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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 봄기행 2010. 4.10
항상 나들이를 떠날 때면 다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었다
늘 해마다 봄, 가을로 계획 된 기행
45인승의 차량이 부끄럽지 않게 많은 회원님들과
함께 하고 싶어 기다림을 꼭꼭 접었지만
늘 그때 그만큼의 자리를 비워두어야 만 했다
이번엔 조금 더 많은 회원님들이 참가해 주셔서
두근거림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겠지 하는 예쁜 욕심을
카페 한 모퉁이에 접어놓고 기다리는 시간들......
사무차장과 그리고 집시님, 미리내님이랑
부지런히 장을 보며 순간순간 왜 그렇게도 행복한지
이 부지런한 발품들이 함께 떠나는 자리를 환하게 빛내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힘들기는커녕 그냥 웃음보따리를 풀어놓는 시간...
내일은 참석치 못하신다는 회원님들께 좋은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덤으로 얹어져 맛있게 드셔 줄 회원 분들이 한사람씩 떠올려지는 순간
그냥 그렇게 행복한 장보기를 끝내고 돌아오니
갑자기 참석치 못하시게 되었다는 분이 여섯 분????
그래~ 그래도 스물네 분 정도는 되니까~~~
또 누군가 지원병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계획된 기행 날 아침
참석하기를 꺼려하는 남편을 억지로 깨워
서둘러 나간 창원시청집결지~~~
어제 바빠 메일을 확인하지 못한 불찰로 인해
이른 아침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불참소식에 안타까움과 걱정이
쏴하게 밀려왔다.
이러다간 참석인원이 스무 명도 되지 않으면 어쩌지.
회장님의 걱정 어린 얼굴을 뵈면서
일반 체념을 하면서도 맥이 풀렸다
최선을 다하지 못해 이런 일이... 자책도 하면서
일요일이었다면 함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회원님들의 말씀에
아픈 가슴을 내려놓으며
참 다 함께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쪽을 배려하면 또 한 쪽이~~~~
그런 생각도 잠시
그래도 떠나야하는 현실
열 명이 되던, 스무 명이 되던
대기된 차량을 인원 적다고 이제 취소 할 수도 없는 일~~~
가자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나들이 준비를 해 주신 회원님들을 위해서라도~~~~
창원시청에서 8명 탑승, 한전 앞에서 6명 탑승 합 14명
이제 함안에서 몇 분이 참석 하실는지 걱정이 되었다.
출발 시 전화를 드리니 또 두 분이 건강상 못 가시겠단다.
큰일 났다. 걱정을 안고 함주공원 앞에 도착하니
눈이 번쩍~~~~ 두 분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여섯 분이나 계신게 아닌가!
서울에서 먼길을 선뜻 동행해 주신 이남순선생님까지
정말 구세주였다.
절로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역시 함안 선생님들이 최고야!!!!!
너무 너무 감사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자꾸 숙여졌다.
회장님께서도 그제야 환한 표정으로 돌아와 기뻐하셨다
이제 마지막 진주에서 고문님을 태우고
우리는 첫 목적지 백양사로 향했다
집시님의 재치 있는 사회로 수수께끼게임은 시작되자
웃음꽃 피는 기행 길
알차고 푸짐한 상품 덕분에 웃음
그리고 천연색 가발에, 뱅글거리는 안경에,
기다림님의 이벤트까지 합해져
온통 웃음바다,
참석치 않겠다던 남편을 보니
그저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재미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음번엔 사양 않겠구나! 나 혼자 쾌제를 부르며
돌아서는데 나한테 마빡 가발을 쓰란다.
클났다!!!
흑기사신청~~~~
수석 부회장님~~~ 최고!!!!!
기분 좋게 승낙하시는 바람에 한 고비 넘겼다.
마빡 가발에 저고리에 몸빼에
사람들은 배를 움켜잡고 웃기 시작했다
차 안이 들섞일 정도로~~~
기분 좋게 망가져주시는 배려에 그냥 고맙기만 했다.
기사님도 우리들의 이런 모습에 그저 웃음이 가득했다
학교에서는 위엄있는 분이시지만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주심에 감사했다
그렇게 웃다보니 전라도 길
전라도로 들어서니 비가 차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 가락기행에 비가 온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번 기행 역시 비는 오지 않을거야!!!
내 생각은 적중하지 않았다.
