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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글/좋은글/참고글 스크랩 진정한 성평등(性平等)을 이루려면
milkyway 추천 0 조회 47 19.02.11 02: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정한 성평등(性平等)을 이루려면

 

 

은처승척결 기자회견

 

요즘 조계사 일주문은 기자회견 장소입니다. 이른바 길거리 기자회견입니다. 주로 교계신문기자들을 대상으로 교계의 문제점을 알리는 것입니다. 최근 기자회견 중에는 이제까지 기자회견과는 다른 특별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교계 스님들의 성추문에 대한 것입니다. 이름하여 은처승척결특별기자회견입니다.

 

교계신문에 따르면 조계종 호계위원이었던 H스님은 절에 찾아 온 젊은 여성을 수 차례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로 그 여성은 딸을 출산했는데 그 과정에서 낙태를 강요 당하고 폭력을 당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스님이 딸 같은 신도의 딸을 성폭행하고 성의 노리개로 삼은 것입니다. 이에 조계종적폐청산시민연대가 조계사일주문 앞에서 은처승척결 기자회견을 연 것입니다.

 

교계에 성추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잊을 만 하면 뉴스에 보도 되어 사람들 입에 회자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은밀하게 때로는 버젓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 많은 원로스님들 상당수가 숨겨 놓은 아내와 자식이 있다는 소문입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에 대한 추문도 끊이지 않습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은 은처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가 되기 전에 교단자정센터에서 우려의 성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약 팔년 전 성명을 보면 은처승, 도박승, 부패승은 교단을 붕괴시키고 불법을 쇠멸시키는 사자신충들이다. 자비행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가 12백만 명을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불자 3백만명이 빠져나간 이유

 

어느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대표의 역량에 따라 흥망성쇠가 달려 있습니다. 특히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어떤 자가 기업의 CEO를 맡느냐에 따라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CEO의 경쟁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 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매출과 이익이 아무리 좋아도 무능력한 CEO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부도의 길, 도산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조계종 종헌종법에 따르면 스님이 되는 조건을 독신비구승이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돈 있는 스님, 권력있는 스님은 몰래 처와 아들을 숨겨 놓고 살고 있습니다.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 다른 것입니다. 무엇 보다 충격적인 것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에서부터 본사주지 등 힘있는 스님들 상당수가 은처의혹을 받고 있거나 실제로 은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신비구종단에서 은처가 있다는 것은 한국불교가 은처승종단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소위 정화운동 이전으로 돌아 간 것입니다. 무능력한 CEO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부도의 길로 가듯이, 부적격자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쇠망의 길로 가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일까 2015년 종교인구 총조사에서 무려 불자가 3백만명이나 빠져 나갔습니다.

 

음식절제가 되면 성욕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가 은처의혹을 받고 있다면 불자로서는 부끄럽고 창피한일 입니다. 마치 조폭출신 대통령을 가진 국민과 같습니다. 더구나 은처를 가지게 된 동기가 성폭행에 따른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남자들만 사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마치 발정난 수컷을 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치마만 두르고 있으면 모두 성적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출가이유가 불분명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욕계에 살면서 성적욕망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입니다. 욕망의 세계에서 성욕을 극복한다는 것은 식욕을 극복하는 것처럼 요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음식절제를 말씀했습니다. 부처님은 음식절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신체에 대하여 부정을 관찰하고, 음식의 혐오에 대하여 지각하고, 모든 세계에 즐길만한 것이 없음에 대하여 지각하고, 일체의 형성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죽음에 대하여 지각하여 안으로 잘 확립한다.”(A5.71)

 

 

부처님은 음식의 혐오에 대하여 지각하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혐오스런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은 음식이 재생을 불로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네 가지 음식, (1)먹을 수 있는 자양분(麤細食), (2)느낌을 위한 접촉의 자양분(觸食), (3)새로운 존재의 생성을 위한 의도의 자양분(意思食), (4)정신-신체를 위한 의식의 자양분(識食)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음식은 혐오의 대상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띠깐다끼의 경에서 수행승이 때로는 비혐오적인 것에서 혐오적인 것을 지각한다면, 옳다.”(A5.144)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혐오적인 것이란 주석에 따르면 원하는 대상(예를 들어 여자의 육체나 맛있는 음식 등)에 대하여 부정, 무상, 혐오의 지각을 일으키는 것이다.”(Mrp.III.290)라 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여자의 육체와 맛있는 음식이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식욕과 성욕은 근원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음식절제를 강조한 것은 동시에 성욕의 절제에도 해당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망자도 음식을 향유한다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때까지 육체를 보전해 오고 있는 것은 끊임 없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찾아 먹은 것입니다. 단 하루만 굶어도 허기져서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니 단 한끼만 건너 뛰어도 죽을 듯이 괴로워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음식은 망자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이는 쿳다까니까야 담장밖에 경에 따르면,“연민에 가득 차서 가신 친지들에게 제 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를 헌공하오니”(Khp.7)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음식을 공양하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제사의 공덕을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음식은 아귀의 영역에 태어난 자들이라 합니다. 대게 자신의 친지나 혈족이 해당됩니다. 그런데 친지나 혈족 중에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사를 지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앙굿따라니까야 지눗쏘니의 경에서 바라문이여, 다른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해당되는 곳에 나타나서 그들이 그 보시를 향유합니다.”(A10.177)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조모 등 직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설령 부모나 조모가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조상, 즉 다른 친지의 친족이 아귀의 영역에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라도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 보시를 향유합니다.”라 했는데 이는 아귀가 제사음식을 취함을 말합니다.

