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굿이라고도 하는 농악은, 지역성을 듬뿍 안고 있는 무형문화재다.
농악은 그 형태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마을제를 지내는 마을농악,
두레패들이 일할 때 쓰는 두레농악, 집집으로 돌아다니면서 걸립패가 벌이는 걸립농악,
남사당패 등이 전국을 떠돌면서 관객과 거리를 두고 뛰어난 기교를 선보이는 연희농악 등이다.
그 중 지역성을 잘 드러내는 것은 마을농악과 두레농악이다.
걸립농악과 연희농악은 농악패들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지역적 특성들이 섞일 수밖에 없다.
여러 학자들이 농악의 지역분류를 해왔지만 그 중 두 가지가 단연 돋보인다.
정병호는 여러 지역을 직접 조사하는 방법을 통해 구분했는데,
크게 웃다리농악(경기, 충청, 강원, 영서), 영동농악(강원, 함경, 경북 동해안),
영남농악(경북, 경남), 호남좌도농악, 호남우도농악으로 나누었다.
이보형은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자료를 바탕으로 구분했는데,
웃다리농악(경기, 충청 북부, 강원 영서), 영동농악(대관령 동쪽),
호남좌도농악, 호남우도농악, 경북좌도농악, 경북우도농악, 경남좌도농악, 경남우도농악으로 보았다.
두 사람의 의견이 대체로 비슷하지만 웃다리농악과 영남농악의 구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정병호가 웃다리농악에 충청도 전체를 포함시킨 반면, 이보형은 충청도 북부로 한정했다.
단, 어느 지역을 충청도 북부로 하는가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영남농악의 경우 정병호가 경북, 경남으로 나눈 반면 이보형은 경북좌우, 경남좌우로 세분했다.
정병호도 밝혔듯 지형은 농악의 지역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평야와 강, 그리고 산줄기로 구획되는 지역들이 농악권을 특정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호남정맥을 경계로 호남좌도농악과 호남우도농악이 구분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호남좌도는 섬진강 유역으로서 산악지역이고, 호남우도는 동진 · 만경 · 영산강 일대의 평야지대인 것이다.
강원도농악 또한 영동과 영서로 나뉘는데, 영동농악은 동해안을 따라서 함경도와 경상도까지를 영향권으로 한다.
백두대간이라는 울타리에 막혀 남북으로 퍼져 나아가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영남농악은-더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이보형의 분류로 보아 낙동정맥이 좌우를 나누는 경계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병호가 "경기 · 충청지방은 험악한 산맥이 없으므로
이 지역의 농악들은 대체로 동일하다"고 본 것만은 잘못인 것 같다.
또한 화순과 전주를 호남좌도농악에 포함시킨 것도 잘못으로 보인다.
왜 그런가?
학자들이 화순을 좌도농악으로 본 것은 화순군 동복면 한천농악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화순군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기 전까지는
능주목, 화순군, 동복현(혹은 능주군, 화순군, 동복군)으로 생활권이 달랐다.
화순, 능주는 영산강 수계고 동복은 섬진강 수계다.
따라서 섬진강 수계인 동복의 한천농악으로 화순군 농악 모두를 말할 수 없다.
물론 유역이 다르다고 해서 생활문화 교류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영산강 수계인 담양 동부지역은
낮은 고개를 통해 섬진강권인 순창과 교류하기 때문에 좌도농악의 영향권이다.
그러나 동복과 화순은 사정이 다르다.
쉽게 오갈 수 없는 고개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마한 부족국가 이래로 생활권이 달랐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능주와 화순(화순읍)은 서해안을 따라 영산강을 거슬로 올라온 선조들이 이루었던 여래비리국에 속했던 데 반해,
동복지방은 섬진강 상류를 중심으로 해서 구릉지대에 세력을 잡고있던 벽비리국에 속했던 것이다.
따라서 화순을 호남좌도농악으로 구분한 것은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호남정맥의 서쪽인 전주를 거의 모든 학자들이 좌도농악으로 얘기했는데,
이 구분도 재고해야 한다.
전주에서만 68년을 산 홍유봉은 해방 뒤 스무서너 살에 농악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주를 좌도농악으로 보는 시각에 강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해방 뒤 서울 창경원에서 전국농악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전주에서도 굿패를 꾸려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 때 전주 남부시장에서 생선도매집을 하는 양승기씨가 말하기를
"시청, 도청에서 굿패를 소집해서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굿패를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상쇠 : 유한준(남원군), 부쇠 : 강태문(남원군), 끝쇠 : 박오복(전주시),
수징 : 박종대(전주시), 부징 : 강반주(남원군), 수장구 : 김상원(장수군)
... (중략) ...
그 때 전북에는 정읍팀과 전주팀 이렇게 두 팀의 굿패가 있었다.
정읍팀은 전주 고깔을 썼다.
그런데 위쪽(서울쪽)으로 올라가 고깔을 쓰고 하면 굿을 안 알아주었다.
그러니까 전국농악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전립을 쓰는' 남원 농악패들을 데려다가 전주팀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두 번 연거푸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이런 연유로 전주에 오래 전부터 있던 고깔을 쓰는 농악이 아니라,
전립을 쓰는 농악이 전주를 대표해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웃다리농악이라 일컬어지는 경기 · 충청농악 또한 모호한 면이 없지 않다.
