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도 죄인가
증 언 자 이태성(남)
생년월일 :1963(당시 나이 17세)
직 업 .고등학생(현재 설계사무소 건축기사)
조사일시 ,1989. 1
개요
1980년 당시 전일실업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이태성 씨는 5월 21일 오후 3시경 노동청 후문에서 총상을 당했다.
도청 앞에서 총상
1980년 당시 나는 전일실업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고향은 함평이었지만 국민학교 2학년 때 행상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무척 열심히 일하셨는데도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어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게을러서 못산다는 말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내성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한 아이로 자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정치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밖으로 표현할 줄은 몰랐다. 1950년 5월 멀리서 대학생들의 시위대열을 바라만 보곤했다.5월 18일은 일요일이라 풍향동 집에서 쉬고 있는데 동네가 뒤숭숭해지더니 친구들이 찾아와 시내에 난리가 났다면서 공수부대가 대학생 차림의 젊은이는 무조건 잡아 간다고 했다.다음날(19일) 학교에 갔는데 교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전날 사내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살벌한 만행을 이야기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수업이 시작됐는데도 선생님들은 들어오시질 않았다. 대학생 형과 누나를 둔 아이들의 걱정소리 우리도 같이 들고일어나야 된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오가는데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휴교령이 내렸다고 했다. 학교에서 연락할 때까지 집에 있으라고 했다."돌아가는 길에 한눈 팔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라. 시내는 절대 나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크게 다친다. 몸조심하고 집에만 있어라." 선생님이 신신당부를 하셨다. '큰일이 나기는 단단히 났는갑다'생각하고 집으로 왔다.
그날부터 나는 집에서 꼼짝없이 붙잡혀 지냈다. 21일 아침 일찍 친구들이 왔는데 MBC방송국이 불탔다고 했다. 전날 시내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했는데, 계엄군이 장갑차를 밀고 오자 MBC방송국 옆 전자제품 상사에서 전자제품을 끄집어내 바리케이드를 쳤으나 그대로 직진해 몇 사람들이 깔려서 죽기도 했다고 했다. 호기심이 생겨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식구들 몰래 친구들과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날 나는 오전 내내 시민군이 타고 다니는 버스에 올라타 시내에 돌아다니다가 1시 30분경 광주소방서 앞에서 내리는데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현대예식장 부근에 이르렀을때 다리에 총상을 입은 50대 남자와 머리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도청 쪽으로 가는 건 위험할 것 같아서 전남여고를 거쳐 노동청 앞으로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전두환이 물러가라'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 틈에 끼여 구호를 외쳤다.
앞에서는 시민군이 탄 장갑차가 도청을 향해 밀고 들어가려 시도하고 있었다. 1시간여동안 구호를 외치고노래를 부르며 서 있는데 두 발의 총성이 들렸다. 총소리가 나자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길가나 건물 밑으로 숨었다. 순식간에 도로가 텅 비었다. 아무도 총에 맞은사람이 없어 시민들에게 계엄군이 위협용으로 쏜 공포탄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도로로 나왔다. 다시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탕'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있던 교련복을 입은 학생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공포탄이 아닌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스치자 본능적으로 도로 바닥에 엎드려 인도 쪽으로 기어갔다. 두 번째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내 오른쪽 둔부를 스치고 지나갔다.쓰러지면서 보니 연이어 세번째 총알이 날아와 내 옆에 있던 꼬마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보다 먼저 총에 맞고 쓰러진 교련복을 입은 학생을 둘러보았다.
그 학생의 부상 정도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그 학생은 배에 총을 맞았는지 창자가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손을 부르르 떨면서 의식을 잃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소름이 끼치고 오장육부가 뒤 집어지는 것같이 속이 뒤집혔다. 시민들이 달려와 그 학생을 전남대병원으로 옮겨가고, 나와 꼬마는 부근의 김화중정형외과로 옮겨졌다.병원에는 광주고속 운전사라는 사람도 총에 맞고 입원해 있었다. 병원에서 오후 4, 5시경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한참 동안 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에 있던 광주고속 운전사 아저씨와 나는 무작정 병원에 있다가 무슨 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로 부축하여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는 시민군 차를 세워 풍향등 쪽으로 데려다주라고 부탁했으나 그쪽에는 계엄군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우리 둘은 시외버스공용터미날 앞에서 내려 어느 내과병원으로 들어갔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의 보호자들이 밥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아버님이 자전거를 타고오셨다. 나는 자전거 뒤에 실려 집으로 갔다. 22일 가택수사를 한다는 소문이 있어 벽장 속에 숨어 며칠을 지냈다. 그런데 총알이 스쳐간 오른쪽 다리의 통증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처음 총에 맞았을 때 얼마나 상처가 컸던지 찢어진 사이로 내 손이 쏙 들어갔을 정도였다.점점 고통이 심해지자 김화중외과를 서너 번 더 다녔다. 31일 병원에서 조선대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조선대병원에서는 진찰을 해보더니 상태가 안 좋다고 꿰맨 곳을 다시 뜯고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의사가 신고를 할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신고하지 말라고 했다. 신고를 하면 무료로 치료를 해주지만 신고를 하지 않으면 본인이 치료비를 부담해야 했다.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형편인데도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 내장래에 해가 있을까봐 신고를 하지 않고 치료비를 내셨다.
