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치세
김명헌, 27세 김효건, 31세 김범구, 32세 김열택, 32세
김상구, 32세 김성응, 30세 김정묵, 34세 김우택 32세 김기상, 34세
김기웅 34세 김기헌 34세 김성은, 30세 김 수, 32세 김상순, 33세
김기서, 34세 김효수, 31세 김재삼, 35세
영조의 보령이 80에 이르자,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이 대리청정을 했다.
83세 나이로 영조가 승하하자, 세손이 왕위에 등극하니 이가 정조다.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영의정, 그의 동생 홍인환이 정승자리에 있었다.
정조는 당파싸움의 피해를 잘 아는지라, 이들을 모두 내 쫓고
탕평책을 계속 실시하였다.
인사의 형평성을 기하기 위해 숙종 이후 실직 되었던
남인들을 등용하고, 서북인도 골고루 기용하였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다.
학문 진흥에 관심을 두고 왕실의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만들었다.
서적을 모으고 저술을 권장하니
‘대전통편’ ‘국조보감’ ‘규장전운’등을 편찬하여 문에를 부흫시켰다.
농업을 발전시키고 상업활동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회전반에 걸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정치가 안정되어갔다.
김명헌(命獻, 27세)은
아홉 번 낙방하고 열 번째 과거를 봤을 때는 나이가 여든 한 살이었다.
1714년(肅宗40年)∼1795년(正祖19年), 82歲,字는 사충(士忠)이고
수직통정대부(壽職通政大夫) 장집(章緝)의 아들이다.
그는 호학능문(好學能文)하여 1782년(正祖6年)에 가승(家乘)을 정비하여
임인보(壬寅譜)를 편(編)하고 비로서 가계(家系)의 체통(體統)을 세웠다.
1794년(正祖18年)에
심락수(沈樂洙) 어사(御史)가 베픈 과장(科場)에 응시하였는데,]
시권(試券)을 상송(上送)하여 과차(科次)할 때
명헌(命獻)의 나이가 81세였다.
책(策)에 차석(次席)이었으나 특별히 사제(賜第)하였다.
그러나 고령(高齡)으로 직부(直赴) 할 수 없음을 어사(御史)가 아뢰었다.
임금이 명(命)하기를 ”대정현(大靜縣) 유생(儒生) 김명헌(金命獻)은
명년(明年) 급제자를 발표할 때 방미(榜尾)에 부기(附記)하고
화패(花牌)를 내려 보내어 창명(唱名)하게 하고
객사(客舍)의 뜰에서 숙배(肅拜)하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창방(唱榜)하기 전前에 사망하였으므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하였다.
참판 김명헌
김명헌(金命獻) 참판(參判)은 조선조 숙종(肅宗) 때의
중문면(中文面) 중문리 사람이다.
인물이 좋고 학문이 뛰어나, 과거를 하려고 서울을 여러차례 출입하였다.
그러나 과거는 보논 족족 낙방(落榜)이었다.
김참판은 낙방을 거듭해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아홉 번 낙방하고 열 번째 과거를 봤을 때는 나이가 여든 한 살이었다.
팔순(八旬) 노인인 김참판은
창창한 젊은이들과 같이 시지(試紙)를 펼쳐 놓고 율시(律詩)를 써 내려갔다.
그 한 구절에 말하기를,
"身年은 九九요. 落榜은 三三이라."
나이 81세에 낙방은 9번이라는 글귀다.
이 시지를 받아 든 상시관(上試官)은 글귀를 죽 내려다 보고는
자리 밑에 따로 넣었다.
과거가 끝나자 상시관은 크게 탄식했다.
이 늙은 선비는 아홉 번이나 낙방했지만, 이 글 재주면 필시 매번
급제 했을 것이다. 아깝게도 매번 급제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사실 김참판은 아홉 번 과거에 매번 급제를 했다.
그런데 중간에 오리(汚吏)들이 이름을 바꾸어
뇌물을 먹인 엉뚱한 사람에게 벼슬을 주어 버린 것이다.
상시관은 이번엔 그런 일이 없게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영수증을 써주었다.