정말 이번 기행은 갑자기 불참자가 많아지는 이변을 연출하더니
비까지~~~
백양사 주차장에 내리니 비는 제법 굵어졌다.
아무도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터라 우리는 비를 뚫고 걸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개나리가 버얼써 지고 없는데
이곳에는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살짜기 고개를 내민 봄이 어쩜 그렇게 싱그럽던지~~~
애기 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의 가을보다도 호젓한 길목이
연둣빛 설레임과 수줍은 다소곳함이 있는 정겨움으로
젖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렇게 예쁜 모습의 봄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름 빗줄기까지 행복을 쏟아 붓는 듯 했다
그래서 젖음도 좋은 나들이 길......
백양사를 잠시 알아보면
일반적으로 통하는 백양사의 유래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로 불려졌다.
조선 선조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한다
백양사에 들어서니 진한 향기가 뼈 속까지 타고 들어온다
두리번거리며 어디서 나는 향내인지 찾아보니
300년된 고불매의 향기였다.
호남에는 유명한 5매가 있는데
1.광주 전남대학교 대명매(大明梅)
광주 전남대학교 용봉캠퍼스 대강당 앞에 있는 홍매이다
1621년 월봉 고부천 선생이 진문사서상권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희종황제로부터 홍매 1분을 증정 받아 고향인 담양군에 심어 기르던 것을
그의 11대 손자인 고재천 선생이 농과대학장을 할 때
현재의 자리에 옮겨 심었던 것이다.
뽀족한듯 봉긋한 수형의 형태가 아름답다.
2.담양 지실마을 계당매(溪堂梅)
가사문학의 본 고장인 담양군 남면에 지실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송강의 넷째 아들이 살던
계당(개천 위에 지은 집이라 해 붙은 이름이다) 터가 있다.
그가 심고 가꾸었다는 홍매화와 백매화, 두 그루가 지금도 자태를 뽐내고 있다.
3.장성 백양사 고불매(古佛梅)
백양사 선원인 향적전(香績殿) 앞에 매화가 있다.
백양사의 어른 스님들은 이를 고불매(古佛梅)라 부른다.
청정하고 모범적인 고불총림의 기상과 분위기를 표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화는 향적전 담장과 경계를 이루며 서 있다.
고불매는 지상 30cm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한 줄기를 뻗었고,
다시 지상 62cm에서 두 줄기를 뻗었는데 하나는 서쪽을 향한다.
고불매는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잘 자랐으며
고매의 품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4.순천 조계산 선암사 백매(白梅)
한때 선암사 주지였던 지허(指墟) 스님에 의하면
고려 때 중건한 상량문에 와룡송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때 소나무와 함께 매화나무(백매)와 영산홍, 자산홍, 차나무도 심었다고 한다.
선암사 팔상전 뒤, 10평 정도 되는 축대 위에 백매가 있다.
나무높이는 11.5m이고, 수관폭은 16m에 이른다.
줄기는 지면의 60cm 높이에서 두 줄기로 자라다가 다시 두 줄기로 뻗은 형태이며,
줄기 밑둥치의 직경이 82cm다. 수령은 약 580년생이며 꽃 색깔은 백색이다.
이 밖에도 선암사에는 모두 22그루 매화가 있다.
운수암으로 올라가는 길가 돌담 옆에는
높이 12m, 수관폭 14.5m, 직경이 83cm인 홍매가 있다.
수령이 약 550년가량이다. 줄기의 기부에서 세 갈래로 뻗어 올라간 형태를 띠고 있다
5.소록도 수양매
지금 중앙공원에는 편백과 솔송나무, 향나무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가장 큰 수양매 한 그루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치 이춘상의 혼이 형상화한 듯이 말이다.
높이 6.8m이고 수관폭은 동서로 13.4m, 남북으로 5.8m이며 직경은 66cm인 백매화다.
지상 62cm의 줄기에서 서남 방향으로 11m 가량 옆으로 뻗어나간 가지는
마치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12개의 곡선을 형성해 자랐다
호남 5매 중 하나인 명성처럼 고불매의 우아한 자태는
봄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
짙은 향내로 마음을 붙들어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어떤 이는 이 고불매를 보기 위해 몇 번을 이곳을 찾는다하는데
우리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그 당당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인가?
