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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辨) 변(≠辯)
시골 철학자의 辨(with 외손녀)
<다음 글은 도덕교사 출신이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쓴 글이다.>
(A rural philosopher's argument on the distribution of inheritance & With a daughter of my daughter)
- 나의 경험 상 먹고사는 생계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아무 것도 더 여유를 두고 할 수가 없다.
-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경제 문제도 해결을 못하는 자에게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된다.
- 기타 온전한 학문과 예술 등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경제적 문제 해결 후, 그 열쇠가 있다.
외손녀와 즐거운 한때이다.
상당수의 한국 부모들은 유산을 물러 줄 적에 아들중심이다.
심지어 딸에겐 한 푼도 안 남기고 모조리 유언으로 아들에게만 주고 가는 부모들도 꽤 있다.
이는 한마디로 자기에게 인간의 기회를 준 신(神, God)을 배신하는 자괴살(自壞煞) 행위이다.
대개 아들들은 스스로 클 수 있지만 딸인 경우는 거의 그렇지 못하다.
여자들이 스스로 성장하기엔 역부족이고 여러모로 위험하기도 하다.
집안 대대로 가업이라고 하더라도 아들만 우선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 보편적인 애정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꼴이다.
A. 나의 중학 동창은 장인이 병중에 있을 적에 그의 부인과 함께 지극 정성으로 모셨으나, 장인이 타계할 적에 유산을 모조리 아들에게만 주고 떠났다. 유언이 비도덕적이라서 부친 사후 아들 스스로 누나와 공평하게 유산을 나누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지만, 누나에겐 일전 한푼도 주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B. 나의 지인의 어떤 아비는 딸은 무시하고 모든 유산을 오빠인 아들에게만 주고 갔다. 이 오빠 역시 여동생에게 전혀 분배를 하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비도덕적 행위로 스스로 오빠의 길을 버린 것이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면 딸이 더 유산을 많이 받아야 한다.
아들들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길들이 많지만 딸인 경우는 거의 그렇지 못하고 빈곤한 경우 위험하기도 하다.
위의 A,B의 사례인 경우 며느리인 남의 집 딸은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으나, 친딸인 경우는 인생 자체가 난감할 수도 있다.
딸과 사위는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외손들은 외조부모를 멀리 한다.
그리고 사촌 간 교류는 결국 자연히 끊어진다.
유산을 아들에게만 주고 간 이는 딸에 대하여 부모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버리게 되고, 외손들에게도 외조부모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버리게 된다.
더 꼴사나운 것은 유산을 독차지한 남자형제들의 의식수준들이다.
내가 본 모든 사례들은 하나같이 부모님의 뜻이라며 자기만 차지하고 제외된 다른 남형제나 여형제들에게 임의로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한 경우를 본적이 없다. 사후까지 따라갈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미리 파는 꼴이다.
나의 집안도 마찬가지이다.
거상인 조부님이 1983년 8월에 돌아가시자 숙부는 가짜 유언장을 들고 모든 유산은 나의 것이라며 설치고, 이복 삼촌과 이복 고모는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강변하고, 백부님과 나의 아버지는 법대로 하자고 말하고, 조부님과 마지막까지 동거하신 어느 부인은 자기 몫도 달라고 하였다. 결국은 장례 후 1/6으로 공평히 나누어 가졌다. 1983년도로 금액은 1인당 1,350만원이었다. 그 당시 나름은 큰돈이다. 물론 나의 아버지도 자기 몫을 받아 왔다. 하지만 그 돈 가운데 1,000만원은 사라졌다. 나보다 2살 아래터울인 나의 동생이 1,000만원만 있으면 자기가 곧 거금을 벌 수 있다며 나의 부모로부터 받아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26세 때 뇌염 후 지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친동생에게도 전재산을 사기 당하고, 또 막내아들에게도 돈을 그냥 준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친동생 일에 꼬임을 당해 연대재정보증을 잘못 서서 전재산이 대출은행 채무변제로 홀라당 몰수 당하고 무허가 판잣집에 춥게 살면서 집에 돈이 귀해 매우 힘든 시기였다. 너무나 귀한 조부님의 유산이 나의 부모님께 빛의 서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만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내가 태어났지만 할말을 잊게 하는 집안 수준이다.
