자에 오른다. 의자 1개, 2개, 3개, 4개까지 받아 쌓고 앉더니 책상을 1개, 2개, 3개 추가로 받아 쌓고는 거꾸로 물구나무선다. 장대로 물건 1개씩 받아 내리고 여파가 서서히 내려온다. 아버지와 딸 같은 위대한 두 사람이다.
<4> 철퇴 무예 - 다시 어두워지더니 도깨비 불이 돈다. 여아 4명과 남아 1명이 벌이는 줄과 유성추 무예다. 줄의 양쪽에 철퇴가 매달린 기구를 잡고 현란한 조명과 함께 도깨비처럼 돈다. 화분묘기남아와 맨 처음 나온 여아 4명이다.
3. 변검
가면을 쓰고 벌이는 묘기다.
<1> 가면을 쓴 남자 1명이 검정 도포를 입고, 부채 든 6명의 남자들은 뒤에서 흰 옷, 붉은 도포, 모두 가면 쓰고 검은 대장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빙 둘러서서 있더니 대장이 객석으로 나와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는 무지개 조명에 현란한 무술쇼를 벌인다. 가면 모습이 모두 다르다.
<2> 8명의 중년 여자가 나와 1명은 중앙 원탁 테이블에, 7명은 뒤에서 우산을 돌린다. 중앙의 테이블에 엎어진 여자는 꺾어지고, 휘어지고, 온몸을 말아 올리는데 저게 정녕 사람인가. 촛불 4개씩 3묶음을 발에 끼고, 둘이 얼굴에 들고, 두 손에 들고 대단한 여인의 촛불쇼다. 다음엔 5묶음을 가지고 얼굴, 두 손, 두 발에 불꽃 송이를 얹는다. 어둠에서 떠오른 화사한 불꽃, 그것은 떠오르는 중국의 상징이다.
<3> 남자 9명이 칼과 방패를 들고 나와 검을 휘두르며 막아내는 기막힌 무술이다. 방패에 가면무늬를 달고 죽창을 잘 막아낸다.
<4> 남자 1명이 쇠막대기를 들고는 객석에 돌며 확인시킨 후 이마로 자른다.
<5> 9명의 남자가 나와 1명씩 무술을 펼친다. 지렁이 절규다. 기고 구르고, 날고, 개구리처럼 뛰고, 뒤집고, 저 무서운 힘이 바로 중국이다.
<6> 남자 혼자 웃통 벗고 달빛 무술이다. 8명은 둘러서서 무예창으로 든다.
<7> 12명의 남자가 나와 채찍쇼를 벌인다.
마지막으로 모든 이가 나와서 돈다. 객석과 무대를 누비며 한 바퀴 돌고는 사라진다. 도구를 이용했던, 몸의 힘으로 했던 놀라운 쇼다. 앞서 중국에 왔을 때 보았던 두 번의 서커스 모기와는 많이 다르다. 무서운 중국의 저력이라는 느낌이 든다.
버스를 타고 나오며 우리가 본 그 공연장 건물에 씌여진 영문과 한문의 간판을 보니 ‘DONGCHENG DISTRIG LIBRARY’ 한자로는 ‘동성구 도서관’ 이다. 왜 ‘도서관’ 이라는 명칭이 들어갔을까. 도서관이 있는 건물이어서일까. 우리와는 다르니 공연장을 도서관이라 하는 걸까. 늦어진 저녁 식사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 오리구이 석식
북경 오리구이는 유명한 특식이다. 65일간 키운 오리를 구운 것인데 45일간은 자유로운 먹이로 키우고, 20일간은 낮에 2차례 밤에 4차례 오리 입을 벌려 억지로 먹여 통통하게 살찌게 한 후 가죽과 고기 사이에 바람을 넣어 말린다.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가죽만 마르고 살은 물기가 그대로 있다. 그 때 기름이 다 제거된다.
이렇게 정성들여 작업한 오리를 배나무, 대추나무를 사용하여 냄새를 제거시켜 구워낸 것이다. 1마리에 108쪽을 내는데 일류 요리사만 가능한 칼질이다. 이 얇게 자른 오리살을 밀전병에 얹어 고추장과 함께 돌돌 말아 먹는 것이 북경 오리 구이다.
우리 일행은 16명이다. 먼저 밥조를 잤다. 8명씩 1조와 2조다. ‘밥조’라는 명칭이 어색하여 많이 웃었다. 한 테이블에 오리 두 마리씩 여덟 가지 별식과 함께 나온다. 파인애플, 고추장, 감자, 무, 파, 오이, 육수, 땅콩, 그리고 밀전병, 쌀밥, 맥주와 콜라가 나왔다. 몇 년전 상해 여행 중 먹었던 거지 닭요리와는 다르다. 그땐 찜이라서 뜯어 먹었는데, 지금은 구이라서, 또 잘게 조각내어서 우아하게 먹을 수 있다.
맛이 있다. 배고픈 탓도 있지만 깔끔한 맛에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테이블 곁에는 일류요리사가 호텔 조리사 복장으로 구운 오리를 자르고 있다. 남자의 예리한 손놀림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국의 요리가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것은 일찍이 알고 있다. 1990년도에 대만에 갔을 때부터다. 산양, 노루, 사슴 등의 야생 동물의 고기를 즉시 구워주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큼 푸짐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대표 메뉴는 육류다. 대륙적인 향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항상 뒤따라 나오는 차 문화 역시 그렇다. 오리를 시작으로 앞으로 먹을 요리들이 기대된다.
* 왕부정 거리
북경시 최대의 번화한 거리로서, 시 동편에 길게 늘어선 상점거리다. 약 1km 가량의 거리 왼편으로 약 100여개의 각종 상점이 들어서 있는데, 우의 상점을 비롯한 신화서점 등 유명한 상점을 비롯해 우의빈관과 같은 호화 호텔도 자리하고 있다. 거리 서쪽에는 중국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북경 백화점이 있으며 동쪽에는 신동안 시장이 있다.
이곳은 일찍이 황실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황실의 우물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왕부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황실이 있던 곳이어서인지 이곳은 아직도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상점과 빌딩이 많으며 유리창 거리가 우리의 인사동 거리와 비교되는 것처럼 이곳은 우리의 명동, 압구정 거리 쯤으로 비교된다. 상업거리로써는 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쇼핑에 빠지지 않는 먹거리도 가득한 곳으로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다양한 간식거리가 있어서 역시 음식천국이라 불리는 중국을 실감케 한다. 특히 밤이 되면 더욱 화려한 불빛으로 행인들을 유혹하는데, 군것질을 하며 이곳저곳 둘러보는 여유가 북경여행을 즐겁게 한다.
이곳에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하루의 일정을 다 마치고 호텔에 가기 직전 들른 곳이다. 야경이 은은하다. 포장마차가 여러 종류지만 진열된 먹거리는 종류가 비슷하다. 지네, 메뚜기, 참새구이 등 기이한 것들을 늘어놓고 손님을 부른다. 병아리 요리는 절대 먹지 말라는 가이드의 부탁이 있었다. 죽은지 며칠된 것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물건을 먼저 받고 돈을 주라, 여럿이 뭉쳐 다녀라, 소매치기가 많으니 가방을 조심하라는 등의 당부를 한다. 가이드도 3년전에 이곳에서 한화 160만원을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가방을 옆으로 메면 반을 가져가란 뜻이고, 뒤로 메면 다 가져가란 뜻이니 반드시 앞으로 메고 다니란다.
북경은 전기가 부족하여 어둡다. 그래도 왕부정 거리가 가장 밝다는데 한국의 번화가에 비하면 으슥한 뒷골목이다. 구정에서 대보름까지만 모든 네온 사인이 허락되어 다 켜고 그 외는 못 켜게 한다. 밤 10시 30분경 불이 모두 나가고 홍등이 흑등으로 바뀌어 더욱 어둡다. 전기절약이란 말에 뒤돌아서 가던 길을 돌아오며 상당히 넓은 대로변의 어둠을 우리 정서로 이해하기엔 힘든 대목이지만 역시 급부상하는 중국의 보이지 않는 저력이다. 그래도 여전히 화려한 거리다.
* 중국의 인구 정책
중국의 인구는 15억이다. 그 중 호적이 있는 자는 13억이고, 2억은 호적이 없다. 한족은 어린이 1명밖에 못 키운다. 능력이 있어도 못 키운다. 1명 외에는 호적을 안 준다. 공무원은 쫓겨난다.
그러나 농사 짓는 사람만 예외다. 1983년부터 개인에게 정부에서 땅을 나누어 주었다. 첫째가 여자면 남자 낳도록 허락한다. 첫째가 남자면 허락지 않는다. 농사일을 하는 남자가 필요해서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는 55개 소수민족이 산다. 조선족은 3명까지 자녀 출산이 가능하다. 연변의 조선족 숫자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 자치구 유지 가능토록 하려면 3명 육아를 허락해야 된다.
거대한 나라다. 15억 인구가 침을 1번만 뱉어도 운하를 이룰 정도다. 북경에 1천만명인데, 사실은 1500만명중 500만명은 유동이라서 그렇다. 2010년이면 북경 인구가 1800만명이 될 거라고 한다. 대륙도 크고, 인구도 많고 무서운 저력을 지닌 나라다. 빠른 속도로 경제도 발전되고 있으니 머지않아 희망의 꽃이 필 나라다.
* 춘휘원 호텔
북경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다. 호텔 내에서 개인 온천장이 있고 노천 온천장과 밤 12시까지 열어놓는 수영장이 있다. 모두 자연 온수다. 호텔 생수가 1병에 중국 돈 10원, 한화로는 1,500원이라 하여 서커스 극장에서 1병에 중화 2원씩 주고 샀다.
밤 12시경에 호텔에 들어왔다. 록키산 매리어트 호텔처럼 녹지의 자연 공간에 저층으로 여러 동의 건물이 늘어서 있다. 아름다운 전원 호텔이다.
2006년 8월 2일 수요일 북경
춘휘원 호텔 출발, 분지 도시 북경, 구사일생과 엎지러진 물, 옥 공장 견학, 명 13릉, 칠보 공예, 만리장성, 용경협, 팔달령 고속도로, 샤브샤브 석식, 발 맛사지
* 춘휘원 호텔 출발
참으로 좋은 호텔이다. 지난 밤 늦게 들어와서 노천 온천욕과 수영장에는 못 갔지만, 호텔 방 곁에 만들어 놓은 개인 온천장에서 온천욕을 했다. 내경뿐만 아니라 외경도 상당히 좋다.
광동성 부자의 개인 소유 호텔이라 하는데 드넓은 대지에 저층으로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동수가 많아 자칫 헤매이게 된다. 파란 잔디와 여러 가지 꽃들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발로 본다는 북경 관광을 위해서다. 이 호텔은 오늘 밤에도 들어와 유숙하고, 마지막 날 연길에서 돌아와서도 하루 더 머문다.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어서 대부분 짐은 두고 가벼운 가방만 메고 나섰다.
* 분지 도시 북경
명나라 때부터 ‘북경’ 이라 칭하게 된 북경은 분지 도시다. 여름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지리적인 요인으로 지금의 체감 온도가 한국보다 훨씬 덥다. 여름온도가 32~42도라 하니 이해가 된다.
중국 방송은 아침에 낮 기온을 40도 이하로 방송한다. 일터에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하루를 나가지 않으면 3일분 월급을 뺀다. 저녁에서야 40도의 기온으로 발표한다. 기묘한 작전이다. 아직은 사회주의라서 가능한 일이다.
중국은 넓어서 여름에도 눈이 있는 곳이 있는 반면, 두 번 농사 짓는 더운 곳도 있다. 농사 짓는 곳은 밤낮을 바꿔서 일한다. 35시간 기차타고 ‘심천’ 에 갈 때는 두 발이 짖무른다는 표현으로 북경의 더위를 이해시킨다.
기차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던 이 나라에서 해발 3400m 높이의 산에 철로를 놓기 시작했다는 TV 방영을 했다. 기차 관광 6박 7일 코스로 꼬박 기차만 타고 서장 지구를 돌아보는 코스다. 곧 한국인도 관광이 가능할 것이라 한다. 한국에서도 TV에서 이미 소개한 내용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중국을 싸고 도는 거대한 산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소주’ 는 ‘하늘 아래 천당’ 으로 아름다운 곳인데 북경을 수도로 정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이곳에 도읍지를 정하면 황제가 오래오래 그 지위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해서, 둘째 흉노족 유목민과 만리장성 부근에서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셋째 옥돌 생산지가 북경에 있어서다.
이런저런 북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지금 명13릉으로 가고 있다. 분지 도시인 한국의 대구가 떠오르기도 하고,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만리장성이 떠오른다. 바깥은 무척 더운데 에어컨을 튼 버스 안은 시원하다. 지리상으로 한국보다 위도가 높아 시원하리라는 예상은 맞지 않는 여름의 고온이다.
* 구사일생과 엎지러진 물
구사일생은 10명이 만리장성을 쌓으러 가면 9명은 죽고 1명은 산다는 데서 유래된 고사성어다. 그것 말고도 ‘하룻밤 만리장성’ 이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남편이 만리장성에 나가야 하는데 거지가 와서 하루만 자자고 하여 부인이 허락했고, 그 하루를 그 부인과 자고는 만리장성에 갔다는 이야기다. 부언하면 그 부인이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하룻밤을 거지에게 주고 남편 대신 거지를 만리장성에 보낸 것이다. 그만큼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힘겨운 작업이었음을 시사하는 문구다.
엎지러진 물은 주나라의 밑기둥인 강태공에 얽힌 일화다. 강태공은 책을 좋아하는 선비로서 주나라 왕이 인재 물색 중 낚시터에서 뽑힌 사람이다. 강태공이 부인을 돌보지 않자 10년만에 부인이 도망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이 위수로 낚시하러 갔는데 주나라 왕이 ‘오늘 길을 떠나면 좋은 일이 있을거라’ 는 도사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가, 위수에서 낚시하는 강태공을 만난 것이다. 노인이 된 강태공을 부왕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강태공은 시골로 와서 부인을 불렀다. 출세한 남편을 보자 놀란 부인은 함께 살 것을 요청했다. 그 때 강태공은 한 컵의 물을 가져오라고 한 후 반 컵은 마시고 반 컵은 모래밭에 버리며, 저 물을 담으면 다시 살겠노라고 말했다. 부인이 담지 못하자 ‘우리 사이는 엎지러진 물’ 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헤어졌다. 이미 깨어진 불가능한 일을 대변하는 문구다.
이외에도 중국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와 문구들이 많다.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이런 저런 대목들이 이 나라에서 나왔다 하니 드넓은 나라의 역사 한 마디를 밟는 기분이다.