 

아귀의 영역에 있는 자들은 제사의 음식을 얻어 먹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 보시를 향유합니다.( d?na? paribhu?jant?)라 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그 보시를 즐깁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paribhu?janta’‘eating; using; enjoying’의 뜻입니다. 아귀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다르기 때문에 아귀의 영역에 있는 자들이 인간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배고픈 아귀들이 눈으로 보고 냄새로 맡아서 음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덕이 되는 제사

 

바라문 자눗쏘니는 부처님에게 계속물었습니다. 자눗쏘니는 부처님에게 그 돌아가신 친지나 혈족이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지 않았고, 다른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도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누가 그 보시를 향유합니까?” (A10.177) 라고 물어 봅니다. 자신의 혈족도 자신의 친족도 아귀가 되지 않았다면 누가 그 제사상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h?na? kho eta? br?hma?a, anavak?so ya? ta? ?h?na? vicitta? assa imin? d?ghena addhun? yadida? [PTS Page 271] petehi ??ti s?lohitehi. Api ca br?hma?a d?yakopi anipphalo hoti.

 

바라문이여,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라문이여, 보시하는 자에게 과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A10.177)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육도라 하여 육도윤회하는 것이라 합니다. 윤회의 과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아귀의 영역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자신의 직계 혈족이나 친족이 설령 아귀의 영역에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기나긴 세월 동안(d?ghena addhun?)한번은 아귀의 영역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귀의 영역에 있는 자들 모두는 자신과 기나긴 여정에 있어서 인연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보시에 대하여 보시하는 자에게 과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Api ca br?hma?a d?yakopi anipphalo hoti.)라 하여 제사지내는 것이 보시공덕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에 수륙제가 있습니다. 물과 육지에서 헤메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올리는 재를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유주무주고혼을 위한 것입니다. 전쟁으로 죽은 자, 외롭게 고독하게 죽은 자들을 위한 제사입니다. 이런 수륙제에 참여하면 큰 공덕이 될 것이라 합니다.

 

법회할 때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립니다. 육법공양이라 하여 등, , , 과일, 쌀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제철에 나는 농산물입니다. 그 중에 과일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이런 제철 농산물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의미도 있지만 유주무주고혼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의미가 더 클 것입니다. 그래서 가신 친지들을 위한 것이니 친지들께서는 행복하소서. 여기에 모여 친지의 가신 님들도 함께 했으니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에 진실로 기뻐하소서.”(Khp.7)라 하여 불교에서는 공덕이 되는 제사를 장려했습니다.

 

기쁨을 먹고 산다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이야기 했지만 또 한편으로 음식보시의 공덕에 대해서도 말씀했습니다. 음식절제는 윤회하는 삶을 끝내기 위한 것이고, 음식보시는 뭇삶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의 세계에서 결코 욕망을 내려 놓고 살기 힘듭니다. 그것은 식탐에서 나타납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들은 끊임 없이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번식해야 합니다. 마치 축생처럼 먹는 것과 번식하는 것입니다. 본능에 충실하는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TV에서는 끊임 없이 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각종 영상 매체에서는 공통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자극합니다. 욕계에서 욕망으로 사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인간들은 마천루라는 욕망의 바벨탑을 세워 올렸습니다.

 

음식절제가 곧 수행입니다. 음식절제를 하면 욕망의 절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욕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욕계를 벗어나 색계에 태어나면 음식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는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하 경에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D27)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색계 2선천인 극광천에서는 기쁨이 음식인 것입니다.

