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청양의 송덕비(頌德碑), 눈여겨 보셨나요?
[필자주] 이 글은 지난 2011년 12월 29일 충청권 일간지 금강일보에 소개한 필자의 칼럼입니다. 충남 청양 태생 출향인의 한 사람으로서 전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옛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장평초등학교 동창생 단체 카톡방>에도 올립니다. 역사학자이자 존경하는 고향 선배님이신 정구복 박사께서 운영하는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에도 소개합니다.
윤승원의 세상風情(60)
시대의 거울 ‘송덕비(頌德碑)’
- 알기 쉽게 재 조명한《靑陽의 金石文》 -
윤승원 논설위원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일지라도 눈여겨보지 않고 소홀히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노상 바빠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다가다 자주 보게 되더라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데는 그만한 요인이 있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금석문(金石文)’이 그렇다. 쉽게 해석이 안 되는 어려운 한문투성이인데다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퇴색했거나 이끼가 끼어 있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일쑤다.
그런데 최근에 감탄할만한 일이 생겼다. 고향 문화원의 초청으로 ‘내 고장 문화 알리기’행사에 참석했다가 뜻밖에 두툼한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靑陽의 金石文》(청양문화원 2011년 발행, 임장혁, 정형호 엮음, 576쪽)이다.
* 이 책을 엮은 중앙대학교 민속학과 임장혁, 정형호 교수는 충남 청양 출신 민속학자 임동권 박사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구한 학자들이다. 자료 조사 보조는 중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 석사과정 이준규, 노현식, 이사빈, 지화정, 박민혜, 정세영, 이 주 씨가 함께 했다. 비문 번역은 위창복 성균관 청년유도회 중앙회 부회장이 맡았다.
▲ 청양문화원이 역점사업으로 누구나 알기 쉽게 펴낸《靑陽의 金石文》- 개인이나 가족이 세운 묘지의 비문은 배제하고, 국가나 지역공동체, 또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하여 건립한 금석문 중심으로 ‘선정기준’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 주고 있다.
필자는 이 책자를 꼼꼼히 살펴보다가 새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 첫째, 이런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긴요한 문화 사업을 처음 기획한 문화원 관계자들의 깊이 있는 안목과 역사의식이다.
▲ 둘째, 이런 귀중한 책을 발간하기까지는 남다른 애향심과 전문적 식견을 가진 민속학자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셋째, 개인이나 가족이 세운 묘지의 비문은 가급적 배제하고 국가나 지역공동체, 또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하여 건립한 금석문 중심으로 ‘선정기준’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 넷째, 원문을 알기 쉽게 해독(解讀)했다. 옛 사람의 글을 오늘 날의 감각으로 누구나 읽기 쉽게 해독하는 일은 전문가인 학자의 해박한 지식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 다섯째, 구체적인 사실을 의미 있게 표현한 문장이다. 금석문은 당시 관리들의 선정(善政)과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효행, 지역사회에 대한 공덕 등이 함축된 ‘기록문화’다. 글의 행간에서 읽혀지는 옛 사람의 과대포장 되지 않은 진솔한 삶의 발자취는 존경과 더불어 숙연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궁벽하여 글공부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에 내 고향 시골 벽촌에서 대체 어느 문사가 이런 담백한 문장을 지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송덕비도 있다.
‘弘厚巨閥(홍후거벌) 來住此鄕(래주차향)。人病跋涉(인병발섭) 施而橋梁(시이교량)。險途達坦(험도달탄) 僻地生光(벽지생광)。立石而紀(입석이기) 永年不忘(영년불망)。
크고 후한 거벌(지체 있는 집안), 이 고을에 와 살았거니, 사람들이 물 건너기 괴로웠는데, 다리 놓아주는 은혜 베풀었네. 험난한 길 평탄하게 통행되니, 궁벽한 지역에 빛이 나도다. 비석을 세우고 기록하여, 긴 세월동안 잊지 않으리라.’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면사무소 앞에 세운 ‘김해김공재철시혜기념비(金海金公在哲施惠紀念碑)’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비석이다. (건립일 : 1963년 음력 6월, 건립자 : 적곡면민 일동)
▲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면사무소 앞에 세워진 '송덕비' - 결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비석이지만, 여기 새겨진 담백한 문장의 행간에서 읽혀지는 옛 사람의 과대포장 되지 않은 진솔한 삶의 발자취는 존경과 더불어 숙연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본 사진은 필자가 고향 선산 성묘길에 찍었다.)
이 비문에서 나는 ‘險途達坦 僻地生光’(험난한 길 평탄하게 통행되니, 궁벽한 지역에 빛이 나도다)이란 구절에 특히 감동한다. 1963년 건립됐으니까 필자가 10대 소년시절이다. 직접 보고 겪었던 풍경이기에 더욱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오늘날 생각하면 시골 냇가에 다리 하나 놔주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싶지만 당시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량은 마땅히 나라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놔줘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이지만 당시엔 국가재정이 이런 벽지에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갖가지 농산물을 머리에 이고 장에 가는 사람, 책보를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먼 길 걸어서 등하교하는 어린이들, 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 등 이곳 ‘흙다리’(통나무에 진흙을 다져 만든 임시방편의 다리)를 건너다니다가 구멍이 뚫리고 물이 범람하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여 한 개인이 큰 덕을 베풀어 번듯하게 다리를 놓아 준 일이야말로 주민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 준 일이고, 면민들로선 그 고마운 뜻을 비에 새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해 충남의 어느 고장에서는 시장을 지낸 사람이 현직에서 물러나기도 전에 공덕비를 세워 주민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고, 서울의 모 구청장을 지낸 사람은 구민의 세금으로 자신의 공적비를 세웠다고 해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또 충남의 어느 지역 발전협의회에서는 특정인의 막대한 공덕비 건립비용을 자치단체에 요청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지역공동체나 주민일동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세운 옛 ‘금석문’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금석문은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훌륭한 업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우는 것이다.
특히 송덕비는 ‘시대의 거울’이다. 비에 새겨진 옛 사람들의 정신적 가치는 그 어떤 기록유산 보다 값지다.
청양문화원이 가장 큰 역점사업으로 펴낸《靑陽의 金石文》발간을 계기로, 각 자치단체에서는 전국에 산재돼 있는 금석문을 재조명하여 훌륭한 옛 사람들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 ▣ (금강일보 2011. 12. 29.)
첫댓글 저도 금석문 발간 소식을 드고 한부를 청양문화원에 부탁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충 한번 보았습니다. 이런 소중한 것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이번 시향에 가면 한번 직접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