* 옥 공장 견학
명 13릉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공장이다. 명 13릉 가는 길에 옥 공장이 있어서다. 북경 시내 가로수가 상당히 울창하다. 들녘도 우거진 숲의 초지가 많다. 농토에는 옥수수, 팥 등의 잡곡이 보인다. 열대 우림지대 같은 느낌이 드는 풍경도 보이고, 올림픽 준비로 경기장을 손질하는 인부도 보인다.
옥공장에 들어서자 옥으로 만든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외객을 맞는다. 만지면 건강에 좋다하여 다가가 만졌다. 그 외 하나로 된 물고기 상, 옥으로 조각한 말, 지구본, 도장, 팔찌, 탑, 베개, 방석, 목걸이, 반지 등 비취와 옥 생산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비취는 때려서 소리의 청명으로 좋은 것을 구별하는데, 맑고 투명한 소리는 강도 9, 퉁명스러운 것은 강도 7이다. 옥은 목에 댈 때 차가운 것이 진짜다. 차츰 기가 들어가며 미지근해진다. 초록색이 가장 좋은 옥으로 한화 1만원부터 있다. 핸드폰 것이 줄 1개당 한화 3천원, 이곳 액수로는 3만원 꼴인데 비싸다. 중국도 이제 싸지만은 않은 듯, 자본주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정부가 품질을 보증하는 보석이라는데 믿기 어렵다. 중국인의 속성으로 보아 돈 벌기 위한 몸부림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단한 규모의 옥 공장이다. 상호가 ‘북경 옥기린, 북경 옥조청’ 으로 한문으로 크게 씌여있다. 여기서 기린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옥공장에서 나오니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고 상당히 덥다. 비가 조금 뿌리기도 하고, 상쾌하면서도 무덥다. 버스 안은 천국이다.
* 명 13릉
옥공장에서 30분 정도 소요되는 곳에 있다. 주원장이 묻힌 곳이다. 가난해서 머슴살이하다가 절로 도망갔고, 스님이 큰 일을 해보라고 하여 농민봉기를 일으켜 39세때 황제에 올라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 총 42명의 자식을 둔 사람이다. 곳곳에 자식을 왕으로 두면 반란이 나지 않기에 그리 많이 두었다.
남경에 묻혔다가 네 번째 아들 성조 영락제(주체)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12살 때 이곳 천수산으로 무덤을 옮겼다. 이곳은 명 13대 황제만 묻힌 곳으로 정릉이다. 금 800냥 들여서 6년간 지은, 10만명이 평생 먹을 돈을 들인 것이라는, 신종 만력 황제(주익균)의 무덤을 보았다.
신종 황제는 궁녀 아들은 인정하지 않음으로 본부인과의 알력으로 59세에 사망했다. 그는 24년 동안은 정치상에서 치적을 남겼으나, 25년 동안은 치적이 없어 무비를 세웠다. 본인은 치적이 많아서 무비라 하는데 사실은 아니다.
중국 황제는 만 20세부터 자기 무덤을 만드는 일이 가능했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사후 자신이 들어갈 궁궐을 짓는 일에 혈세를 들일 때 사회 혼란과 백성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신종 황제의 무덤은 손자가 이곳으로 옮겼는데, 지하 무덤 벽면에 철물을 녹여 부어서 오랜 보존이 가능하다.
지하 무덤은 스산했다. 붉은 관은 신종 황제와 부인의 보물함으로 아주 컸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그날의 유품이 덩그러니 관을 지킨다.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장명등 옥좌도 있고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 밖에서 멀리 장릉도 보았다. 아직 발굴 중으로 개방되지 않은 능이다. 무덤 외벽에는 수공벽돌을 만들 때 자신의 이름을 새겨둔 흔적이 있다. 정릉입구 16장의 돌조각에 새겨진 글자로 발견된 무덤이다.
야외 정원에는 북경나무로 불리는 용발톱 나무가 곳곳에 아름다운 형상으로 서 있다. 측백나무도 많고, 한국의 잔디도 심겨져 있다. 얕으막한 산 언덕이 아름답다.
명 13릉 주변은 땅이 좋아서 모두 과수원이다. 배, 복숭아, 포도, 감, 사과 등 생산지다. 이렇게 좋은 곳에 정릉을 지은 것이다. 가이드가 사 준 복숭아를 2개씩 먹었다.
문 입구에는 야광 나무가 양변으로 줄지어 서 있다. 나무의 기생충을 죽이려고, 운전 기사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애처롭다. 나무에 지장이 없는 생석회를 바른 것이라지만, 저 나무들의 다리목이 얼마나 답답할까. 지난 번의 중국 여행시 본 그대로, 야광 가로수들은 밑동이 하얗다. 이곳 명 13릉에서만 보는 것은 아닌데 죽은 자의 집으로 가는 길목의 야광 나무는 굵은 몸통이어서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띈다.
* 칠보 공예
점심 식사를 한 후 바로 같은 건물에 있는 칠보공예 상점을 둘러 보았다. 500년 전통으로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주로 발전시킨 공예다. 정교한 문양과 색깔이 아름답다. 장식품의 터다란 꽃병에서 작은 소품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한 가득이다.
밖에는 오성기가 펄럭이고 쾌청한 날씨다. 이곳에 들어오는 버스를 보니 ‘北京巴士’(북경파사)로 씌여 있다. ‘BUS'를 중국어로 음만 빌어 쓴 단어다. ’켄터키‘를 ’긍덕기‘(肯德基)로 썼다.
물건을 사는 것보다 중국의 문화를 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 만리장성
북방 흉노족 침입 방지용으로 쌓은 성을 내장성과 외장성이 있다. 진나라 때 6,350m로 12,500여리이던 것이 이어서 보수하여 총길이가 5만 4천 km로 10만 8천리다. 3년을 도보로 걸어야 다 본다.
네 군데 입성문이 있는데 팔달령문이 제일 좋다. 명나라 때 8차례 보수했는데 낙타에 돌을 실어 날랐다. 13세에 황제가 되어 54세에 사망한 진시황은 나라를 통일하고, 화폐를 통일한 위인이다. 사후 자기 무덤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두었다.
나는 두 번째 왔다. 예전처럼 케이블카로 올랐다. 더위와 햇살이 덩달아 장엄하다. 아랑곳없이 모여든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데만도 수십분을 기다렸다. 가파른 길로 정상까지 올랐다. 멀리 뽀얗게 보이는 장성이 대단한 위용이다. 외적으로 보이는 형상도 위대하지만 내적으로 잠재된 중국의 위대한 저력의 한 도막이다.
* 용경협
강택민이 명령하여 10년간 물을 가두어 만든 인공 협곡이다. 평균 수심이 60m, 깊은 곳은 80m다. 작은 계림으로 불리운다. 이곳에서 왕복 50분 정도 소요되는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자연 비경을 보는데 입구의 행정 구역은 창평현이고, 용경협은 연경현이어서, 두 지역간을 연결시키는 빵차가 우리를 이동시켰다.
왜 이름이 ‘빵차’일까, 의아했는데 ‘빵처럼 동근 차’ 라서 그렇게 부른단다. 빵차 1대에 8인씩 타고 10분 정도 질주하여 협곡 가까이 들어간다. 만리장성이 속한 창평현에서 용경협이 있는 연경현에 진입한 것이다. 들어갈 때 빵차 번호가 10번이면 나올 때도 반드시 10번 차를 타고 나와야 차비를 2중으로 내지 않는다. 좁은 산길을 무섭게 달려들어간다.
빵차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용형상의 에스컬레이터가 산 절벽을 타고 걸터오른다. 용의 입으로 들어가 꼬리까지 수없이 많은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타고 올라가 용의 꼬리문으로 나가니 용경협의 비경 앞에 다다른다. 협곡의 본 형태는 자연이어도 가두어놓은 짙푸른 물은 인공인데 대단한 절경이다.
유람선을 타고 본 용경협은 물빛과 산풍경이 탄성을 자아낸다. 위로는 케이블카가 왔다갔다 하고, 솟아오른 산봉우리에 번지점프대도 있고, 하늘 줄 위에서는 자전거 곡예를 하는 자도 있다.
천연 자연 자원을 이용해 10년 동안 가두어 둔 물로 후손이 먹고 살고 있으니 이 기막힌 행복, 내내 부러운 것은 내 조국 어느 산곡 하나, 저런 아름다움 서리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산의 협곡도 대단하고 햇살과 만나 각도에 따라 변하는 녹색, 청색의 물빛이 장관이다.
다시 끝점에서 돌아 물길을 따라 왔던 길로 나온다. 하선하여 동굴을 타고 내려와서 아까 탔던 빵차를 찾아 타고 나왔다. 한국의 봉고차격인 다마스 헌차는 언덕길을 시동을 켜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내려간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서 평지에 와서야 시동을 건다. 용경협 지역민들에게 먹고 살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운영되는 차다. 기발한 지혜다.
장가계와 보봉 호수의 비경과는 다른 차원의 용경협은 중국의 큰 관광 자원이다. 폭은 좁지만 긴 협곡이 인상적이다. 곳곳에 ‘강택민’을 새긴 것도 인상적이다.
* 팔달령 고속도로
만리장성에서 용경협에서 40분 거리고, 용경협에서 저녁 식사 장소인 북경까지 50분 거리다. 이 주변의 도로가 모두 팔달령 고속도로다. 사방이 산으로, 산악지대, 산악터널이 수없이 많다. 아주 긴 터널도 지나왔다.
계속 위로 가면 몽고다. 같은 나라에서 이렇게 지형이 다를까. 한국의 강원도와 유사하다. 태백산맥 준령 같다. 곳곳의 화장실이 상당히 좋아졌다. 물 장치, 화장지 등이 잘 비치되어 있다.
휴게소에서 옥수수 6자루를 들고 ‘천원’을 외치다가 막상 사려 하면 2자루만 준다. 여전히 낮은 국민성을 드러내는 행각이다. 옥수수와, 명 13릉에서 먹은 복숭아, 모두 한국 것과 동일하며 맛있다. 산악지대여서일까. 주위에 옥수수 밭이 많다.
거대하게 앉은 만리장성 산자락을 깎아 만든 팔달령 고속도로는 현대 감각이 서린 또 하나의 명물이다. 잘 가꾼 고속도로다.
* 샤브샤브 석식
오늘 저녁은 특식이다. 징기스칸이 바쁜 전쟁 중에 먹던 음식에서 유래된 샤브샤브는 육류뿐만 아니라 생선, 야채까지 데쳐서 먹는다. 쇠고기와 양고기를 무제한으로 준다. 분위기도 좋고 식당도 크고 1인에 한 냄비씩 불 위에 육수를 끓인 물에 고기를 넣어 건져 먹는데, 이 밤 두고 두고 생각 나리라.
중국의 차는 유명하다. 차 인심이 좋아 계속 따라준다. 독초 먹고 기절했는데 무슨 잎새가 입 안에 들어가 생명을 건진 것이 바로 차 잎이다. 영국이 최초로 수입해 갔는데 배 안에서 1달씩 걸리므로 발효되니까 위스키에 섞어 마신 것이 홍차다. 처음에는 귀족차였는데 지금은 일반차다. 중국인에게 아편을 공짜로 주고 차를 계속 수입해 갔다. 그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편 전쟁이다.
한국과 중국은 이웃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차 문화가 많이 발전되어 있다. 육식에는 꼭 필요한 차, 나도 녹차를 즐겨 마신다.
떠나기 아쉬운 샤브샤브 석식 만찬, 모두가 맛있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 발 맛사지
저녁 식사 후 지쳐 피곤한 몸을 위해 아시아 선수촌으로 이동하여 발 맛사지를 받았다. 여기서도 차를 제공한다. 그리고 차에서 우러난 향기로운 물로 발을 씻어 준다.
중국의 발 맛사지는 여행 중 필수적인 상품이다. 요금도 처음보다 많이 비싸졌다. 몇 년 전에는 6천원 한화이던 것이 지금은 2만원까지 받는단다.
이곳에서는 각질 제거 전문 요원도 있다. 발바닥에 각질이 있는 사람은 추가로 한화 16,000원을 내고 제거한다. 비싼 값이다. 우리 방에서도 몇 명이 받았다.
여자는 남자 손님을, 남자는 여자 손님을 책임지고 정성껏 해 준다. 6개월에 몇 년 동안 교육을 받은 젊은 아이들이다. 바로 이제 여러 번 받고 보니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애처로웠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들의 고유한 직업이다. 전문인의 손으로 받는 발 맛사지는 아주 시원하고, 돈 가치 이상의 건강보조요법이다.
2006년 8월 3일 목요일 북경, 연길
자전거 출근 풍경, 동인당 한의원, 이화원, 서태후에 대한 일화, 양지 머리 화로 구이집, 실크 공장 견학, 천안문, 자금성, 모택동 요리집 석식, 북경 공항 출발, 연길 도착(연길과 연변의 차이, 연변 조선족 자치구역, 한글상호, 여권님, 백두산 여행에 대한 설명), 대우 호텔
* 자전거 출근 풍경
이화원 가는 길에 본 자전거 출근 풍경은 대단했다. 내가 최초로 자전거 행렬을 본 것은 1990년 대만에서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차량 속에 섞여 다니는 자전거는 참으로 신기하여 여행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지켜보곤 했다.
나는 지금 중국 베이징의 자전거 행렬을 버스 안에서 지켜보고 있다. 한두번 본 것도 아닌데 두 눈을 휘둥그렇게 한다. 자전거, 자전거 트럭, 자전거 마차가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출근 러시아워를 이루고 있다. 대만과 다른 것은 차량 도로와 자전거 도로가 구분된 것인데 여전히 그 때의 놀라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신혼 부부가 나란히 탄 풍경, 장사를 위해 물건을 싣고 가는 풍경, 큰 짐을 이동하는 풍경 등등 모두가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다. 개인적인 시각에서 조금만 돌려보면 중국의 거대한 용틀임이다. 무섭게 떠오르는 절약 정신, 검소한 자세, 근면한 국민성이다. 시멘트로 수로공사를 잘해놓은 물길이 아침 햇살에 함께 빛나고 있다.
* 동인당 한의원
동충하초, 동충은 음, 하초는 양이라며 누에 말린 것을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의 한약재를 소개했다. 한국인은 산에서 약초 채취가 힘드니까 안 캐지만, 그래서 비싸지만, 중국은 산에서 자연산 약초를 채취한다고 강조한다.