설계사무소에 취업
그 뒤 집에서 조선대병원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풍향동에 있는 이 동진외과에서 학교에 나가지 못한 채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 한 달이 지난 뒤 학교에 갔는데 오른쪽다리가 아파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매일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선생님들에게 자세가 불량하다고 야단을 자주 맞았다. 전에는 착실하게 학교를 다녀 선생님들에게 야단을 맞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사정을 모르고 꾸지람하시는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답답했다. 할수없이 담임선생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렸다가 교장선생님에게 불려다녔다. 다치게 된 경우와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자술서를 쓰게 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나에게, "너는 더럽게 재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돌아다녔어도 괜찮더라."고 놀려댔다. 나는 말처럼 재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됐으면 병신이 되거나 죽었을 텐데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병원에는 7월 31일까지 다니면서 치료를 했다. 3학년이 되면서 실습을 나갔는데,교감선생님이 나를 이쁘게 봤던지 한국건축설계사무소에 추천을 해주셨다. 원래는 현장으로 가고 싶었지만 몸이 버티어낼 것 같지 않아 앉아서 일하는 설계사무소에 지금까지 계속 다니고 있다. 그 뒤 상무대에서 방위를 받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군무원(기술문관)이 1980년 5 · 15 때 정보활동을 했다고 했다.1987년에야 5 · 18 부상자회가 있다는 걸 알고 박옥재부상자회에 신고를 했다. 작년 국회의원 선거전 때 어린이대공원에서 단합대회를 가진다고 나오라고 하길래 처음으로 나갔다.
그런데 회장이라는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지대섭이가 우리 단합대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서 지대섭이를 지지하라고 해서 다른 회원들하고 싸움이 붙었다. 나는 아는 사람도 없고 분위기에 적응하기도 힘들어 어리벙벙하게 서 있었다. 그때 5 · 18 민중항쟁동지 회(이하오항동)에서 두 사람이 모임 취재차 나왔다가 싸우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자 회장단에서 이번에는 그 사람들과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옛말에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싸움은 말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오고 갔다. 나는 간신히 싸움을 말려놓고 오항동에서 온 사람들한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 봤다.그 사람들은 부상자회가 양분된 이야기에서부터 그동안 박옥재 회장이 해왔던 일에 대해서 1시간 가량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그 다음날부터 오항동에 가입하여 매달 월례회에 나가고 있다. 작년 1988년 5월 9일은 내 생애에 있어서 잊지 못할 날이다. 내 친구 형인 신영일 씨가 돌아가신 날이다. 그 친구하고는 제나 친한 사이인데도 나는 영일이형이 운동을 하는지 몰랐다. 기독병원 영안실에 가서야 형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아, 운동하는 사람은 뭔가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라는 것이 운동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표나지 않게·,운동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1980년 5 · 18 민중항쟁의 부상자이지만 참여하지도 못하고 부상만 당한 것이 못내 아쉽고 부끄러울 뿐이다. 하긴 그때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고, 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보다는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울분과 분노가 더 컸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설계사무소도 민주화 바람을 타 설계사무소 연합노조를 만들었다. 광주에만 설계사무소가 105군데나 된다. 직원이 적게는 2명에서 20여명이 되는데 1987년 연합노조를 결성할 수가 있었다. 105인이나 되는 사업주를 대상으로 지금 파업을 하고 있는데 사업주들의 파괴,방해 공작으로 파업이 끝나고 나면 타격이 굉장히 을 것 같다. 그러나 한술 밥에 배부르겠는가.차근차근 한 가지씩 해나간다는 생각으로 밀고 나갈 생각이다.(조사 · 정리 이현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