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지 말고 받아 주어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14:1-6).
14장-15장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를 “아디아포라”라고 말합니다. 아디아포라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란 뜻으로, 불변(不變)의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 각자의 신앙양심에 입각한 판단과 자유에 맡겨야할 문제들을 말합니다. 즉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명문화(明文化)되지 않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에 관한 것인데, 이에 대해 의견을 달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 안에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두 가지 신앙 사상이 있었습니다. 한편은 보수파(保守派)라 할 수 있는 사람들로써 레위기 11장에서 금지한 것들은 먹지 않았으며, 특히나 시장에서 파는 육류 중에는 우상에게 제사했던 제물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고전 8:13) 일체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월삭, 절기 등에 대해서 철저히 준수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주로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이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은 자유(自由)파라할 수 있는 사람들로써, 먹는 음식이나 절기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비교적 자유스런 사람들인데 주로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자유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을, 아직도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치한 신앙인들이라고 업신여겼고, 반면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유파에 속하는 사람들을, 저런 자들은 사이비 신자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형제는 지금 어떤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이럴 경우 사도는 어떤 판정을 내릴 것인가?
① 첫마디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1상) 합니다.
㉠ 누구를 가리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적이며 금욕적인 그들이 더 강한 신자같이 보일 터인데, “연약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것은 “행위”(行爲)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열성이나 행위 면에서는 앞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② 그렇다면 자유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강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15:1절에서는 “우리 강한 자가” 라고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 그런데 강(强)하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의 구속의 은총만을 의지하는 자, 바로 “믿음의 담대함”(딤전 3:13)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하심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 그러면 “너희가 받되” 한, 구체적인 “받아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업신여기지 말고 더불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주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성숙(成熟)한 자도 아니요, 진정으로 강한 자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아직까지 지켜 내려오던 의문(儀文)이라는 틀을 깨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 하는 것입니다.
③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判斷)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3) 합니다.
㉠ 이는 세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업신여기지 말라” 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 “판단하지 말라” 합니다.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자기 잣대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제각기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갈등을 침묵케 하는 중대한 표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아 주셨다”는 것은 그들이 구원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 속에도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연약하기는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다”는 말씀은 최후의 권위입니다. 누구도 이 권위 앞에 불복할 수가 없습니다.
④ 그래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4) 합니다.
㉠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4상) 하고 책망합니다. 그의 주인(主人)은 네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4하) 합니다. 그들이 지금은 연약하나 그들을 자라게 하시고, 강하게 하셔서, 굳게 세우실 권능이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아버지 자신이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괜찮지만, 남이 때린다면 그것은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그러하기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 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받아 주어야만 합니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아 주라는 것입니다. 받아 줄 수 있는 사람, 그가 곧 강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자”에 대해서는 받아주어라 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로 “강한 자들”을 향해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⑤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받아 준다”는 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달리 없다 하겠습니다.
㉠ 15:7절에서는,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고 권면합니다. 받아 줄려면 넓은 품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곧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는, “만일 식물로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하고 말씀합니다.
㉡ 주님은 나 같은 죄인(罪人)도 받아 주셨는데, 나는 형제를 받아주지 못하고 배척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비판하고 업신여길 것입니까?
⑥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지니라”(5) 합니다.
㉠ 먹는 문제에서 “날을 지키는” 문제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런 일은, “자기 마음에 확정(確定)할 지니라”, 즉 자기 믿음대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시대와는 달리 새 언약 하에서는 “마음에 확정”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리,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記錄)하리라”(히 8:10)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성령께서 자신을 어느 수준에까지 인도하셨든지,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믿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성전 꽃꽂이를 하는 집사님이 소재(素材)로 사용한 나무를 꺾어서 조형적인 멋을 내었습니다. 이것을 본 다른 집사님이 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꽃꽂이를 꺾어서 드릴 수 있느냐는 거지요.
㉢ 주일성수를 강조하다 보면 다른 날들, 즉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가 소홀해 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주일 중심에서 매일 중심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워 권위 있는 목회를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평신도 중심으로 평신도를 깨우자고 외치는 분도 있습니다.
⑦ 이에 대해서 사도는 정의를 내리기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 합니다.
㉠ 중심점은 한 절 안에 3번 등장하는, “주(主)를 위하여”에 있습니다. 그리고 2번 등장하는 “하나님께 감사(感謝)함”에 있습니다.
㉮ 어느 한 날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먹으며,
㉰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먹고,
㉱ 꺼림칙하여 먹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으며,
㉲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나도 주님을 위하여”, “저 사람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저 사람이 나와 같지 아니한 것은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습니다. 방법은 달라도 목적(目的)은 같기 때문에 받아 주라는 것입니다.
㉢ 이것을 알았다면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심을 통해서,
㉮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혔던 휘장을 찢어주시고,
㉯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헐어버려 주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주신 주님의 교회 내에, “네가 누구관대”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담을 쌓을 수가 있단 말이냐? 그래서 “받아주어라”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