채취 후 물에 담갔다가 첫탕은 버리고 두 번째 탕부터 달여서 먹거나, 생약으로 조제하여 먹는다는 것이다. 그 외 양파를 껍질 채 씻어 손으로 뜯어 달여 먹으면 혈압에 좋고, 은행을 삶아서 참기름에 재워 몇 알씩 먹으면 폐가 깨끗해진다는 등의 설명을 들었다. 당뇨로 고생하는 한국의 배우 홍성민도 이곳에 다녀 갔다며 물 1500cc에 동충하초 70g을 넣어 500cc로 달여 먹으면 당뇨에 특효약이란다. 건강은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이라며 여행자 개개인의 진맥을 짚어 체크도 해 주었다.
남편은 상체에 열이 많아 간이 나쁠 수 있고, 나는 맥박이 빠르며 기와 혈이 부족하고, 큰 아들은 남편, 작은 아들은 나와 비슷하게 말해준다. 가족 모두 아직 큰 이상이 없으나 항상 자신의 몸에 맡는 음식, 운동, 정신을 다스릴 것을 깨우쳐 준 시간이다.
한약재를 아무도 사지 않았지만 중국의 한의학에 대한 견해는 우수함이 인정된다. 한글로 환영문구 프랭카드를 걸어둔 것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충동구매하지 않는 한국인의 여행 매너는 더욱 훌륭하다.
* 이화원
청나라 건륭 황제가 어머니 생일 선물로 지어준 여름 별장, 피서별장이다. 처음에는 자연 호수였으나 차츰 확장시켜 전체 면적의 3/4이 인공호수다. 서태후가 금 200만냥을 들여 해군을 동원하여 이룬 작업이다. ‘이화원’ 이란 이름도 서태후가 다시 고친 것이다. 그의 친여동생 남편 이름인 ‘청의원’ 이던 것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다시 지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하고, 맨 처음 전기가 들어온 아름다운 뜨락이다. 입구에서부터 관람인파로 장사진이다. 나는 두 번째 찾은 곳인데도 새로운 느낌이다. 서태후 집무실 인수전 앞에 놓인 거대한 장수석, 사방이 막힌 곳에 광서제가 갇혔던 방, 광서제가 부인을 만나러 나가던 문을 막은 벽, 청나라 도서관, 서태후가 사용하던 시계, 모양 낸 유리창 등등 그날의 역사가 오롯하다.
가장 눈부신 것은 곤명호, 여전히 넓고 고요한데 그녀는 간곳 없고, 주인 잃은 물이 연꽃을 피웠으니 서태후의 환생일까, 광서제의 눈물일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웃음과 눈물이 교차한다. 호수 저 멀리 서태후가 찾기 쉽도록 세운 금문이 높이 솟아 있다. 연회장도 웅장하게 숲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다.
버드나무 휘어진 그늘 아래 호숫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이화원의 정취에 젖는다. 곤명호 중앙에 섬을 만들어 연결한 19공교 다리가 길게 놓여 있고 한가로이 떠다니는 유람선에 세인의 흥겨운 표정이 실려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흔적은 여전히 남아 숯한 전설을 낳는 이화원, 그토록 오래 살고 싶어 온갖 행태를 부렸던 서태후, 그녀의 숨결이 곳곳에 서린 정원이다.
* 서태후에 대한 일화
본명은 혜옥란, 시에 능하고 정치적 야망이 큰 여인이다. 13세 때 부친이 사망하고 15세 때 궁녀로 들어와 19세에 후궁이 되었다. 아들의 수렴 청정을 시작으로 48년간 정권을 쥐고 흔들다가 74세에 사망한 여인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고 평범했던 본부인 동태후가 먹은 만두에 독을 넣어 독살시킨 그녀는 대단한 지략가로, 야심가로 숯한 일화를 남기고 떠났다.
한끼 식사에 220여가지 음식을 세 테이블에 놓고 1. 구경, 2. 맛, 3. 식사로 즐겼다. 여덟 개의 큰 뜨락에서 그녀의 한 끼 식사를 위해 128명의 요리사가 동원되었다. 스님이 담장을 뛰어 넘는다는 숙주나물 고기 요리는 10명의 요리사가 맡았다. 과일은 몇십 kg을 쪼개서 냄새만 맡고 버리고, 우유를 수없이 먹어 50대까지 얼굴에 주름이 없었다.
이화원에서 아기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는데 그 연유가, 서태후가 아기 엄마의 젖을 다 먹어서라고 하니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삶이다. 소젖과 사람 젖을 병행하여 먹고 산 여자, 그것도 건강하고 잘 생긴 산모의 젖을 빼앗아 먹은 비정한 여자, 그 모습을 상상하니 소름이 돋는다.
위안 스카이(원세개)가 총통일 때 서태후에게 선사한 독일제 자가용을 타고 다닌 행복한 여자다. 운전사에게 무릎 꿇고 운전시킬만큼 권위를 앞세운 그녀는 잔인한 여자다. 예뻐지라고 낙수당에 최초로 전기를 높아운 백성의 성의에 놀랍다. 오만한 그녀는 기차를 이용하여 자금성 주위 호수 북해, 중해, 남해를 타고 돌며 소리가 자금성을 흔든다는 이유로 기차 앞머리를 빼고 수많은 신하에게 몽둥이로 끌게 했다.
비범한 여인, 비정한 여인, 아직도 잠들지 않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 양지머리 화로 구이집
점심 식사한 한식 식당이다. 대로변 버스 안에서 한국어로 걸어둔 상호가 눈에 들어올 때 참으로 반가웠다. 실내에는 이영애 탈렌트 모델 사진이 걸려 있다. 중국 6개 음식점에 걸어둔 사진이란다. 전에는 중국인들이 김희선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이영애를 좋아하여 이영애처럼 성형 수술을 요구하기도 한단다. 아무튼 중국에서 내 조국 한국을 만났으니 기쁨이 크다.
2층에서 먹은 점심은 풍성했다. 식단도, 인심도 모두 좋다. 한국의 불고기 요리가 한국의 향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깨끗한 인테리어가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다. 한복을 입은 아가씨의 배웅이 고운 추억으로 새겨진다. 세계 곳곳에서 솟는 한국의 저력이다.
* 실크 공장 견학
전에 왔던 곳이다. 다른 것은 올림픽 경기장을 보수하는 것뿐 입구의 풍경이 그대로다. 커다란 팬더곰이 북경의 상징 동물로 손님을 맞이하고, 용 울타리가 발걸음을 이끈다.
번데기 공장, 견사 공장, 견사 옷 쇼, 견사옷 가게 등을 돌아보았다. 뽕나무 재배가 많은 중국의 견사 직물은 이 나라의 특산품이다. 상품을 사는 것보다 휴식이 더 달콤한 공간이다. 발로 보는 베이징 관광 중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의 실크 물결은 잠시나마 피로를 덜어준다. 전에 비하여 많이 싸진 가격이지만 실크 제품은 관리의 불편함으로 사기 힘든 상품이다. 비단 장수 왕서방을 떠올리며 중국의 생산 라인 한 도막을 보고 있다.
* 천안문
맨 처음 부르던 이름은 승천문이다. 여러차례 전쟁으로 훼손되어 보수하며 ‘천하가 안전’ 하다는 천안문으로 개명되었다.
남북 880m 길이로 100만명 수용이 가능한 광장이다. 명 14, 청 10, 총 24명의 황제가 거주한 600년 역사를 지닌 이곳은 15년 동안 지어 완공되었다. 세계 최대의 광장으로 6.4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다.
여전히 신호등이 없는 것이 내게는 독특한 대목이다. 자금성의 관문이며 집회의 대장소인 천안문 주변 대로에 신호등이 없다. 전에 처음 볼 때도 놀라고, 지금도 나는 놀라고 있다. 차와 사람 인파가 뒤섞이어 위태로운데도 순조롭게 교행되는 교통체계를 보면 중국의 정치, 중국의 잠재력을 떠올리게 한다. 무서운 힘이다.
모택동 기념비가 완공되어 우뚝 서 있다. 다행히 햇볕이 나지 않아 더워도 견딜 수 있어 좋다. TV에서 나오는 중국 타이틀 명소다. 모택동은 갔어도 위인의 사진은 여전히 그곳에서 외인을 반긴다. 그 앞을 질주하는 차량들이 현실을 인식시킬 뿐이다.
우리 일행은 지하철 입구의 지하도를 따라 대로를 건너 천안문에 들어섰다. 자금성에 입성하기 위해서다. 좌우에 걸린 모택동 구호가 커다란 한문 글씨로 중국의 단합을 외치고 있다.
* 자금성
날씨가 더운 탓인지 생각보다 사람이 적다. 태화전이 올림픽을 대비하여 보수 공사 중이어서 가까이 가지 못했다. 붉은 기와 지붕 물결이 양쪽으로 장관이다.
800여채 건물에 쪽방까지 9,999개의 방으로 지어진 자금성은 명, 청대 황제들이 살던 곳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황궁이다. 하늘 ‘자’, 출입금지 ‘자’를 쓴 것은 하늘에 이르는 성,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성으로 해석되며, 방 숫자를 1만개로 채우지 않은 것도 하늘보다 작도록 한 것이란다.
왕이 거주하는 곳만 청기와고, 나머지는 모두 적기와다. 씨족사회 때는 황하강에 거주하여 황제만 황색기와였다. 2만명이 거주하던 성에 화장실이 없다. 지난 번 여행시에는 황제를 해치려는 도적이 숨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냄새 때문이라고 한다. 황제는 도자기에 비단을 깔고 누고, 하녀는 화로에 나무를 깔고 누면 내다 버렸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둘러서서 열기로 온도를 높였고, 손화로, 발화로를 사용하던 곳이다. 9개의 문을 거쳐야 나가는 거대한 성은 15년 동안 지어졌고, 관람객들은 양쪽으로 뻗쳐지은 궁궐은 눈으로만 보고 주요 문으로 연결된 중앙의 직선 도로를 따라 걸으며 본다. 그 길만도 길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더위 속에서 생수가 인기다. 작은 것 한 병에 중화 4원, 한화로는 130*4=520원이다. 생수 2병을 사서 우리 가족은 나누어 마셨다. 한참을 걸어서 신무문으로 나왔다. 벽돌 1장에 쌀 10가마값, 가로 세로 15장씩 쌓아 외적이 못 들어오게 했던 자금성을 우리는 관통하여 지나온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 명소를 보며 한편으로는 부럽다. 선대가 지어 놓은 유산으로 후대가 먹고 살지 않는가. 보기 드물게 서양인 관광객이 줄지어 지나간다. 세계 그 어느 관광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다. 우리나라도 기존 문화 유산을 잘 관리하고 세계에 홍보하여 동.서양의 외객을 불러들여야겠다는 욕심이 난다. 버스를 타고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자금성, 그 사위를 휘도는 물길, 담장 벽 눈부신 풍경이다.
* 모택동 요리집 석식
모택동이 즐겨먹던 요리로 식단을 꾸미는 식당이다. 자금성에서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어떤 집이며, 어떤 집일까 궁금함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루함을 덜어준다.
외향은 다른 식당과 별 차이가 없는데 실내 분위기가 참 좋다. 천정에 매단 조명등의 찬란한 색상과 모양이 아름답고 잘 배치된 테이블이 세련된 느낌이다.
요리로는 민물고기와 버섯, 고기, 석이버섯, 쌀밥, 배추 볶음 등이다. 생각보다는 수수한 식단이다. 모택동을 떠올리며 맛있게 먹었다. 시간이 좀 있어 출입문 곁에 마련한 휴게실, 그윽한 분위기의 쇼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화장실에는 비누와 화장지가 있고 친절한 여자의 서비스까지 좋다.
나올 때는 문간에서 배웅하는 젊은 남자들이 합창하듯 ‘안녕히 가세요’를 외친다. 정겨운 풍경이다. 그만큼 중국 속에 한국이 큰 무게로 파고 든 입증이다.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들며 떠나왔다.
* 북경 공항 출발
이제 북경을 떠나 연길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북경 공항은 여전히 복잡하다. 자국인과 외국인이 장사진이다. 원래 업무 처리가 늦은 근무원의 탓도 있지만 인구가 많은 나라, 세계인이 거쳐가는 공항이어서 그렇다.
서서 기다리다가 여자들은 군데군데 앉아서 기다린다. 지난 번 장가계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풍경과 유사하다. 영어를 못하는 나라, 능통한 영어교사도 의사소통을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마디로 대책이 없는 나라다. 영어 표기도 같은 단어를 다르게 적어 놓았다. 두 아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한국의 문화는 이러한 것들과 비교하면 차원이 놓다.
비행기도 연착하여 밤늦게 출발했다. 연길에 대한 설레임, 백두산에 대한 신비를 안고 어둠 속에서 북경을 떠난다.
* 연길 도착(연길과 연변의 차이, 연변 조선족 자치구역, 한글상호, 여권님, 백두산 여행에 대한 설명)
밤 11시에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시골 고향 향기가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곳이다. 가이드가 마중나와 반가이 맞이한다. 버스를 타고 대우 호텔로 20분간 이동하며 연길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대우 호텔은 4성급 호텔로 제일 좋은 숙소이며 대우 건설이 지은 호텔인데 대우가 망해서 지금은 정부에서 운영한다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족 가이드는 줄줄이 읊는다. 중년 남자, 북한 말씨다. 내일은 새벽 6시에 모닝콜을 울릴 것이며, 연길에서 백두산까지 5시간 소요됨으로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호텔서 나올 때는 1회용 슬리퍼를 갖고 나오라, 지루한 시간, 버스 안에서 신고 가라는 것이다. 비가 와도 우산은 못 쓰고 비옷만 가능하다. 모자도 끈 달린 것만 가능하다. 바람 때문이다. 5월 1일부터 짚차로 이동하던 구간이 짧아져 버스를 바꿔타야기에 이동용 가방에 소품을 챙겨가라, 여권을 주의하라, 암시장에서 500만원에 거래되며 분실시 심양에 가서 재판받기까지 30일간 체류된다며 이곳에서는 ‘여권님’ 으로 높여 부른단다.
연길과 연변의 차이는 연길은 도시명이고 연변은 조선족 자치족이 사는 지역의 총칭이다.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이듯이 연변의 수도가 연길이다. 소수민족 보호 차원으로 반드시 상호에 한글 기재를 강요한 탓에 창 밖의 건물 상가에는 영어는 없고 한문과 한글을 겸하여 상호를 내걸고 있다. 참으로 반갑고, 내 조국 어느 한 지역에 온 느낌이다.
