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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명 영화배우가 교통사고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공인이나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다시 한 번 삶의 의미에 대해, 죽음의 힘에 대해 되새겨보게 한다. 후배와 함께 이 당혹스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행복해봐야 하는데…” “너, 행복한 순간 많았어?”
“아니에요. 저는 행복한 순간이 한순간도 없었어요.”
“내가 보기엔 꽤 많았는데…” “아니에요. 로맨스가 없잖아요.”
후배는 갓 마흔을 넘긴 싱글 여성 그리스도인이다. 그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에 걸쳐 연애를 했지만 별로 만족스럽지도 설레지도 않은 연애였다고 했다. 연인과 헤어진 이후 주로 2~3년에 한 명씩 유명한 남자 연예인을 대상으로 로맨틱한 감정의 결핍을 농반진반으로 메워나갔다. 야근은 물론 주말 근무까지 해야 하는 과도한 업무량, 마음을 나누지 않고 각기 정글 속 생존에 골몰하는 직장 동료들, 외로움을 가중시키는 가정사 가운데서 살아남는 길은 로맨스의 환상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녀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대인들은 숨 한번 깊이 고를 시간 없이 쫓겨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왜 이렇게 달리고 있지?’ 생각해볼 틈도 없다. 퇴근을 하고 나면 육체적, 심리적 소진 때문에 얼른 쉬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 외롭고 고단한 사회생활 속에서 싱글들은 문득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사랑이 있다면, 로맨스가 있다면, 가족이 있다면…, 그래도 행복하지 않을까? 덜 외롭지 않을까? 이 고단함과 어려움을 좀 더 쉽게 이겨내지 않을까?
리머런스
나이가 든 싱글들은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에 따르는 책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왔기 때문에 쉽게 뛰어들지 않는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고단한 삶이란 것을 알기에 책임이라는 짐을 하나 더 어깨에 짊어지려면 불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나’라는 짐을 상대가 메어줄 것이라는 환상적 기대를 품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랑에 빠진 격렬한 감정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리머런스’ 곧 도취성 사랑이라 부른다. 첫눈에 반할 때 경험하게 되는 이런 상태가 되면 동공이 확대되고, 심장 박동이 솟구치며, 상대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 종일 가득차고, 성적 욕망과 불안정한 마음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뇌신경과학자 조나 레러의 「사랑을 지키는 법」(21세기북스)에서는 리머런스에 대한 심리학자 도로시 테노브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리머런스를 경험한 평범한 미국인 50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한 테노브는 이런 황홀한 마음 상태에 대해, 빠르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상태’로 결론 내렸다. 완벽해 보이는 커플조차 몇 년이 지나 시들해지는 것을 보면, 리머런스는 장기애착 관계를 알아보기에 믿을 만한 지표가 아니었다. 그녀는 리머런스가 사랑에 빠진 감정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진짜 사랑은 아니라고 말한다. 리머런스는 사실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감정을 진실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거나 감정 자체만을 사랑의 지표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테노브는 리머런스를 “작은 망상들이 이어져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라며, “리머런스를 끝내는 확실한 방법은 아마 확 질려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연 씨(가명)는 결혼한 지 7년 정도 된 남편과 관계가 무척 좋은 40대 초반의 여성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싱글 시절에 좋아했던 사람을 우연한 기회에 재회하게 되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다채로운 색상의 감정을 연구하길 좋아했던 세연 씨는 금세 다시 사랑에 빠졌다. 남편과 돈독한 부부애가 있음에도 그녀는 새로이 맞이하게 된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길 바랐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로맨스의 감정이 지속되는 아름다운 사랑”을 실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늘 함께 있고 생활을 나누는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큰 폭의 감정 격차를 로맨스에서는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랑은 사랑대로, 그리고 다른 남성과의 관계는 그 관계대로 두 가지 양태의 사랑을 지속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세연 씨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남성이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일이 바빴고, 로맨틱한 감정이 자신의 가정과 일보다 우선시될 정도로 연애에 충분한 에너지를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남아 있어주길 원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노력은 할 수 없었다. 세연 씨는 그를 사귀는 동안 끊임없이 동요하는 감정과 불안을 맛보아야 했기에 결국은 관계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불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리머런스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로맨스가 없어서’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을 찾아낼 수 없는 후배 역시 바로 이런 리머런스의 상태가 고단하고 여유가 없으며 외로운 생활의 탈출구가 될 것이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왜 싱글이야?