또한 나의 아버지가 한창 나이 26세 때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경북 고령에서 성냥공장을 운영 중이었는데, 불시에 뇌염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와 지력저하가 되어 당사자는 당연하고 전 가족의 앞길에 암운을 일으키고 나의 장래에 불행의 직격탄을 초래한 것은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할지 암담하다. 신을 원망해야 할지 나의 운명을 원망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의 정신적 심장이 불화살에 관통당한 것이다. 고향 땅에서 생고생 할 적에 지하에서 면면히 나를 보라 본 대대로의 직계조상이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은덕으로 용케도 살아 남았다. 보이지 않는 그분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요행(僥倖)인 세계 5대 물류항만도시인 부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부산은 그 자체로 상공업과 무역, 그리고 자유가 넘치는 엄청나게 큰 요새였다. 당시엔 몰랐는데 살아보니 유라시아 대륙의 비(非)서구권으로서는 오직 하나 뿐인 다뉴브(Danube)강 동쪽의 유일(唯一)한 자유의 관문인 것이다. 나는 신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것을 복으로 받은 것이다.
참고로 나의 조부님은 6·25사변 때 대구에서 전당포를 운영하여 상상 이상의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아름다운 첩에 정신이 팔려 전 재산을 탕진하여 그 슬하에 탄생한 분들이 바로 이복 삼촌과 이복 고모님이다. 어머니를 빼어 닮아 엄청 미남미인이지만 그분들도 호적이 나의 조모님 슬하로 있는 등 인생이 꼬여 고생을 많이 하셨다. 조부님 마지막에 동거하신 분은 다른 분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분께 더 많은 유산을 자식들이 각자 알아서 별도로 더 주어야 하는데 나의 부친 형제들의 수준이 그 정도는 영 아니었다. 정말 아쉽다. 그때 나의 조부님이 미국거주 유대인들처럼 돈의 위력과 세계사의 흐름을 대강이나마라도 알았다면, 아니면 조모님이라도 영특하셨으면 내가 성장기에 안 해도 될 고생들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친지와 형제간의 수준이 이러할진데, 나의 경우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면 나의 직계를 제외하곤 다 인연을 가위로 무조건 끊을 것이다. 필요없는 인연이다. 없어야만 더 좋은 불필요한 인연 하나하나 모두들에게 세상원리상으로도 계속 공짜는 없는 법이다. 인(因)에서 연(緣)을 확실히 지워 이미 갈라진 길을 시야(視野)에서 더 멀리함이 마땅하다.
1950년대 나의 조부님의 재산이 어느 정돈가 하면 종이가 귀한 일제시대부터 대구에서 경북지역을 상대로 지물도·소매장사를 하였고, 전쟁 때는 재빠르게 돈이 된다고 전당포를 운영하였고, 신문사에 돈으로 매수를 하여 나의 백부에겐 신문기자증을 주어 군역을 피했고, 나의 아버지도 학도병으로 갔다가 휴가차 온 이후 역시 돈으로 징병차출을 면하게 하여 보호를 하였고, 휴전 후엔 큰 아들에겐 과수원을 사다 주었고 차남인 나의 아버지에겐 경북 고령에 종업원 20명 이상의 큰 평수의 성냥공장을 지어 주었다. 숙부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대구상고 재학시 영화배우가 될 오지명과 동기로 같이 놀았다.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간 것이 아니고 실력이 놈팽이라서 못 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조부가 역시 돈으로 당시 비명문 대학이지만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의 대졸 경영학사로 서류상 만들어 주었다. 그 졸업장으로 효성산업에 입사했지만 실력이 바닥나 과장 승진에 3번이나 고배 후 개인시업으로 독립하였다. 합판가공업으로 삼창산업회사를 차렸다. 이때 조부님이 부지구입 등 거의 모든 뼈대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사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법, 결국 경쟁회사에 밀려 고전하다가 결국 폐문으로 망했다. 한편 이미 그 당시에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다운 30대 나이의 이미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을 둔 홀로 미망인이 된 첩(妾)에 정신이 와락 빠지고 통째로 무너져, 자신의 재산이 십수 년간 거의 표시나지 않게 줄줄 옆으로 뒤로 밤낮으로 소리 없이 조용히 솔솔 기가 막히게 새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전재산 모두를 어이 없게 힘 한번 못쓰고 탕진하고 말았다. 재산도 없이 나락(奈落)으로 떨어지자마자 결국 첩도 나의 조부 사이에서 자신이 낳은 아들과 딸을 그대로 두고 떠나가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장사로 실력과 내공이 있는 터라 이번에 건축업으로 성공을 하여 나름 재산을 회복하였다. 