백두산 천지는 추워서 잠바, 운동화, 긴 바지를 꼭 챙기라고 한다. 오늘 연길 날씨가 30도인데 천지는 5도다. 순수한 영역 천지를 처녀에 비유한다. 짚차로 천지 정상 가까이 가며 도보로 5분이면 천지가 보이는 해발 2749m 장군봉, 백두봉에 이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은 해발 2,600m의 천운봉이다. 오늘로 보아서는 내일 백두산 천지에 갈 것 같다며 함께 하늘님께 기도하자고 한다.
연길의 생활은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해마다 한국에서 70억 달러가 들어온다. 한국에 나가서 벌어오는 돈만 그렇다. 이런 돈으로 차린 가게들이 즐비하다. 주로 술집, 노래방, 맛사지방 등 유홍업소다. 돈을 벌기 위해 몸부림치는 조선족들의 생활상이다.
이곳이 옛 고구려 땅, 내 조국이라는 상념이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한다. 한반도의 맨 꼭대기 내 나라 땅인데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유감이다. 북한과 하나로 이어 서울에서 이곳까지 육로로 달려올 그날을 떠올리며 밤을 재운다.
* 대우 호텔
친근한 이름이어서 좋다. 예감은 했지만 한국의 유명했던 기업, 대우에서 지은 호텔이다. 한 때는 번창했을텐데 현재는 대우 기업에서 떠나 중국의 손에서 운영되고 있다.
조금 씁쓸하지만 그래도 살아 숨쉬는 한국의 맥을 만남에 기쁘다. 호텔 종업원이 나와서 가방을 객실까지 옮겨준다. 사실 아시아 지역 여행 중에는 보기 드문 일이다. 미주나 유럽 쪽에서 발달한 팁 문화는 어색하지 않은데 같은 동양권에서는 서로 원하지 않아 각자의 짐을 챙겨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다.
우리의 동포 조선족이 호텔 종업원이다. 젊은 청소년들이 밤 늦은 시간에 조상의 나라에서 온 길손의 가방을 받아 객실로 옮겨준다. 작은 성의지만 천원권 지폐 한 장씩 주기로 했다. 이국 속의 조국, 조국 속의 이국, 묘한 감정이다. 아무튼 낯설지 않아 좋은 숙소다.
2006년 8월 4일 금요일 연변, 백두산, 장백폭포
대우호텔 출발, 연길 시가지 풍경, 중국 교포 이미지, 남한에 대한 인식, 조선족의 농사, 한국 교포집과 중국인 집, 북한의 생활상, 청막골 휴게소,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 짚차, 백두산의 분포별 수종, 짚차가 오르는 가파른 길, 백두산 데드라인, 백두산 천문봉, 백두산 천지, 하산 길, 장백폭포, 백두산 온천수, 호림원 호텔 석식
* 대우호텔 출발
백두산을 가기 위해 연길에 왔기에 오늘 이 호텔을 아주 떠난다. 서둘러 짐을 챙겨 로비에 두고 곳곳을 둘러보았다. 꽤 높고, 깨끗하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다부진 건물이다.
호텔 조식은 음식이 너무 싱거워 입에 잘 맞지 않았다. 주로 콩요리가 많다. 호텔 치고는 식단이 세련되지 못했다. 그러나 옛날 우리 조상들이 먹던 음식풍이어서 정감이 간다. 이곳에서는 순수 동양, 순수 한국의 요리가 대부분이다.
2층 식당 주변에는 상가다. 길게 늘어선 상가에 북한 냄새가 배인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호텔 안에 있는 규모로는 상당히 큰 상가다. 아래로 보이는 1층 로비가 아름답다. 계단으로 내려와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 연길 시가지 풍경
지난 밤 어둠에서 보았을 때 한글 상호가 인상적이어서 밝은 낮에 자세히 보고 싶었다. TV에서 보았던 연길은 초라한 생활상이었는데 정말 그럴까도 궁금하다. 내 동족이기에 사랑스런 관심이다.
1950년부터 연변 조선족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70%가 조선족이고 한족이 30%였는데 지금은 연변 조선족이 4%밖에 안 된다. 연길에 사는 사람은 1300명이다.
연길 시가지는 한국의 읍소재지 정도의 발전상이고 크기는 더 넓어 보인다. 건물도 많고, 새로이 짓는 공사장도 보인다. 자가용은 적고 오토바이가 많다. 자가용에 ‘吉H7516’, 이런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유소도 ‘中國石油’ 라고 되어 있다. 석화라는 말 대신 한국식으로 석유라고 쓴 표기가 돋보인다. 곳곳 상점의 간판 글씨는 반드시 한글과 한자가 병행으로 씌여있다. 한글 사용이 의무라는 점에서 동포애를 느낀다. 우리나라도 외국인의 마을을 더 조성해주고 그들의 언어로 거리와 상가를 꾸며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재래시장과 연변 병원, 도심을 흐르는 시냇물, 노래방, 관공서 등을 보며 시가지를 벗어났다.
* 중국 교포 이미지
월급이 월 15만원~20만원이다. 겉으로 보이는 행색도 우리와는 다르다. 북한과 접경지역이고, 중국인과 함께 산 탓일까, 외모가 중국인과 북한인의 합성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사회주의 빨갱이 교육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한다.
중국 비행기가 고장으로 춘천에 착륙한 적이 있었는데 난리가 났었단다. 남한을 ‘남조선’ 으로 부르며 왕래가 없던 때라 못 돌아오고 모두 감옥살이 할 거라고 예상했단다. 말투도, 사고도, 바라보는 시선도 영락없는 북한 사람이다. 30대 중년 남자, 우리 일행의 가이드로 온 남자, 한국교포 3세인 남자는 어린 시절에는 두만강을 건너 북한 친구와 놀다 해질녘 돌아오곤 했단다.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북한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이며 돕고 살고 있다.
* 남한에 대한 인식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대로 북한은 굶주림 속에 사는 거지, 무서운 늑대로 인식하며 살았듯이 이곳 사람들은 남한을 거지, 자본주의 나쁜 놈으로 알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남조선은 나쁜 곳, 나쁜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가 모두 그런 내용이었고, 특히 〈금희와 은희의 운명〉에서 금희는 남조선 아이인데 부모가 죽고 굶주림에 살다가 술집에 팔려가 몸을 팔게 되자 자살하는 것으로, 은희는 북조선 아이인데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으로 부각시켜 남한의 비극을 다루었단다. 미국 앞잡이와 함께 남조선이 먼저 쳐들어와 중국이 지원했다고 교육받았고 미국 침략자들이 남조선 동포를 못살게 둔다고 배워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남한에 간 동포에게 칼라 TV를 주고 돌려보내는 것을 보고 남한에 대하여 재인식했단다. 더 큰 이유는 88 올림픽 이후다. 그의 조부가 인천이 고향인데 올림픽을 보고 ‘내 조국이 저렇게 발전했구나’ 하며 가 보고 싶어했고, 그래서 타국, 홍콩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그 당시 중국에서 남조선 핏줄은 나쁘게 인식해서 족보를 다 태웠고, 더러는 깊숙이 감추고 살았다. 그러다가 홍콩을 통해 한국에 다녀온 자가 빌딩을 사는 것 보고 놀랐다.
한국에 가서 장사를 하거나 취업하면 1일 임금이 이곳 한달 월급이다. 서로 나가려 하니 한국에 한번 가려면 1천만원의 중개료가 들고, 사기당하기도 하여 자살한 자도 있다. 그 후 한국인들 다 죽인다고, 공짜로 일해 준다고 신청해서 한국에 입국했는데 아니었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 좋은 나라였다. 전쟁 나면 총 가지고 가서 한국인들 쏴 죽인다고 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돈 벌러간다. 언어 통하고 좋다.
그런 현상은 2002년 월드컵에서 더욱 확실이 다져졌다. 한국에서 월드컵을 치뤘고, 한국이 일본을 물리치고 세계 4강에 오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 작은 나라에서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조선족은 셋방도 안 주었는데 대한민국의 발전으로 중국 교포들은 큰 자부심으로 살게 되었다.
가이드의 조부는 함북에서 살았는데 이곳 사람들이 남한에지지 않으려고 강인한 국민성으로 살 듯이 역시 그렇게 살아왔단다. 모친이 지금 서울에서 식당 주방장이란다. 서울에 다녀왔는데 4가지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첫째 소주가 참 맛있어 5병을 먹고 하루를 잤고, 둘째 지하철이 신기했고, 셋째 화장실이 깨끗하여 좋았고, 넷째 데모 현장이 인상적이었단다. 만만디인 중국 생활, 초인종을 2번 울려야 나가는 이곳 삶과는 달랐다. 한국은 거지가 없지만 이곳은 거지가 많다. 거지에게 돈 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나라에 주지 않고 모두 자기 주머니에 들어간다는 말에 공산주의를 엿보게 한다. 월미도가 북한 땅인줄 알고 살았다는 내 동포, 그 동안 얼마나 두터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살아왔는지 느끼는 순간이다.
참으로 다행스런 것은 이제는 그런 장벽이 무너지고 중국과도 북한과 어울리며 살려는 노력으로 부드러워진 외교다. 남한의 요구만도 아니고 세계가 하나되는 시대적 추이라서 북한도 자연스레 개방되고 있다. 그 동안 잘못 인식되어 온 서로의 이미지가 새롭게 좋은 방향으로 재조명됨에 기쁘다.
* 조선족의 농사
버스는 점점 함북 지방 고산 지대로 가고 있다. 도심을 벗어나 백두산으로 가는 산중 국도를 달린다. 연길 시내 변두리에서는 넓은 벼농사 들녘이 보였다. 벼농사와 옥수수, 콩, 밭농사가 보이면 조선족이라는 설명에 큰 눈으로 자세히 살펴 보았다. 산간 마을은 주로 옥수수와 콩 농사를 짓는다. 밭에서 일하는 농군 중 호미가 긴 것은 중국인이고, 호미가 짧은 것은 교포다.
차츰 고도가 높아지자 소를 방목하는 모습이 보인다. 황소 1마리에 한국에서는 300만원인데 이곳에서는 50만원이다. 우거진 산자락 풀밭을 누비고 다니며 풀을 뜯는 행복한 소들이다. 유년시절 고향에서 보아온 풍경이다.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이곳의 삶은 고달프다.
부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 50년 후면 조선족이 100명도 안 될 거라고, 조선족이 망할거라고,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보상금을 자치주에서 지급한다. 한족과 조선족이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다. 한족 남자면 그 아이는 무조건 한족이다. 조선족 남자면 조선족이다.
더 깊은 고산지역에서는 산삼과 고사리 농사를 짓는다. 산삼 150개를 갖고 한국에 팔러 가다가 공항에서 경찰개로 발견되어 빼앗긴 동포도 있다. 왕복 2차선 도로 사정이 나쁘다. 요동이 심하다. 백두산은 효도 관광지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찰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그래서 이토록 험한 길을 5시간 달려서 가고 있다.
백두산 가는 길이지만 더 소중한 내 동포의 들녘과 산을 보고 있다. 평지에는 철로도 있다. 심양, 북경까지 이어지는 교통로다. 먼거리라서 물자 수송용으로 주로 쓰이고 있다. 대파 농사는 한국과 유사하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옥수수와 콩 농사다. 중국에 심은 내 조국의 씨앗이다.
* 한국교포 집과 중국인 집
농가 마을 주택의 지붕만으로도 어느 민족의 집인지 안다. 한국 교포의 집은 한국의 기와 지붕처럼 모양을 내어 세웠다. 중국인의 집은 슬라브 지붕처럼 납작하게 두 부분으로 기와를 얹었다.
쉽게 말하면 조선족의 집은 귀풍스럽고, 한족의 집은 단조롭다. 한국가의 전통이 지붕에서도 이어짐을 보며 대견스럽고 흐뭇했다. 들녘도, 집도 내 조국 모양새인데, 이곳은 중국령, 우리의 영토가 아니다. 기막힌 비극이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난 우리의 후손들이 이민 3세, 4세로 한반도의 꼬리표를 달고 힘겹게 살고 있다.
더러는 부자로 보이는 커다란 기와집도 있지만, TV에서 보았던 초라한 집도, 짚으로 지붕을 올린 초가집도 있다. 민속촌에서나 보는 움막집이 이곳에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동포가 살고 있다. 이제는 조선인의 족보를 드러내고 산다고 함에 그래도 밝은 햇살이 내린 것이라고, 참으로 위상이 높아진 우리의 조국이라고 큰 자긍심을 느낀다.
* 북한의 생활상
북한은 자존심만 남았다. 8.15 해방을 중요시하면서도 자기들 방식으로 살자는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살자’ 구호를 내걸고 생활한다. 아직도 김정일 사상만 가득하다. 철저한 가족 통치다. 지금도 김정일 차남이 계승 중이다.
중국에 와서 외화벌이 한다. 3달에 1회씩 북한에 가서 교육받고 온다. 따라오는 안전특무원으로부터 그들은 일일이 탐색당한다.
1970년 대로 정지된 삶이다. 집단농사지어 나누어 먹는다. 공산주의 이론 그대로 다 같이 일하여, 다 같이 동일한 삶으로 산다. 문제는 그로 인해 발전이 없는 폐쇄적인 생활이다. 등소평이 개혁, 개방시킴으로 중국 북경 지방은 김정일을 싫어하나 안쪽 지방은 여전히 김정일을 숭상한다. 북한에서는 북어라고 안 하고 명태라고, ‘김정일 명태’ 로 명명하여 부른다.
산을 보아도 중국산에는 나무가 있는데 북한산에는 나무가 없다. 그 이유는 초소를 지어 감시하기에 유리하도록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궁핍한 생활고로 나무를 팔기 위해 베어서 그렇다. ‘나무팔아 조국 건설하자’ 는 정책으로 북한령의 산을 모두 민둥산이다. 민둥산 밭농사는 비가 오면 망한다.
중국은 주5일 근무제로 산 속 농촌 마을에 별장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육안으로도 두 나라는 구분된다. 외형의 삶은 비슷한데, 내부의 삶은 질적으로 다르다.
길림성에 들어서니 한글 글씨가 더 많이 보인다. 길림성 교통 통제국을 통과하자 버스는 더욱 깊은 산중 도로로 접어 든다. 북한 복장 차림의 중국 관리 요원이 꽃밭에서 풀을 뽑는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내일 북한인을 만나는데 정치이야기만 빼면 다 말한다고 한다. 모두 기계적인 굳은 표정임을 전해준다. 북한어로 슬리퍼는 끌신, 식도는 밥길, 담배 한 보루는 담배 한 막대기, 백열등은 불알, 형광등은 긴 불알, 가로등은 떼불알이라고 알려준다. 의사소통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남남북녀, 그래서 북한 여자가 예쁘다는데 궁금하다. 북한의 생활상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곳에서 들으니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 청막골 휴게소
연변은 8개 조선 자치구로 되어 있다. 행정 구역은 시→현→향→촌으로 나뉘어 있고 연변 수부는 연길시, 도문시, 용정시, 홍춘시다. 지금 우리는 조선 자치구인 연변 지역을 달리고 있다. 연변 길림성에 있는 ‘안도현’ 이라는 행정구역도 지나고 산중으로, 산중으로 달려간다.