김참판은 영수증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게 갑인년이었다. 과거는 문제도 없이 급제였다.
그러나 김참판은 집에 돌아와 과로 때문이었는지 병을 앓아 누웠다.
병은 점점 무거워 갔다.
김참판은 세상을 떠나야 할 것임을 스스로 느꼈다.
일생 소원이던 과거 급제를 못하고 죽게 됨을 탄식하였다.
이듬해인 을묘(乙卯)년 2월 19일에 김참판은 숨을 거두었다.
관(棺)을 짜고 입관이 끝나자, 먼 문앞에 관원의 행차가 당도했다.
과거 급제의 창방(唱榜)이 도착한 것이다.
제주목사(濟州牧使)를 거쳐 대정현감(大靜縣監)이 김참판에게까지
전달하는 것이 이렇게 늦어진 것이었다.
창방이 도착하자,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이 한 없이 서운해 했다.
과원은 영전(靈前)에 분향을 하고 교지(敎旨)를 관 위에 올려드렸다.
순간 관이 다르르 떨고 교지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고한다.
출처 : 부산종친회카페
김효건(孝建, 31세)
정조조에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판서,
정조왕이 공의 단정한 풍모르와 굳은 지조를 칭찬하여 상을내렸다.
김범구(範九, 32세)는
덕행으로 세인의 추앙을받았다.
서당을 개설해 후진 양성에 힘을 섰다.
김열택(說澤, 32세)은
현릉 참봉과 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불취.
정조의 특명으로 승자하여 교지를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김상구(象九 32세)는
영조조에 생원, 진사 양시합격,
정조 17년(1793)에 실시한 도산 별시에 문과 급제하였으나, 문제가 생겨 파방되고 말았다.
왕이 공의 재주를 아껴 자석으로 만든
벼루와 옥책 띠를 하사하고, 빈홍록을 간행 할 것을 명했다. 유고가있다.
김성은(성은, 30세)는
정조 10년에
평장동 왕자공의 유허에 사우를 짓는 책임을 맡았다.
정조 21년(1797)에 문안공 양감의 위에 시조공의 위패를 봉설하고,
서원 강당 중수기를 썼다. 순조 26년(1826녀)에 유림의 발의로
노산사를 창건하는 등 그 외도 많은 문사 일을하였다.
상강록을 편저하고 성리변론, 태극해설 등을 저술하였다.
유고가 있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정묵(正黙, 34세)은
경학으로 천망되어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 사림의 천거로 사헌부 지평겸
경영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성리학에 식견과 문장 및 덕행이 뛰어나 사림의 사표가되었다.
김우택(遇澤 32세)는
예학에 정통하여 향천에 올랐다.
4례의 32편과 음사함록과 거
가예의 등 각 1권씩 집에 보관 되어 있다.
예론변설 1권이 세상에 알려져 예학의 대가로 통칭되었다. 휴정서원에 배향.
김기상(箕象, 34세)은
영조조에 문과급제, 호조참판.
김기응(箕應 34세)은 황주목사.
김기헌(箕憲, 34세)는
영조때 여러 고을의 수령을거쳐
상주목사. 이조참판에 추증.
김성응(聲應, 30세)은
정조조에 장원급제, 관직은 도사였다.
독실한 행실, 깊은학문, 지식이 넓어 향당의 본보기가 되었다. 유고가있다.
김 수( 燧, 32세)는
효우에 돈독하였으며
족조인 김성은과 더불어, 장영공 진(稹), 전리판서공 광리의 묘소를
풍덕, 망포 응봉하에 찾아서 수호하였다.
저서로 동류록 및 풍천일기가 있다.
김상순(相順, 33세)는
순조조에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부총관을 지냈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김기서(箕書, 34세)는
정조조 참봉을 제수했으나 불취.
순조조에 감역을 제수했으나 불취.
그때 공론이 공을 경영관으로 뽑아야 한단다고 하였다.
부수, 위수를 거쳐 청도군수로 선정.
김효수(孝秀, 31세)는
정조조 급제, 승정원 승지.
김재삼(在三, 35세)는
음사로 선산부사를 거쳐 형조참판, 충청도 관찰사엮임.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