1970년대 후반 금액 300만원으로 장손인 큰집 사촌형이 재직회사에 재정적 누를 범했지만 그것도 한방에 처리해 주셨다. 참고로 당시 경찰(순경)과 9급 공무원(당시엔 5급 을)의 초임이 세전 10만원이 채 안되는 그 이하였다. 나의 경우는 나의 부친이 26세 때 뇌염을 앓아 지력이 떨어지고 반신불수가 되는 통에 성냥공장도 곧 처분하고 그후의 나의 성장기엔 취약과 빈곤이 나를 그림자 마냥 따라 다녔다. 빈곤했지만 집안 여력상 초대급 거부의 길이 나의 지척에 있었다. 조부님의 집이 1950년대 대구 동산동에 홀로 2층 양옥집이었다. 하여튼 두번째 손자인 나로서는 기가 찰 일이다. 본처 소생의 딸 하나 및 아들 셋으로 부터 탄생한 손자손녀가 9명이고 첩 직계 손자가 하나인데 방기(放棄)를 하여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 나에게 고종누나인 외손녀는 부모님이 요절하는 통에 친가 외가의 큰 도움 없이 홀로 크다가 가전제품 기술자를 만나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나의 고모님도 규수(閨秀)로 훌륭한 분이지만 고모부는 일제시대에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무덕관 출신의 유도 5단 실력자였는데 6·25 사변 전 1946년 10월 대구사태(10·1사건) 때 우익으로 활동하시다 경찰차를 타고 산을 넘어 오다가 좌익들의 총탄세례에 돌아 가셨다. 하여튼 조부님이 일제 때 지물도·소매장사 및 6·25 때 전당포를 하여 돈을 엄청 벌었지만 손자대엔 전혀 득이 없을 정도로 돈관리엔 제정신이 아니였다. 실로 귀(貴)와 천(賤)의 차이가 간발(間髮)이다. 참고로 이 당시의 나의 조부의 재력은 삼성그룹의 태두인 이병철 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일약(一約)을 한번 더 하면 1950년대 대한민국의 절대다수의 시민들이 배고픈 빈곤에 기약없이 무작정 허덕일 때 일제시대부터의 지물장사와 6·25사변의 와중에 전당포로 안전한 대구에서 운좋게 1%이내의 자유대한민국 거부가 된 나의 조부님의 절제되지 못한 개인적 욕심이 손자대까지 내려와 피해를 입힌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대로만 유지했더라도 OECD정상급 대한민국에서 초(超)거부의 집안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일정시기(日政時期)의 대구는 한반도의 3대 도시로서 경성(서울), 평양, 대구로 그 위세가 부산이나 인천보다도 경제규모가 컸다. 그런 대구에서의 거부였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초토화되어 이슬처럼 사라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 분들이 인간이란 삶의 본질을 놓치고 세상사의 흐름과 타인의 연민에 무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조부님의 장사수단을 전철(轉轍) 삼아 보면 값만 올려 되파는 일반 장사치와 상품의 부가가치를 올리는 사업가와의 차이를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장사치는 돈을 제 아무리 많이 벌어도 어디까지나 생계형으로 자기 자신의 일신에 머무르고, 신(神, God)을 대신하여 이웃이나 시민들에게 음양으로 많은 혜택을 주는 경제적 사업가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승냥이급 늑대와 맹수의 사자나 호랑이 만큼의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또 예를 들면 나의 백부님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제국의 해군병사로 일분군 해군전함부대 안에서 유도챔피언이었다. 그런 분이 정작 조국의 전쟁 땐 27세에 불과한데도 부모님이 마련해 준 신문기자증으로 기자 및 문인행세를 했다고 했다. 이건 누구 잘못인지 모르겠다. 백부님이 나에게 해 주신 교훈 하나 가운데 특이한 한 것이 하나 있다면 '교과서에 나오는 김동리 등등 문인 새끼들 말 믿지 마라. 이 자식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학사모를 주는 전문대나 초급 대학 등 당시대 초(超)일급의 고등교육을 받은 놈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지금 백척간두의 풍전등화이고, 자유를 위하여 대신 함께 싸워주는 미군들 덕분에 나라가 학철부어(涸轍鮒魚: 붕어가 빗물 덕분에 잠시 고인 길바닥 물에서 팔딱거리는 신세)의 찰나인데도 돈으로 매수한 대학생 신분이나 신문사 기자증을 들고 어느 한놈도 전선에 갈 생각은 않고 다방에 죽치고 앉아 북한군이 더 남하(南下)하면 완전변신하거나 안전한 제주도나 일본 등등 외국으로 도망칠 궁리만하고 <오! 조국이여~~~> 하고 다방에 있는 헌 신문지나 빈 담배갑에 시만 긁적거리는 놈들'이라며 나에게 줄곧 만날 때 마다 자주 말씀하셨다. 1910년 고종황제부터 돈을 받고 나라를 자기 가산제(家産制) 재산 인양 파는 등등 모조리 태생적으로 정신이 가난한 2류 국민들 뿐이다. 그 와중에도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과 정도언론의 여러 신문사가 징병회피용 징표로 매관매직 장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의 백부님의 증언이다.