연길에서 한참을 달려 만난 휴식처가 청막골 휴게소다. 오전 10시 30분, 투명한 아침이다. 깨끗하게 다듬어 놓은 도로와 공원, 기념품 상가가 있다.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다. 파는 물건은 주로 백두산에서 채취한 나물, 도토리, 장뢰 산삼 등이다. 나는 도토리 가루를 두 봉지 샀다. 1봉지에 5천원씩 1만원인데 8천원에 주었다.
점원들의 말씨가 완전히 북한 말씨다. 어려서부터 선군정치하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아 사고를 못 바꾸는 탓도 있고, 굳어져 버린 그들만의 독특한 발음이 상당히 도전적이다. 김일성 우표와 책자도 판매한다. 주로 북한 사람이 와서 장사하는 곳이다.
연변에는 전라도에서 이주 온 사람이 모여사는 ‘무주촌’ 도 있다. 한국의 지명을 그대로 본떠 무주촌으로 부른다. 이곳 동포들은 옥수수를 기르는데 메옥수수는 넓은 밭에 가득 재배하여 기름을 짜서 차기름으로, 사료용으로 판매하고, 찰옥수수는 집 앞 마당가에 심어 식용으로 한다. 콩은 기름 짜서 차에는 안 쓰고 식용으로만 쓴다. 이곳에서 북한에 옥수수 몇 트럭을 보냈는데 이유 없이 되돌려보냈다고도 한다.
북간도, 이곳은 산이 깊어 산적이 많다. 사위가 우람한 산이다. 이런 지역에서 어떻게 살까. 잘 포장된 길은 오직 백두산을 향해 달리는 차량만 지나간다. 아주 드물게 지나간다. 소사촌에서 5km만 가면 백두산이라는데, 아마 백두산 가까이 다다른 것 같다.
청막골 휴게소라는 높이 세운 기둥의 입간판이 한국의 어느 휴게소 마크와 동일하다. 반갑고 기쁘다. 기후가 비슷한 탓일까. 장미꽃이 한국의 꽃과 똑같다. 풀과 다른 식물도 유사한 것이 많다.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공기인데 분명 여기는 중국 영토다. 그러나 우리의 동족이 상업하는 곳이기에 정감이 가는 휴게소다.
*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은 중국, 러시아, 북한 이렇게 세 나라의 접경이다. ‘미인 송’ 이라는 백두산 소나무가 붉은 다리로, 아름다운 모양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위로 자라며 저절로 구부러 고운 자태다. 백두산 가는 길은 이미 연길에서부터지만 이제는 백두산 자락의 산중 길에 접어든 것이다.
나무 사이로 철도가 보인다. 일제 때 약탈해가기 위해 세운 철도인데 현재는 물자 수송과 여객 운반용으로 베이징까지 이어져 있다. 우리가 온 비행기 길을 심양을 거쳐 장시간 소요되는 기차를 이용해서도 올 수 있다. 상가가 형성된 마을에서 내려 고려식당에서 한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버스는 줄기차게 달린다.
10대 명경 중, 중국 6대 명경에 들어가는 백두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의 시조에 나오는 태산이 바로 백두산이다.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에는 민족기상의 발원지인 천지가 있다. 그 천지까지 오르는 길은 연길에서 5시간, 백두산 버스로 20분, 짚차로 20분, 도보로 10분이다.
백두산 권역은 연길 버스가 못 들어가므로, 장백산 버스로 바꿔타고 짚차 타는 곳까지 들어간다. ‘장백산’ 이라는 관문이 우람하게 솟은 초입에서 내려 화장실에 갔는데 초등학교 시절 학교 화장실의 무서움을 재현하고 있다. 어떤 아이는 못 들어가고 운다. 나무 조각으로 구멍 뚫어 만든 화장실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완전 구형이다. 세계인이 수없이 드나드는 명소의 화장실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주변 뜨락은 잘 가꾸어 놓았다. 주차장에서 장백산 관문을 통과하여 조금 걸어 오르니 짚차 타는 곳이 보인다. 짚차와 사람들이 장사진이다.
* 백두산 짚차
백두산 천지를 오르기 위해 줄 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대기한 짚차들이 백두산 자락 한 도막 깎아 만든 광장에 한 가득이다. 멀리 산봉우리 나무 사이로 천지의 오롯한 천문봉 높은 산정이 가뭇가뭇 시야에 들어온다.
11km의 산길을 짚차로 20분간 올라간다. 튼튼한 몸체의 유럽 짚차는 6명 정원이다. 몇 구비 줄을 돌고 돌아, 오랜 시간 기다려 우리 가족 4명과 방송인 배칠수의 장인 내외 2명, 이렇게 6인이 한 조가 되어 짚차 한 대에 동석했다.
짚차가 백두산에 들어설 때 그 관문에는 중국식 이름으로 ‘장백산’ 이라고 씌여 있다. 운전 기사도 중국인, 이름도 중국식, 옛 고구려 우리 땅인데 서러운 장면들이다. 시간을 다투어 운행해야 돈벌이가 된다는 짚차는 깎아지른 백두산 절벽의 산길을 다람쥐처럼 올라간다. ㄹ자로 휘어진 도로를 잘도 회전하여 오른다.
가끔은 무서운 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이것이 생업인 이곳 연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같이 오르내린다. 이미 장백산 권역 버스로 백두산 가까이 왔고, 정말 가파른 오르막 마지막 백두산 길을 지금 짚차에 몸을 싣고 오르고 있다.
* 백두산의 분포별 수종
백두산은 깊고 장대했다. 앉은 자리도 넓고, 일어선 키도 크다. 그래서 산 아래, 산 중턱, 산 꼭대기의 수종이 다르다. 아래에는 침엽수림이 우거져 있다. 짙푸른 덩이의 푸른 숲이 울창하다. 중턱에 오르니 하얀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은비늘 다리의 선이 고운 나무는 플라타나스 수종 비슷한데 훨씬 아름답다. 산 꼭대기에는 돌짝 산에 키 작은 풀들이 초지를 형성하고 있다. 뉴질랜드 남섬 같은 초지에 노랑, 하양, 분홍 꽃들이 곱다.
모든 것들이 신비롭다. 분명 우리의 영토인데 동일한 이름의 산에서 이리도 고운 식물들이 살더란 말이다. 록키산에 온 듯, 뉴질랜드에 온 듯, 수많은 회억의 강을 떠올리며 나의 백두산 영상은 또 하나의 칩으로 저장되고 있다.
* 짚차가 오르는 가파른 길
천지에 오르는 산 길은 여러 갈래다. 외지의 객이 빠른 시간에 왕복 오르내리는 코스가 짚차 운송이고, 기찻길, 도보 길도 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산벽에 철로가 고고한 자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며 인간의 위대한 지혜를 본다. 떨어지지 않도록 톱니 모양으로 나무목이 고여 있다.
짚차가 가는 종착지는 천문봉이다. 천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며 오르는 길도 수월하여 대부분 중국을 통해 천지에 온 외객은 이 길을 따라 짚차로 오른다. 앞 좌석에 기사 외 2명, 뒷좌석에 4명이 승차하였는데 의자 등받이나 창문 손잡이를 잡지 않고는 몸통이 좌우로 쏠려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그만큼 길도 험악하고, 운전법도 거칠다. 그런 위험에 대한 보상은 대단하다. 전후 좌우, 그 어느 곳을 보아도 비경이다. 짚차의 빠른 속도에 비명을 지르고, 백두산 비경에 비명을 지른다.
* 백두산 데드라인
백두산 산정이 보일 때 추운 바람이 사는 그 곳은 데드라인이 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모래와 자갈만이 뒹굴며 산 봉우리를 지킨다. 살기 위해 작은 키로 몸을 낮추고 생의 지혜로 꽃을 피워 올리던 초지의 연두빛 식물들이 이곳에서는 목숨을 놓는다.
기막힌 현장이다. 록키산맥을 달리며 보았던 설봉의 데드라인과는 조금 다르지만, 분명 이곳은 내 나라 최북녘 최고봉 하늘 가까운 곳의 생명 한계선이다. 지금 계절이 한여름 8월 초순인데 풀 한 포기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 드높은 영봉의 신비가 가슴을 벅차게 한다.
용암이 분출할 때 흘러내린 구멍 숭숭 뚫린 돌덩이와 검은 재의 형상으로 나뒹구는 흙, 그 백두산 데드라인에 지금 내가 서 있다. 관리 사무소와 커피숖, 기념품 상가가 생명의 푯대로 시야에 들어올 뿐 휘황한 땅, 칼바람이 분무하는 소슬한 영역이다. 산정을 향해 보면 하늘과 맞닿은 용기가, 산 아래를 보면 대륙을 품고 앉은 용기가 데드라인, 그 무서운 힘만큼 용감하다.
* 백두산 천문봉
짚차에서 내려 천문봉으로 오를 때 산소부족과 기압 차이로 조금 힘들거라는 조선족 교포의 말은 정확했다. 젊은이들은 잘 올라가는데 나이든 어른들은 답답해 한다. 나도 한 동안 이상한 증상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힘들어 몸이 무거워졌다. 물을 마시고 두 손을 힘차게 움직이며 한발 두발 서서히 오르니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해발 2760m, 한라산보다 1천 미터 정도 더 높이 올랐으니 당연한 현상이리라. 그래서 백두산 천지 관광객 모집시에 70대 노인은 받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말, 사실이다. 나는 내 조국에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말하리라. ‘빨리 백두산에 다녀오라’ 고. 세계의 명소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두산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특급 명소라고. 그리고 나이가 들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하늘 가까운 높고 차가운 영토라고.
* 백두산 천지
언제쯤 천지가 보일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천문봉 그 거친 등짝을 오를 때 갑자기 바위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그때까지도 기압 차이로 힘든 상황이었는데 저 호수가 ‘천지’ 라고 예감하며 기쁨의 탄성으로 바라보았을 때 나의 가슴은 평온해졌다.
처음 보인 그곳이 천지의 전부인 줄 알고 눈과 발을 떼지 못한 채 엎드려서 보고, 앉아서 보고, 서서 보고 그랬는데 그것은 천지의 서곡이었다. 천문봉에 다 오르지도 않은 한쪽 날개 끝 작은 비경이었다.
꿈 같은 시간이다. 두려움보다 목숨 같은 소중한 보물을 보는 느낌이다. 천지는 조금씩 오를 때마다 다르게 보인다. 좁게, 넓게 바위에 맞물려 빼어난 경관이다. 바위들 형상이 화산 폭발하며 기묘하게 이루어졌다.
아직도 휴화산인 천지, 언제 또 장엄한 진통이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은 사회산이지만 백두산 천지는 휴화산이다. 화산 폭발로 이루어 놓은 분화구까지는 이해되는데 저토록 짙푸른 물은 어떻게 생성되는지 의문이다.
제일 깊은 곳 수심이 373m이고 물의 평균 온도는 5도다. 저수온에 산다는 산천어가 살고 있다는데 김일성은 이 물고기만 회로 요리하여 먹었단다. 그리하여도 그는 칠십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고, 수많은 세월이 쌓여도 불변인 것은 오직 저 광활한 호수, 하늘 연못 천지(天池) 뿐이다.
30분 정도 머물며 돌아본 천지는 장엄했다. 짚차에서 내려 겨우 5분 정도 걸어오른 곳에서 만난 천지는 TV 속에서, 사진 속에서 본 모습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위용이다. 수많은 백두산 산봉우리에 싸여 있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드넓고, 하늘의 구름덩이와 맞닿아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어디까지가 호수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천지를 에워싼 맨살의 뽀얀 바위림 또한 절경이다.
맞은 편에는 북한 영토가 보인다. 산을 타고 내려온 뽀얀 길이 선명하다. 그 아래 천지 호수변에 집도 보인다. 낮은 지대에는 작은 풀이 파릇하다. 가까운 곳에 우리의 조국이 있다.
눈물겨운 못, 분명 내 조국의 땅인데 빙 돌아 타국을 거쳐서야 오른 백두산 천지다. 천지의 물은 청남빛, 푸르다가 푸르다가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농익은 저 푸르름이여. 디카 한 컷에 다 담지 못하는 광폭한 천지, 하늘과 맞닿았으니 이곳이 우리 조국의 지붕, 조국의 머리가 아닌가. 거대한 지붕, 거대한 머리다.
‘천지(天池)’ 라는 비석 앞에서 아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줄로 위험선을 표시해 두었는데 한번 발을 헛디디면 수심 200m 이상의 깊은 저 천지연에 추락한다. 아슬한 언덕, 비석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줄 서 있다. 천지 돌비를 만져보고, 안아보고, 빙빙 돌며 앞과 뒤 모습을 보고, 못내 아쉬움을 접지 못하여 서성였다. 이제 떠나야 하는 끝선에 이르렀는데, 멈추어선 그곳의 비경은 모두 명작 수채화로 시선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으니 내 어찌 돌아서랴.
그래 네 영혼을 품어가리라. 네 목숨을 담아 가리라. 내 가슴에, 내 두뇌에 너를 한 가득 채워 가리라. 내 목숨을 놓는 그 순간까지 너를 기억하며 살리라. 오늘의 저 장엄한 백두산 천지 그 모습을.
* 하산 길
내려올 때는 올라간 곳과는 반대편 길로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천무봉을 빙그르 한 바퀴 돌며 천지를 보고 내려오도록 길에는 안내 표시 줄이 쳐져 있다. 그 동아줄을 잡고 짚차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가면 된다.
곳곳에 현무암 돌이 뒹군다. 제주도에서 보는 구멍 숭숭 뚫린 돌멩이다. 색깔이 검지 않은 것만 다르다. 뽀얀 진흙색깔이고 더러는 숯검뎅이가 붙은 검은 색도 있다.
아까처럼 다시 짚차를 타고 백두산을 내려왔다. 역시 번개 같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내려간다. 산 아래 비경을 조망하며 천지에 오르는 다른 짚차와 교행하며 내려오는 하산길, 그것 또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여정이다.
