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부스러기
이승애
거대한 쓰레기더미가 관객을 노려본다. 매우 어둡고 음울한 눈빛이다. 샹들리에조차 빛의 아름다움을 발산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매달려 있다. 그 빛 아래 60여 년 묵은 먼지로 덧칠해진 짙은 회색의 쓰레기더미가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널브러져 있다.
자료를 찾다 우연히 2019 청주 공예비엔날레에 전시되었던 강홍석 작가의 쓰레기 작품 ‘Strange But All Ours(우리 모두의 것-낯선)’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60여 년 동안 연초제조창 동부 창고 37동에 쌓여 있던 온갖 쓰레기를 모아 특별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이 작품을 만든 이유는 ‘지나친 자본주의로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부풀어 올랐고, 멈출 수 없는 욕망은 쓰레기를 양산해내고 있다. 결국 쓰레기를 줄이려면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한다.
작품 구성은 ‘먼지 궁전’ ‘쓰레기 궁전’ ‘포토존’ 세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조금씩 다른 내용을 담았다. 오랜 세월 어둠에 길들여진 갖가지 물건들은 조명을 거부하듯 앵돌아져 스스로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먼지 궁전 한복판에는 세워진 낡은 손수레 윗부분에 밧줄을 얼키설키 엮어 부처상을 모셨다. 그런데 부처의 모습이 온전치 않다. 정수리에서부터 무언가가 흘러내려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종교의 현주소를 말하고 싶은 것일까. 신앙이 부재 하는 종교 안에서 얽히고설킨 인간의 모습이 겹쳐온다. 좌정한 부처상 오른쪽 다리에 작은 성모상이 서 있다. 이 묘한 결합의 의미를 찾으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해보지만,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러다 문득 종교는 하나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나지만, 하나 이길 거부하고 편편이 조각난 채 분쟁에 이르는 종교가 세력 확장의 전쟁을 치른다. 진정한 신앙을 잃어버린 세상에 구원이 있을 수가 있는지. 낡은 것들을 이용해 인간의 천태만상을 부각시켜놓은 작가의 의중을 알고 싶어 골똘해진다.
화면을 바꿔 다른 작품을 본다. 쓰레기더미 중간 부분에 작은 공간을 내고 전화번호부로 만든 부처상을 모셨다. 과거 속에 묻혔던 인물들과 수많은 업종이 부처를 통해 소생되었다. 부처는 그들의 존재 여부나 신분 따위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직 품어 안음으로써 그들과 합체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들 또한 모든 욕망을 벗어놓고 순수한 자신을 찾았을까. 경쟁도, 욕심도, 귀천도 존재하지 않는 평등 앞에서 출렁이던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 고요함과 달리 깨어진 유리 조각 위에 좌정한 부처상은 내 마음을 내리누른다. 부처는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유리 조각들 위에서 상처를 보듬듯 가만히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관람객 몇이 부처상 앞에 마음 한 자락씩 얹어놓고 싶었는지 지폐를 두고 갔다. 그 옆에서 쓰레기더미가 숨을 죽이고 있다.
집 안 곳곳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돌아본다.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물건들이 수두룩하다. 개중에는 필요해서 들여놓은 것도 있지만, 순간의 욕심으로 들여놓은 것도 있다. 옷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옷들, 책, 가방, 신발, 온갖 잡동사니들이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덤처럼 누워있다. 나에게 필요가 없다면 재생의 기회를 주어야겠다.
사제였던 작은오빠가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에 안겼다. 유품을 정리하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평소 그냥 지나치는 게 없었던 오빠는 교회 전례에 관한 자료뿐 아니라 건축, 식물, 문화, 교육, 역사, 철학 등 수십여 가지에 이르는 자료집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 뚝눈으로 봐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어 보였다. 너무 귀한 자료들이라 교구에 기증하려고 하였으나 필요 없다고 했다. 그제야 오빠가 평생 모아온 모든 것들 또한 아무 의미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에겐 보물이었고, 또 누구에겐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들, 언젠가는 재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라는 기대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쓰레기더미 앞에 놓인 금색 의자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욕망의 배설물을 뒤로하고 금색 의자에 앉은 기분은 어떠할까? 단지 포만감만 느낀다면 주어진 삶에 대한 배신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비닐봉지 몇 장과 플라스틱 용기 몇 개, 이래저래 생겨난 잡다한 쓰레기를 아무 생각 없이 버리고 왔다. 내 소유욕이 배설한 쓰레기들, 내 삶의 부스러기가 늘어날수록 나도 무감해질까 봐 겁이 난다.
우측 한편의 풍경은 아주 복합적이다. 한때는 유용하게 쓰였을 생활용품들이 시커멓게 그을려 벽면을 그득 채웠다. 그중 두드러지는 것은 4시를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지만 기억 저편에 머문 채 꼼짝하지 않는다. 미래로 향하지 못하는 시곗바늘이 요지부동한 인간의 표상처럼 느껴진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려는데 욕망의 배설물 덩어리가 지구를 삼킬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첫댓글 맞아요.
삶 자체가 부스러기를 만들고 쉽게 내던지는 일상이지요.
필요할 땐 욕심 부리고 귀히 여기다가 흔적없이 내치는 이기적인 산물인 부스러기의 존재를 멋진 글로 탄생시켰네요.
쓰레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저는 강혹석 작가님의 작품이 많은 울림을 주었어요. 좋은 평 고맙습니다.
거대한 쓰레기는 우리의 1차적인 욕망의 배설이지만 욕망은 점점 커져 우리 스스로를 삼킬지도 모릅니다.
강홍석 작가의 쓰레기 작품에서 삶을 끌어올려 우리들 앞에 툭 던져 놓은 것이
그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한참 동안 글 속에 있게 만듭니다.
11월호에 문제작으로 뜰 것 같은 예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평이 너무 과분한대도 기분은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삶의 부스러기는 빨리 치워버려야해요.
언제 다시 소용될까 갈무리해보지만 오랜세월 구석을 차지하고 세월의 때만 입기 십상이지요.
집안을 둘러봅니다.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끌어안고 사는지!
마음 안에는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내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오늘은 맑은 가을 고운 단풍을 보며 나를 정화시켜야겠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 또한 쓰레기를 잔뜩 끌어안고 살아요. 마음에 쌓인 쓰레기 먼저 처분해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생전에 오빠가 평생 모아 온 것들이 주인을 잃자 쓰레기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살아있는 자의 것은 살아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는 말이겠죠. 곧 쓰레기가 될 잡동사니가 제 방에도 가득하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