 

욕계탈출을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욕망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욕망에 물들지 않고 욕망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욕계에서 탈출하여 기쁨을 먹고 사는 색계와 무색계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곳도 궁극이 아닙니다. 더 이상 세계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세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이 이 세 가지 원리를 갖추면, 확실한 길을 확보하고 번뇌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기반을 얻는다.”(A3.16)라 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이고,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indriyesu guttadv?ro hoti, bhojane matta??? hoti, j?gariya? anuyutto hoti.)” (A3.16) 입니다. 욕망의 세계, 욕계탈출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감각대문을 수호하는 것

 

번뇌를 부수기 위한 토대로서 첫 번째는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단속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Katha?ca bhikkhave bhikkhu indriyesu guttadv?r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cakkhun? r?pa? disv? na nimittagg?h? hoti, n?nubya?janagg?h?. Yatv?dhikara?ameta? cakkhundriya? asa?vuta? viharanta? abhijjh? domanass? p?pak? akusal? dhamm? anv?ssaveyyu?, tassa sa?var?ya pa?ipajjati, rakkhati cakkhundriya?, cakkhundriye sa?vara? ?pajjati.

 

수행승들이여,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시각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시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A3.16)

 

 

감각능력의 문(indriyesu dv?ra)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정신(m?nasa)도 감각능력에 해당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능력의 문이라 합니다.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한다는 것은 감각대문을 수호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인상과 연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상(nimitta)은 영어로 ‘image’라 하며 큰 대상을 말합니다. 사람을 예로 든다면여자다” “남자다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상(anubya?jana)은 영어로 ‘a secondary attribute’라 하며 부수적으로 따르는 대상을 말합니다. 사람을 예로 든다면 눈, , 귀 등 특정부위에 주목하는 것과 같습니다. 초불연에서는 표상[全體相, nimitta]”부분상[細相, anubya?jana]”이라 하여, 대괄호를 이용하여 한자어와 빠알리어문구를 삽입하여 번역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여섯 가지 감각대문이 있습니다. 대문을 통하여 대상을 통하여 끊임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인상적인 대상은 연상작용을 하게 만듭니다. 만약 인상과 연상이 계속 된다면 대문을 열어 주게 되는 셈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한다. (p?pak? akusal? dhamm? anv?ssaveyyu?)” (A3.16) 라 합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anv?ssavati’‘to stream into, to attack’의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물밀듯이]흘러들어 올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감각대문을 수호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 도둑이 침입한 것으로 봅니다. 다름 아닌 악하고 불건전 한 것들(p?pak? akusal? dhamm?)’입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탐욕, 성냄 등 14가지 불선법이 있습니다. 도둑이 들어 와서 헤집고 다닌다면 모두 털리고 말 것입니다. 인상과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감각대문을 단속하는 것입니다.

 

왜 음식절제해야 하는가?

 

번뇌를 부수기 위한 토대로서 두 번째는 식사에서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입니다. 감각대문을 수호하는 것과 먹는 것이 번뇌의 소멸에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욕망과 관련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Katha?ca bhikkhave bhikkhu bhojane matta??? hoti: idha bhikkhave bhikkhu pa?isa?kh? yoniso ?h?ra? ?h?reti. Neva dav?ya na mad?ya na ma??an?ya na vibh?san?ya. Y?vadeva imassa k?yassa ?hitiy? y?pan?ya vihi?s?paratiy? brahmacariy?nuggah?ya, iti pur??a?ca vedana? pa?iha?kh?mi, nava?ca vedana? na upp?dess?mi, y?tr? ca me bhavissati, anavajjat? ca ph?suvih?ro c?ti. Eva? kho bhikkhave bhikkhu bhojane matta??? hoti.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것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예전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 것이다.’라고 깊이 성찰하여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A3.16)

 

 

이것이 음식절제에 대한 정형구입니다. 또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공양게(供養偈)라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을 약으로 알아 먹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것입니다. 만일 음식을 약으로 알아 먹는다면 몸을 생각하여 어느 음식이든지 먹을 것입니다. 먹다 보면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심지어 술도 마실 수 있습니다. 대승공양게에서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正思良藥爲療形枯) ”라는 구절은 부처님 가르침과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음식을 약으로 알아 먹는 것은 환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음식을 약으로 알아 먹는 다면 음식을 즐기는 것이 됩니다. 약 아닌 음식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음식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탁발음식은 배를 채우는 것으로 족하고”(A10.99)라 했습니다.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 그것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 음식입니다.

 

경에서 나는 예전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iti pur??a?ca vedana? pa?iha?kh?mi, nava?ca vedana? na upp?dess?mi)”라 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그래서 나는 오래된 느낌을 물리치고 새로운 느낌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오래된 느낌은 배고픔으로 인한 불편한 느낌이고 새로운 느낌은 [절제없이] 먹음으로 인한 불편한 느낌이다.”(355번 각주) 라고 주석을 인용했습니다.  음식절제는 중요한 수행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음식절제가 실패하면 욕망에 굴복한 것이 됩니다.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란?