* 장백 폭포
백두산이 중국 지명으로 장백산이라는 것도, 천지에서 백두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폭포가 장백 폭포라는 것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언젠가 장백산 더덕을 한 바구니 선물로 받아 굵고 하얀 진액이 나오는 더덕을 보약처럼 먹은 적이 있는데 나는 지금 그 더덕을 키워준 장백산에 와 있다.
짚차로 내려온 그곳에서 장백산 버스로 환승하여 장백폭포가 있는 계곡으로 갔다.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오르는데 가는 길에 온천수 뜨거운 물에 삶아내는 계란도 보고 적은 양이지만 수증기가 모락모락 나오는 것도 보았다. 뉴질랜드 로또루아 지열지대에 온 느낌이다.
천지 물이 넘쳐서 산곡을 타고 내려오는 폭포의 물이 넓은 시내를 이루고 오른다. 철계단을 오르고, 다리를 건너고,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걷고 수없이 걸어오른 산곡, 그곳에서 장백 폭포를 만났다. 휘어진 산 구비로 보이지 않던 폭포가 하얀 명주실 타래처럼 쏟아져 내린다.
벌써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산 그늘이 짙어간다. 장백폭포 앞까지는 이곳에서도 한참을 가야 함에 원경으로만 보았다. 높이 68m의 장엄한 폭포 줄기는 천지를 에워싼 백두산 낮은 봉우리에서 떨어지며 지축을 흔든다.
하얀 물, 순수의 물, 백두산 물, 시리도록 차가운 물도 만져보고 한 웅큼 쥐어 하늘로 던져도 보고 신비로운 땅, 신비로운 영역이다. 저토록 흘러내리는데도 천지의 물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어 줄지 않는다 하니 축복의 산, 축복의 연못이다.
폭포에서 내려오며 장백산 산삼을 한 뿌리에 한화 1천원씩 사서 먹었다. 우리 가족 네 식구분 네 뿌리를 4천원에 샀더니 젊은 청년은 고맙다며 덤으로 한 뿌리 더 주었다. 한국에서 함께 간 인솔자 사영준에게 그 한 뿌리는 주고 함께 먹으며 내려왔다. 한국에서 1천원은 큰 가치가 아니지만 중국에서 1천원은 상당히 큰 가치의 돈이기에 장백산 산삼은 비샀고, 그만큼 지친 몸의 피로를 덜어 주리라 믿어졌다. 버스 정류장에 가까워질 때 산자락 곳곳에서 솟는 온천수가 어둠을 타고 더욱 선명한 모습이다. 장백 폭포를 보러 왔는데 또 하나의 진풍경이다.
* 백두산 온천수
산자락 아래에 온천욕장이 있다. 길가에서는 계란을 삶아서 판다. 구멍에서 나오는 온천수에 손을 대보니 데일만큼 뜨겁다. 길가 갈라튼 틈새에서도 온천수가 흘러 나온다. 온천수가 지천이다. 정녕 백두산은 명물이다. 온갖 신비로움을 품고 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온천장에 들어갔다. 1시간 정도 소요됨에 젊은이들은 휴게소에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맑고 투명한 심호흡으로 휴식을 취했다. 기념품 가게에서 장백산 안내 책을 8천원에 사고 2천원에 아이스크림 4개를 사서 우리 가족은 야외 비치 파라솔 의자에 앉아 먹으며 백두산의 정취에 젖었다. 뼈 속까지 맑아지는 느낌의 천연의 산향내가 영혼을 적신다. 온천수에 육신을 담그는 일도 행복하겠지만 백두산 드넓은 품자락에서 심호흡하는 일도 참으로 행복하다.
어둠이 스며들어 산그늘이 내려앉을 때 하산했다. 이제 오늘의 일정은 마치고 석식만찬장으로 간다. 백두산을 두고 떠나는 걸음이 아쉽다.
* 호림원 호텔 석식
오늘밤 우리가 유숙할 호텔에서 푸짐한 저녁 만찬으로 즐거운 시간이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백두산 자락 경내의 호텔로 이름에서부터 깊은 맛이 우러난다. 여러 여행팀이 들어와 로비와 식당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벽면에 화가가 그린 커다란 호랑이가 걸려 있어 더욱 백두산 품을 느끼게 한다.
버섯 요리, 닭고기, 돼지고기, 콩나물, 숙주나물, 상추, 고려주까지 진수성찬이다. 백두산에서 자란 육류와 채소는 맛도 향기도 진하고 상추의 크기와 육질이 다부지다. 떨어진 음식 접시에는 여전히 한 가득씩 채워주고 인심 만점 음식 만점이다. 백두산 관광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만큼 천지까지 무난히 다녀온 기쁨은 여행객도 안내자도 무척 크다.
그래서 고기와 술로, 야채와 과일로 완벽한 석식 타임을 가지며 오늘을 자축하고 있다. 오늘 저녁 2차로 노래방에 가자고, 룸마다 연락하면 나오라고, 그리 약속하고는 각자의 방으로 갔는데 백두산을 오르내린 고단함에 모두들 곤히 잠들었다. 아름다운 밤이다.
2006년 8월 5일 토요일 국경지대, 두만강, 용정, 대성중학교
호림원 호텔 출발, 이민자들에 대한 삶의 이야기, 피나무 꽃 꿀집, 북한 박물관, 평양 식당에서 중식, 두만강 가는 길, 도문시, 두만강, 강 건너 북한 땅, 북한의 민둥산, 산에 새긴 김정일 찬양 구호, 접경 지역 두만강변 풍경, 용정 시가지, 대성 중학교, 해란강과 일송정, 연변 동방 곰락원, 연길 진달래 공원, 연길 공항 출발
* 호림원 호텔 출발
백두산을 떠난다는 아쉬움으로 짧은 아침시간이 소중하다. 새벽 6시에 모닝콜이 울리고, 서둘러 아침을 먹고 9시 30분에 출발한다는 것에 맞춰 바깥 풍경을 보았다.
분명 달랐다. 깊은 산자락에 앉은 자태와 출입문, 입구에 세워둔 백두산 호랑이 간판, 문득 바람처럼 지나가는 백두산 차량, 등등 모든 것들이 다 신비롭다. 실내와 실외의 설치물, 룸의 천정 높이가 상당히 높아 중후하고 웅장하다. 백두산의 위풍에 맞춰 잘 지어진 호텔이다.
오늘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를 돌아보는 날이다. 두만강을 비롯한 용정, 대성 중학교 등 모두 꼭 가보고 싶은 우리의 역사 유적지다. 버스에 올라 백두산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호텔을 떠났다.
* 이민자들에 대한 삶의 이야기
연길 가이드 김광일은 이민 3세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일정을 말해준다. 북한과 중국 말씨가 섞인 그의 억양은 다부지다. 설명도 조목조목 잘 해 준다. 우리와 함께 피를 나눈 동족이기에 정감이 간다.
호림원 호텔에서 40분 가서 피나무 꽃 꿀을 보고, 다시 그곳에서 50분 가서 북한 박물관을 보고, 연길에는 12시 30분에 도착하여 두만강에 간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연길을 떠난다.
조선족이 중국에 이민을 오게 된 계기와 삶에 대하여 역사적 배경과 함께 들려준다. 명․청 시대 두 나라가 싸울 때 조선인 18,000명을 명나라에 지원해 주었던 것이 이민의 시초다. 명나라가 패망한 후, 이때 파병된 사람들은 적응을 못하고 노예 취급당했다. 북간도는 그 당시 청나라 영토다.
중국에는 ‘박’씨가 없다. ‘朴’ 자에서 ‘木’을 빼고 ‘卜’(복)씨로 성을 개명하여 산다. 절강성에 가면 이런 성씨 개명자가 많다. 풍속 언어도 다 바뀌었다. 1949년에 정부에 가서 성을 다시 바꿔 달라고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다가 등소평이 바꾸어 주었다. 등소평은 조선족을 인정하고 조선 풍속을 교육시켰다.
중국은 백두산이 용공기지다. ‘누르하치’ 라는 말은 ‘붉은 열매를 먹고 낳은 아들’ 이란 뜻이다. 한때는 백두산 출입을 폐쇄했다. 조선족이 식물을 채취하면 사형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굶주린 20만명이 두만강을 건나와 백두산에서 살았다.
백두산은 중국과 한반도로 분리되어 있다. 산동성 사람들을 투입해서 백두산을 개발했고, 어떤 높은 분이 조선족이 사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켜 백두산을 개간시켰다. 그때 점점 넓게 개간하므로 땅이 많이 바뀌었다.
독립 운동자 200만명이 이곳에 와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때 못가고 남은 자가 오늘의 이민자들이다. 이민 1세, 2세는 고생이 많았다. 잃어버린 땅에 대한 설움과 울분이 성격을 강하게 바꿔 놓았다. 중국과 싸워서 이겨야 하므로 강인해졌다.
이런 연유로 중국에는 우리 조선인이 많다. 고국에 못 가고 정작 자신이 조선인인줄 알면서도 겉으로는 중국 풍속에 젖어 살고 있다. 중국과 한반도의 묘한 고리다. 이제는 서로에 대하여 인정해 주고 우리 동포가 기를 펴고 편히 살 수 있길 빈다.
* 피나무 꽃 꿀집
길가에 꿀집이 있다. 평지에 벌통이 있고 느티나무처럼 커다란 나무가 피나무인데 그 꽃에서 꿀을 만드는 곳이다. 직원 몇 명이 나와 꿀을 시식시켜 주고 설명해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촌도 속인다는 꿀, 특히 중국에 대하여는 신뢰하기 어렵다. 꿀이 묽어서 줄줄 흐르는 것도 사고 싶은 마음을 잠재운다.
꿀보다 주위 풍경에 더 관심이 많다. 개 2마리가 개 집에서 귀엽게 놀며 우리를 바라본다.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과 그 사이에 놓아둔 벌통이 시선을 끈다. 아무도 사지 않아 미안하지만 성숙한 쇼핑 문화의 한국인들이 대견스럽다.
* 북한 박물관
일체 사진 촬영 금지다. 자수화가 많고 사향 상품은 100%라고 믿고 사가란다. 대화를 나누어도 된다는데 절대 먼저 그들이 말하지는 않는다. 표정이 굳다. 얌전하고 정숙한 인사법으로 맞아들인다.
인민 수예가들이 만든 수예품은 세계 최고로 몇 달 몇 년이 걸린다. 천지는 모두 명주실로 2년에 걸려 완성된 작품이다. 중국 허락 받고 간신히 들어온 북한 박물관에서는 모두 북한 사람이 관리한다. 지금 눈 앞에 움직이는 직원이 모두 북한인이다.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비극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마른 아가씨가 안내한다. 조국 통일하여 언어통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우황청심원은 북한이 원조이며 우리 조상 허준 선생님 처방은 원방으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청심환인데, 우리 민족에게 맞는 것은 청심원으로 허준 선생님 처방대로 만든다 했다. 사향이 들어간 것은 2년이 지나도 보드랍고, 복용법은 입 안에 넣고 녹여서 먹어야 한다. 조금씩 녹이면 향이 세고 보드랍다. 감기 치료로 열이 내리고 고혈압, 무의식 환자에게 좋다. 저혈압 환자는 절대 금지다.
사향노루 수놈의 작은 생식기에서 채취하는데 임산부는 냄새만 맡아도 낙태한다. 피를 부르는 특징으로 그렇단다. 사향노루 1마리가 죽어야 미량 얻는다. 안궁우황환은 고, 저혈압 모두 복용가능하다.
북한 물건들이 책을 비롯한 자료들이 뒤에 진열되어 있다. 사방에는 자수 공예품, 액자가 걸려 있다. 정교하여 사진으로 보인다. 백두산 풍경과 꽃이 주로 많다.
밖에는 ‘묘향산 전시관’ 이라고 씌여 있다. 한국의 화단처럼 아담한 뜨락이 있고 모두 우리의 동포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렇게 중국에 진출하여 외화를 벌어 잘 사는 북한이 되길 빈다.
* 평양 식당에서 중식
내 동포를 도와 주려는 노력이 대단하다. 가능하면 북한인이 운영하는 식당, 가게를 찾아간다. 어느새 북한이 아주 가까이 와 있다.
3층 넓은 식당에서 평양 요리를 먹었다. 사람이 많아 번호표를 준다. 나느 27번 흰바탕에 붉은 인쇄로 찍은 번호표를 옷에 붙였다. 식사하고 밖으로 나오니 평양 예민관 홀에는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평양에서 왔습니다’ 라는 큰 프랭카드를 내걸고 평양 민속품을 팔고 있다. 사진을 찍자 했더니 안 된다며 달아난다. 그래서 살짝 북한 여자 근처에 서서 겨우 사진을 찍었다.
상당히 폐쇄적이다. 무공해 인간이다. 순수한 눈빛, 고운 혈색, 정말 남남북녀다. 한복차림 고운 매무새에서 언어, 예법 하나 하나가 조선시대의 정숙한 여인상이다. 결 고운 내 혈육이다.
* 두만강 가는 길
역시 옥수수, 콩 농사가 많다. 소를 방목하는 목장도 많다. 침엽수림이 많이 보인다. 연길에서 중식 후 도문으로 이동하여 두만강에 간다. 40분 정도 가면 된다. 가요에서 ‘두만강’을 부르던 기억이 난다. 영문도 모르고 불렀던 어린 시절의 그 강에 지금 가까이 다가간다.
벌써 두만강 줄기가 보인다. 두만강은 천리 두만강인데 지금 보이는 것은 북강이다. 버스 차창으로 지나가는 강 풍경이 두만강이라는 것을 금새 알게 한다. 깊은 강, 산 사이로 들녘 사이로 평화롭게 흐르고 있다. 그 줄기를 따라 지금 달리고 있다.
* 도문시
우리는 지금 중국 땅을 달리며 두만강을 보고 있다. 저 강 건너가 도문시다. 북강 700리와 남강 300리를 합하여 천리 두만강인데 도문시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두만강을 본다.
도문시는 연변의 한 도시로 두만강변에 있다. 북한과 접경 도시다. 저 멀리 산이 북한의 민둥산이다. 땔감으로 다 베어 나무가 없다. 도문시 가로수인 비술 나무가 명물이다. 늘어진 모양이 장관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까지 천리인데 유일하게 도문시에만 중국과 북한을 잇는 철교가 있다. 기차가 다닌다. 북한으로 가는 다리가 길게 놓여 있다. 강변에는 기름진 땅에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 풍요로운 들녘이다.
* 두만강
도문 시내를 가로질러 맞닿은 곳에 두만강이 있었다. 사진은 꼭 허락된 곳에서만 가능하고 그 외는 돈을 천원씩 지불해야 한다. 성문을 설치해 놓고 배경으로 사진을 찍도록 유도한다. 가난한 티가 나는 모양새 좋지 않은 행각이다.
