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창세기 33 장
The End (창 33:1~20)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언제나 “The End"입니다. 해피엔딩이든지, 비극이든지 언제나 디 엔드입니다. 인생도 한편의 영화와 같습니다. 내가 주인공입니다.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결말을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힘들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면 20절에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가 이것을 보면서 The End를 연상해 보았습니다. 야곱의 파란 만장한 삶 제 1막의 엔딩 자막이기 때문입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32:28) 야곱이 마침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오늘 본문에서 형님과 화해한 후에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벧엘에서 서원한 대로 “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야곱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있는 숙곳에서 살 때였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근심과 마음을 짓누르던 죄책감과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27년 만에 찾아 온 행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오두막)이라 부르더라”(창 33:17)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는 말은 상징적인 말입니다. 여러분 나를 위하여 집을 짓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먼저 이 일이 있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허사”(시 127:1)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세우시지 않으면 나의 노력과 수고가 허사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27년간 무엇을 세웠습니까? 자기의 집과 가정을 세웠습니다. 죽을 고생하고 속아가면서 그것도 장인에게 속아가면서 처남들의 시기와 질투를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거부가 되었고 세상말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입니다. 이제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느냐 보존되느냐는 기로의 순간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의 결말이 어찌되었겠습니까? 무엇하려고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야곱에게 왔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하고 단순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인생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야곱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샬롬 엔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인생의 결말은 오늘 본문에 그려지지 않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세운 모든 것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단지 교훈을 위하여 보존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여러분 에서는 야곱에게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에서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사실 성경에서 에서는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비록 야곱의 쌍둥이로 출현하지만 이스라엘 형성사에서 그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위협적이고 구속사의 장애물로 등장할 뿐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영적인 의미를 떠나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 등장하는 에서를 이야기 한다면 그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야곱과 동등한 의미를 지닌, 어쩌면 더 비중있는 주인공으로 그려질 수 있는 자인 것입니다. 성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그의 무용담과 그의 삶이 더욱 성공적으로 그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보다 더 성공적이고 위대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야 하는 에서들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한 부분을 감당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나는 에서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중심으로 역사를 전개해 가십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아닐 경우에는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구속사에서 무의미한 에서나 나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너무 연약하고 비굴해도 내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나의 삶에서 하나님이 빠지면 나의 모든 삶은 공허하며 착각입니다. 세워지질 않는 것입니다.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이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그래 보여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등장하시고 그와 함께 하시므로 마침내 자기의 집을 세우고 웃음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사백인의 장정을 거느리고 사막을 달리는 영웅은 잠시 등장할 뿐인 것입니다.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인생은 적과의 동침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원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라반을 상대한 야곱처럼, 오늘도 우리는 에서를 상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야곱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추운 한 겨울 얼음을 깨고 물 속에도 들어갑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나는 구속사의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안 풀릴 것 같아도 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구속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져가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에서와 야곱의 만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인 그림입니까? 하나님의 작품은 언제나 사람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여러분 내가 주인공인데 비굴하면 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면 비굴이 아니라 더 한 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노라면 내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 안에 사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죽기까지 낮아지신 하나님이 몸을 굽히시는 것입니다. 왜요? 나 같은 에서를 구원하여 구속사의 또 다른 주인공을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오늘 살아가는 동안 주님이 내 입에 주시는 명대사를 말하며, 주님이 내 몸으로 하라는 겸손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몸을 굽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단을 쌓고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나의 삶이 끝날지라도 나의 마지막이 주님 안에서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나의 마지막을 아시는 분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구속사의 주인공답게 살게 하시고, 내 입에 명대사를 주셔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주님처럼 깊이 몸 굽히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구하옵나이다. 아멘.
2010.3.30
Crossabbath Gospel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안식하세요,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
출처: 생명나무 원문보기 글쓴이: 생명나무