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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논쟁과 맹목적의 미국 숭배
미국, 맥 아터, 일제 전범, 박정희, 대일청구권
by온기철 James Ohn6시간전
뉴스룸-사랑 방 닷컴
중국 대륙과 태평 상의 섬나라 일본 사이에 끼어 있는 반도국 한국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 두 세력과 어울려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의 지난 70 평생 동안 대륙과 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아무도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았다. 대륙은 공산국가이고 섬은 철천지 원수 일본이었다. 이런 나라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면 이적 행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이렇게 국민을 까막눈으로 만들어 놓고 친일-빨갱이 논쟁을 벌여서 권력을 차지했다. 정치인에게 친일파 낙인이 찍히거나 빨갱이로 판정이 나면 그 수명이 다 했다. 가짜 뉴스에 세뇌된 국민은 그것을 고지 곳 대로 믿었다.
맥 아터를 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으로 들여다본다면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막강한 친일파였다. 또 하나, 맥 아터는 한국사람들이 지독하게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바로 잘난 체하는 사람이다. 맥 아터는 트럼프 못지않게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자기 이미지 관리에 철저했다. 그가 항상 입에 물고 있는 강냉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어 낸 적은 한 번도 없다. 말짱 폼이었다. 그가 연설에서 사용하는 경구는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대중들의 뇌리 속에 깊이 새겨 주었다. 한국사람들은 맥 아터가 친일파이고 잘난 척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은인이라고 생각하며 극진히 모신다. 해방둥이인 우리 세대는 더욱 그렇다. 미국 군인이나 고위 관리 치고 반공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그가 남한을 공산주의자 들의 침략으로부터 구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공적이다. 그러나 최선의 방법으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I shall return" 1942년 필리핀 사령관이었던 맥 아터는 일본군에게 패퇴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가면서 토해낸 유명한 경구이다. 그러나 8만 명에 가까운 필리핀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로 구성된 그 휘하의 장병들은 모두 남아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굶어 죽다시피 했다. 전쟁 말기의 일본은 식량 부족으로 포로에게 충분한 먹을 것을 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자기 지휘 하에 있는 전투기를 서로 날개가 닿을 정도로 한 곳에 모아 놓고 있었다. 일본 비행기의 아주 손 쉬은 타깃이 되었다. 이렇게 맥 아터의 전투기들이 하늘로 떠 보지도 못하고 섬멸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Time; 2019, 11.11; Douglass MacArthur is One of America's Most Famous Generals, He's Also the Most Overrated)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한국사람들은 번역한다. 1951년 4월 19일 양원 합동회의에서 그가 행한 퇴역 연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말은 맥 아터의 간판처럼 따라다닌다. 한국전쟁에서 그의 오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 갔다. 중공군이 북한 땅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부지기수로 있는 데도 이를 부정하고 38 이북으로 진격했다. 그는 중공군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거의 엉터리에 가까운 작전으로 중공군을 공격하다가 린 바이오의 유인작전에 말려 들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모르는 사이에 중공군은 이미 이들의 후미까지 들어와서 포위된 상태였다. 중공군의 남진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남쪽으로 퇴각하려고 했다. 남쪽으로 가다 보니 이미 중공군이 퇴로를 막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결국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인천 상륙으로 수복되었던 서울은 다시 인민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물론 그 후 화가 머리 끝 가지 오른 그는 만주 폭격, 중국 핵 공격, 장개석으로 하여금 남쪽에서 대륙 공격, 그리고 압록강 코발트 30 핵 띠 설치 등을 트루만에게 요구했고 이로 인해서 트루만과 의견 층돌이 잦아서 사실상 트루만이 옷을 벗긴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한국전쟁에서 그가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에 대한 뉘우침이나 사과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뜻으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노병의 실체는 사라지지만 그들의 행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희생된 젊은이들의 영령은 영원히 그를 원망할 것이다. (본인의 한국전쟁 제12장, 유엔군과 국군 38선 건너고 중공군 압록강 건너다, 참고)
1945년 8월 일본을 점령한 트루만 대통령은 동년 9월 2일 다글라스 맥 아터를 연합국의 최고 사령관(Supreme Command of Allied Powers)으로 임명했다. 연합국은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을 지칭했지만 소련은 일본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고 장개석의 증화민국은 모택통과의 갈등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영국이 미국을 지지하고 모든 일본에 관한 일은 미국이 알아서 했다. 맥 아터는 패전국 일본의 통치자였다.