여전히 우리 수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제정신들이 아니다. 정신이 빈곤들 하여 아들들에게만 유산을 주고 소외된 아들이나 딸들은 분개하여 유산전문 변호사를 찾는 등 형제가 갈라지고 외종과 고종 사촌이 남이 되는 등 스스로 콩가루 집안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그리하여 외손들은 외조부모부터 정이 떨어지고 외갓집이라면 제사도 불참하는 등 치(齒)를 떤다. 한마디로 한다면 작금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수준이다. 스스로 축생(畜生) 이하의 내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나의 아버지는 6·25 학도병일 때 미군소속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몇 번의 전투에서 온전히 살아 남은 공으로 휴가를 다녀로 온 것이었다. 희안하게도 미군들은 전투 중에도 돌아가면서 순번을 정해 휴가를 가거나 보내 주었다. 우리 한국군 마냥 병사들을 위급하든말든 무조건 사지로 막 몰아 넣지 않았다. 당연히 미군들은 병사들도 귀대율이 100%라면 한국군은 불신이 가득하여 병사들의 귀대률이 대개 탈영으로 이어져서 전사할 때까지 아예 휴가 자체가 없었다. 그것참 휘안할 일이다. 아버지의 학도병 친구들 몇은 북한 인민군의 박격포 삼각기법 포격에 무조건 전진하라는 미군 장교에 지휘에도 뒤로 도망치다가 전멸 당했다. 미군장교들을 따라 전진한 학도병들은 다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총탄과 포탄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직접 전투에 참전한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미군들이 하나하나 힘도 세고 매우 강하고, 생각이상으로 전투에 능하다고 하였다. 총검으로 생사를 가르는 각개백병전도 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이 장교를 무척 존경하고 장교 역시 전장에서 선두로 앞장섰고 무엇보다도 보급품이 매우 넉넉했다고 하였다. 또 하나 매우 놀랍도록 특이한 것은 낙동강 야간전투에서도 북한 인민군들이 사정거리에 집단으로 충분히 들어 올 때까지 총을 쏘지 않고 백인병사들이 산허리에서 매복하면서 기다리다 사격과 백병전으로 보이는 북한군을 모조리 전멸시킨 것은 기록에도 남길 수 없는 실제적 전과라는 것이었다. 6·25때 낙동강 사수가 가능했던 것은 미군 하나하나가 생각 이상으로 북한 인민군에 비하여 각개 전투력이 각종으로 월등히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미국백인들이 태평양 전쟁에서도 승리하는 등 세계를 지배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1960~70년대 월남전에 다녀온 동네 선배들의 실전 이야기에 의하면 총알을 아무리 많이 들고 들어가도 일단 전투에 임하면 수 분후 곧 총알이 동나 그땐 믿을 건 총에 꽂은 대검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큰 전투는 폭격과 포격이라도 여기저기에서의 작은 전투는 백병전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이 실전선배들의 가르침이다. 일단 엉켜 떼거리로 싸우면 덩치가 아무리 커도 총검술로 정확히 적의 인후부를 찌르지 못하면 자신도 바로 황천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군들 중에는 전투를 업으로 삼는 장기복무 부사관 백색프로킬러용사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항상 전투복차림으로 눈빛부터 다르고 잘 웃지 않고 눈엔 살기가 가득하고 총과 대검을 다루는 솜씨가 거의 신급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미군자체의 장소불문의 강력하고 월등한 전천후 화력 덕택에 이들의 전장생존률은 매우 높다. 거의 다치지도 않고 100% 살아서 귀대한다. 그래서 개개인들의 전투경험이 누적되어 있다. 