‘결혼≠사랑’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다. 결혼하지 않고 연애만 하며 사는 삶이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 TV나 영화에서는, 사랑해도 결혼하지 않는 커플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꾸준히 던지고 있다.
결혼은 정말 ‘사랑만 하면’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려면 거꾸로 왜 비혼이 늘어나고 있는지, 그 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2년 보건복지부는 기혼자, 미혼남성, 미혼여성들을 대상으로 “기혼자와 미혼자가 생각하는 비혼 및 만혼 경향의 원인”을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문항으로 제시한 “원인들”이다:
①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어려워서
② 집 장만 등 결혼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③ 비혼의 삶을 즐기려는 경향이 늘어나서
④ 시댁/처가 중심의 결혼생활이 부담스러워서
⑤ 결혼에 따르는 각종 의무와 역할이 부담스러워서
⑥ 꼭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약해져서
⑦ 교육을 받는 기간이 길어져서
⑧ 배우자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져서
⑨ 결혼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수입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아서
⑩ 결혼보다 일을 우선시 여겨서
이 문항들을 40대에 막 들어선 싱글 그리스도인 후배 둘에게 보여주고 어디에 속하는지 물었다. 남자 후배는 ①,②,⑧,⑨를, 여자 후배는 ①,②,④,⑤,⑦,⑧,⑨를 들었다. 둘 다 외적으로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특히 여자 후배는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에 안정적인 직장으로 보이는 곳에 다니고 있었다. 여자 후배에게 ①을 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본인 직장이 안정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라는 반문이 돌아왔다.
한 교회의 싱글 소그룹에 속해 있는 30대 후반의 남성은 “여성과 만남을 가져도 결혼을 생각하기만 하면 감정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결혼이라는 것이 너무 큰 책임으로 와 닿아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거’라는 대안은 왜 교회 안에선 이야기되지 않는지, 솔직한 의견을 내주었다. 그의 비혼 이유는 ⑤에 해당할 것이다.
또 한 명의 30대 후반 남성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면 소개팅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왜 여자들은 ‘믿음’ 하나만 본다면서 직업과 경제적 조건부터 따지는가 하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만약 두 명의 여성이 있는데 다른 모든 조건이 비슷하다면 자신도 ‘좀 더 예쁜 여성’을 소개받고 싶다고 시인했다.
위의 조사 결과에서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시댁/처가 중심의 결혼생활이 부담스러워서’와 ‘결혼에 따르는 각종 의무와 역할이 부담스러워서’라는 항목에서 나타난 남녀 비율차다. 다른 모든 항목에서는 남녀가 비슷한 비율을 보였지만, 유독 이 두 항목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20%p) 높았다. 결혼의 조건으로 우리는 ‘사랑’을 생각하지만 사실상 ‘사랑’이라는 가면 아래 수많은 조건과 기준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호의적인 감정이 생기는 것도 사실은 자신과 내적, 외적 ‘조건이 맞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언가 좋은 감정이 일어나는 데에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요건들이 작용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결혼의 본질은 사랑, 친밀성, 신뢰 같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정치경제학을 형성하는 핵심적 사회 제도”(“왜 비혼이냐고? 여성 생존 전략이다” 중에서)라고 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배우자 기준은 세상적인 모든 기준에다 신앙까지 추가된 것이에요”라고 공공연히 말하곤 한다.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결혼정보회사 역시 다를 바 없다. 기독교 신앙을 기본 전제로 하되 고객들의 경제적 조건, 사회적 지위, 외모, 나이에 따라 철저히 사람의 등급이 매겨져 있다. 게다가 교회는 그리스도인 간의 결혼을 권하지만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 쪽으로 기운다. 그리스도인 남녀 두 집단 간의 인식 불균형의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구조 가운데서도 싱글들은 결혼을 안 한 ‘죄’에 대해 자주 심문을 받는다. 지난 11월호 첫 번째 글 “싱글을 보는 법”을 읽고 독자 지민 씨(가명)는 이렇게 메일을 보내오셨다.
