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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고린도전서 10장 1-12절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됨이라
지상의 교회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문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지역의 교회들 가운데 고린도교회만큼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 서신은 없는데, 그 가운데는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고전8장).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지식과 함께 사랑으로 말미암은 덕을 말합니다. 지식에 따라서는 먹을 수 있지만 먹음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 안에서 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하는데(고전9장), 사도로서 마땅히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요, 복음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난 뒤 오늘 본문으로 넘어오는데,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 보면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말씀합니다. 우상 제물에 대해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우상 숭배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질에 대한 문제와 비본질에 대한 문제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본문은 구약 백성의 예를 통해 그들과 같은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이런 내용이 본문의 후반부에 나타난다면 전반부에서는 신약의 이해로 하자면 세례와 성찬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교회에게 은혜의 방편, 은혜의 표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은혜를 저버린 몇몇 사건을 통해 너희는 그런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형제들’로 부릅니다. 앞선 내용을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이 있고, 또한 음행과 관련된 사건도 있고, 그 외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 지체된 자로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알기를 원한다. 반드시 알기를 원한다. 누구도 예외 없이 주의 몸 된 교회라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 조상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때 ‘우리 조상들’은 구약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는 어느 지역에 있습니까? 유대 지역이 아닙니다. 이방 지역입니다.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는 이방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도 바울은 구약의 백성에 대하여 우리 조상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결코 혈통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합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로 하자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한 지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가(요1:12)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혈통으로는 같은 유대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 있게 된다면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지상 교회를 대상으로 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유익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가운데 들려진다고 할 때는 지상 교회가 그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라고 하는 자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롬9:6).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롬9:7). 약속을 따라 난 자, 그 약속을 참된 믿음으로 받는 자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우리 조상들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먼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다시 1절 나머지 부분부터 2절까지의 내용을 보시면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저들이 받은 은혜는 무엇인가? 첫째가 세례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물론 저들이 신약의 세례와 같은 방식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1절에서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세례임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일단 구름 아래 있다는 것은 출애굽기 13장 21절과 22절의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출애굽기 14장에 기록된 홍해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너가게 하신 것이나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리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할 때 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세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4문은 세례에 대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어 은혜언약의 유익들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약조를 표시하고 인치는 성례라고 설명합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세례는 구원의 의미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셨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너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구원의 표이지, 구원 자체는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세례가 구원을 의미한다고 할 때 구원을 위해서는 죄를 씻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세례 안에는 그런 의미 또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의 세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막1:4, 눅3:3, 행13:24). 그러나 세례 자체에 죄를 씻는 능력이 있는가? 없습니다. 죄를 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9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가 그대에게 유익이 됨을 거룩한 세례에서 어떻게 깨닫고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물로 씻는 외형적인 의식을 제정하셨고, 또한 마치 몸의 더러운 것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듯이, 내가 그의 피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의 오염, 즉 나의 모든 죄를 확실히 씻음 받는다는 약속을 덧붙이셨습니다. 세례는 물이라는 표를 가지고 씻는다는 외적 의식입니다. 그 의식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확실히 씻음 받는다는 약속을 인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책이 깨끗하게 씻겨 집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죄에 대하여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하여는 점점 살도록 하시는데, 이 일을 위하여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함과 오염을 점진적으로 제거하십니다. 이 약속의 인이 지금 세례라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에게 속하여’라고 말씀하는데, 당시 그들의 지도자로 모세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는데, 이런 그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어 3절과 4절에서는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조상들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첫 번째 세례를 말했다면 두 번째는 성찬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이 구약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의미에서 ‘신령한’ 혹은 ‘영적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동일하게 음식과 관련해서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라고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신령한 음식이라고 하는 만큼 이것 역시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음식의 경우 만나와 관련된 내용이고, 신령한 음료의 경우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신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누구를 예표 한 것인가? 그리스도를 예표 한 것입니다. 이때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있는데, 반석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리 저리 이동할 때 계속해서 그들을 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역사하신 하나님, 그가 사실을 그들을 함께 하셨습니다. 때문에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의 역사가 끊이지 않았다는 뜻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매일 만나를 먹이신 것처럼 물 또한 계속해서 공급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가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사건 이후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말씀인데, 우선 48절 이하에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6:48-51) 52절 이하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2-54)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찬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바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6문은 성찬에 대하여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의 정하심을 따라 떡과 포도주를 주고 받음으로 그의 죽으심이 증거 되는 성례라고 설명합니다. 성찬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체적이며 정욕적인 방식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고 말하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과 함께 그들의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은혜 가운데 자라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세례가 물로 씻어 은혜언약의 유익들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약조를 표시하고 인치는 성례라면, 성찬은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과 함께 그들의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은혜 가운데 자라게 하는 성례입니다. 주시는 것은 만나요 반석의 물이지만 그것을 통해 알리고자 하신 바는 신령한 내용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몸을 먹음으로, 그의 피를 마심으로, 그러나 실제 몸, 실제 피가 아니라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으로,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들과 함께 그들의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은혜 가운데 자라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백성들, 다시 말해 우리의 조상들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역사를 맛보았고, 또한 홍해를 건넜으며, 광야 40년 동안 구름 기둥 아래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세례 받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홍해 사건과 구름 기둥 두 가지로 표현했다고 해서 두 번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사건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바가 세례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또한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광야이기에 그들 스스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에 참여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그들은 신약 백성처럼 세례를 받은 자들이고, 또한 성찬에도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시면서 만나를 주신 목적을 말씀하기도 하셨는데,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먹이시는 것은 육체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교훈하시고 또한 그런 교훈으로 유익하게 하고자 하시는 바는 육체에 제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영혼에게까지 미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것을 교훈하시는 바가 영혼에까지 미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함이 마땅합니까? 