긴 둑을 걸으며 걷다가 아래로 내려가서 두만강을 만났다. 기가 막힌 강이다. 절반은 중국 소유, 절반은 북한 소유다. 뗏목 관광은 1인당 5천원이다.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고 뗏목에 앉아 두만강을 오르내린다.
바짝 다가가 물을 보니 오염되어 더럽다 ‘두만강 푸른 물에~’로 시작하는 두만강은 옛 이야기다. 함경북도에서 철광이 세워지면서 저렇게 오염되었다. 하구에는 풀이 가득 자란다. 물줄기가 약한 곳에는 자갈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발원강은 쉼없아 흐르고 있다.
* 강 건너 북한 땅
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 두 지역의 생활은 엄청난 차이다. 내가 선 곳은 연변의 도문시, 풍요로운 땅이고 두만강 건너는 북한의 남양시, 빈곤한 땅이다.
민가도 보이고 농사를 짓는 채전밭도 보인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산이란 산은 모두 벌거숭이다. 그래서 애련하게 알몸으로 드러난다. 가장 최단의 거리에서 보는 북한이다. 내 조국의 국토인데 바라만 볼 뿐 갈 수 없음이 애석하다.
* 북한의 민둥산
중국의 산은 울창한데 북한의 산은 모두 민둥산이다. 그 이유는 첫째 땔감으로 베어서 그렇고, 둘째 중국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돈벌이로 나무를 벤다는 것도, 중국인의 거동을 살피기 위해서라는 것도 민둥산을 이해하기에는 낮은 의식 수준이다.
민둥산 아래에는 민가가 있고, 정적이 흐른다. 저 강을 건너가는 탈북자들을 북한에서는 한쪽 눈 감아준다. 중국으로 도강하는 북한인은 잔인하여, 어떤 사람은 식칼을 들고 6명을 죽이고 건너온 적이 있다. 그토록 잔인하게 넘는다. 민둥산의 깎아지른 구릉들이 애처롭다. 살기좋은 북한이 되어 저 산에 푸른 나무 가득이길 빈다.
* 산에 새긴 김정일 찬양 구호
두만강에서 40분간 달리면 용정이다. 그곳으로 가면서 북한의 산을 계속 보게 된다. 안내원이 저 멀리 하얀 글씨를 읽어 보란다. 북한 민둥산 중턱에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커다란 하얀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나무가 있어야 할 곳에 찬양 구호가 새겨 있다. 가슴이 시려오는 대목이다.
70년대만 해도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가서 놀았다고, 해질녘에 강 건너서 헤어졌다고 가이드 조선족은 회상의 말을 들려준다. 지금은 왕래가 불가능한 땅, 삼엄한 경계다.
묻고 싶다. 진정 21세기의 태양이 김정일 장군이냐고. 눈으로 보지 않아 나는 그 생활상을 잘 모르지만 김정일 장군이 태양이라면 북녘 땅은 따스해야 하지 않는가. 왜 헐벗고 가난할까. 저 오롯하게 산을 빛내는 찬양 구호가 헛되지 않기를 염원한다.
* 접경 지역 두만강변 풍경
지금 북한의 영토를 바라보며 계속 중국 영토를 달리고 있다. 남의 땅을 빌어 바라보는 이 피맺힌 비극, 언제까지 갈 것인가. 온전하게 소유하지도 못한 두만강 변에는 철없는 아이들이 첨벙대며 발가벗은 몸으로 미역을 감고 있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그렇게 생활한다.
중국 물과 북한 물이 하나되어 흐르는데 접경지역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중국 쪽의 기름진 땅에는 2모작 벼가 누렇게 풍년을 노래하는데 북한 쪽 벌거벗은 땅에는 민둥산만 줄 서 있다.
갈림길이 두만강과 용정 가는 길로 나뉘어 있는데 우리는 용정 가는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25분 가면 용정시다. 내륙으로 접어들며 사방이 모두 옥수수밭, 콩밭이다. 더러 감자, 고추, 토마토, 해바라기도 있다. 산녘에 들녘에 노랗게 꽃대 오른 옥수수가 곱다.
평지 마을에 이르자 새마을 운동 주택들이 붉은 양철 지붕으로 물결을 이룬다. ‘우리 마을 우리가 건설하자’ 는 구호를 청색 지붕의 집 벽 본부에 붙여 놓았다. 60년도 후반에 불었던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 건설 온기를 이곳에서 본다.
두만강변 풍경은 참으로 정겹다. 한국의 어느 영토 한 마디를 지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옛 고구려의 맥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들 평화롭기를, 풍요롭기를 소망한다.
* 용정 시가지
인구 13만명 중 70%가 조선족이다. 이곳은 최초로 잘 살게 된 조선족 지역이다. 윤동주 시비가 용정 중학교에 있어 유명하기도 하지만 한국의 드라마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이 독립 운동하던 장소로 소개된 곳이어서 생생히 기억된다.
시가지 도로가 깨끗하고 넓게 잘 가꾸어져 있다. 그 옛날의 초라하던 모습은 용정 외곽에서나 조금 보일 뿐 모두 다시 세워진 신축 건물이 많다. 대성 중학교 앞의 낡은 고층 아파트가 이 도시의 연륜을 드러내고 있다. 내 동포의 족적이 서린 용정 시가지는 남다른 감회로 다가오는 소중한 도시다.
* 대성 중학교
민족 시인 윤동주님의 모교이며 삶이 깃든 학교다. 교문에는 룡정 중학교라고 새겨져 있다. 들어서니 드넓은 마당이 있고 교사 현관 앞 정원 잔디 밭에 시비가 있다. 그의 대표시 〈서시〉다.
실내로 들어가서 2층에 전시된 사진 자료를 보며 설명을 들었다. 민족 운동가들의 사진과 그 당시 활동 모습이 담겨 있다. 문익환 목사도 정일권 전 총리도 이 중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선인들은 떠났어도 이곳 교정에는 1200명의 학생이 있다. 컴퓨터, 음악, 미술 등 종합 학교다. 현재는 용정 제일 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본관 맞은 편에 길게 지은 교실 건물에서 다양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학교처럼 꾸밈새는 없어도 단단한 외향이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활약하던 땅, 용정에서 올곧은 함성으로 우뚝 선 대성 중학교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 해란강과 일송정
해란강을 건너며 저 멀리 산정에 선 일송정을 보았다. 원래의 일송정은 일본인이 솔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고춧가루를 넣어 봄함으로 말라 죽었다. 독립 운동가들이 그 소나무 밑에서 항일 의지를 모으자 이를 미워하여 죽인 것이다. 일송정이 있던 비암산에는 현재 그 소나무가 아니고 후에 심은 작은 소나무가 있다. 1980년 중국 당국에서 ‘일송정’ 이라는 정자를 건립했다.
멀리 정자만 보인다. 멀어서 그 산까지는 못 가고 용정 건너 저 멀리 산 줄기 위에 오롯한 곳에 살고 있을 일송정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가곡 ‘선구자’ 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을 지금 지나고 있다. 두만강 지류인 해란강은 용정에 흐르는 넓은 강이다. 물과 바위와 자갈이 다른 강자락과 다를 바 없는데 선구자의 용감한 함성이 스며 흐르는 듯, 우리에게는 뜨거운 강이다. 드넓은 용정 들녘은 벼가 자라고 있다. 말 발굽 소리 잠 들고 이제는 풍요가 넘실거리는 기름진 땅이다.
해란강 다리를 건너며 본 일송정 조망은 가슴 벅찬 순간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우리 민족이 간도지방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이 해란강 주변의 이 들판이다. 그 중심 젖줄이 바로 이 해란강이었기에 일송정과 해란강이 선구자로 언급되는 것이다.
* 연변 동방 곰락원
백두산에는 곰이 많다. 웅담은 연변의 특산물이다. 원액을 뽑아서 말리는 것인데 간에 좋다. 곰을 잡되 새끼는 다시 백두산에 보내준다.
용정의 변두리에 크게 지은 웅담 공장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들어서자 사육사가 검정곰을 데리고 다니며 관광객에게 눈길을 유도한다. 걸어서, 또는 두발로 주인을 따라 다니는 곰이 귀엽다가 차츰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곳곳에 곰 사육장이 많다. 넓은 우리에 큰 나뭇가지 기둥을 박아 곰들이 올망졸망 모여 올라앉아 있고 물과 먹이통이 땅바닥에 놓여 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을 그들은 의식하지 않는다. 관광코스로 수많은 외객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실내에서 설명을 듣고 상품소개를 받았지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한민국의 여행 안목과 수준을 말해주는 증거다. 외국 물건 못지 않은 우리의 상품이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나 역시 꼭 사야할 물건 외에는 그 어떤 상술에도 이끌리지 않는다.
수많은 곰과 웅담에 대하여 보고, 배우고 나왔지만 입구 안내문에 ‘연변 동방 곰락원’ 이라는 설명문 앞에서 과연 이곳이 ‘곰락원’ 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백두산이 있어 이런 공장도 가능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약이라면 곰을 잡아서라도 생산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긍정하며 걸음을 옮겼다.
문 밖에는 용정 뜰이 드넓게 펼쳐진다. 벼와 옥수수 외 여러 작물이 잘 자라고 있다. 서희가 조선을 떠나 이곳에서 살며 독립운동기금을 모으던 상가와 유사한 상점이 길가에 있고, 그때와 비슷한 주택이 초라한 외형으로 뒤편에 있다. 토지 드라마 속에 내가 선 느낌이다. 용정 중심지는 신형 건물들로 화사한데 외곽은 옛 모습 그대로 허술하다.
버스는 마을을 벗어나, 곰락원에서 점점 멀어지며 연길로 간다. 쭉 뻗은 국도변에는 소나무와 여러 숲의 군락이 울창하고, 토지의 광랴에 내려오는 석양의 빛이 참으로 아름답고 기름지다.
* 연길 진달래 공원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한라산’ 음식점에서 불고기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가려 했는데 시간이 조금 여유있어 들른 공원이다. 연길에 오던 날 점심을 먹던 식당 건물이 이 공원 안에 있다. 그 때는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유로이 각자 돌아다니며 모두 살펴보고 있다.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동안 구경했다. 진달래 광장에서 2곡에 1000원을 주고 부르는 노래방이 가장 큰 인기다. 우리 일행도 몇 명 나가 3천원 주고 6곡을 불렀다. 연예인 배칠수 장인과 장모의 노래와 춤이 박수 갈채를 받는다. 연길의 조선족 동포와 하나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진달래 꽃모양의 조각품이 높이 솟아 올라 아름다운 조명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섬세한 진달래 꽃잎에서 보랏빛 실체와 가까운 색을 보며 사람들은 조국의 동산을 그리워하리라. 진달래 정자도 있다. 기와 지붕 조각이 진달래 모양이다.
놀이 기구, 잔디 광장, 포장마차 등 잘 갖추어진 공원이다. 강아지를 끌고 온 가족도 있다. 예의바르고 질서를 지키는 시민의식이다. 밤이라서 잘 보이진 않지만 서울의 어느 한 공원에 머문 느낌이다. 우리 말이 통하고, 진달래가 솟아 있고, 우리의 노래가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연길 사람들은 이곳을 사랑한다. 노래 마당 앞에 모두 앉아 호흡을 하나로 맞춘다. 나도 가족과 함께, 조선족과 함께 앉아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공원이 커서 다는 못 돌았지만 진달래 꽃탑 주변을 돌며 덩달아 조국에 대한 향수에 젖기도 했다. 연길의 아름다운 마지막 밤이다. 고운 추억 간직하고 돌아가리라.
* 연길 공항 출발
내가 생각한 연길이 아니었다. 훨씬 풍요롭다. 화려한 거리, 형색도 곱고, 흥에 겨운 사람들의 모습이 밝다. 오늘밤 내 기억 속에 저장되는 연길은 결코 초라한 땅이 아니다. 가끔씩 TV에서 보았던 가난한 터가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 동포의 근면한 삶에서 이룩된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거든 연길의 동포들 잘 있다고 전해 달라고, 잘 산다고, 남 부럽지 않게 산다고 전해달라고, 그래야 연길이 알려진다고, 조선족 가이드는 힘주어 당부한다. 피줄을 타고 흐르는 동족애의 정이 뜨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가슴 한쪽이 아리면서도 흐뭇하다.
한국에 간 20만명의 조선족이 벌어서 보내는 돈이 1년에 70억 달러, 한화로 70억 달러*1,000원=70,000억원, 즉 7조원이다. 그것도 보이는 돈만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보았던 연변 여인의 근면함이 그 한 예다. 우리는 그 여인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여자라고 부른다. 예의 바르고, 정숙하고, 성실하고, 알뜰하고 일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낙이다. 그리하여 번 돈을 꼬박꼬박 연변의 두 아들에게 보낸다고 했다. 그 돈으로 두 아들이 집을 샀다는 말이 나는 오늘 이곳에서 충분히 납득된다. 한국에서 돈벌이하는 연변 사람도, 연변에 남아 튼튼한 삶의 기둥을 박는 사람도 모두 훌륭하다.
연길 공항에서 밤 9시 55분 비행기로 떠난다. 아쉬운 밤이다. 연길 공항은 크고 깨끗하다. 비행기도 정시에 들어왔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우리의 여행을 도와주는 친절한 조선족 안내원의 배웅을 받으며 베이징 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2006년 8월 6일 일요일 북경, 천진, 인천 도착
북경 천단공원, 조선족의 교육, 인력거 투어, 중국의 재래시장, 황제 부의 본부인 생가, 평양 랭면집 중식, 북경에서 천진으로 이동, 천진 공항 이륙, 인천 공항 도착
* 북경 천단공원
지난 밤 연길에서 밤 12시에 베이징 공항에 왔다.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다시 북경에 온 것이다. 춘휘원 호텔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이제 북경 천단 공원으로 간다. 새벽에 호텔에 들어와 겨우 눈만 붙이고 아침 6시에 일어나 서둘렀다. 오늘 북경 마지막 여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북경 천단 공원은 명, 청대 황제가 하늘에 풍년을 빌었던 공원이다. 중국에는 이것 말고도 땅에게 비는 지단 공원, 해에게 비는 일단 공원, 달에게 비는 월단공원, 농사신에게 비는 농단공원이 있는데 그 중 천단 공원이 대표로 가장 좋은 공원이다. 황제가 와서 직접 하늘에 비가 오도록, 그래서 풍년이 들도록, 그런 때마다 하늘에 빌던 의미있는 곳이다. 아편, 술, 여자를 못 대하는 정절인들이 보름날에 와서 빌기도 했다.