남한 국민은 "친일파 청산"을 못한 한을 품고 살고 있다. 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이 한둘이겠냐 만은 그중에 제법 큰 편에 속한다. 친일파 청산을 방해한 장본인은 미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군정의 우두머리는 맥 아터였다. 미국이 점령한 남한은 일본 영토였다. 아시아의 모든 미 점령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극동 사령부의 관점에서는 남한은 일본에 비해서 그렇게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남한의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상관은 총 사령관 맥 아터였다.
유롭에서 패전국 독일의 전범은 나치였다. 아시아에서 패전국 전범은 천황과 도조를 포함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었다. 유럽에서 영국, 미국, 소련이 나치를 철저히 색출하여 처벌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전범을 앞세워 새 일본 건설을 추진했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협조했던 친일파를 재 등용하여 대한민국을 세웠다. 한국사람들의 반일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남한을 일본의 일부로 행정관리 해 버린 셈이다.
맥 아터는 진주만 공격을 강행했던 히데키 도조에게 전쟁의 총책임을 싸우고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그에게서 모든 통치권력을 박탈하고 국민들의 피겨 헤드로 남아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미국이 정복자가 아니고 자비를 베푸는 나라(good Samaritan)라고 국민들을 믿게 하는 홍보대사 역할을 시켰다.
전쟁 말기의 일본 정부는 국민의 의식주를 무시한 체 모든 것을 전쟁에 동원했다. 미국은 매일 포탄을 퍼부었다. 그래도 항복할 기색이 없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945년 8월의 일본 풍경은 페허 그대로였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은 쓰레게 더미를 뒤졌고 부모와 살 집이 없는 아이들은 반 나체가 되어 길거리를 헤맷다. 물가는 치솟았고 암시장이 번창했다. 이, 벼룩 등 물것이 창궐하자 전 국민에게 디디티 살포하는 풍경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 였다. 많은 젊은 여자들은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맥 아터는 본국에 식량원조를 급하게 요구했다. 만약 빈약한 일본 경제를 그대로 두면 공산주의가 성 할 우려가 컸다. 미국 정부는 신속하게 식량을 조달했다. 맥 아터는 천황이 국민을 굶게 한 사람이 아니고 식량을 나누어 주는 자비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 주었다. 남한 식량사정도 일본 못지않게 나빴다. 하지도 원조를 요청했으나 일본처럼 충분히 주지 않았다. 남한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의 시작이었다. 대구 항쟁을 비롯한 반 미군정 시위의 단초가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 항복 직후에 미국은 패전국 일본에게 전쟁의 책임을 철저히 물어서 공명정대하게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1947-1948년에 이 정책이 일본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서 대륙의 소련과 중공이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으려는 정책으로 급 선회했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 약 3년 동안 노부 수게 키시와 요시오 코다마는 나란히 감옥에 있었다. 키시는 일본 수상이 되고 코다마는 야쿠자의 두목이 된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다른 많은 전범들과 같이 투옥되었으나, 이들이 풀려 나오기 전날 수많은 죄수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 졌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정보 요원으로 이용하여 일본 정계를 미국 정부에 협조하도록 조정했다. 일본에 독재와 공산주의가 뿌리내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유진영에 속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930대는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이때 코다마는 우익청년 단체를 이끌었는 데 일본 수상 암살 미수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를 간첩될 사람들을 모집하고 전쟁에 필요 한 금속을 조달하는 거간군으로 이용했다. 약 5년 동안 그는 중국 일본 점령 지역에서 가장 큰 암시장을 운영했다. 코다마는 이성 장군이 되었고 무려 175 million dollar의 재산을 모았다. 1948년 감옥에서 나오 자, 그는 미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서, 보수 정객들에게 이 돈을 써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들이 정권을 잡도록 도왔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미국인 사업가, 전 OSS 요원, 전 외교관 들을 동원 하여 비밀공작을 성공리에 이끌게 했다. 물론 자금은 미 중앙정보부가 조달했다.
키시는 코다마의 돈과 상당한 정치력으로 일본 의회에서 다수당의 지도자가 되어 수상에 당선되고 자민당을 만들었다. 자민당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 정권을 진보 야당에게 내주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70여 년 동안 일본의 집권당이었다.
1941년에 그는 미국과의 전쟁 선전포고문에 서명했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일본의 무기 군수 보급 장관을 지냈다. 일본이 펄 하버를 공격할 때 일본 주재 미국대사였던 Joseph Grew는 구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키시는 그를 초대하여 골프를 쳤다. 그 후로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었다. 전 후에 Grew는 중앙정보부 전위 기관인 자유유롭 전국 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키시는 미국 고위층에 이미 친구가 있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수상관저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그의 동생, 아이사쿠 사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미군 점령 내각의 수석 비서관이었다. 그는 키시에게 죄수복을 갈아입으라고 신사복을 건네주었다.