주변에서는 “이렇게 괜찮은데 왜 아직도 사람이 없어?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냐?”라고
합니다. (물론 저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지만, 절대 두 번째 질문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은 때로 저를 좌절하게 만들어요. ‘내가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하고요.
가끔 “이상형이 뭐야?”라는 질문을 받아요. 그럴 때면 “믿는 형제”라고 대답하지만,
뒤에 사족을 붙이게 돼요. “안 믿어도 착한 사람”, 혹은 “가족이 신앙이 있는 사람” 등과 같이
여지를 남겨두는 거죠. 혹시 내가 너무 기준이 높아서 소개도 못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세상적인 기준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어떤 자매는 “왜 굳이 모든 기준을 버리고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해?
하나님도 내가 기뻐하길 원하시지 않을까?”라는 얘기를 하기도 해요.
어느 누구도 정답을 얘기해줄 수는 없는 현실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떤 이들은 “안 괜찮은 사람 중에서 잘 골라 괜찮은 형제로 만들면 된다”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나요? 어려운 문제예요. ‘결국 결혼은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지 않아도 괜찮은가?’라는 딜레마에 계속 빠지게 돼요.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는 문제를 개인의 탓, 개인의 이슈로 돌릴 때 이런 혼란과 고통이 일어난다. 결국 비혼의 증가는 한 개인의 내면이나 성향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이 맞물린 결과로 볼 수 있다. 비혼의 배경에는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는 사회적 변화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만 객관적인 조명이 가능하다.
사회 전반의 흐름과 구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성경 말씀을 우리가 사는 맥락과 관련 없이 적용한다면 교회는 엉뚱한 고통을 양산할 수 있다. 교회의 언어는 점점 더 게토에 갇혀 사회 속에서 통용될 수 없는 언어가 되고 만다.
사회와 완전히 분리된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제자를 삼을 수 있을까? 매우 다양한 사회문화적, 심리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문제를 믿음의 문제, 개인의 문제로 돌릴 때 신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교회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성, 의존성과 주체성 사이에 놓인
내가 비혼 여성으로서 겪은 혼란은 사회의 이중 메시지로 인한 것이었다.
나는 20대에 비현실적인 사랑의 환상 속에 있었다. 불타오르는 사랑을 기다렸고 그런 사랑을 했다. 그러나 불처럼 타오르니 얼마 되지 않아 재가 되어버렸다. 리머런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한 연애였다. 아마도 그런 강렬한 감정에 대한 환상을 고수했던 이유는 내 안의 깊은 공허감과 미디어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로 보아온 가정에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군림하는 왕으로서의 아버지와 헌신적이고 다정다감하며 아버지의 말에 순응하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개인적으로 무력한 스타일이 아니었고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며 많은 일에 판단이 빠르고 분별력이 있는 분이었지만 남성 우선적인 생활양식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기도 했고 집안의 평화를 위해 남편의 말에 순종적이었다.
식탁의 반찬과 TV 채널의 주도권을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은 가장 먼저 아빠, 아빠가 안 계시면 오빠의 순서였다. 나와 엄마는 아빠와 오빠가 집에 없다면 아무거나 먹으면 되는 존재였다. 남자들이 없을 때, 특히 무서운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집안은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나는 반동적으로 더더욱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기대를 높여갔다. 어렸을 때 만화 〈캔디〉를 보며 안소니와 테리우스가 나를 지켜주길 바랐고, 〈맥가이버〉를 보며 모든 것을 척척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언젠가 나의 연인이 되길 바랐으며, 외화 미니시리즈 〈가시나무새〉의 신부님을 보고 자상하고 현명한 아버지의 역할을 해줄 사람과의 로맨스를 꿈꾸고, 영화 〈사랑을 위하여〉Dying Young를 보며 예술에 대한 무한 공감을 나눌 낭만적 연인을 상상했다.