빗줄기도 개의치 않고 그냥 그 향내에 듬뿍 취해
고불매 아래서 매화꽃잎 띄워 차를 한잔 마시면
그냥 신선이 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에 젖어있는데,
수석부회장님 입 속에서 피어난 매화꽃잎을 보자
웃음과 함께 젊음의 피돌기가 느껴져 마냥 신이 났다.
정말 잘 왔구나~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채워주려는 듯
종종종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새 순들의 어리광이
자꾸자꾸 마음을 설레게 해서
첫사랑을 만난 듯 했다.
겉핥기처럼 백양사를 엿보고
다음 봄을 기약하며
우리는 출출한 배를 채울 식당으로 향했다
정읍식당,
예약한 방으로 들어서니
정말 진수성찬~~~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한 찬은
허기진 배를 한없이 채워주었다
특정식 13000원짜리를 10000원에 해 줌도 고마운데
일부러 전화까지 해서 잘 드시고 가셨냐는 인사도 잊지 않는
사장님의 배려에 참 풍성한 인심을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떠들썩하던 봄비는 어디로 도망가고
간간히 비치는 햇살이 기행 길을 더 빛나게 해 주었다
다음은 필암서원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서원.
사적 제242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卞成溫)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1624년(인조 4) 복원되었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1786년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이 서원에 소장된 문서들은 보물 587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는데
총15책 65장의 필사본들로 고문서류이다.
이 자료들은 필암서원의 임원, 원생, 조선 후기 서원의 재정과 노비 소유,
서원의 운영사항과 지방관청 및 유림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서원을 돌아보니 여기도 매화향이 진하게 우리를 반긴다.
어라!!!!
우영옥선생님 친구분을 만났다
매화나무 아래서 만난 친구
같이 사진을 찍으며 반가움을 나누고 있는데
청절당에서 갓을 쓰고 호령하시는 분이 있었으니~~~
어느 분은 “원님 같다”고 하고 어떤 분은 “저승사자 같다” 하고 어떤 분은......ㅋㅋ
우린 질펀하게 필암서원 마당에 웃음을 풀어놓고 뜰에 가득 피워있는 민들레꽃에
설레임을 전해주고 돌아섰다.
다음은 홍길동 생가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마을에 위치해 있다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민중영웅이다.
역사상의 실존인물이며 허구적 소설의주인공이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강도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인 일본 오끼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역사상 홍길동은 조선초 15세기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다.
좌절과 울분속에서 출가하여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소외된 민중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봉건적 조선왕조의 핍박을 받던 중 관군에 체포되어 남해로 유배 되었으나
탈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오끼나와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조선에서 처럼 민중을 대변하는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동안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되어 왔으나,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홍길동연구팀(장성군, 연세대학교국학연구회,
전남매일, 유구대학, 오끼나와관광국, 석원 도문화원)의 3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끝에
그 베일에 쌓인 비밀 이 밝혀졌다.
아직도 조성중인 생가 터는 현대적인 색감이 너무 많이 느껴져
왠지 생소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역사 속의 한 페이지를 들쳐 본 느낌만 갖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축령산으로 향했다
장성 축령산! 한 사람이 있었다. 살아 있었을 때 그는 숲이었다.
숲이 될 거라고 누군가에게 약속한 적은 없다. 혼자서 묵묵히 숲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날 쓸쓸하게 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자신과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가 심은 나무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리고 천천히 자라면서 숲으로 변해갔다.
춘원 임종국 선생이 죽는 순간까지 나무를 심고 보살폈다는 그 숲, 축령산에 간다.
장성 서삼면 모암리와 북일면 문암리 일대를 뒤덮고 있는
50여년생 편백나무와 삼나무들, 그 넓이가 무려 258ha이다.
빈틈없이 자란 그 나무들, `숲으로 된 성벽’이다.
벌거숭이 땅에 1956년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해 87년 다른 세상으로 가는 순간까지도
그 나무들만 생각했다는 애림가.
임종국 선생은 자신의 땅도 아닌 국유지에 나무를 심고,
그 나무들이 곧게 자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 그 나무들은 선생의 것이 아니었다.
나무 심는 일에 모든 가산을 내어주고도
그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선생은 다 자란 나무를 담보로 빚을 얻어 계속 나무를 심었다.
결국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해 선생에게는 자식 같았던 그 나무들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무에 모든 것을 내준 선생의 인생도 어느 정도 보상이 이루어졌다.
산림청은 2002년 그 숲을 사들인 후 `고(故) 임종국 조림지’로 이름지었다.