영락 15년 동안 자금성이 완공될 무렵, 동일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자금성이 73㎡, 천단 공원이 273㎡, 천단 공원이 자금성의 4배 크기다. 건축물이 북쪽은 하늘 상징으로 둥글고, 남쪽은 땅 상징으로 네모졌다. 하늘을 상징하는 기년전 본당은 대표 건물이다. 녹색은 백성, 황색은 황제, 청색은 하늘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청색으로 보수했다. 기년전의 기둥이 24개인데 안쪽 12개는 1년 12달, 앞쪽 12개는 12시간을 뜻한다.
이곳에는 또 회음벽이 있다. 소리가 되돌아오는 담벼락이다. 청 건륭황제가 비오라고 제사지내려 천단공원에 와서 잠시 담벽에 누워 있는데 개구리 울음에 잠을 깼다. 신하에게 그 개구리를 잡아오라 하여 따라가 보니 담벽에 개구리가 있는 뱀이 그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신하들이 ‘우리가 뭐하러 잡느냐, 곧 뱀이 잡아먹을 것을’ 하고 말했는데 그 말을 황제가 다 듣고 있었다. 대신들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비니, 황제는 괜찮다고, 너희들 때문에 이 담벽의 신비를 알게 되었다 했다. 그때부터 회음벽이 된 것이다.
또한 원심석도 있다. 동그란 돌판 위에 올라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땀으로 온몸을 적시는데도 원심석에 오르기 위해 장사진이다. 담겨있는 소중한 의미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천단공원은 그러나 옛날의 공원이 아니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퇴직자, 여유있는 자, 집 몇 채 가진 자들이 모여 노는 곳이다. 운동, 기공 운동, 춤, 노래, 오락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재미있는 공원이다. 녹음기를 틀어 놓고 두 사람씩 춤추는 사람들도 있고 붓글씨 쓰는 자, 무술 연습자 등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온다.
2년 전에 왔을 때도 그랬다. 여전히 여유있는 실버 세대가 모여 생을 즐겁게 엮고 있다. 보기 좋다. 측백나무만 심겨진 정원에 푸른 잔디가 상쾌함을 더해준다. 하늘 신이 걷던 길과 황제가 걷던 길을 따라 나오며 황제인 양, 황후인 양 위엄을 갖추고 한 발 한 발 옮겼다. 8월 더위가 대단해도 이순간 나는 황후다.
* 조선족의 교육
연길에서도 안내원으로부터 들었지만 북경의 안내원 강연화에게서도 조선족의 삶에 대하여 들었다. 그녀의 부친은 살았다면 지금 70대인데 한국에 가면 무조건 잡혀서 못 나온다고 하여 본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한국에 못 갔다는 것이다. 큰 비극이다. 친구가 한국에 다녀오며 사온 오이 비누 냄새만 맡아 보았다고. 여행자들이 쓰고 남은 한국 물건을 주고 갈 때 그것이 한국에 대한 전부라고 서글픈 사연을 읊는다.
교포 3세인 그녀는 어린 시절에 부친께서 라디오를 몰래 숨겨놓고 작은 볼륨으로 남조선 방송을 듣는 것을 보았는데 자녀들에게는 못 들어오게 했단다. 신고당하면 붙잡혀 가고 벌금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조국을 그리워하다가 그의 조상들은 눈을 감고 자녀 교육에 열의를 쏟은 조상의 덕으로 중국 조선족은 대부분 잘 살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녀 교육은 한국과 유사하게 적극적이었다. 한민족의 선비자적 정신이 이곳에도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안내원 형제 삼남매도 모두 대학까지 마쳤고 조부모, 부모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눈물겨운 선인들의 삶이다.
지금은 대학 입학시 학자금 대출도 가능하다. 중국에서도 공부 잘 하면 장학생이 된다. 조선족이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조선족은 돈을 꿔서라도 교육시키는데 한족은 돈이 없으면 안 가르친다. 중학교까지는 호적 없이도 교육이 가능하나 고교부터는 호적이 있어야 가능하다. 호적에 오르는 자는 아들이고, 당연히 장자다.
아이를 임신하면 병원에 가서 아들, 딸 구별 확인해서 딸이면 지운다. 국가에서는 안 알려주도록 했지만 돈 집어주고 의사에게 딸이면 알아내어 낙태 부탁한다. 남아선호사상은 중국에서도 보통이 아니다.
6년 전부터 초등에서 대학까지 영어를 많이 교육시킨다. 전에는 일본어를 배웠는데 쓸모가 없어 바뀐 것이다. 20대 사람이 영어를 잘 못하면 공부를 안 했거나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다.
가이드의 자녀 교포 4세는 한국어를 잘 모른다고 고백한다. 아들 1명인데 한족 유치원에 다녀서 모국어를 배울 기회도 없고, 또 중국에서 적응하며 살기 위해서는 이곳 교육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는 것이 가슴에 와 닿으면서도 씁쓸한 이야기들이다. 모국을 기억하며, 모국어를 잊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최초 이민자들의 자취는 서서히 사라지고, 이민자들의 후손은 조상들의 나라에 대한 교육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것이 그들이 살기 위한 길인 것을. 지구촌이 하나로 동그랗게 이어져 이념의 벽을 깨고 모두 행복하게 살길 빈다.
* 인력거 투어
북경 시내 중 차가 다니지 못하는 골목과 재래시장, 부의 부인 생가까지 다녀오는 하나의 관광이다. 1인당 2만원이라는 부담스런 요금인데 사람이 끄는 교통기구를 타기 때문에 이해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치고는 비인간적이다.
2인이 1조가 되어 탄다. 덩치 큰 젊은 남자들이 붉은 색 천으로 지붕을 두른 자전거 개량 마차를 페달로 몰고 와서 우리 일행을 태우고 달려간다. 180년 된 고전 주택 골목을 누비고 잘도 간다.
주위 풍경을 보는 것보다 앞 뒤 따라오는 인력거를 보는 것도 신기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워서 부채질을 하는데 돈을 벌기 위해 모터가 아닌 인력으로 두 사람을 끌고 가는 고통을 감래하는 운전자를 모두들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형상만 차량이지 사람을 타고 돌아보는 관광코스다. 중국의 가난한 자에게 주고 가는 팁이라 여기면 된다. 돈과 사람을 떠나 단순하게 생각해야 마음 편히 탈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 중국의 재래시장
인력거 투어가 아니면 올 수 없는 곳이다. 구옥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가다. 인력거에서 내려 들어가 보았다. 정육점에서부터 채소 가게까지 즐비한 물건 사이로 거닐며 아이쇼핑만 했다.
상당히 불결하다. 육류를 모두 판 위에 내어 놓고 썰어서 판다. 그런데 상했는지 그 냄새가 고약하다. 비위생적인 것에 역겹다. 채소는 크기가 상당히 커서 놀라운 것도 있다. 중국 풍토가 그렇게 길러내는가 보다. 우리를 보고는 사 가라고 사정한다. 아직도 먼 중국의 상거래 질서를 체험하는 현장이다.
* 황제 부의 본부인 생가
다시 인력거를 타고 간 곳은 마지막 중국 황제 애신각라 부의(청나라 12대 마지막 선통 황제)의 본부인 본부인 생가다. 조금 넓은 골목에는 민속품을 파는 가게가 몇 군데 줄지어 있고,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관리하고 있는 집의 대문이 열려 있다. 이곳이 부의의 처가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통의 민가다. 수세미가 주렁주렁 달린 터널은 지나 실내로 들어갔다. 북경의 사람이 월 27만 5천원씩 내고 살고 있다. 훌륭한 지방 사람이 퇴직한 후 이 집을 사들여 운영하고 있다. 사탕과 차를 주며 외객을 맞는다. 북경 원주민은 먹는 것에만 신경쓴다. 옷과 치장에는 관심이 없다. 과일 사탕이 알차게 맛있다.
1300평의 대지를 안고 있는 이 집을 비롯하여 주변 땅값이 비싸다. 거지같은 부자가 사는 곳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풍경인데 부의 본부인 생가로 인해 그런 것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도 아주 벽촌에서나 보는 옴팍한 집의 구조다.
이 집을 끝점으로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간다. 북경의 병원은 개인이 못하게 하고 국가에서 운영하는데 비싼 대로변에는 없고 뒷골목에 있다. 연변에서는 개인의 병원 운영을 허락한다. 베이징 병원이 보이지 않던 연유를 인력거 투어로 알게 되고, 직접 병원 앞을 지나왔다. 허름한 건물이지만 규모는 상당히 크다.
인력거에서 내려 화장실에 갔을 때 놀랐다. 중국의 수도 중심지에 그런 화장실이 있다는 것은 수치다. 칸막이도 없이 시멘트 판에 구멍만 줄지어 뚫어 놓았다. 옆사람의 전부를 보며 볼일을 본다. 오물에서 솟는 냄새도 지독하다. 이런 문제가 중국이 대국이면서도 그 진가를 낮게 평가받는 한 대목이라 여겨졌다. 중국에 올때마다 느끼는 화장실의 낮은 문화다.
인력거 투어로 인해서 중국의 이면까지 들여다보고 간다. 모든 여행일정이 끝난 셈이다. 인력거 주차장에는 수많은 인력거가 대기하고 있다. 손님을 받기 위해서다. 이방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애처러운 시선들이 떠나가는 우리를 배웅하고 있다.
* 평양 랭면집 중식
바깥 날씨가 더워서 서둘러 들어갔다. 2층에 올라가 냉면과 돌솥 비빔밥을 먹었다. 찹쌀 순대와 동태찜 등 음식이 고급스럽고 깔끔하고 맛 좋다. 북한 요리집 중에서도 이 음식점은 고급이다.
다 먹고는 공연을 관람했다. 식당 한 켠에 공연 무대가 있고 북한 아가씨가 1명씩 나와 노래를 부른다. 천안 삼거리, 울고 넘는 박달재 등 남한의 가요를 잘도 부른다. 자태와 음성이 곱다. 저녁 조명 아래에서 본다면 더욱 아름다운 분위기다.
식사를 마친 후 1층에 내려오니 기념품 가게가 있다. 한복을 입은 북한 여인들이 팔고 있다. 중국에서 벌어가는 외화 수입의 한 현장이다. 우리 동족이니 잘 되기를, 참 잘하는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검은 원피스에 흰 칼라, 긴 머리의 소녀가 안녕히 가시라고 상냥하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조화지만 뽀얀 복사꽃 화분과 잘 어울리는 전통 이조 시대의 정숙한 여인네 자태다. 그 인사에 기분이 좋다.
밖에 나와서 상호를 보니 ‘평양 랭면’ 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냉’ 이 아니고 ‘랭’ 이다. 두음법칙이 배제된 어법이다. 묘한 생각이 스친다. 북한에서 중국에 진출한 고급음식점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돌고 돌아온 이역 땅 중국에서 만나는 북한 사람들이 눈물겹기도 하다. 우리와 핏줄을 나눈 동족인데 마치 동물원의 진열된 생물체를 보듯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속히 그런 아픈 마디에서 벗어나기를, 하나되기를 간절히 빈다 .
* 북경에서 천진으로 이동
점심 식사 후 천진으로 이동했다. 천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북경에서 천진까지는 52km,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올 때의 길을 되돌아 가지만 역으로 감에 주변 풍경이 새롭다.
도로변에 민물고기 양식장이 많고, 우거진 가로수가 군락을 이룬다. 시속 90km로 버스가 달린다. 차 안에서 노래 한곡씩 돌아가며 부르면서 가자고 의견을 모아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과 중국을 떠남에 아쉬움을 노래에 싣는다.
산이 없다. 중국 외곽 변두리나 가야 산을 본다. 평지의 들녘을 가르며 달린다. 양식장 연못에서 발가벗고 수영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살인 더위다. 천단 공원에서 흘린 땀은 완전히 비를 맞은 듯 옷이 젖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버스 안은 천국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물고기처럼 첨벙대는 저 사람들이 이해된다.
야광 석회칠 나무가 이곳에도 줄 서 있다. 더위에 지쳐 그 나무 아래 지쳐 쉬는 자전거 운행자도 있고, 걸인인 듯 퍼져 누운 자도 있다. 큰 길가에서 위험한 광경이지만 더위로 인한 장면들이다.
아름다운 꽃 정원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버스는 우리를 천진공항에 잘 배웅해 주었다. 중국에서 밟는 마지막 도시 천진이다.
* 천진 공항 이륙
천진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하여 기다리는데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와 잠시 이륙 대기 중이라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좀 걱정스럽다. 중국의 기후는 종종 이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곧 이륙했고, 조금 흔들렸으나 비구름 층을 뚫고 창공에 올랐을 때 하늘은 투명했다. 비구름이 지상에는 뿌릴지라도 하늘 높은 상공은 해당없다. 그 위에 비행기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기내식으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다. 천진 발 인천행 16:45분 KE864편, 대한 항공이다. 인천까지는 1시간 40분 소요 예상이며 19:25분 도착이다. 모니터에 천진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가 황해 바다를 관통하고 있다. 하늘은 솜털 구름이 하얗다. 무공해 하늘이 유리쪽이다.
창가에 두 아들이 앉고, 우리 부부는 통로 쪽 중앙 좌석에 앉았다. 59A, 59B, 59C, 59D다. 행복한 시간이다. 비행기에서 제공한 신문을 보며, 나는 또 여행수첩에 메모하며, 거닐며 몸을 풀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노래를 듣기도, 모두 아름다운 시간이다.
중국과 한국은 비행거리가 짧아서 좋다. 국내 이동보다 약간 멀뿐이다. 벌써 비행기는 한반도에 들어섰다.
* 인천 공항 도착
인천 공항에 오후 7시 30분에 도착했다. 한국은 베이징보다 덜 덥다. 시차가 2시간 빨라 밤으로 더 가까워졌다. 정시에 무사히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나왔다.
대한항공사에 들러 마일리지를 적립하고 9시경 리무진을 타고 집으로 왔다. 무사히 5박 6일간의 북경, 백두산 기행은 우리 가족에게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두 아들의 넓은 가슴이 더욱 넓어졌으리라. 우리 내외에게는 문인 부부로서의 글제와 소재를 얻은 것, 새로운 지역에 대한 신비를 가슴에 저장시킨 것, 건강에 대한 값진 행군을 했다는 점 등 많은 소득이다.
그래서 가족 여행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국내외 가리지 않고 떠난다. 앞으로도 두 아들이 새로운 가정을 갖기 전까지는 우리와 함께 실행할 것이다.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로 생활에서 활력을 얻고 맡은 일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 가족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화합, 아름다운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