키시는 그의 동생에게, " 이상 하지 않니? 이제 우리 모두 민주주의 자야."라고 말했다.
키시가 죄수에서 수상이 되는 데는 7년 동안의 세심한 계획이 필요했다. 키시는 뉴스위크 도쿄 지국장 해리 컨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키시는 편집국장 해리 컨을 통해서 미국 정치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해리 컨은 CIA 국장 알랜 달라스의 친구였다.
미 중앙정보국은 컨을 통해 서 키시와 접촉했다. 키시는 미 대사관 직원들을 희귀종 난을 다루 듯 극진히 대 했다. 키시는 미국 사람들에게 그가 이끄는 자민당은 리버랄도 아니고 민주적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잿더미에서 나온 우익 봉건 주의자들의 클럽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정책을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것을 약속했다. 그는 미국이 미군기지를 일본에 둘 것을 허락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받았다. (Legacy of Ashes; The History of CIA by Tim Weiner에서).
전범이었던 키시 노브스케는 1945년 여름에 감옥 들어갔으나 1948년에 갑자기 풀려 나왔다. 왜 그랬을 까?
미국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일본을 패전국으로 처벌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1947-1948년에 일본 경제를 살려서 태평양 방어에 중요한 미국의 우방으로 키우려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이미 소련이 태평양에 해안을 가지고 있고 중국 내전이 모택통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소련과 중공이 태평양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본을 강한 나라로 재건하려는 정책이었다. 유롭에서 마샬 프랜으로 독일 경제를 살려서 소련 공산주의 세력 확신을 막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정책이다.
맥 아터는 능력 있는 일본제 국주 의자(전범)들을 처벌하는 대신 등용해서 친미 반공 정책을 시행하게 하고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새 일본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친미 반공주의자로 둔갑하여 일본 우파 보수세력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남한의 다른 정치인보다 훨씬 앞서서 미국과 맥 아터의 영향략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맥 아터에게 서신으로 그의 반공에 대한 신념을 알렸고 맥 아터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와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한의 첫 통치자가 되는 데는 맥 아터의 힘이 컸다. 그의 지지세력은 일제와 협력했던 세칭 친일파 들이었다. 그들은 부끄러운 경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한국전쟁과 일본의 경제성장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어른들은 일본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일본사람들이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이 일본 회생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들 보다 똑똑 해서 그렇게 된 줄 알았다.
한국이 잿더미로 변해가는 동안 일본은 경제대국이 되어 갔다. 한국전쟁은 수천만 불의 거금을 일본 경제에 퍼부었다.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이 전쟁터로 오가면서 일본을 들렸다. 그들은 일본 사람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 중의 하나인 일본 사람들은 그들이 기회만 주어진 다면 거의 모든 것에 돈을 쓴 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나체를 마치 조용하고 신선한 해돋이 구경하듯 쳐다보는 일본인 들은 곧 나체가 좋은 장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양 여자들 크기의 유방을 가진 시골 여자들은 거의 모두 나이트클럽에서 나체로 걷기 위해서 도시로 나왔다. 어떤 미국인은 길거리에서 담배 파는 여자에게 담배를 사면서 여자에게 눈이 팔려 원하는 것과 다른 담배를 집어 들기도 했다. 고향에서 감리교인이었던 어떤 군목은 도쿄 호텔에서 택시 잡으러 나가는 동안에 무려 14번이나 핌프의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을 지나가는 모든 미군들은 양질의 캐나다 위스키 한 병에 본국 1/5 가격인 겨우 1불 50전, 한잔에 25전에 불과했다. 한 장교는 "이렇게 싼데 안 취할 수 없지"라고 즐겁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전쟁 때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전쟁 터를 오가는 남자들은 설령 십자군이라도 똑같은 것들을 원했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나라 전체를 홍등가로 만든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일본 경제를 완전히 살려놓은 것은 미군의 대대적인 국방비 지출이었다. 미군 조달 책임 장교들은 일본 산업이 전방에서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물자를 본국에서 생산하여 태평양을 건너 수송하는 것보다 헐씬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평가했던 것보다 더욱 효율적이고 능률 적이었다.