만나라는 음식을 먹으면서 말씀으로 사는 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세례의 의미와 성찬의 의미가 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한다면 비록 구약 시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아니지만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승천하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바라보면 살아야 합니다. 40년 광야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면서 먹고 마시게 하셨다면 늘 순종과 감사와 소망을 가지고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신약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절로 오시면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멸망 받지 않는 게 아닙니다. 성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멸망 받지 않는 게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와 성찬, 다시 말해 성례는 구원과 관련된 표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외적으로는 세례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할 수도 있고, 또한 홍해를 건널 수도 있고, 구름 기둥 아래에서 거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만나를 먹을 수도 있고, 반석에서 나오도록 하는 물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적으로까지 참여하도록 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 할 때 광야에서 죽으면, 다시 말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구원 자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모세조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 예수님께서 변형되실 때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구원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광야에서 죽었다고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영원한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역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영원한 구원의 대상인가? 그렇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광야든, 가나안 땅이든 지상의 교회일 뿐입니다. 지상에 교회라는 것은 알곡만 있는 게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신약의 성례인 세례의 의미를 담고 있는 홍해를 건너고 또 구름 아래에 있었지만, 나아가 성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한번만이 아니라 40년 동안 내내 먹고 마실 수 있었지만,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합당한 것을 내놓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할만한 일들을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기뻐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을 광야에서 멸하신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멸망을 받았다고 할 때 원문을 살려 말하자면 광야에서 죽어 이리 저리 흩뿌려지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세례도 받고 성찬에도 참여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표도 받고 그의 은혜 가운데 있는 듯 했지만, 그 은혜를 저버림으로 광야에서 죽음을 맛보게 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구약 백성에 대하여 말하는가?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나아가 은혜의 표도 받았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가? 너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교훈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왜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는가?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악을 즐겨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 앞에 내놓은 것은 무엇인가? 악이요 죄를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이것을 알고, 아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거울로 삼아 동일한 길을 걷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7절 이하 10절을 통해 네 가지 사건을 언급하는데, 먼저 7절을 보시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2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론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곧 자신들을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십니다. 그것이 곧 우상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상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상은 싫어하십니다. 싫어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들의 손을 통해 저들을 죽이시는데, 이때 죽은 수가 삼천 명 가량 됩니다.
이 우상숭배와 관련해 본문은 출애굽기 32장 6절 후반부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이것은 우상숭배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반부에는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난 뒤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거짓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거짓예배와 함께 그들은 축제를 열었는데, 그 모습이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축제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거짓예배 자체도 받으실 수 없는데, 그런 예배와 함께 축제가 있다고 할 때 그런 축제에 어떻게 함께 하실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저들은 거짓예배와 함께 축제를 엽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데, 저들만 기뻐합니다. 예배와 함께 축제를 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셨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예배를 어떻게 받으실 수 있으며, 저들이 기뻐하는 일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예배의 요소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과 상관없이 인간의 것으로 채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것도 저것도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외에 허락하신 바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정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를 따른 열심, 진리를 따른 정성이 아니면 받으실 수 없습니다. 열심과 정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 주께서 명하신 것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열심과 정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예배가 진리보다 열심과 정성만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우상숭배 내용 안에 이런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 앞에서 예배도 드렸지만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우리 조상과 같이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어 8절에 보시면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 권면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지만(14절) 그와 같은 일에 대하여 몇 가지 더 언급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음행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의 문제 가운데 음행에 대한 것도 있었기에 이 문제를 여기서 다시금 언급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건은 민수기 25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한 사건입니다. 민수기 25장과 비교할 때 사도 바울은 이만 삼천 명이 죽었다고 말하는 반면, 민수기에서는 이만 사천 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런 차이 때문에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하여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성경은 원본이 아니라 사본입니다. 사본 상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어떤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나 무건들의 수를 개략적으로 말하거나, 사람들이 그 수를 여러 가지로 말할 때에 어떤 때에는 이 수를, 어떤 때에는 저 수를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런 수의 차이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모압 여자들과 음행한 사건과 관련해 민수기에서는 단순히 음행 사건만 말하지 않고 모압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여 함께 제사하게 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하게 된 것까지 말씀합니다. 이방 여자와의 음행도 문제지만 그들에게 속하여 그들의 신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죄가 하나의 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죄에까지 미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간음죄가 그렇습니다.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 살인죄까지 저지르고, 또 거짓을 말하기까지 하는 일이 있었는데, 지금 사도 바울은 이런 사건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우리도 저들과 같이 음행하는 자가 되지 말자고 권면합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민수기 21장에 있는 사건으로 광야 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시험’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불신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을 보면 도저히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신실합니까? 과연 하나님께 능력이 있습니까?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과연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불신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시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불신한 저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는데,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물린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체험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불뱀 모양으로 만든 놋뱀을 장대에 달아 보게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것으로 요한복음 3장에서 소개되기도 하는데(요3:14), 우리말 성경에서는 ‘주를 시험하다가’ 이렇게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로 되어 있습니다. 즉 저들의 시험과 불신은 바로 저들을 위해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불신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불신했던 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저들은 끊임없이 시험하고 불신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긍휼이 있기를 기도하였던 겁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광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잘못으로 광야의 길을 걷게 되는, 징계를 받는 형태로 있었지만, 그런 광야 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을 교훈 삼아 우리는 그들과 같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고 권합니다.
