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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5회 2016.6.14.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6년 6월 14일(화,오후 1시 15분~ )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2)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알아차림
대념처경에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알아차림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적 형상[色]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느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行]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서 법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법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법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법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① 색온(色蘊)
오온의 첫 번째는 색온입니다. 색온은 물질의 무더기입니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色]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물질이 일어날 때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 형상이 사라질 때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질적 형상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못됩니다.
물질적 형상을 물질(物質), 색(色), 몸, 신체(身體) 등 여러 가지로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이라고 할 때의 물질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에서는 몸 또는 신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단지 물질적 형상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단지 물질적 형상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에는 이것들이 무더기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포함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최종 목표는 지혜입니다. 지혜만이 번뇌를 부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알아차림이 필요하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집중에 의해서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무상의 법을 알면 단순하게 무상의 법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상의 지혜가 나면 다음 단계인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런 뒤에 최종적으로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최종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시작부터 반드시 기본적인 조건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알아차릴 때 단지 물질적 현상으로 알아차려야 하며, 이러한 물질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집중을 해야지 ‘이 호흡은 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라는 식의 의문을 가지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이나, 몸의 네 가지 자세에 대해서나, 네 가지 분명한 앎에 대해서나, 몸의 네 가지 요소인 지, 수, 화, 풍에 대해서 어떤 것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단지 물질적 현상의 하나라고 알아야 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다만 물질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알아차릴 대상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에 불과하다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이렇게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 때만이 나의 몸이라는 생각으로 인한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전에 모르던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놀람과 두려움과 의혹을 갖기 마련입니다. 이때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그 순간의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에 빠져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거나 단순하게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만약 다양하게 나타난 현상으로 인해 놀라거나 근심걱정을 하게 되면 ‘지금 내 마음이 걱정을 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려서 이것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수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하나하나 문제 삼으면 아직 갈 길이 먼 수행자가 갈 길을 바르게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들이 모두 장애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장애가 나타난 것을 장애라고 보지 말고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쉽게 목표로 하는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을 단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순간 어떤 선입관이나 번뇌가 침투하지 않고 온전하게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됩니다. 이렇게 청정한 상태에서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고요함에 의해 비로소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에서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지혜가 나야 나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몸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라거나 없애려 하거나 어떤 선입관으로 대상을 보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흙탕물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비쳐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오직 거기에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물질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그래서 물질은 무상한 것입니다. 물질은 매순간 진동하면서 변하기 때문에 항상 같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질은 괴로움입니다. 물질은 그 순간의 감각기관일 뿐이므로 나의 물질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의 신체는 여러 가지 부분들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몸은 관념으로서의 몸과 실재로서의 몸이 있습니다. 관념으로서의 몸은 몸을 구성하는 32가지 부분들이 있습니다.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과 발톱, 이빨, 살, 힘줄, 뼈 등 32가지로 나눕니다. 물론 이 32가지는 부정관을 하기 위한 내용이라서 완전하게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실재로서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인식할 수 있는 실재입니다. 몸에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땅의 요소[地大]가 있습니다. 그리고 물의 요소[水大]가 있습니다. 그리고 뜨거움과 차가움의 불의 요소[火大]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동하는 바람의 요소[風大]가 있습니다. 이들 요소들의 결합으로 몸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의 요소 외에 여러 가지 파생된 물질이 스물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듯 몸을 구성하는 부분도 다양하며, 몸을 인식하는 요소도 다양합니다.
이들 몸의 요소는 항상 변하며, 이것들은 불만족이고,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색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몸은 단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이것이 나의 몸은 아닙니다.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몸은 있습니다. 그래서 유신(有身)은 있으나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은 관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소유를 의미하는 유신견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자아가 강해서 이기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최고라는 우월감을 갖기 마련이라서 법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오온을 집착하게 됩니다. 무명(無明) 중에서 가장 나쁜 무명이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살인을 해도 법을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신견을 가지면 내가 본다는 견해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법의 성품을 볼 수 없어 도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어떤 견해에 대해서도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게 하는 유신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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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념처 전체 내용은 14회 파일에 있습니다.
이번 15회 강좌로 2016년 1학기가 종강되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귀한법문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