정병호의 말처럼 과연 험한 산맥이 없기 때문에 경기 · 충청농악은 균일한 색을 띠는 것일까?
그러나 거기에는 한남금북정맥이 있다.
한남금북정맥 또한 여느 정맥과 다름 없는 분계선인 것이다.
우리나라 기후를 온대와 냉대로 크게 나누는 경계선이 바로 이 산줄기 아니던가?
웃다리농악은 남사당패가 자신들의 농악을 삼남(전라, 충청, 경상)농악, 즉 아랫다리농악과 구분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그렇다면 경기농악만을 웃다리농악이라 해야하며, 거기에 충청도까지 포함시킨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경기 · 충청농악을 웃다리농악으로 묶어 부르는 것은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1호가 대전 웃다리농악이고,
청주 웃다리농악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입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만으로 충청농악을 웃다리농악으로 부를 수 있을까?
이 의문을 풀려면 산경표에 의한 산줄기 구분으로 충청도를 이해해야 한다.
금북정맥 북쪽에서 한남정맥 남쪽에 이르는 지역,
그러니까 아산만, 남양만을 포함하는 경기만 일대는 행정구역은 경기도와 충청도로 나뉘어 있지만 같은 생활권이다.
예전에 이 지역은 서산, 당진, 아산, 평택, 화성으로 연결되는 서해안 두레문화권이었고, 타령조의 경기서부 소리권이다.
또한 마을농악대가 마을제를 주관하는 금강권과는 달리, 이 지역은 무당이 무악으로 마을제를 주관하는 곳이다.
언어권과 시장권도 이 지역과 금강유역이 달랐다는 연구가 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이보형은 정병호와는 달리 웃다리농악을 충청 북부로 한정했다.
경계가 되는 구체적인 지형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남부인 금산농악을 호남좌도농악으로 본다는 의견은 밝혔다.
또한 금강 하류의 논산농악과 익산 성포농악이 호남좌도농악이라는
최근의 연구도 금강유역의 마을농악이 호남좌도농악권임을 뒷받침한다.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성포는 옛날 조창이 있던 포구였는데
호남좌도농악 가락을 지켜온 이인수(68세)를 소개한 다음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인수는 7세 때부터 동네굿을 따라다니다
성포 수장구였던 큰아버지 이덕근한테 장구가락을 익히기 시작하여
한마치에게서 구정놀음(개인놀이)까지 전수받으면서 15세 때부터는 끝장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뒤 마을굿이 점점 쇠퇴하면서 마을 어른들도 대부분 타계하는 바람에 성포농악은 침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인수는 개인 기량이 뛰어나고 풍물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
이리, 김제 등지로 원정을 나가 그곳 치배들과 어울려 풍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81년부터는 이리 우도농악단에서 김형순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인수가 활동하였던 이리농악단은 1985년 강릉에서 열린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단체상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인수의 마음 한켠에는 '넘의 동네 넘의 굿'을 치는 것에 대한 회의와 허전함이 날로 커져만 갔다.
(전주와 임실을 갈라놓는 호남정맥은 전라 좌우도농악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도농악이어야 할 전주농악은
좌도농악, 우도농악이어야 할 성포농악의 계승자는 이리농악을 "넘의 동네, 넘의 굿" 이라고 여기고 있다.
전주농악 문제는 남원농악이 습합된 역사적 사실에 있고
용안 동쪽 내가 금강과 합류하는 어귀에 있는 성포농악의 그것은
남쪽의, 도솔산-불명산-문수산-용화산-삼기산 줄기가 실제적인 금남정맥임을 알면 풀릴 듯하다.)
그래서 이인수는 성포 좌도농악을 재현하고 전승시킬 뜻으로
1992년부터 성포 금성초등학교와 인연을 맺고, 성포 좌도농악을 되살리고 전수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금강에 배가 드나들었고 육상교통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오륙십년 전만 해도
금강유역은 호남좌도농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대전은 왜 웃다리농악인가?
부여군 은산면 신대리가 고향인 대전 웃다리농악 상쇠 송순갑의 삶을 정리한
이소라의 연구가 어느 정도 이 의문을 풀어준다.
송순갑이 경상도 걸궁패와 협률패를 거쳐,
전국을 무대로 떠돌며 연희농악을 했던 웃다리농악 남사당패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그가 대전에 자리잡은 후 '대전 웃다리농악'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웃다리농악의 불분명함을 지적한 이소라는
"서울 남사당농악, 평택농악, 천안 흥타령농악, 안성 남사당농악 및 대전 웃다리농악 등의
판제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이들 농악단의 상쇠가
1950년대 후반에 김복만의 신남사당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였던 데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대전에서 오래 전부터 해오던 마을농악과는 다른 남사당 연희농악이
대전 웃다리농악으로 불리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웃다리농악을 경기 · 충청농악으로 보는 것은 지역성을 반영하는 마을농악에 기초한 구분이 아니라,
안성 남사당패 연희농악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역구분은 어디까지나 마을농악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
금강유역은 호남좌도농악에 더 가깝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향후 경기농악과 충청농악을 웃다리농악으로 묶지 않고 나누어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하자면,
행정구역에 따라 불리우고 있는 현행 농악이름 대신
실제적 구분선인 강 혹은 산줄기에 의거한 농악권 이름을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다.
예컨대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경기 · 충청북부 농악' 이라는 명칭에 비해 '섬진강유역 농악' 하면 명확하고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