 

번뇌를 부수기 위한 토대로서 세 번째는 깨어있음에 철저하는 것입니다. 욕망으로 살아 가면 욕계에서 살기 때문에 욕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감각대문을 수호하기 위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번뇌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기반으로서 깨어 있음에 철저하라고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Katha?ca bhikkhave bhikkh? j?gariya? anuyutt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divasa? ca?kamena nisajj?ya ?vara??yehi dhammehi citta? parisodheti, rattiy? pa?hama? y?ma? ca?kamena nisajj?ya ?vara??yehi dhammehi citta? parisodheti, rattiy? majjhima? y?ma? dakkhi?ena passena s?haseyya? kappeti, p?de p?da? acc?dh?ya sato sampaj?no u??h?nasa??a? manasikaritv?. Rattiy? pacchima? y?ma? paccu??h?ya ca?kamena nisajj?ya ?vara??yehi dhammehi citta? parisodheti. Eva? kho bhikkhave bhikkhu j?gariya? anuyutto hoti.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란 이러한 것이다.”(A3.16)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j?gariya? anuyutto)이란 낮이나 밤이나 장애가 되는 것것들부터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라 합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늘 사띠(sati)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사띠합니다. 이는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sato sampaj?no u??h?nasa??a? manasikaritv?)”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은 특별한 시간에 다시 일어날 것을 의도하고 잠드셨다.”(35번 각주)라 되어 있습니다. 잠들기 전에도 사띠하고, 잠을 깨고 나서도 사띠하는 것입니다. 잠 잘때도 알아차리면서 잔다면 꿈이 있을 수 없고 깊은 잠을 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 했습니다.

 

식욕과 성욕대로 산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다는 것은 감각능력을 수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알고 창피함을 알면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을 갖춤으로 감각능력 수호는 토대를 갖는다.”(A7.65) 라 했습니다. 감각대문을 수호하는 것이야말 것 욕계를 탈출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욕계탈출 두 번째 조건은 음식절제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젓가락 놀리는 것만 보아도 그 사람에게 탐욕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성냄과 달리 탐욕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밥 먹을 때 탐욕이 드러납니다. 밥먹는 동작이나 밥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 사람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탐욕스런 자는 음식절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 지배되는 자입니다. 식욕은 성욕과 함께 근본적인 욕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식욕과 성욕으로 사는 자는 욕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욕계탈출 세 번째 조건은 늘 사띠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디가니까야 완전한열반의 큰경에서 “아난다여,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아난다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D16)라 했습니다. 여인과 마주쳤을 때 보지 않는 것이 최상이지만,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을 때는 말을 걸지 말라 했습니다. 말을 함으로 인해 친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한 것은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Sati ?nanda upa??hapetabba)”입니다. 사띠를 유지하면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욕망의 세계, 욕계에서는 남녀가 함께 살아 갑니다. 동물로 말한다면 수컷과 암컷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세계를 보면 남자들은 늘 발정난 것처럼 여자들을 성적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범죄가 끊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출가한 스님들에게서 조차 일어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입니다. 식욕과 성욕이라는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만일 식욕과 성욕대로 산다면 인간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성평등(性平等)을 이루려면

 

욕계의 세상에서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입니다. 출가한 수행자라도 여인을 피하여 살 수 없습니다. 여인을 보더라도 쳐다보지 않고, 말 하지 않고, 사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절반이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말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사띠하라고 했는데 이는 감각의 대문을 단속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처님 말씀을 새기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인을 이렇게 대하라고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S35.127)

 

 

 

 

초기경전을 보면 삶의 지혜로 가득합니다. 특히 욕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차제설법이라 하여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윔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Vin.I.15)라 했습니다.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한 것이 아닙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이야기부터 한 것입니다. 그 다음 한 이야기가 바로 욕망에 대한 것입니다.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재난을 당할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욕망을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이는 여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절반은 남성이고 이 세상의 절반은 여성입니다. 어디를 가나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습니다. 만일 남성이 여성을 대할 때 욕망충족을 위한 성적대상으로 여긴다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짐승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아는 자라면 가족과 같이 대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성에 대하여 성적대상이 아닌 가족처럼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했을 때 성차별이 극복되고 성평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평등은 궁극적으로 욕계탈출로 이루어집니다. 남자와 여자가 반반씩 이루어져 있는 욕계에 있는 한 남녀특징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은 요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땔감에 불이 붙듯이 남녀 모두 욕계를 탈출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토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각대문을 지키는 것, 음식절제를 하는 것, 항상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세계를 탈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봅니다.

 

 

 

 

2017-08-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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