또 이들은 군에서 강제전역시시키는 그날까지 온세계의 전장터를 자신의 운명마냥 누비며 총보다 대검을 더 귀중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결정적 순간에 돈을 보고 변심하는 말(語)이 앞서는 샤머니즘의 Asian Zone에서는 발견하기 쉽지 않는 북유럽피안의 신(神, God)의 운명과 계시(言)에 의지하는 원칙론자들의 한 줄기이다. 그래서 동네 한 선배는 이들을 본받아 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대검(帶劍)을 항상 예리하게 만들어 주야로 휴대하였다고 하였다. 대검(帶劍)!!! 맞는 말이다. 인생에서도 항상 대검은 필요하다. 예리하게 만들어 친지나 형제 등 남들로부터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수없이 경험해 왔지만 나의 친지들이나 형제부터도 이상하게 자유의 힘에서 스스로 분기하는 신용과 믿음의 책임성이 아예 없다는 데에 나는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상기 미군에 대한 이야기는 중학교 때 6·25 참전 경험이 있는 지리 선생님께서도 수업시간에 자주 말씀하셨다. 이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사인 자유의 정신을 평소 생활에서 습득한 해 온 병사들과 전쟁이 나자마자 노예처럼 숨어 있다가 끌려 간 병사들과의 차이점에서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월남전에서의 미군프로백색킬러 부사관들의 이야기는 어느 파월장교의 저서에서도 본 적이 있다. 전략전술도 중요하지만 각개전투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자녀가 제 아무리 재주와 재능이 있어도 부모님이 고전을 면치 못하면 그 자녀의 앞길은 자식이 부모님을 냉정하게 버리지 않는 한, 그냥 오로지 인고의 길만이 그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가득할 것이다.
대구에서 거상인 조부님이 조금만 더 세계를 보는 격조가 높았으면, 설사 비천하게 행동하여 망조(亡兆)로 그랬다하더라도 나의 부친이 뇌염이란 26세 때의 불행을 피했다면 나도 어릴 적 수모를 덜 당하고 나름 기품 있게 자라 인생에 그늘이 훨씬 적을텐데, 특히 심신이 무럭무럭 자라는 중학생 때 입은 치명상은 아직도 몸과 마음과 정신에서 결핍의 손(損)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 실로 그 모든 것이 종이 한장 차이이다. 생계형으로 못난이들과 부딪히며 살다보니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나도 비루해져 참다운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다같은 인간이라도 빈궁한 것들과의 생활은 피곤이 첩증을 한다. 먹고입고자고하는 것에도 품격이 있다. 말하고 노는 것에도 넘을 수 없는 별다른 세계의 신분의 차이가 있다. 나의 직분도 계급도 없는 병졸과 같은 서민층의 생활인이다. 온전하고 깊이 있는 자유를 위한 사색이 거의 불가능했다. 심지어 신분이 국가적으로 보호되고, 봉급이 제때 척척 나와, 더 낮은 계층의 분들이 종종 부럽다고 말하는 교사로서 생활하는 데도 교무실의 사내 정치가 있다. 참으로 더 해야 할 본분을 모르는 불쌍한 것들끼리의 말도 안 되는 3류 수준의 정신적 난투극이다. 대학은 다들 분명히 나왔지만 어린 아이들이나 교실에서 계속 상대해야 하다보니, 지적 수준이 겨우 동네 잡범들 수준이다. 교사니 교수니 하는 것도 피곤한 백성들이나 하는 직이다. 하버드 대학의 최고급 교수라하더라도 모조리 봉급생활자로 수퍼리치의 상류층이 본다면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네 자녀들의 그랜드투어용 동반교사들 급에 불과하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나면 저녁을 관조하면서 비천한 대우의 상처의 흔적과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시민을 위하여 신(神,God)에 대한 나의 가오(加悟)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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