마지막으로 10절을 보시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원망에 대한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가나안 정탐과 관련된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또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의 반역, 즉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원망은 비일비재합니다. 먹을 것 없다고 원망, 마실 것 없다고 원망, 더 좋은 것을 먹지 못한다고 원망, 또 광야 길의 불편함 때문에 원망, 계속되는 원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광야 40년이 저들의 불신에 대한 형벌이요, 저들의 원망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광야 40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되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나타내셨던 겁니다. 형벌인데, 진노인데, 그런 형벌과 진노 속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우리도 저들과 같이 원망하는 자가 되지 말자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다시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네 가지 사건만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약 성경의 모든 기록이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나아가 다른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세를 만난 모든 성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경계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서 보자면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까지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성경 기록이 우리의 본보기요,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치고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또 이러한 모든 기록들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은 그 길을 답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그런 은혜의 표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주셨다고 할 때 그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또한 선택의 불변성, 그런 불변성 때문에 견인의 은총까지 베푸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고 고백한다고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죄책이 제거되었음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패와 오염이 점진적으로 제거될 것 또한 믿습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제거 되는 것이지, 한순간 모든 것이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성도가 이 땅에서 계속해서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을 싸우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고, 특별히 성경의 기록된 교훈을 통해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죄를 지음으로 멸망한 일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거울이 되어 우리는 그러한 자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선 줄로 생각하는 자에 대한 부류도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들에 대하여 바르고 건전한 판단이나 생각이 될 수도 있고, 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일 수도 있고, 또는 거룩한 삶과 행실 가운데 견고히 서 있는지의 여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으로, 그리고 그런 신앙 안에 하나님의 선택과 선택의 불변성, 견인의 은총이라는 내용이 선 줄로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구약 백성들 그리고 신약 시대 유대인들에게 있어 선 줄로 생각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선민사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처럼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선 줄로 생각한 그들이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불변성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라, 영원 전에 뜻하신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선택하셨다면 그 선택하신 바가 취소되는 일이 없지만, 지상의 교회로 부름 받은 자들 안에 알곡만 있는 게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자들, 그래서 그들이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된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유기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유기자만 넘어지는가? 택자라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죽음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드신 결과로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형벌이 동시에 은혜가 되도록 하시는 것으로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통해 주의 몸 된 교회는 이것을 본보기로 삼아, 이것을 거울로 삼아 교훈을 받고 경게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구약 백성들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거나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는 형태로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또한 그것으로 성찬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형식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저들이 경험한 기적과 저들이 경험한 은혜를 동일하게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과도 같은 내용, 이런 은혜의 내용을 접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은혜의 표를 받고서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죄의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책은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부패와 오염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더욱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돌아보되 말씀이라는 거울로 돌아봐야 합니다. 구약의 실제 사건을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저들이 가지고 있던 본성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저들의 죄악은 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표를 받으면서도 넘어지는 일이 있다면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더욱 주 앞에서, 그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또한 그렇게 나타나지 않도록 성찬을 통하여 믿음을 강화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붙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택하셨다는 것 때문에, 그 선택이 불변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견인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자의 말씀을 붙드는 것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말씀 때문에 후자의 말씀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성경이 가르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작정하시되 작정하신 바대로 되지만, 그런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전자의 말씀 때문에 후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무엇으로 섰다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일 수 있고, 그 지식에 합당한 생활일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될 때 그것이 곧 교만으로 나타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역대 왕들의 기록을 보면 남유다 왕들 가운데 처음에는 잘 하다가 후반에 못하는 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 모두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에 부합한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특히 개혁신앙을 지향한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의 교만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성찬을 통해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말은 그분 없이는 우리 스스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 백성의 경우 동일하게 세례를 통하여, 성찬을 통하여 오실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자들로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던 일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자신을 돌아보면서 넘어지지 않는 자가 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