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담 스님과 정토의 인연
1) 도선사 대웅전 아미따붇다 삼존상과 극락9품 그림
1957년부터 1960년 5월까지 해인사 주지를 맡으면서 불교정화운동에 온 힘을 쏟던 청담 스님은 나이 60살이 된 1961년 도선사 주지가 되면서 서울에서 머물게 된다. 도선 홈페이지에서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법당의 내부 벽에는 달마達磨와 혜능慧能, 청담靑潭의 영정이 그려져 있으며, 후불탱화 · 팔상도八相圖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등이 있다”고 했고, 현재 도선사에서는 마애불입상(제34호), 목 아미타불 및 대세지보살상(제191호), 석독성상(제192호), 청동종 및 일괄유물(제259호) 등 서울시 유형 문화재를 비롯해 19세기 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소 등의 성보문화재가 다수 있다고“고 했다.
언제부터 대웅전에 아미따붇다를 모셨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60살 이후 청담 스님은 마지막 입적할 때까지 10년은 매일 아미따붇다를 모시고 수행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2) 대웅전 기둥 글귀(柱聯)에 새겨진 나옹선사 아미따붇다 게송
대웅전 기둥 글귀(柱聯)도 청담 스님의 정토 수행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❶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 재하방)
아미따붇다 어느 곳에 계시는가?
❷ 盡未來際度衆生 (진미래제 도중생)
미래세가 다하도록 중생을 구원하리
❸ 着得心頭切莫念 (착득심두 절막념)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잠시도 잊지 말라
❹ 念到念窮無念處 (념도념궁 무념처)
염(아미따불)하고 염하여 염조차 사라지면
❺ 六門常放紫金光 (육문상방 자금광)
여섯 감각문에서 늘 자금 빛 놓으리
❻ 自他一時成佛道 (자타일시 성불도)
나와 남 모두 함께 불도 이루리.
6개 기둥에 걸린 위 6문장 가운데 ❶ ❸ ❹ ❺는 바로 나옹선사가 속가의 누이에게 보냈던 편지 마지막에 붙인 게송이다. 이 내용은 입적하기 3년 전 속가의 전 부인에게 간절한 편지를 쓴 청담의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3) 진주 선덕화 보살과 염불 도인 하담 스님과의 인연
여러분이 보고 있는 『극락 간 사람들』 「일제 강점기 극락 간 사람들」 10번째 이야기에 청담 스님이 『금강경』 강의할 때 소개한 ‘어렸을 때 진주에서 본 선덕화 보살 극락 간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그러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그것만 불러도 이렇게 됩니다. 아무리 뜻도 모르고 극락세계 갈 거라고 그것만 해도 공덕이 되고 정신통일이 되어 혜慧도 열립니다.“
여기서도 속가의 전 부인에게 염불을 권유한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책 『극락 간 사람들』 「해방 후 극락 간 사람들」 7번째 이야기”에서도 염불과의 진한 인연을 찾을 수 있다.
장안사에서 염불삼매를 이룬 하담 스님이 중생에게 회향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극장 선전원처럼 ‘나무아미타불’을 슨 샌드위치 판을 앞뒤로 걸치고 서울을 누빌 때 거처가 바로 청담 스님이 주지로 있던 도선사이다. 그의 자가 법산 스님이 염불하다 천안통을 얻었을 때도 청담 스님은 “보이더라도 일체 신경 쓰지 말고 아미타불 일념에만 빠져라.”라고 지도해 주었다. 하담 스님이 말년에 부산 범어사에서 극락에 갈 때 보여준 고고한 경지에 그 절 스님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했으나, 청담 스님은 이미 서울에서 하담 스님의 경지를 알았고, 염불을 통해서도 일념과 무념을 이루고 극락 가서 불퇴전에 이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돌아가자 돌아가, 내 고장 내게로! 나무아미타불!
청담 스님이 11월 15일 열반하시고 나서 19일 종단장을 하기 전날 신아일보는 다음 같은 글을 올려 청담 스님을 기렸다.
나는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따위의 모든 착각을 다 버리고라도
나는 내 고장인 내게로 돌아와야 한다.
나의 영겁의 욕구이든
영원과 완전과 그리고
이 존귀한 자유 때문에!
그리고 저 한없는 중생들의
산 생명 그 일 때문에!
나는 절대로 그저 앉아
참을 수는 없다.
돌아가자 돌아가!
내 고장! 내게로!
돌아가자! 돌아가!
객지에서는 의지할 곳이 없다.
고생만으로 짓밟히게 된다.
돌아가자 돌아가!
내 고장
내게로!
나무아미타불!
<나의 인생관 「마음에 비친」 중에서, 1971년 11월 18일 「신아일보」>
엮은이는 이 마지막 ‘나무아미타불’이 그냥 관례에 따라 붙인 후렴이 아니라 청담 스님의 참마음이라고 본다.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첫댓글
엮은이는 이 마지막 ‘나무아미타불’이 그냥 관례에 따라 붙인 후렴이 아니라 청담 스님의 참마음이라고 본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