남성에 대한 나의 기대는 두 가지였다.
위험하고 불안전한 세상의 위협요소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어 내가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 그리고 내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줄 정도로 한결같이 온전한 사랑을 퍼부어주는 것.
그때는 그것이 ‘겨우’ 두 가지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특히 남성에게 기대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나는, 매우 명석하고 “샤프해서” 지적으로 나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어 세상을 잘 알지 못해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덜어줄 남성, 또는 엄마처럼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어 상처 입기 쉬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게 도와줄 수 있는 따뜻한 품을 가진 남성 이미지에 쉽게 매혹되었다. 그것이 나의 결핍을 채워줄 것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여성을 선택하는 남자들의 기준은 심플하고도 다양했다. 남자들은 공통적으로 ‘예쁜 여자’를 좋아했지만 그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양한 매체나 간접 경험으로 보아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응석을 부려야 하는 것 같았지만 나에겐 별 소질이 없는 분야였다. 어떤 이들은 남자는 “섬기는 여자”를 좋아한다며 어디서나 날렵한 행동으로 남자들의 필요에 응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해’라고 귀동냥으로 들은 것은 각기 달랐고, 내가 다다르기도 어려울 뿐더러 별로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 내가 사귀거나 만난 남자들은 배우자에 대한 그림을 ‘아침상을 차려주는 아내’ ‘내 부모님께 잘하고 자녀들을 잘 키울 사람’ ‘참한 여자’상으로 놓고 있었다.
이런 적도 있었다. 어느 날, 학교의 남자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때 정치 드라마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뭐하냐?”고 물어 “〈제5공화국〉 보고 있어”라고 말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 그런 거 보면 시집 못 간다.” 그때 이후로 나는 정치나 사회에 관심 있으면 부담스러운 여자가 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꽤 좋은 학업 성적을 유지했고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때까지 나는 성취에 대한 욕구에 대해 지지와 격려를 받았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라는 기대 속에 남자 못지않은 자기실현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남자의 부모님께 잘하고 자녀들을 잘 돌보며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결혼 전까지 그와 내가 똑같은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결혼을 하고 나면 우린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30대 후반에 만난 한 남성은 내가 서른다섯에 유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혼을 안 하고 왜 유학을 갔냐며 자기 여동생 같았으면 크게 혼을 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또한 안전해 보이고, 대다수가 가는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내가 만났던 그런 남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여성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자가 되는 것은 내 옷이 아닌 일종의 수의를 입고 들어가 감옥 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이것은 결코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회 문화적 ‘여성성’을 받아들이거나 수행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의존과 취약성, 나약함,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이러한 ‘여성성’의 수행을 거부하는 여성에게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하며’ ‘여자답지 못하다’는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우리 사회에서 ‘눈이 높은’ 여성,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은 남성들의 눈에는
‘피곤하거나’, ‘결혼하기 쉽지 않은’ 여성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결혼제도가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여성’은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남성에게 ‘의존’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것이 소위 ‘정상적’ 여성의 규범으로 인정받는다.[2]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하고 남성이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받는 길이라고 사회적으로 주입되어왔지만 공적 영역(사회생활)에서는 그것이 취약함과 나약함으로 경멸당한다.
