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3부 24
레빈이 건초 더미 위에서 지새운 밤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일궈 온 농사일이 꺼림칙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모든 흥미가 사라져 버렸다. 엄청난 풍작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처럼 농민들과의 관계에 실패를 거듭하고 불화가 잦았던 적이 없었다고,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와 적대적 관계의 원인을 그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노동을 하며 그 매력을 맛보면서 농부들과 친밀해지고, 그들과 그들의 생활을 부러워하며 그러한 생활 속으로 투신하고 싶어진 것, 그리고 그날 밤 한갓 공상이 아닌 버젓한 계획으로서 그러한 소망의 구체적인 방법을 구상했던 것, 이 모든 것이 농사일에 대한 그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에 그는 이제 농사일에 대해 예전과 같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으며,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 깔려 있던 일꾼들과의 불편한 관계 또한 직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빠바 같은 우량종 암소들, 거름을 뿌리고 쟁기질한 땅, 버드나무 가지로 울타리를 친 아홉 구역의 평지, 90제샤찌나에 걸쳐서 깊게 갈아엎은 거름, 이랑 파종기 등,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에 의해서, 혹은 그에게 공감하는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멋졌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는 분명하게 깨달았다(노동자를 농업의 주된 요소로 보는 그의 저술 작업이 이 점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농사일이라는 것은 단지 그와 일꾼들 사이의 잔혹하고 끈질긴 투쟁일 뿐이었으며 그 싸움의 한편, 즉 그의 편에는 모든 것을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기준에 맞추어 개조하고자 하는 열렬한 지향이, 다른 편에는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 투쟁 속에서 그가 깨달은 바는, 한쪽 편에서 아무리 집요하게 힘을 쏟는다 해도 다른 편에서 무위와 무계획으로 일관하는 한, 농사일은 주인 없이 굴러가고 훌륭한 농기구와 가축과 토지는 무용지물이 될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일에 쏟은 정력이 헛수고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그가 해온 농사일의 의미가 스스로에게 분명해진 지금에 와서는 정력을 쏟아부었던 목표 자체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던가? 그는 단 한 푼이라도 이익을 내려고 분투한 반면(안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노력을 덜 쏟으면 노동자들에게 지불할 돈이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농부들은 평온하고 쾌적하게, 즉 몸에 밴 대로 일하기를 고집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노동자들 각자가 최대한의 성과를 내고, 키와 써레와 탈곡기를 망가뜨리지 앟고, 각자 자신이 하는 일을 꼼꼼히 살피도록 주의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최대한 쾌적하게, 쉬어 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걱정 근심 없이, 마음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자 했다. 올여름 레빈은 모든 과정에서 그 사실을 절감했다. 파종에 도움이 안 되는 잡초와 쑥이 무성한 질 나쁜 초지를 골라 건초용 토끼풀을 베어 오도록 사람들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자 농부들은 양질의 종자용 초지를 줄줄이 베어 놓고는 감독관이 그렇게 시켰다고 변명을 하면서, 그래도 건초는 아주 잘될 거라며 그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된 건 그쪽이 풀을 베기에 더 수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건초를 털어 말리도록 건조기를 보냈을 때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이미 망가뜨리고 말았는데, 건조기가 휘두르는 날개 밑 운전석에 멀거니 앉아 있는 게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는 말하기를, “걱정 마십쇼, 아낙네들이 끝내주게 털어 낼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쟁기들도 쓸모라곤 없었으니, 치켜 올라간 쟁기 날을 도무지 낮출 생각을 못 하는 농부들이 무리하게 그것을 휘저어 말들을 괴롭히고 땅은 못쓰게 만들더니 레빈더러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말들은 밀밭에 방치되었는데, 어느 한 사람도 야간에 보초를 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라고 일렀음에도 일꾼들은 교대로 보초를 서더니 하루 종일 일을 한 반까가 결국 잠들어 버렸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답시고 한다는 말이 “뜻대로 처분하시라”는 것이었다. 세 마리의 우량종 새끼 암소를 잘못 먹여서 병이 들게 만든 적도 있었는데, 물터도 마련해 주지 않고 새로 자란 토끼풀밭에 풀어놓은 탓이었다. 그러고는 토끼풀 때문에 송아지들이 부어올랐다는 건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은 채, 그를 안심시킬 요량으로 이웃집에서는 112마리를 사흘씩이나 풀어놓았다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 모든 사건은 누군가 레빈과 그의 농사일에 악감정을 품은 탓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빈도 잘 알고 있는 바, 다들 그를 좋아했고 ‘순박한 나리’라고 여겼다(그것은 대단한 찬사였다). 일이 그렇게 된 건 그저 그들이 즐겁고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레빈의 관심사가 그들에게는 낯설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당한 이익에 어쩔 수 없이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레빈은 농사일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던 터였다. 그는 보트에 물이 차는 것을 알면서도 구멍을 찾으려 들지 않았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지금껏 꾸려 온 농사일에 흥미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혐오감마저 들었으며, 따라서 더 이상은 그 일을 해나갈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키티 셰르바쯔까야가 30베르스따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오블론스까야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레빈더러 자기네 집으로 와달라고 청했었다. 여동생에게 다시 청혼하러 오라는 얘기였는데, 그러면서 넌지시 동생이 이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는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키티 셰르바쯔까야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레빈 또한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오블론스까야의 집으로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가 그를 거절한 사건이 두 사람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스스로 원했던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녀더러 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할 수는 없어.’ 그는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이 그로 하여금 그녀를 냉담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원망의 감정 없이는 도저히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거야. 악의없이 그녀를 쳐다볼 수는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 쪽에서도 당연히 나를 더욱 증오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한테서 그런 말을 들은 마당에 내가 어떻게 거길 찾아가겠어? 과연 내가 그녀에게서 들은 얘기를 모르는 체할 수 있겠어? 넓은 아량으로 찾아가서 그녀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푼다고? 그녀 앞에서 용서를 베풀고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는 배역을 연기한단 말이지!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도대체 왜 나한테 그 얘기를 한 걸까? 그녀를 우연히 만난다면야, 그땐 모든 게 저절로 굴러가겠지.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그에게 키티가 사용할 여성용 안장을 빌려달라는 전갈을 보내기까지 했다. ‘댁에 여성용 안장을 갖고 계시다면서요? 바라건대, 직접 가져다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식의 언행을 레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영리하고 섬세한 여자가 자기 동생을 그런 식으로 멸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열 통이나 편지를 썼다가 모두 찢어 버렸다. 그러고는 아무런 답신도 없이 안장만 보냈다. 가겠노라고 쓰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갈 수 없다고, 혹은 출타할 예정이라고 쓰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그는 무언가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괴감을 안고서 답신 없이 안장만 보낸 다음, 이튿날 싫증이 난 농사일을 모조리 영지 관리인에게 떠넘기고는 멀리 떨어진 군에 사는 친구 스비야시스끼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근처에는 도요새가 서식하는 근사한 늪지가 있었는데, 얼마 전 그가 자기 집에 와서 머물다 가겠다는 오랜 약속을 지키라고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수로프스끼군의 도요새 늪지는 오래전부터 레빈의 마음을 끌었지만, 그는 매번 농사일 때문에 여행을 미루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웃해 있는 셰르바쯔끼 일가의 여인들로부터, 무엇보다도 농사일로부터 벗어나 그 어떤 슬픔 속에서도 최고의 위안을 안겨 주는 것, 바로 사냥을 하러 그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