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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4년 정유(1897) 10월 1일(정사, 양력 10월 26일) 맑음
34-10-01[08] 인재를 등용하고 군대를 양성하고 학교를 부흥시키는 시무를 진달하는 전 정언 현동건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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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천하 각국의 군대는 기예가 민첩하고 장비가 정예하며 규율이 엄격하니, 우리의 것과 저들의 것을 비교하여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림으로써 군제(軍制)를 정비하는 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두발은 다시 기르게 하여 온 나라 백성과 다르지 않게 하고 훈련할 때에 쓰는 용어는 우리말로 풀어서 온 나라 백성이 보고 듣기에 괴이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자연히 백성의 마음이 단결되어고락(苦樂)을 함께 하려는 마음이 모두 간절할 것입니다. 4천만 인구가 한 사람의 마음처럼 일치단결한다면 천혜의 요새인 우리나라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군대를 양성하는 정도입니다.
원문: 四千萬口, 如一人心, 則以我金湯天府之國, 其於防外患, 何如哉?
일사집략(日槎集略) 인(人) / 산록(散錄)
중전무웅(中田武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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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나의 불초함을 돌아보지 않고, 장차 한국을 위하여 말할까 합니다. 나는 문장에 있어서 가장 졸(拙)한 사람이니, 청컨대 그 문장은 간략히 하고 그 뜻만 취하려 합니다. 한국과 왜(倭)는 동포(同胞)요, 동인(同人)입니다. 옛날부터 서로 친했고, 또 왕인(王仁)이 경서(經書)를 전하여 왜의 문화를 도와 그 업적이 컸었습니다. 그런데 호시탐탐하는 눈 푸른 놈들이 동양에서 발호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동아 여러 나라가 연횡(連衡)하여 저들에게 위엄을 보이지 않으면 동양 모든 나라는 망해서 거의 초토(焦土)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를 위한 계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한국은 곧 개항을 해서 각국과 교의(交誼)를 통하여 그들의 제도와 문물을 본받아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충해야 할 것이니, 오로지 부국 강병의 방법을익히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사업이 이와 같이 되면, 왜(倭)와 청 나라와 한국이 더욱 교정(交情)을 통하게되어 각각 안으로 병력을 기르고, 밖으로 위엄을 보여서, 만약 하루아침에 왜(倭)가 영국(英國)에게 비상한 일이 있으면, 청국과 한국이 그 뒤를 끊되, 청 나라가 러시아에 대해서나 한국이 프랑스에 대해서도 모두 이와 같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영국의 짐승과 러시아의 새매가 날뛰는 것이 무엇이 두려우며, 눈 푸른 놈들의 탐욕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만일 이러한 계획을 하지 않고 묵묵히 한 국면(局面)만을 지키고거만스럽게 나만 옳고 남을 그르다고 한다면, 동양 모든 나라는 모두 서양 사람의 계교속에 빠지고 말 것이니, 이른바 입술이 상하면 이가 시리다는 것으로서, 아침에 청 나라가 쓰러지면 저녁에 한국과 왜국에 화가 미칠 것은 불을 보는 것과 같이 뚜렷하리니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일본 3천 5백만 인민은 진실로 서양 사람들의 이기주의를 미워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그 기술과 문예(文藝)의 정교한 것은, 동양 여러 나라가 서양 사람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때문에 좋은 기술을저들에게서 취하여, 동양 여러 나라의 천부(天賦)의 용맹을 가지고 배양해서 활발하게만든다면, 동아의 국기를 서양 하늘에 드날릴 것은 날짜를 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한 가지 큰 계획을 이루는 것은 한 나라의 힘으로는 능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연횡(連衡)을 해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항상개항과 통교의 말을 가지고 한국을 독촉하는 것은 딴 것이 아니요, 오직 이 한 가지 일에 있을 뿐입니다.
청장관전서 제58권 / 앙엽기 5(盎葉記五)
한 사람이 아침 저녁 먹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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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치초:1643,건륭초: 1736년,건륭46년: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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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어제집(乾隆御製集)》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건륭 초년 각 성(各省) 창고에 존치(存置)된 곡식 수량이 모두 3천 5백여만 섬이었는데, 여러 해를 각 성에 독촉해서 곡식 적치(積置)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삼았다. 그리하여 건륭 46년에 이르자 각 성 창고에 존치된 곡식 수량이 4천 21만 섬이 되었다. 초년과 비교해서 계산하면 4백 60여만 섬이 많아졌으니, 그 많아진 바는 10분의 1쯤이 증가된 데에 불과하였다. 순치(順治) 초년에는 민수(民數)가 겨우 1천 63만이었으나 건륭초년에 이르자 벌써 1억 6백여만이 되었으니 이것은 이미 10배가 증가된 것이다. 그리고 건륭 46년에 이르러서는 민수가 이에 2억 7천 7백여만이 되었으니, 이것은 20배나증가된 것이다. 현재 각 성 창고에 존치된 관곡(官穀)을 건륭 초년과 비교하면 4백여만석이 증가된 것에 불과한데, 민수는 1억 가량 증가되었다. 이것은 10분의 1이 증가된곡식으로 20배가 는 인구를 먹이는 셈이니 곡식이 귀해짐은 괴이할 것이 없다.
여러 물건값도 따라 올라서 전일과 비교하여 등귀(騰貴)하지 않은 것이 없다. 소민(小民)이 시장 가까이 붙어 살면서 그를 인연해 모리(謀利)함도 형편상 반드시 그렇게 된것이다. 작년에 대리시 소경(大理寺少卿) 유천성(劉天成)이 주청한 ‘검소함을 숭상해야풍속이 순박함에 이른다.’는 한 접자(摺子)는 내 마음에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시행하기에는 실로 어려운 바가 있었다. 대개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니 검소함을 말미암아서 사치한 데에 들어감은 기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금령(禁令)을 내린다면 법에 걸리는 자가 많게 된다. 또 농사 이외의 것으로 의식을 꾀하는 사람이 점점 생계를 잃을 참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주-D001] 접자(摺子) :
청대(淸代)에 상주서(上奏書)를 일컫던 말.
첫댓글 분명 서거정은 세조와의 문답에서 천하의 戶數가 1천6백만호라 해서 당시 조선의 인구가 1억에 달했음을 말하고 있고, 성종때의 실록에서도 도성에 1백만호가 살고 인구가 만만언(1억)이 넘었다고 나오는데, 어느시점에 무슨 변동이 있었길래 구한말로 가면서 인구가 확 줄어버렸는지 참으로 알수없는 일입니다. 현재로선 교열로 밖에 볼수 없는 실정이군요.
청나라 인구 증가하는 것도 우습구요. 아무래도 일본과 조선의 인구수를 비등하게 맞춘게 교열의 확실한 흔적인듯 합니다.
다민족 국가인 조선이 분리되어 지배층 위주로 반도로 이주하며 확줄어든 것은 아닌지.
마치 6.25때 낙동강까지 밀려서 미군이 70만명정도 거주할 섬을 구해놨던 것처럼요...
아무튼 조선인구 4000만수치는 대륙조선을 안믿는 분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