그 숲을 가꾼 공로가 인정되어 2001년에는 선생의 이름 석 자가
`숲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선생은 자신의 숲으로 되돌아 왔다. 평생을 가꾸었던 그 숲에
수목장(樹木葬) 되었다.
사람들은 축령산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에 기대어 삶의 위안을 찾는다.
우리 모두는 그 숲을 통해 얻은 만큼의 행복을 임종국 선생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괴정마을 → 삼거리주차장(춘원 임종국선생기념비) → 헬기장 → 능선갈림길 →
정상 → 임도 → 삼거리주차장 → 금곡마을(총8.8㎞, 3시간 25분 소요)
금곡마을 → 춘원 임종국선생기념비 → 능선갈림길 → 정상 → 해인사 →
괴정마을(총6.5㎞, 2시간 30분 소요)
괴정마을 → 삼거리주차장(춘원 임종국 선생기념비) → 헬기장 → 우물터 →
모암갈림길 → 통나무집 → 산림욕장 → 우물터 → 삼거리 주차장(기념비) → 괴정마을(총 5.5㎞, 2시간 소요)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면 이 코스대로 걷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우린 짧은 코스 모암갈림길 _ 통나무집_ 모암산림욕장의
간단한 코스로 삼림욕을 대신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산림광장에 설치된 무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우리는 주인공과 관객의 역할을
순식간에 배정받고
숲의 초대 가수
이남순선생님의 멋드러진 독부대
진도아리랑의 아련함을 멋있게 품어 내 무대를 빛내 주고
관객이 된 박수부대의 흥겨움과 더불어
편백나무와 삼나무의 박수소리도 합쳐졌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 덩실 덩실 우리 춤 한마당~~~^^*
개나리꽃들에겐 멋들어지게 개나리처녀 노래를 불러주며
우린 잠시 동안 숲의 주인공으로 취해 있다가
아쉬움을 접으며 숲을 벗어났다
깊숙한 호흡 그리고
짧은 날숨으로 희망과 건강을 간직하고
우린 장성을 떠났다.
장성역에서 이남순선생님은 서울로 향하고 남은 스무명은
기쁨의 노래를 울리면서
귀향길에 올랐다.
사천 휴게소에서 된장찌개로 저녁을 해결하고
돌아오는 길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한 기쁨과 고마움에
힘든 줄도 몰랐다.
회원들을 배려해 봄 기행 때 마다 큰 돈을 아낌없이 내 주시는 분
그리고 회원을 배려해 서슴없이 내어주시는 찬조금
그 분들 때문에 부담 없이 다녀 올 수 있었던 기행
정말 그 분들께 회원들을 대신해서
이렇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정말 특별했던 봄 기행
더욱 진한 향내로 돌아온 여정이기에
이렇게 고불매의 향기와 더불어
가족같은 회원님들께 따스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합니다.
참석자
김만수, 우홍순, 허철회, 김종두(1), 공영해(1)
강재오, 장영수, 이명호, 이남순, 강동규(1),
김병수, 강명자, 최경자, 우영옥, 김순이, 이채구,
차순이(1).........21명
가을 기행 때는
많은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집행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신줄을 아는데 이렇게 소상히 다시 그 길로 되돌려 주시니 꺔샤가 저절로 나오네염~
회장님 비롯해 국장님! 차장님! 정말 정말 고생하셨습니다.그리고 고마웠어요. 행복하실꺼예요^*^~^;
사무국장님 애쓰신 덕분에 기분 좋은 여행길이었습니다. 회원님 동행 해 주시어 더 행복했습니다.
덕분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즐겁습니다.
그날의 일정 눈 앞에 그려집니다. ^^ 여행길에 내리는 비까지 딱 내 취향인데... 잘 읽었어요...^^
다녀온 길 되짚어 선명히 떠오릅니다. 사무국장님 생중계에 못 가신분들도 다녀오신 착각에 빠지셨죠?. 차려 놓으신 밥상에 밥만 먹고 돌아오는데 여비까지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그 정 잊지 않겠습니다
여간한 마음 아니면 힘든 걸음이란 걸 잘 압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허물은 덮어주시리라 믿기에 얼굴 들고 다닙니다.
정말 고마운 걸음 감사했습니다. 그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 추억의 한 페이지에서 행복 할 것 같습니다. 진도 아리랑 다시 한번 그런 기회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