반면 의존성으로 정의 내려진 여성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된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여성은 ‘여자답지 못한’ ‘피곤’하고 ‘드센’ 여자가 되는 것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주체성을 수행할수록 사회적 지지를 받는 남성에 비해, 기존의 체제—남성에 대한 종속과 복종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가 되려는 여성들은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사회의 메시지로 인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성들은 과연 의존성이 없을까?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을 ‘큰아들’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성의 돌봄 노동에 의존하고 여성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들의 의존성은 베일 뒤로 감추어져 있다. 가족 부양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우월성 때문에 그들의 의존성은 가려지거나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 가운데 지적, 정서적, 영적 동반자를 만나지 못할 바에는 결혼을 하지 않거나 미루기로 선택하는 여성들은 ‘비혼’의 길로 접어든다. 제도권 안에 들어가려는 목적만으로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3]
또 다른 삶의 대안
많은 사람들은 비혼 그리스도인들이 ‘혼자’이므로 ‘외로울 것’이라는 선입견부터 갖기 마련이지만, 풍성한 삶을 사는비혼들은 언제나 긴밀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많은 것을 공유하는 친밀한 우정 관계와 신앙 공동체가 삶의 핵심적인 관계망으로 들어서 있다. 특히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비혼의 상태를 자신의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배타적인 낭만적 관계를 맺지 않아도 친밀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해주며 지지해주는 비혼자들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지현 씨(가명)는 40대 후반의 싱글 여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생활이 오롯이 자신의 중심이었다. 교회에서 신뢰관계가 견고하게 형성된 몇몇 사람들과 정서적인 유대감을 갖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상의한다. 특히, 이혼을 하고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동성친구와 친가족보다 더 가깝게 지내고 있다.
친구의 두 자녀를 자기 자녀처럼 생각하며 돌본다. 이제는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하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다. 회사에 제공한 사택에서 머물되 자기 집은 교회 공부방이나 모임에 내어준다. 멀리서 오는 손님에겐 숙소로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게 교회와 회사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40대 중반의 싱글 여성인 중선 씨(가명)는 교사다. 방학 때마다 여행을 가는 그녀는 늘 함께 여행에 동행하는, 역시나 교사인 동성친구가 있다. 얼마 전엔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이 친구와 룸메이트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친형제자매들과 조카들과도 단톡방이나 전화로 수시로 연락을 하고 만난다. 그럼에도 룸메이트인 비혼친구는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동반자다.
수연 씨(가명)는 50대에 들어선 싱글 여성이다. 홀어머니와 조카와 함께 살아오고 있다. 직장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교회의 간사로 섬길 때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는 않지만 언제나 삶은 풍요로웠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해서 먹이는 것이 큰 낙이다. 사람들과의 깊은 유대관계와 주저하지 않는 섬김으로 수연 씨를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얼마 전엔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다른 가정과 함께 여행도 다녀왔다. 어린아이들과 교감을 매우 잘하여 교회에서 한창 육아에 힘들어하는 젊은 엄마들을 도와 아이들을 돌보았다.
이들이 처음부터 비혼으로 살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 모습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소명에 집중하며, 각자 자신들의 개성이나 취향, 재능에 따라 싱글로서 자기 고유의 생활방식을 가꾸어갔다. 아마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혼은 해야지~” “왜 결혼 안 해”라고 시마다 비혼자에게 물음으로써 결혼 자체에 골몰하기보다, 대안적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고, 어떻게 하면 숱한 불순물로 오염된 ‘사랑’이라는 것을 정화시킬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데 있지 않을까?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배워야 할 기술이라고 했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아픈가」에서 “사랑 연구는 결코 지엽적인 일이 아니며 오히려 현대성의 핵심과 기초를 연구하는 일의 중심”이라고 했다. 이처럼 많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에게 사랑은 탐구의 영역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이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별이 가장 중요한 속성의 하나다.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딤후2:15)
이제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진정한 사랑에 대해 분별하며 탐색할 시간이다. CTK 2017:12
[1]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1999)을 변주한 제목이다.
[2] 성미라, “‘상호의존성’의 여성주의적 전유를 통한 주체성 연구: 20~30대 대졸 이상 비혼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2006)
[3] ‘비혼’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단체는 ‘언니네트워크’이다. 결혼이란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새로운 인식과, 결혼에 골몰하는 것보다는 다른 삶을 상상하고 만들어 보는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 가운데 ‘비혼’ 그룹이 탄생했다.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