수천 대의 군용차들이 한국에서 고장 나거나 낡게 되면 일본에서 다시 만들었다. 새 차로 대치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어떤 차들은 세 번이나 고쳐서 썼다. 일본 사람들은 무기, 도구, 장비 어느 것이나 다 만들어 냈다. 그들은 한국군과 미군이 먹을 수 있는 수백만 톤의 음식을 조달했다. 이러한 이득은 일본뿐만이 아니고 미국에게도 있었다. 놀만디에서 영국이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듯이 일본이 없었으면 미국이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5th Anniversary edition This Kind of War(The Classic Korean War History) by T. R. Fehrenbach에서)
1952년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는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게 내린 선물이다. 이제 일본은 살았다."라고 말했다. 43년 후 그의 외손자 일본 총무상
아소 다로는 "운이 좋게도, 정말 운이 좋게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고 43년이 지난 2005년에 한국전쟁의 덕을 되씹었다.
일본 내 만주 인맥과 박정희의 대일 청구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사, 일본 관동군 장교를 지낸 골수 친일파이다. 거기다 군내 남로당 지도자라는 공산주의 경력도 가지고 있다. 남로당 경력이 탈로 되어 사형 직전에 국군의 아버지로 통하는 제임스 하우스만과 백선엽을 비롯한 만주 인맥의 도움으로 살아난 후로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기시 노브스케 전 일본 수상은 일제 때 만주국의 제2인자로서 만주 개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박정희와 같은 만주 인맥이었다. 일본 우파들은 기시를 앞세워 힌일 국교 정상화의 물꼬를 틀려고 했다.
박정희 측도 편한 상대였다. 일본 우파들은 군사정권을 지지했고 기시 사람들과 박정희 정권의 대일 청구권에 대한 협상은 물살을 타게 되었다. 야쿠자 두목이었던 코다마 요시오도 이 중에 한사림이었다.
1970년 8월 한일 국교 정상화에 공을 세웠다는 명목으로 기시 노브스케,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 총리, 시이나 에츠사사부로 외상, 수교 때 일본 측 수석 대표 다가 스카 신이치와 코다마 요시오는 수교훈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한국일보: 2015.4.20; 박정희 정권, 일본 내 만주 인맥과 결탁 흑막정치)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일관계에 두 가지 문제가 가로 놓여 있었다.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서 일본과 싸운 나라가 아니었다. 한국의 독립군을 국가를 대표하는 군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편에서 연합국에 대항했다는 논리를 반박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배상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한국은 식민지 통치와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다. 한편 일본은 한국 내의 일본 자산에 대한 배상을 한국에게 요구했다. 도저히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런 가운 데 세계정세는 일본과 한국이 적대관계를 계속할 수 없게 전개되고 있었다. 미국이 남한에 많은 원조를 퍼부었으나 한국의 경제는 답보 상태였다. 반면에 인공(북한)의 경제는 남한을 능가했다. 미국은 남한의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 능력을 의심했고, 군사정권에 대한 경제개발의 압력이 강화되었다. 그 와중에 공산세력은 북한-중공-소련이라는 삼국동맹을 맺었다. 미국은 한일관계 개선을 통한 남한-일본-미국의 동맹 강화를 추진했다. 일본과 한국의 군사정권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기시는 일본이 한국 내 일본 자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미국에 상환할 빚을 면제해 줄 테니 대신에 아시아 국가에게 그 돈을 원조해 주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한일 협상이 시작되었고 군사정권은 일본이 준 돈을 바탕으로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일본에 대항해서 싸웠던 나라 49개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공산국가와 중립국은 사인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남, 북한 누가 나라를 대표하느 냐도 문제였지만, 마국은 독립군을 연합군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 배상, 영토 문제 등이 최종 결정되는 문서였다. 미국은 일본의 방위를 책임진다고 약속했지만 사실상 미군이 일본에 영구히 주둔하는 것을 합법화한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전 아시아 방어를 위한 미군기지로 만들었다.
내가 자랄 때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고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다. 쓸 때 없는 도덕 논리를 가지고 논쟁하다가 나라가 망 했다는 이야기이다. 외교는 실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는 표출된 사실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과거의 일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 역사적인 사실을 선악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현재의 상황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맥 아터를 인천상륙작전으로 남한을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 부터 구해 주었다고 은인으로 생각하고, 박정희가 친일파 빨갱이라고 배신감을 느끼고 하는 것은 인지 상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한다. 외교는 첫째도 국익, 들째도 국익, 셋째도 국익이다. 미국이 남한을 구해주었다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감정이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어서도 안되고, 일본이 한국을 강점 했다고 친일파를 매도 하는 감정이 한일관게를 지배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